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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서사들 - 이장욱, 박상영, 김혜진 소설

  • 작성일 2019-02-01

[문학 리뷰(소설)]




무의식의 서사들

- 이장욱, 박상영, 김혜진 소설




박혜진





문학적 언어에는 뒷면이 있다. 그 역도 성립한다. 뒷면이 있는 것이 문학적 언어다. 뒷면, 즉 무의식이 문학성을 판별하는 절대 기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뒷면, 즉 포획할 수 없는 또 다른 구조를 내포하고 있을 때 작품은 비로소 문학성을 지닌 텍스트로 도약한다. 그러나 무의식에는 공용어가 없다. 꿈이나 전조, 예감과 징조는 결코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작가들이 무의식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다양해서 평자들에게 무의식은 정답을 알 수 없는 보물찾기처럼 느껴질 정도다. 때로는 작가가 숨기지 않은 것이 발견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찾다'라는 동사만 있을 뿐, 목적어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지난 계절 동안 발표된 소설 중에서 무의식을 드러내는 서사적 구조가 눈에 띄는 작품을 다시 읽어 보고 싶었다. 그것은 곧 한국 소설이 얼마나 다양한 무의식의 언어를 상상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의 발로였으리라. 무의식은 드러나지 않지만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서사의 엔진이다. 엔진으로서의 무의식이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이장욱과 박상영, 그리고 김혜진의 소설을 통해 살펴봤다.



파묻힌 것


「양구에는 돼지코」는 세계의 불확실성이라는 이장욱식 패러다임으로 연결의 진의를 의심하는 소설이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치매 노인의 머릿속에서는 단절된 기억이 불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잠깐 비운 사이에 어딜 가신 거예요? 나가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왜 또 나가셨어요?" 딸과 노인의 통화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이것이 치매 노인의 서사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치매 서사가 기억상실의 모티프를 포함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장례식에 간 노인은 부의금을 내고 식장 안으로 들어간 다음 결혼식장에 대한 생각을 한다. 노인은 장례식으로 출발했지만, 결혼식장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믿을 수 없는 화자'가 아니다. 노인의 발언에 의아해하는 주변 인물들의 태도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사실이 아닌지 구분하는 단서가 된다. 노인은 오히려 진실의 화자다. 사건과 사건이 연결되고 연결과 연결에서 구축되는 의미야말로 만들어진 진실에 가깝다. 치매로 인한 기억상실의 모티프는 진실의 편린을 인간 의식이 가해지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냄으로써 파묻힌 기억을 끌어올린다. 인간 의식으로 재구성되지 않은 무의식의 언어를 끌어올린다.


연결을 거부하는 무의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 1인칭 독백으로 이루어진 소설 초입에서 화자는 인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각각의 단계가 있고, 그 단계들은 한꺼번에 건너뛸 수 없다. 그런 것은 어딘지 인생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숨을 고르며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서······." 이 말은 화자 자신의 삶과 정확하게 반대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소설을 해석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표현이기도 하다. 노인의 과거는 부지불식간에 현재로 침투해 온다. 단계 단계로 이어지지 않고 훌쩍훌쩍 건너뛰어 과거 어느 지점이 또 다른 과거 뒤에 붙어 선다. 두 시점의 만남에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 의식의 흐름만 있을 뿐이고, 그 흐름은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다. 연결되지 않는 과거의 일들 가운데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양구가 있다. 노인은 자꾸 양구로 가려고 한다. 양구는 그가 군 생활을 했던 부대가 있는 지역이다. 부지불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양구에 대한 기억은 노인으로 하여금 그 시절의 일들과 조우하게 한다. 그와 후임 사이에 있었던 감정들. 그것은 평생 동안 발현되지 못한 한때의 감정이자 그의 의식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의식과 전투했던 진실의 감정이다.


