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기획좌담 1차 〈책장 업고 튀어〉
- 작성일 2025-01-01
- 댓글수 0
신년 기획좌담 1차 〈책장 업고 튀어〉
2025년 1월호부터 3월호 사이에 총 3회의 좌담회 내용이 순차적으로 발표될 예정입니다.
ㅇ 회차별 구성
- 1차 : 책장 업고 튀어
- 2차 :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 3차 :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의명 : 《문장웹진》 2025년 신년 기획좌담 1차 〈책장 업고 튀어〉
ㅇ 일 시 : 2024년 11월 28일(목) 13:00~14:30
ㅇ 장 소 : 예술가의집 라운지룸(서울 종로구 동숭길 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ㅇ 참여자
- 사회자 : 이소(문학평론가,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참여자 : 곽선희(‘위즈덤하우스’ 편집자), 김은혜(문학웹진 ‘림’ 편집자), 이유리(소설가), 한영원(시인)
〈개회〉
이소: 반갑습니다. 저는 평론을 쓰는 이소입니다. 《문학과사회》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어요. 다들 어떤 책을 만드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유리: 저는 소설 쓰는 이유리입니다. 최근에 『비눗방울 퐁』이라는 소설집이 나왔습니다.
곽선희: 저는 ‘위즈덤하우스’ 출판사에서 ‘위픽’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 곽선희 편집자라고 합니다. ‘위픽’ 시리즈는 단편소설 한 편이 책 한 권으로 만들어지는 기획이어서 오늘 종이책의 무게라든가 부피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고요. 오늘 자리에서는 좌담에 앞서 문구 덕후이자 전자책 편애자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영원: 저는 시 쓰는 한영원입니다. 『코다크롬』이라고 하는 시집을 썼습니다.
김은혜: 안녕하세요. 저는 열림원 문학웹진 ‘림’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김은혜입니다. 어제 마감이 끝났습니다. 조만간 림 문학상 수상작품집이 나올 예정이고, 전시를 기획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이소: 어떤 전시를 하시나요?
김은혜: 문학상 시상식과 전시를 접목시키는 기획을 하고 있는데요. 전시 기획은 처음이라 조금 떨리기도 합니다.
이소: 제가 미리 질문지를 드리긴 했는데, 꼭 해당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첫 질문은 ‘책과 공간’에 관한 것입니다. 책이라는 것이 부피가 크기도 하고 공간과 큰 연관이 있잖아요. 카페 같은 곳에서는 예쁜 책이나 시집을 인테리어 용도로 쓰고 있기도 하고요. 우리에게는 일과 관련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취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부피가 크다 보니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책을 모으시는지,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전부 다를 것 같아 궁금합니다. ‘집에 책이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집에서 취향의 영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만큼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면 좋겠습니다.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에게 책이라는 것이 취향의 영역인지 일의 영역인지는 모호하지만요.
이유리: 이것이 제가 이 좌담에 참석하게 된 이유인 것 같은데요. 저는 제 소유의 종이책이 집에 한 권도 없어요. 모든 종이책을 스캔해서 PDF로 보관합니다. 덕분에 공간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도 했고, 구글 드라이브에 모아 두고 필요할 때마다 PDF로 볼 수 있게 되어 편리합니다. 이렇게 잘 살고 있었는데, 작년에 소설가와 결혼하는 바람에 책꽂이가 또 생겼어요. 그래서 집 전체를 통틀었을 때는 책이 꽤 있지만, 그것은 저의 책이 아니고 남편의 책입니다. 제 소유의 종이책은 한 권도 없습니다.
이소: 혹시 같은 책을 보더라도 종이책보다는 PDF를 선호하시나요?
이유리: 네. 같은 책이 있더라도 종이책보다는 PDF가 편해요. 남편은 책 보는 것도 까다로운 편이에요. 책날개를 책갈피 삼지 말아라, 읽던 부분을 덮어 두지 말아라. 저는 책 험하게 보는 편이어서 그런 소리를 들을 바에야 PDF를 봅니다.
곽선희: 작가님이 쓰신 책도 종이책으로 간직하지 않으시나요?
이유리: 네. 제 것도 물론 PDF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소: 종이책이 한 권도 없다는 건 굉장한 원칙 같아요.
이유리: 맞아요. 제 원칙입니다. 저는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요.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날을 정해서 모아 둔 책을 전부 잘라 스캔해서 PDF로 만들어 보관하곤 합니다.
