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 웬디, 그리고 이기호 그들의 빛
- 작성일 20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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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더하기+(소설)]
패터슨, 웬디, 그리고 이기호 그들의 빛
- 이기호, 「최미진은 어디로」,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2018, 문학동네
염승숙
패터슨. 그는 '패터슨 시'의 버스기사이고, 매일같이 시를 쓴다. 패터슨 시에서 살아가는, 일하며 시 쓰는 패터슨 씨. 이 리듬감 있는 문장마저도 영화 <패터슨>에서는 시적으로 차용되고 있다. 패터슨 씨의 특별할 것 없는 그러나 분명히 특별해 보이는 어느 일주일을, 감독 짐 자무쉬는 특유의 성실한 제스처로 직조해 낸다. 눈을 뜨고 아내에게 키스하고 씻고 시리얼을 먹고 스탠리 도시락을 손에 든 채로 회사로 걸어가는 것, 하루 종일 운전하는 것, 퇴근 후 아내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 것, 마빈과 함께 산책하고 펍에 들러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것 그리고, 시간을 쪼개어 온종일 틈틈이 이어지는 그의 시작(詩作)······. 그는 반복적인 일과 속에서 영감을 얻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든다. 완성하는 것과는 별개이다. 그는 다만 쓰고 고치고 다시 쓴다. 써서 남기는 것. 써서 남긴 노트를 갖는 것. 그것이 그의 시 쓰기의 전부, 시인으로서의 전체다. 물론 일상은 무시로 변화한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시곗바늘은 제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잠들어 있다 깨어나는 순간의 자세도 어제와 다르다. 갑작스런 버스 고장이나 펍에서 맞닥뜨리는 소소한 사건사고, 퇴근길 우연한 소녀와의 만남과 문답도 있다. 소녀는 묻는다. 아저씨는 시인이에요? 패터슨은 말한다. 아니, 나는 버스 드라이버야. 자신이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시인이 아닐 리 없으니 영화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시가 내어줄 수 있는 비유와 상징을 모두 담지하고 있다.
웬디. 우리는 웬디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쓰는 자의 애틋함과 사랑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패터슨 씨와 마찬가지로 반복적인 일과를 영위하면서도 시나리오 쓰는 일을 놓지 않는 웬디. 벤 르윈의 영화 <스탠바이, 웬디>에서의 그녀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자폐증이라는 장치가 무색하리만큼 자신만의 견고하고 완전한 상상의 세계를 글로써 구축해 간다. 패터슨처럼 웬디 역시 기상, 샤워, 아침식사, 아르바이트, 퇴근, 텔레비전 시청, 저녁식사, 집필, 취침이라는 일상을 보여주는데, 얼핏 밋밋하고 지루해 보이는 그녀의 일과는 그러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궁굴리며 쏟아내는 문장과 스토리들로 인해 매일 달라진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각각 구별되는 지점에 그녀가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고치는 행위가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만도 호흡을 크게 내쉬어야 하고 도넛 시식을 권하는 간단한 제스처도 연습을 통해 얻어야 하는 웬디의 고단함에 비한다면, 온 정신을 몰두해서 시나리오를 써내려가는 그녀의 밤은 내밀하고도 즐거운 몰입의 세계 그것이다.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얻는 아이디어로 유무선의 노트를 채워 가는 작업은 작가로서 자신이 얻게 되는 농밀한 내적 기쁨과 희열을 전제로 한다. 내면에서 그리고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고요하고도 빛나는 사투는 기어코 언어와 문장으로 형상화되어 운율을 잇고 스토리를 빚는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얻어지는 고민의 상념들과 순수한 이기심, 인정욕망으로 무장된 고집들이 있다. 작가 스스로에게 개성과 오리지널리티를 부여해 줄 요건들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작가의 (제임스 A. 미치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타는" 상상력을 겁내고 머뭇거리게 만드는 불안과 허무 또한 낳는다. 