과거와 현재의 불연속적인 만남이 연결을 거부하는 하나의 서사라면 뒤죽박죽 섞인 의식의 흐름을 좇고 있는 노인 옆에서 들려오는 말들은 다른 하나의 서사다. 엄격, 근엄, 진지한 노인의 생각들 사이사이에는 타인들의 경박하고 속물적인 말들이 끼어들어 노인의 생각과 타인의 말이 우스꽝스럽게 연결된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요즘에는 이혼이다 뭐다 부부관계를 천시하는 풍토가 있는 모양이지만, 돼지코만 있으면 돼, 돼지코만." 느닷없이 등장하는 돼지코 얘기는 옆 테이블에서 나누는 소리다. 돼지코는 변환 어댑터다. 돼지코가 있으면 전압이 다른 외국에서 전자 기기를 사용할 때 그 차이를 없앨 수 있다. 하나의 전압을 다른 전압으로 바꾸는 변압기의 작위적인 연결은 진실의 구조로서의 연결을 다만 형이하학적인 사물로 강등시킨다. 파묻힌 진실을 호출하는 것은 오히려 연결의 결핍이다. "너무 또렷한 것들은 더 의심해야 하지 않나." 노인에게 찾아오는 기억들이란 대체로 발현되지 못한 욕망들, 의식화되지 못한 감정들이다. 기억상실과 그로 인한 시공간의 불연속적 연결은 또렷한 것들 사이에 파묻힌 희미한 진실을 채굴하며 연결에 대한 믿음을 의심한다.



억눌린 것


박상영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멜로 드라마적 기복(起伏)과 자기 고백적 성장 서사로 특징되는 연애소설이다. 박상영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리고 박상영 소설을 읽을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그의 소설이 D. H. 로렌스, 귀스타브 플로베르, 기 드 모파상이 이룩한 욕망의 리얼리즘을 승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여성으로 대표되는,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한 자들의 (성적) 욕망과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의 허무와 절망을 발견하고 발명하며 감정의 문학사에 새로운 시작을 썼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의 주인공인 '나'는 인권단체에서 주최하는 '감정의 철학' 수업에서 만난 남성과 사랑에 빠지며 초 단위의 감정 변화를 겪는다.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감정의 기복은 연애사건 이외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지금 사랑에 빠진 게이인 동시에 요양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엄마를 간호하는 보호자다. 엄마를 간호하며 '나'는 초 단위의 감정 변화를 겪는다. 스피노자의 48개 감정으로 분류되지 않는 이 많은 감정들은 다 무엇일까. '나'의 욕망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문 앞에서 뒤엉켜 있다. 한 번도 밖으로 나가 본 적 없는 감정 때문이다. '나'는 감정을 억압당한 채 살아 왔던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서 사귀다 이별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의 표면에 흐르는 서사는 '나'의 감정의 변화, 한마디로 연애 사건이다. 연애의 전개를 작동시키는 무의식은 두 개의 트라우마다. 종교와 이념. 엄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이젠 이빨이 다 빠졌지만 아프기 전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어느 남학생과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로 '나'의 심리적 욕구가 튀어나오는 일을 막는 데 일생을 바친다. '나'의 병을 치료하겠다는 일념으로 '나'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엄마는 '나'에게 트라우마 그 자체다. 엄마로부터 부정당한 '나'의 감정은 외출을 허락받지 못했으므로 '나'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를 만난 이후로 '나'는 일기를 쓴다. 그의 감정과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알기 위한 기록이다. 요양병원에서 엄마는 더 이상의 항암치료를 포기한 채 통증을 경감해 주는 한방 대체 요법이나 힐링 요가, 마음을 다스리는 긍정의 명상법 같은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다. 엄마 곁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아픈 엄마가 기적적으로 완치할 때까지 '나'는 엄마에게 자신의 사랑을 말하지 못한다. 끝내 실패한다.


사랑도 실패한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는 '나'보다 열두 살이 많다. '나'와는 다른 대학 문화를 경험한 그는 소위 운동권으로 운동권 중에서도 미제를 타도하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역사의식, 자주 의식도 없이 미국이나 좋아하는 철부지고 '나'의 눈에 비친 그는 욕망은 충족하고 싶으면서 욕망이 타인에게 보여지는 것에는 극도로 혐오감을 비치는 사람이다.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는 비겁하고 기만적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좋아한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아는 것과 실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 한 몸이 아닌 걸까. 그는 성소수자로서의 감정과 욕망은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믿음의 영역에서도, 이념의 영역에서도 실패한 '나'의 연애 이야기는 '나'의 감정을 둘러싸고 있는 무의식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엄마로 표상되는 믿음과 그로 대표되는 이념은 세계의 상부를 구성하는 두 개의 틀이다. 내 실패는 '나'의 심리를 억누르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 실패는 가슴 아픈 경험이지만 그로 인해 '나'는 감정을 알지 못하는 한 인간에서 인간의 감정을 통해 세계의 진실을 탐구하는 소설가가 된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한 편의 성장 서사로 뛰어오른다.