이소: 그럼 자른 책은 버리시는 건가요?
이유리: 맞아요. 그걸 버려야 의미가 있잖아요.
한영원: 어떻게 버리시나요?
이유리: 그냥 재활용으로 버립니다.
한영원: 그냥 정말 버리시는군요.
이소: 저는 내심 이 주제를 보고 ‘우리 모두 종이책을 좋아할 텐데,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거든요. 아까 전자책 편애자로 자기소개해 주신 곽선희 편집자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요즘은 그러신 분들도 좀 있지’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유리 작가님 말씀을 들으니 또 새롭네요. 하지만 책은 영혼이 있지 않습니까?(웃음)
이유리: 스캔으로 영혼이 이동하는 거죠. 책의 영혼은 종이보다는 그 안의 내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소: 곽선희 편집자님께서도 종이책을 안 가지고 계시나요?
곽선희: 종이책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이 질문지를 받았을 때 ‘집에서 취향의 영역이 차지하는 영역, 비율’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거든요. 취향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용품을 고르는 데도 작용하는 말인 것 같아서 취향이라고 한다면 집 전체가 100% 취향의 영역이지 않을까요? 질문하시는 의도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요. 취향보다는 취미에 가까운 물건들, 그러니까 생활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거실로 쓰고 있는 큰 방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책도 포함되어 있고요. 5년 전, 마지막으로 이사했을 무렵 세어 보았을 때 책은 2,000권가량이었어요. 책 외에도 다이어리, 뜨개 용품, 굿즈 등이 많아요. 회사에 오래 다니면서 사무실 서가에도 책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회사에 있는 책들은 세어 보지 않았고, 그중에서 집으로 가져온 것들이 약 1,000권 되는 것 같아요. 합치면 아마 3,000권 정도이지 않을까요? 책상에 책이 너무 많이 쌓여 앉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서 친구들과 ‘올해부터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 하루에 하나씩 버리기를 시작했는데, 그게 마음처럼 잘되지는 않습니다.
이소: 전자책 편애자치고는 종이책이 너무 많으신데요!
곽선희: 맞아요. 대부분 예전에 산 종이책들이고, 요즘은 웬만하면 전자책을 사려고 해요. 읽고 싶은 책이 생겼을 때 사러 가는 것도 번거롭고, 배송을 기다리는 것도 힘들어서 전자책으로 바로바로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이소: 이유리 작가님은 취미의 공간도 최대한 정돈되어 있나요?
이유리: 저는 취미가 엄청 많아서 책보다 취미의 공간이 넓어요. 베란다에 식물을 가득 키우고 있기도 하고요.
한영원: 제가 본가에 살았을 때는 가족들 책과 제 책이 합쳐져 거의 발 디딜 틈이 없는 수준이 되었어요. 자취를 시작하고, 이사 한 날 자취방에 가니 책이 한 권도 없는 것이 너무 기뻤어요. 이제 온전히 내 책들로 채울 수 있겠구나. 싶어서요.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는 책들이 다시 증식하는 바람에 발 디딜 틈이 없게 되었어요.
이소: 본가에서 가져오진 않으셨어요?
한영원: 갖고 왔어요. 그래서 결국에는 다시 늘어나게 되었답니다. 똑같은 책을 모르고 여러 권 사서 같은 책이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답니다.
김은혜: 저는 아까 선희 편집자님 말씀에 공감하였는데요. 저는 되게 분산되어 있어요. 집에도 있고, 사무실에도 있고요. 차 트렁크에도 이만큼 쌓여 있거든요. 제가 이번에 좌담을 준비하면서 이사 횟수를 세어 보았어요. 20살 때부터 이사를 여덟 번 했더라고요. 이고, 지고, 버리고를 너무 많이 겪었기에 지금은 100권 정도를 남겨 두고 나머지는 거의 전자책으로 대체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집에서는 공간적 비율이 그리 크지 않아요. 어쩔 수 없고, 너무 슬픈 것 같아요. 이사하는 상자에 책만 넣을 수는 없거든요. 저대로 분산해서 넣으면 상자가 여덟 개 이상 나오고요. 그런 과정을 거쳐 전자책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이소: 작업하는 공간이 집이면 반드시 책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한영원: 공감합니다.
