도플갱어
- 작성일 2019-01-01
- 댓글수 0
[문학 더하기+(시)]
도플갱어
김신식
집 창문을 본 지 오래되었다. 관리실에서 작성한 공고문을 본 게 발단이었다. 공고인즉슨 비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열어 놓으면 떨어질 수 있으니 되도록 닫아 놓으라는 것이었다. 경고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난 유리창 사진이 게시된 걸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언젠가부터 에어컨 실외기 창이 창문을 대체했다. 공기청정기를 들였고 암막커튼을 달면서 창문으로 바깥세상을 볼 일이 점점 줄었다. 좀처럼 창문을 볼 일이 없으니 창문을 다루는 기록물을 보면 어색했다. 창문이 나오는 작품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가 등장인물의 긴 이름이 헷갈려 이전 페이지를 다시 읽어야 하는 옛 러시아 소설 같았다.
창문 하면 으레 일조권과 조망권이 떠오르지만 나는 그런 권리와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중이다. 가령 햇살이 궁금하면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온라인 예술저널 <UNIT>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사람들이 일몰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포스트 수가 5,700만 개, 일출 사진을 올린 포스트 수가 2억 8,600만 개라고 한다.1) 나는 창문으로 일출과 일몰을 보는 대신 인스타그래머의 도움을 받아 하루의 시작과 끝을 확인하는 편이다.
하지만 창문 자체를 멀리하고 싶진 않았다. 기록에 담긴 창문을 볼 때 생기는 이물감을 확인하고 싶었다.
1) http://www.unit.nl/news/2018/wetransfer-x-mirka-laura-severa
창문을 열면
나와 있는 그 사람이 보였다. 그보다 먼저 나와
있는 의자가 보였다. 날마다 앉아야 할 타이밍을 놓
치게 되는 건
좋아서다.2)
2) 임승유, 「미래가 무섭다」, 『그 밖의 어떤 것』, 현대문학, 2018, p.18.
인용한 시는 임승유 시인의 「미래가 무섭다」(2018) 중 한 대목이다. 시를 읽고 나서 사진작가 도미야수 하야히사Hayahisa Tomiyasu의 「탁구대Tisch Tennis Platte」(2012-2016)3)가 떠올랐다. 2011년 여름, 라이프치히에서 유학하던 하야히사는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던 중 여우를 발견한다. 여우를 따라가다 보니 탁구대가 있었다. 하야히사는 탁구대를 이리저리 살피는 여우를 주시했다. 그날 이후 그는 창밖의 여우를 관찰하다가 시선을 옮겨 여우가 서성거렸던 탁구대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탁구대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용도는 달랐다. 탁구대는 동네사람들의 빨래터이자 아이들의 숨바꼭질 자리였다. 주민들은 탁구대에서 일광욕을 즐기거나 스트레칭을 하고, 캠핑을 즐기기도 했다. 그렇게 촬영은 5년간 지속되었다. 하야히사는 선약도 미룬 채 촬영에 몰두했다. 몇 번의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이하며 하야히사는 약 4,000장의 사진을 남겼다.
3) 『탁구대Tisch Tennis Platte』는 2018년, 사진집 전문 출판사 MACK에서 주최한 MACK First Book Award에서 '올해의 선정작'이 되었다. 참고로 MACK First Book Award는 신인 작가의 재능을 독려하고자 사진집을 발간한 적 없는 사진작가의 첫 책을 제작해 주는 자리다. 2012년 창설되었다. 하야히사의 사진은 다음의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www.tomiyasuhayahisa.com/ttp/
사진작가 도미야수 하야히사의 홈페이지 화면
「탁구대」는 언뜻 '일상성'이라는 단어를 쉬이 쓰고 싶은 소소한 분위기의 사진 작업 같지만, 나는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고 싶진 않다. 하야히사는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에 개입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사진을 보면 작가는 창으로 바깥 보기를 강조하듯 일정한 구도로 탁구대를 촬영했다. 창가의 시선에서 사진 속 탁구대, 탁구대 뒤의 나무는 늘 동일한 위치에 있다. 이때 창문과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의 거리감 유지로 인해 사진가가 객관성을 확보했다는 지적은 너무 손쉬운 것 같다. 더 나아가 보자. 주관적인 해석이 그리 개입될 필요가 없는 듯한 광경을 두고, 작가가 시간의 경과에 의존한 채 마냥 창문 바깥의 변화된 양상을 '찍었다'고만 언급할 수 있을까.
여기서 사진을 논하는 우리는 '육안으로 관찰한다'는 말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사진가는 대상을 바라볼 때 육안보단 카메라와 친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찍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실어 뭔가를 '담아내는 데' 알게 모르게 혈안이 된 사진가에게 카메라로 세상을 '그저' 관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야히사는 가장 수동적인 위치에서 창문에 기대어 일상과 세상을 지켜보는 듯하나, 창문과 카메라는 작가의 열렬한 의도를 살며시 숨겨 주는 허구화된 장치로 작동한다. 「탁구대」는 탁구대를 둘러싼 자연스러운 광경이 리모컨으로 조종되고 있는 듯한 경직성과 배합되어 있기에 흥미로이 다가온다.