다가오는 것


김혜진 소설에는 좀처럼 플래시백이 등장하지 않는다. 「자정 무렵」도 마찬가지다. 앞선 작품들의 주요 시제가 과거였다면 「자정 무렵」은 오지 않은 것을 예감하는 불안한 현재형으로 진행된다. 과거와 상호작용하는 소설들에서 현재는 흔히 증상으로 읽힌다. 증상의 원인을 과거의 결핍이나 억압에서 찾아내는 시선은 프로이트적이다. 그러나 과거를 그리지 않는 소설에서 현재는 증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명명되거나 호명되지 않은 미결정 상태로 존재하는 현재는 타인들의 시선과 간섭에 의해 이름을 지니는 쪽으로 끌려가는 동시에 확정되지 않음으로써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고 대상화되지 않으려고 버틴다. 이름에 갇히지 않으려는 쪽과 이름을 부르려는 쪽의 긴장감이 김혜진 소설의 주요한 갈등인바, 그 미확정적이고 미결정적인 상태는 개념화되지 않기 위해 타자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오늘의 끝이자 내일의 시작인 동시에 오늘도 내일도 아닌 자정 무렵처럼.


두 여성이 동거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의 파트너다. 이야기는 '너'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너'는 학창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동창 유리가 '마을 연구소'라는 사무실을 얻게 된 데 돈과 관심을 쏟고 있다. '너'는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주택관리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지만 '나'의 눈에는 시험 준비도 제대로 되어 가고 있지 않고 당장은 버는 돈도 모아 둔 돈도 바닥 난 상태에 불과하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직장인인 '나'는 '너'의 친구들을 만나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만 유리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혼자 빠질 수도 없는 상황에 사무실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함께하게 된 이웃들은 '너'와 '나'에게 이 동네로 이사 올 것을 권유하는 데에서부터 결혼 문제에 이르기까지 성소수자에 대한 배려 섞인 대화를 이어 나간다. 그런데 그 배려들이 '나'는 어쩐지 불편하고 불쾌하다.


"사람들은 우리 곁에 나란히 서 있다가, 한꺼번에 갑자기 몇 계단 우로 뛰어 올라가서 우두커니 우리를 내려다보고 또 갑자기 우르르 몇 계단 아래로 내려선 다음 멍하니 우리를 올려다본다. 그 바람에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그들보다 아래였다가, 위였다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러나저러나 우리와 나란히 서 있는 건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 같다."


「자정 무렵」은 여성 성소수자 커플의 이별의 징조를 예감하는 소설이다. 소설 안에서 표면화된 것은 이웃 사람들과 '나'의 갈등이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말과 시선은 아슬아슬하다. 무엇보다 그들의 생각에 맞장구치는 '너'의 예민하지 못한 성격에 대한 '나'의 마음 역시 아슬아슬하다. 특별하달 것 없는 갈등을 특별한 이야기로 전개시키는 지점은 사람들의 시선을 불편해하는 '나'의 내면에 불의나 윤리에 대한 입장이 아니라 '너'에 대한 '단순 변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래된 연인이 그렇듯이 이들 관계는 일상의 이름으로 유지되는 습관적 생활의 일부에 편입되어 가고 있다. '너'에 대해 느끼는 '나'의 사랑은 내일을 기약하지 않을 것처럼 불안하다. '나'의 눈에는 어쩐지 '너'의 단점만 보인다. 그러나 '너'에 대한 마음은 좀처럼 표출되지 않는다. 이것은 보편적 사랑의 이미지다. 그리고 그 반대에는 은연중에 이들을 특수한 존재로 명명하고 구분 지으려 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사랑은 지극히 일반적이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지극히 차별적이다. 개인의 사랑에서 개인을 소거하려는 집단 의지, 개념 의지에 대한 비틀기와 이들의 사랑이 희미해져 가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자정 무렵」은 보편과 특수가 충돌하며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파묻힌 기억의 불연속적 출현, 억눌린 욕망의 실패한 사랑, 무규정 상태에서 다가오는 것과 그것을 거부하려는 의지의 길항 관계는 각각의 방식으로 서사화 된 무의식이다. 무의식이라는 기준으로 취사선택한 소설들이 하나같이 성소수자라는 조건을 경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도하지 않은 발견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의식에는 공용어가 없다. 그 바벨탑 안에서 성소수자는 인간 존재의 모순과 갈등, 사회의 한계와 부조리를 드러내는 가장 동시대적 언어라고 하면 성급한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작가소개 / 박혜진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문학 편집자로 일한다.


《문장웹진 2019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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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진
  • 20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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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진
  • 2017-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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