곽선희: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유지하고는 있는데, 제가 일을 할 때 물건을 부려 놓아야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한번 재택근무를 하면 노트북이나 책, 다이어리 같은 걸 집까지 가져가는 게 힘들어서 웬만하면 모든 걸 회사에서 하고 있어요. 재택근무를 피할 수 없는 날이면 물건으로 가득 찬 집보다는 스터디 카페에 가서 일하는 편이에요.
이소: 그런 부분에서 확실히 이유리 작가님 스타일이 편할 것 같긴 해요. 저도 책 때문에 집에서만 작업하거든요.
이유리: 저는 밖에 나가는 걸 안 즐겨서 집에서 주로 작업하긴 하는데요. 저만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작업할 때 다른 책을 잘 안 보게 되더라고요. 창작하면서 남의 책을 참고하는 일이 많지 않다 보니 쓰는 것과 읽는 것이 분리되어 있고, 읽고 싶을 때는 소파에 앉아 읽다가 쓰고 싶을 때는 컴퓨터 앞에 앉아 쓰고 있습니다.
이소: 읽을 때는 어떤 것으로 읽으시나요?
이유리: 작은 태블릿PC가 있어요. PDF 보는 용도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소: 다른 분들은 책 읽을 때 어디서 어떻게 읽으세요? 작업 공간과 독서 공간이 분리되어 있나요?
곽선희: 공간에 따라 읽는 책이 달라요. 집에서는 책을 읽기보다 놀고 싶어지더라고요. 앉아만 있어도 놀 만한 것들이 눈에 띄어서 그런가 봐요. 집에서는 앉아 있는 것보다 누워 있는 걸 선호하기도 하고요. 누워서는 책을 읽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집에서는 휴대전화로 계속 만화만 보고, 그런 생활을 오래 하다가 ‘그래도 책을 읽어야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 지난여름부터는 아침에 눈을 뜨면 카페에 가서 책을 읽다가 돌아와요. 종이책은 그렇게 소화하고, 출퇴근 길에는 전자책을 읽어요.
한영원: 저도 읽는 시간과 작업 시간이 분리되어 있어요. 시간이 분리되어 있기에 공간은 같은 장소를 이용하고, 또 저희 집에서 3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어요. 그래서 너무 책상이 더러운 날에는 집중하기 위해 일어나서 도서관에 갑니다.
김은혜: 저도 평일에 퇴근하고 나서는 읽고 싶지 않아요. 아침에 출근해서 계속 편집하고, 글과 관련된 걸 하니 퇴근한 후에는 유튜브만 틀어 놓고 있는 것 같아요. 주말에는 누워서 책을 읽는데, 그래서 전자책을 사는 것 같아요. 옆으로 누워서 보기에도 편하고, 벽돌 책 같은 것도 전자책으로 구매하면 보기 편한 것 같아요. 집에서는 독서를 잘 안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혹시 선희 편집자님께서는 회사에서 일 관련된 책을 제외하고 다른 책도 보시나요?
곽선희: 일이 많다 보니 그럴 시간이 거의 없는데, 요 며칠은 제 손에서 교정지가 다 떠나 있어서 시간이 비어 업무와 아주 관련 있는 건 아닌, 그냥 책을 읽은 적도 있어요.
이유리: 저는 전자책의 ‘물성 없는 물성’이 좋은 것 같아요. 전자책을 봤을 때 종이책을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최근 발견한 방법인데, 뜨개질하면서 전자책을 볼 수도 있고요. 반지 모양으로 나온 블루투스 리모컨을 이용하면 가능하더라고요. 책을 효율적으로 읽게 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소: 그러면 다들 책 정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이사할 때 한 번씩 정리하시는 건가요?
곽선희: 이사를 안 한 지 오래돼서 책 관리는 거의 하지 않아요. 책을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함으로써 자연 소멸시키는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지에 이렇게 답변을 작성하고 일주일 뒤에 갑자기 본부장님께서 ‘며칠 뒤에 참고 자료 서가를 정리하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평소에 책을 잘 못 버리는 편인데, 그런 피할 수 없는 순간에 닥치니까 되게 차갑게 책을 버리게 되었어요. 책을 버리는 자신을 메타적으로 바라보면서 편집자의 자아가 ‘정말 잔인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집에 있는 책들도 안 보는 것들은 버려야겠다, 그런데 본다는 기준이 뭘까에 대해 고민한 날이었어요.
이소: 어떤 책들을 남기셨나요?