시로 돌아가 본다. "그 사람"과 "의자"는 "나"보다 먼저 나와 있는(come out) 걸까, "나"와 함께 있는 걸까. "무엇보다 좋은 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모든 게 거기 있다는 것이다."라는 마지막 시구를 덧대자면 전자나 후자나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수 없는 시 속 상황이다. 반어법을 적용하자면, 화자에게 창문을 열어 매일 동일한 광경을 보기란 지긋지긋한 일일 수 있다. 혹은 창이 있는 방 안에서 창 바깥의 자신을 상상하며 보기란 자칫 섬뜩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일일 수 있다. 전자에 천착하자면 화자는 자신이 부재한 창 바깥의 일상을 관측함에 가깝다. 후자에 몰입하자면 화자는 가상의 나를 동원해 창 바깥의 모습을 지어냄에 가닿는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라는 시구를 보아 화자는 나와 달리 꼬박꼬박 창문으로 바깥을 보는 사람이다. 근데 나는 임승유의 시와 하야히사의 사진에서 빼먹은 지점이 있다. 시에서 화자가 '창문을 열어' 사람과 의자와 건물과 나무를 보았듯, 하야히사 또한 '창문을 열어' 탁구대와 주민들을 찍었다는 점 말이다. 아마도 시 속 화자나 사진가는 유리로 여과되지 않은 대상을 보았을 것이다. 하나 창문을 열었다고 해서 창문의 기능과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구체적인 시간과 역사를 알 수 없는 시 속 상황에서 창가에 있는 화자를 마음껏 상상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화자는 창문을 열어 육안으로 바깥을 매일 구경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화자가 사진가였다면 이 시는 자신보다 먼저 나와 의자에 앉은 사람, 그 사람의 자리마냥 기다리는 듯한 의자, 의자 뒤 건물, 건물 옆 나무, 의자에 앉았던 사람이 어디론가 향하자 생긴 빈자리를 촬영한 뒤 남긴 작가 노트 같다.
하지만 제일 끌리는 상상은 화자인 "나"가 창문을 열었을 때 허구화된 자신을 투영하며 바깥을 지켜보는 경우다. 창문을 열었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실제를 반영하기보단, 창가에 영사기가 있고 바깥에 투명한 스크린이 있어 "나"라는 상像이 눈앞에 펼쳐지는. 상상을 통해 시를 쪼개자면, 화자는 창문을 열어 먼저 나와 있는 그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과("나와") 있는 "그 사람"을 본다. "그 사람"보다 먼저 자신과 있던 의자를 본다. "날마다 앉아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건 좋아서다."라는 시구를 이러한 상상을 발동한 전후로 비교해서 읽어 보면 장면 안에 여러 개의 "나"가 돌아다니는 효과가 나타난다.
시와 관련된 상상력을 북돋고자 나는 마야 데렌과 알렉산더 헤미드의 단편영화 <오후의 그물망Meshes of the Afternoon>(1943)4)을 다시 보았다. 한 여성이 집에 들어가 집 안을 살피고 창가에 기대어 바깥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 또 다른 자신의 상像을 본다. 여성은 제자신이 반복 재생되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 채 다가오는 불안을 감지한다.
4) 마야 데렌의 전남편이자 작곡가였던 이토 테이지의 음악이 실린 영화의 원본 영상은 이 주소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lbIME-2v2M
마야 데렌·알렉산더 헤미드의 영화 <오후의 그물망>(1943)을 구글로 검색해 본 화면
나는 <오후의 그물망>과 시를 비교해 보면서 왜 시인은 "미래가 무섭다"는 제목을 지었을까 생각했다. 창문을 열어서 본 바깥세상 내 대상의 위치와 배치가 늘 같다는 데서 온 '권태로움'으로 시를 축약하기엔 제목이 자아내는 무게감이 꽤 묵직하다. 시어와 구성의 간소함과 곁들여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지금껏 펼친 여러 판본 중 나는 「미래가 무섭다」와 <오후의 그물망>을 이으며 이 시를 공포영화로 탈바꿈해 보기로 했다. 그랬을 때 시 속 화자가 창문으로 투영하는 또 다른 나는 도플갱어처럼 느껴졌다. <오후의 그물망>에선 상징적인 사물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중엔 열쇠가 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열쇠는 실마리를 푸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영화에서 여성은 난해하기 그지없는 집에서 실마리를 풀어 보려 하지만, 창가에서 자신의 또 다른 상을 보고선 기시감을 느낀 채 불안해한다.
익히 알다시피 도플갱어를 본 사람은 죽음이라는 숙명을 떨쳐낼 수 없다. 문득 궁금했다. 창문을 열어 또 다른 나를 보는 기분은 어떨까. 막상 「미래가 무섭다」를 도플갱어가 등장한 시로 상상하니 다음 구절이 좀 섬뜩하게 읽혔다.
그 사람을 기다리는 의자와 그 뒤의 건물과 그
옆의 나무와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난 후의 고요가 좋
아서다.
무엇보다 좋은 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모든 게 거기 있다는 것이다.5)
5) 임승유, 「미래가 무섭다」, 『그 밖의 어떤 것』, 현대문학, 2018, p.18.
이왕 발휘한 상상력을 좀 더 가동하자면, 의자와 건물과 나무엔 가상의 화자가 활동했던 기운이 묻어 있을 것이다. 그러했을 때 "무엇보다 좋은 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모든 게 거기 있다는 것이다."라는 시구는 화자가 아닌, 화자의 분신이 창문 속 화자를 응시하며 던진 흉흉한 말일지도 모른다.
*

지난해 인상 깊게 본 공포영화로 아리 에스터 감독의 <유전Hereditary>(2018)이 있다. 악마학에서 자주 다루는 루시퍼의 심복 파이몬 이야기와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려는 이야기인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을 골자로 한 본 작품에서, 진정한 공포는 급작스레 등장하는 괴인이나 괴성이 아니다. 허름한 창문을 비추면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모든 것이 거기 있음만으로도 공포를 야기한다.
창문을 통해 뭔가를 본 지도 아예 창문을 본 지도 오래된 지금, 시를 에워싼 상상의 시도를 빌려 나도 입을 뗀다.
미래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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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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