패터슨이 마빈으로 하여금 제 노트를 물어뜯게 만드는, 우연인 척 사고를 가장하는 마음의 이면에는 시인이 되지 않음으로써 일생 시인으로 살고 싶은(가닿지 않음으로써 닿고자 하는) 공포가 있는데 역설적으로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에 직면하면서도 위기를 온몸으로 뚫고 나아가려는 웬디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로의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닿으려 하나 닿지 않을 수 있다는 무서움도 동일한 어법인 셈이다. 패터슨도 웬디도 쓰이지 않은 노트를 갖고 있고, 그것은 곧 무엇이고 만들어 나갈 가능성과 무한함을 가리키지만 '텅 빈' 페이지를 바라보는 작가의 절망과 인내도 의미할 것이다. (뭔가) 견디면서 (또한 뭔가) 만들어야 하는, 쓰는 자신을 향한 확신과 불신 사이에서 언제고 항해해야 하는 매일의 피로와 고뇌가 작가에게는 굳은살처럼 박여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기호도 있다. 이기호는 '쓰는' 패터슨과 (작가가 되고자) '나아가는' 웬디 이 둘보다 한 걸음 더 앞서, 쓰고 나아가는 사람의 정치한 내면을 보여준다. 그는 일찌감치 「수인」을 통해 소설이란 무엇이며 또 소설 쓰기란 무엇인지 물어왔다. 원자력발전소의 폭발로 세계가 무너진 줄도 모르고 깊은 산속에서 홀로 쓰는 사람, "노동 없는 곳에선 소설도 아무 의미 없는 게 아닌가요?"라는 질문 앞에 망설이고 말 줄이는 사람을 이미 '소설가'로 그려 왔던 바다. 새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의 곳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소설을 쓰며 이어 나가는 삶의 무능함과 무력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 쓰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머뭇거리고 멋쩍어하고 무서워하는 인물을 내세워 '쓴다는 것'의 지난함을 드러낸다.
「최미진은 어디로」의 화자 '나'이자 작중인물 '이기호'는 소설가로, 어느 날 "우연히 중고나라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누군가" 이 년 전 출간된 자신의 장편소설을 "염가 판매"하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이 '발견'은 '나'에게 큰 절망을 안기는데, 아이디 '제임스 셔터내려'가 책에 붙여 놓은 코멘트가 이러했던 까닭이다.
49. 이기호/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사인본 (4000원-그룹 1, 그룹 2에서 다섯 권 구매 시 무료 증정)
(이기호, 「최미진은 어디로」,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10쪽, 2018, 문학동네_이하 인용 시 괄호 안에 쪽수만 표시한다)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판을 가장 비극적으로 상상해 봤을 때 이런 구절이 등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제임스 셔터내려'의 코멘트는 '나'에게 큰 의문을 남긴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가만히 그 문구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절실히, 내면에서 세계와 불화하고자 하는 상실의 감정을 홀로 견디게 만든다. 이를테면 '수치심' 같은 것. '수치란 추한 행동을 범하지 않게끔 인간을 억제하는 치욕에 대한 공포이자 상대방의 동정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경계심'이라고 했던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소설에서 보이는 '나'의 감정 상태와 이어지는 일련의 행위들은 작가로서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불안과 두려움을 증명해 보인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잠들지 못하는 밤에 침대에 누워 "오늘 좀 모욕적인 일을 당했다"고, "그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네"라고 중얼거리지만 아내로부터 이해받지는 못한다. "소설가가 소설 못 쓰면 그게 모욕이지, 뭐 다른 게 모욕이야!"(15쪽)라는 아내의 '큰 소리'는 '나'를 더 큰 초조와 불면의 시간으로 이끈다. 다음날 '제임스 셔터내려'에게 중고 책 다섯 권을 "직거래"로 구매하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는 '나'의 선택은 그렇기에 어쩌면 자신에게 가해진 이 수치와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내몰리는 방식으로 추동된다. 타인에게 자신의 불안을 고스란히 덧씌울 수 있는 가해의 행위라는 사실 또한 애초엔 선뜻 인지하지 못한 채로.