곽선희: 두 번 이상 읽은 책들, 안 본 책들을 남겼고요. 절판의 위험이 있는 책들도 남겼습니다. 한 번만 읽은 책들이 버려진 셈이죠.
이소: 물성 때문에 이 책은 꼭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들도 있으신가요?
곽선희: 그림책? 그림책에는 실물에서만 느껴지는 게 있잖아요. 제작 사양이 특이하거나, 특이한 종이를 썼다거나 하면 일할 때 참고가 되어 남겨 놓게 돼요.
한영원: 저는 종이책이랑 전자책 비율이 반반이에요. 따지자면 종이책이 좀 더 많은 편이긴 하죠. 전자책 양이 늘어나면서 어떤 건 종이책으로, 살지 어떤 건 전자책으로 살지 기준을 세워야만 한다는 게 괴롭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종이책이 늘어날 때마다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제가 종이책을 정리하는 기준은 한 번도 안 본 것뿐인 것 같아요. 책을 볼 때 밑줄을 긋거나 접어 두는 습관이 있어서 팔지는 못하게 되고요. 안 본 것들은 중고로 팝니다. 전자책이 늘어날 때는 좋았던 책을 다시 종이책으로 사거나 독후감으로 쓰는 형태로 정리합니다. 생각해 보니 전자책은 늘어나도 정리할 수가 없네요.
이소: 다들 여러 번 읽은 책을 오히려 버리지 못하시는 것 같네요. 이미 본 책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내 손때가 묻었기 때문인가요? 혹은 책의 내용 때문인가요? 단 한 권의 책을 남겨야 한다면 어떤 책을 남기실 건가요?
한영원: 저는 책의 내용이 더 큰 것 같아요. 단 한 권의 책을 정말 고르라는 질문은 정말 늘 어렵습니다. 단 한 권의 책으로는 부족하니까 제게 여러 책이 있는 것이니까요. 집이 발 디딜 틈 없어도 책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와 같아요. 그리고 아무리 큰 장소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든 책을 모을 수는 없죠.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모든 책을 가진 것은 아예 없는 것처럼도 생각됩니다. 제게는 제 속도로 책을 가지고 고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근 책장 정리를 하면서 저를 고민케 했던 전집이 있는데, 시 전집이거든요. 전집을 버릴 때는 책 한 권 한 권을 모두 버려야 하니까 다른 책보다는 더욱 고민이 된답니다. 그래서 욕심을 내자면 저는 차라리 전집을 남기겠습니다.
김은혜: 저도 판형이 특이한 것들을 주로 사무실에 갖다 놓는 것 같아요. 같이 작업했던 선생님들의 신간이 나오면 보내 주시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면지에 꼭 코멘트를 써 주시잖아요. 그런 책들은 절대 못 버리고요. 펀딩으로 구매한 책들이나 독립출판 서적은 재발간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 소장하곤 합니다.
이소: 이유리 작가님은 싸인 받은 면지도 PDF로 만드시나요?
이유리: 저 그렇게까지 냉혈한은 아니어서 면지는 따로 모으고 있습니다. 물론 스캔도 해 두고요.
이소: 저는 정말 종이책을 좋아해서 다들 그런 줄 알고 있다가 지금 계속 충격 상태예요.
곽선희: 저도 종이책을 정말 좋아했는데, 전자책으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있어요. 몇 년 전에 허리와 목이 너무 아파서 책상에 앉아 있기 힘들어진 거예요. 보통 교정도 종이에 뽑아서 보는데 책상에 앉는 행위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졌고, 그때 누워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책도 누워서 리모컨으로 읽고, 교정도 아이패드로 봤고요. 그걸 한번 겪고 나니 종이책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도 분명 있지만, 종이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전자책 TTS 기능도 무척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엔 그 기계음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지만요. 대중교통에서 책을 들고 읽기 힘들 때 그냥 듣고만 있어도 생각보다 내용이 잘 들어오더라고요. 책의 알맹이가 무엇일지 고민해 보기도 했습니다. 전자책의 장점이자 단점이 판형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이잖아요. 시력이 나쁜데 안경이나 렌즈를 잘 끼지 않는 저는 종이책을 보는 것이 불편할 때 전자책 서체 크기를 조절해서 보곤 하는데, 그럴 때면 출판 디자이너가 전자책에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져요. 책을 만들 때 서체,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 수까지 고려하는데 전자책에서는 소용이 없어지잖아요. 이 자리에 디자이너 선생님이 계셨어도 좋았겠다 싶어요.