"저는······ 그러니까······ 작가인데요······ 소설을 쓰는······"
내 말을 들은 보험회사 직원은 들고 있던 서류철에서 시선을 떼 힐끔 나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글쎄, 잘 모르겠다······ 소심한 내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 보험회사 직원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아주 살짝, 비스듬히 올라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류철을 뒤적거렸다.
"작가라, 작가라······ 작가들은 보통 교통사고도 잘 안 난다던데······ 운전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여기 있네요, 작가. 작가는 일용 잡급에 해당하니까······ 일당 만팔천원이네요."
아아, 그렇군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연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렇게 열심히 고개라도 끄덕거려야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아무렇지 않아 보일 것만 같았다. 나는 그가 말한 만팔천원보다, 웬일인지 그의 깨끗하게 다려진 양복과 넥타이에서, 들고 있는 펜과 서류철에서, 어떤 수치심 같은 것을 느꼈다. 어쩐지 내가 이제 막 그에게 포획된 짐승이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날 나는 그가 사인하라는 곳에 얌전히 사인했고, 그가 묻는 말에만 대답했으며, 아무런 질문도 따로 건네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나는 정발산역 2번 출구 앞에 서서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어째서 그때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인가? 그때의 수치심과 지금의 모욕감은 무엇이 다른가? 광주에서 행신까지 오는 KTX 좌석에 앉아서 나는 내가 무언가 살짝 뒤틀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18~19쪽)
'나'는 중고책 다섯 권을 구매하면 자신의 책을 "서비스"로 준다는 '제임스 셔터내려'를 만나기 위해 '기어코' 기차를 타고 '일산'으로 향한다. '정발산역 2번 출구' 앞에서 그를 기다리며 '나'는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던 예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보험회사 직원의 "일용 잡급"이라는 표현은, 그 말을 듣는 장소가 병원이었던 탓에 평가라기보다는 병의 진단 혹은 선고처럼 처절하게 들린다. "소설가라, 소설가······ 모집 직종란엔 없는 직업이군요."라던 심판관의 말에 존재 증명을 위한 '곡괭이'를 들었던 「수인」에서의 소설가는 이제 '일당 만 팔천 원'으로 사고를 보상받는 수준의 '일용 잡급'이 되었다. "아아, 그렇군요." 따져 묻거나 조소하지 않고 그는 다만 수긍한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 위해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러나 "수치심"을 느낀다. "그때의 수치심과 지금의 모욕감이"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느끼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소설을 쓰는 일은 '직업'도 아니고 "일용 잡급"이다. 그것을 너무도 당연히 분류하고 점수 매기는 직업을 가진 자들이 있다. 모멸과 경멸 앞에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길 수밖에 없는 정념의 상태로, 소설가는 놓여진다.
「최미진은 어디로」에서의 '나'는 의도하진 않았으나 결국 자신의 책을 "서비스"로 가지고 나온 '제임스 셔터내려'에게 자신이 느낀 수치와 모욕을 되돌려준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무언가 말하려고 속으로 무던 애쓰는 것처럼 연신 입술 끝을 씰룩거렸지만,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선 아무런 목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가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훌쩍훌쩍 콧물을 들이켜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얼떨떨해져 "아니, 나는 단지 그냥 궁금해서······"라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이번엔 주엽역 방향으로 후다닥 달려갔기 때문이다. 팔뚝으로 연신 눈가를 훔치면서······ 고개는 계속 숙인 채······ 그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27쪽)
상대에게 '죄송하다'는 여러 차례의 사과를 들었지만 '나'의 수치심은 '환멸'에 가깝게 더 배가된다. 단지 무섭도록 강했던 자신의 "적의"(31쪽)를 해소하고 싶었을 뿐은 아니었을까 자괴하며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작가로서 괴롭고도 속절없이 가장 보통의 '부끄러움'을 견디는 과정을 세밀히 적시하며 그 자체로 윤리적인 태도를 내보이고 있다.
어쩌면 긴 고백을 하고 싶어진다. 정신적으로 풍요하거나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그다지 명예롭거나 안온하지도 않은 작가의 삶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무력증"에 빠지거나 "이상하게도 화난 사람처럼"(72쪽) 굴게 되는, 써지지 않는 '아픔' 그 '통증'에 대해서. 나부터가 신경 쓰이는 나의 내면의 어떤 '뒤틀림'을 들켜버리고는 타인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 불편함에 대해서. "이선생, 글쓰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잠깐 잊었네요. 난, 다 이해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신경쓰지 마세요."(74쪽,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라는 상대의 '이해'는 작가 스스로 언제까지고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없으리라는 좌절에 이르게 한다. 끝끝내, 다만 이해받아야 하는 존재로 남고 싶지는 않은 불편함마저. 때문에 이기호의 말마따나 작가로서 느끼게 되는 '수치심'과 '모욕감'은 그침이 없다. 수치심은 적개심과 죄책감을 동반하게 마련이니까. 차라리 모욕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누구도 '이미' 혹은 '벌써' 가해진 모욕을 견디라고 말하지 않으나 그것을 견디고 극복해 나가는 재주까지 가져야 작가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이기호의 소설을 통해 알게 되지 않았나. '일용 잡급'으로 분류되는 직업군 앞에서 작가는 그저 "포획된 짐승"처럼 온순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이라는 건 아마도, 어느 날 갑자기 '윤희'가 머리에 쓰고 출근한 '히잡'과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불편한 시선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대체로 "품위 유지"(219쪽,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가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말이다. 도대체 '쓰는 행위'의 유쾌와 불유쾌는 어디에서 오며 또한 '쓰는 자'의 이 비루한 활력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걸까.
뮤지션이자 작가인 패티 스미스는 『몰입』의 말미에서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 너무나 평범하고 평이해 보여서 이 말 뒤의 농담의 진의를 찾고 싶어지지만 아마도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 쓴다는 속내에는 무언가 쓴다는 것의 행위가 삶을 충만하게 고양시킨다는 뜻이 숨어 있을 테다. '쓺'이 '삶'을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의미. 그 기계적인 단순함으로부터 도피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스탠바이, 웬디>의 도입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들려주는 웬디의 내레이션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그녀가 말하는 '빛'에 대해서.
빛. 그건 목적지에 닿기까지 수백만 년을 달릴 때도 있다. 외롭고 쓸쓸히. 누군가에 가 닿기를 바라며. 하지만 닿을 수 없다면? 머물 곳을 못 찾는다면? 우주는 너무 광활하고 시간은 너무 길어서 이곳에선 길을 잃기 너무 쉬우니까.
시나리오를 쓰는 것. 작가로서 매일 밤 홀로 애쓰고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 것. 이 모든 게 그녀에게는 '빛'으로 일컬어진다. 외롭고 쓸쓸하지만 그러나 또한 외롭고도 쓸쓸히 다시금 새 노트를 마련하는 자가 패터슨의 시 쓰기라면, 웬디는 '외롭고 쓸쓸히' 달리고 나아간다. 누군가에 가 닿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다. "우주는 너무 광활하고 시간은 너무 길어서" 그러니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 그녀는 오직 길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의 작품을 들고 나아간다. '수없이 생각하고 구상하고 쓴 걸 또다시 써서 남에게 읽힌다는 게, 뭘 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딱 맞는 단어를 생각하고 이야기를 풀 가장 좋은 방법을 찾느라, 생각하느라 보낸 낮과 밤이 얼만지 아느냐'고 묻는 그녀에게서 우리는 세계의 외부에서 가해지는 모욕에의 항변, 수치와의 싸움을 견디는 자의 "안간힘"을 본다. 고심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자의, '쓰는 행위'의 의미를 정면으로 옹호하는 방식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이기호 역시 그런 "안간힘"을 선언하듯 내보이고 있다.
나는 다시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다시 써올리고, 다시 쓴다. 안간힘을 다해, 이 글을 쓴다. 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121쪽,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그러니 그의 '쓺', 그가 쓰는 것, 그의 소설 쓰기, 소설가로서의 작중인물 이기호를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우주는 너무 광활하고 시간은 너무 길어서 그가 다만 길을 잃지 않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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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9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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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1
문장웹진 비평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2]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김인숙의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2) 박서양 1. 앞서 1부에서 살펴보았듯 『자작나무 숲』을 단편에서 장편으로 개작하는 과정을 거쳐 쓰레기 집이 지니는 의미는 보다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된다. 기존의 사회적 담론이 쓰레기 집을 단순히 개인의 병리적 현상이나 위생 문제로써 다뤄왔다면, 장편소설에서 작품의 주된 배경이 되는 쓰레기 집은 한 가문의 은폐된 기억이 귀환하는 실체적 장소로 탈바꿈한다. 그렇기에 이곳은 단순히 한 노인의 저장강박이 빚어낸 결과물이 아니다. 쓰레기가 켜켜이 쌓이고 느리게 부패하는 이 공간은 공적 시스템의 신속한 망각에 맞서 기억의 소멸을 유예하는 지연의 장소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과거 배경이 1989년이라는 사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95년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며 규격 봉투 안에 모든 폐기물이 동질화되고 익명화되기 이전, 쓰레기는 그것을 배출한 자의 삶의 궤적과 정보가 선명하게 남겨진 물질이다. 즉, 1989년이라는 시간은 쓰레기가 아직 완전히 규격화되지 않은 채,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었다는 실명(實名)의 흔적을 지닌 채 공동체 내부에 머물던 시기다. 또한, 좁은 다리 하나를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되는 곡교의 폐쇄적인 마을 구조 역시 이러한 쓰레기의 관계적 속성을 한층 강화시킨다. 쓰레기차가 드나들기 어려워 쓰레기를 각자 태우거나 묻는 비공식적 처리에 의존해야 했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변두리 마을에서 쓰레기의 출처는 서로에게 투명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누가 무엇을 버렸는지 훤히 알 수 있는 동네에서 타인의 쓰레기를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수집이나 저장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가 서둘러 지우고자 했던 기억들을 자신의 공간으로 편입시키는 행위가 된다. 더욱이 할머니가 쓰레기를 쌓아 올리는 산1번지의 집이 본래 일제강점기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했던 시아버지 모칠성의 거처였다는 점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할머니의 수집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은 이미 채무자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장물들이 켜켜이 쌓이던 공간이었다. 저당 잡힌 물건들은 누구에게서 어떤 연유로 빼앗아 왔는지 그 유래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그 어떤 폐기물보다도 비극적이고 선명한 서사를 품고 있다. 요컨대 이 집은 단순히 버려진 사물들의 무덤이 아니라, 타인의 삶의 서사가 강제로 유입되고 축적되어 온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이러한 공간적 내력은 언뜻 산1번지의 쓰레기 집을 마을의 배제된 기억과 비밀이 축적되는 일종의 아카이브처럼 비치게 만든다. “할머니한테는 저 집이 뭐랄까…… 박물관 같은 거지요.”(124쪽) 하지만 할머니의 수집 행위를 ‘기억의 보존’으로 쉽게 낭만화할 수는 없다. 집 안으로 모여든 쓰레기들은 한데 뒤엉켜 부패하며 본래의 형태와 개별성을 잃고, 그것이 매개하던 고유한 서사 역시
- 박서양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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