이소: 그런 점에서 PDF와 전자책은 다르게 볼 수도 있겠네요. PDF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폰트나 자간의 변동은 생기지 않으니까요. 전자책이 그것만의 고정된 물성을 가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혹은 개별적인 커스텀을 설정할 수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곽선희: 되게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요. 종이책이나 PDF처럼 고정된 이미지를 읽거나 볼 수 있는 저는 어떤 것이 편한지 선택할 수 있는데, 종이책을 아예 읽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듯해요.
김은혜: 편집자로서는 변환하지 않는 형태가 좋긴 하거든요. 자간과 폰트를 전부 집약해서 읽기 좋게끔 만들어 두었는데 형태가 달라지면 좀 서운할 것 같긴 하고요. 그런데 제가 독자로서 읽을 때는 너무 편해요. 20대 때는 폰트를 작게 해서 읽었는데, 30대가 되니까 폰트를 점점 키우게 되더라고요. 독자에게는 전자책이 좀 더 편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한영원: 저는 어떤 책이 너무 좋아서 그 페이지를 넘기고 싶지 않을 때는 아예 글자를 키워서 천천히 그 페이지를 감상하기도 하고, 책이 좀 지루하다거나, 책 전체를 빨리 보고 싶을 때는 글자를 작게 해서 페이지 수를 적게 해 보거든요. 제게 있어서는 그런 특성이 전자책만의 물성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그걸 고정하는 것은 큰 메리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종이책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이소: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요즘에는 우리가 지나치게 자신의 취향으로만 매끈하게 둘러싸여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될 때가 있습니다. 설정을 바꿀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양가적인 마음이 들어요.
한영원: 제가 요즘 종이책과 전자책에 관해 생각한 지점은 종이책이 전자책과 어떤 종속 관계, 대체 관계, 상하 관계라기보다는 아예 장르가 다른 것처럼 느껴져요. 미식축구와 축구가 다른 장르가 된 것처럼요.
이소: 전자책에 냄새나 촉감 같은 감각 기능을 추가할 수 있다면 좋을까요? 가상현실처럼 완벽히 구현된다기보단 책의 물리적 한계는 지닌 상태로요.
곽선희: 그런 기능이 휴대전화나 전자책 리더기에 생기면 번거로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감각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이미 종이책을 읽고 있지, 전자책을 읽지는 않을 듯하거든요. 전자책 독자가 기대하는 기능은 아닌 것 같아요. 만약 소설에서 묘사하는 소리가 실제로 들리거나 냄새가 나게 된다고 해도 저는 직접 상상하는 편이 훨씬 좋아요.
한영원: 전자책이 더 발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현재 전자책 기술이 가진 한계가 주는 불편함이 제게 있어서는 종이책의 한계처럼, 그 장르에 있어 감수해야 할 불편함이라고 느껴집니다. 더 많은 기능이 있다면 또 배우고 따라가는 게 번잡스러운 선택지처럼 느껴지고, 그것은 전자책이 아닌 또 다른 장르가 될 것만 같아요.
김은혜: 저도 이 질문을 보고 싫었어요. 독서 분위기는 내가 스스로 조성하는 편이 좋지 않나 싶어서요. 그것도 독서 행위에 포함될 수 있으니까요.
이소: 같은 이유로 저는 전자책이 너무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전자책에도 메모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확실히 종이책과는 차이가 느껴지기도 하고요.
이유리: 저는 책을 데이터로 소장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제가 절대로 안 읽을 것 같은 책도 무조건 스캔하거든요. 이야기하고 보니 저는 책, 즉 데이터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 것 같네요. 영혼만 빨아먹고 껍데기는 버리는 디멘터 같은 얘기지만요.
이소: 만약 작가님께 무한한 공간이 주어져서 무한한 도서관으로 꾸밀 수 있다고 하더라도 스캔하시겠습니까?
이유리: 모든 책이 존재하는 도서관과 모든 책의 파일이 있는 전자 도서관 중 택하라고 한다면, 후자를 택할 것 같아요. 소유라는 개념의 확장을 생각했을 때 저는 제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야 해요. 제가 원할 때 꺼내 볼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정리되어야 하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전자책은 정말 편리하죠!
한영원: 아까 유리 작가님께서 전자책의 영혼 이야기하셨을 때 나는 무엇이 중요한가 생각해 보았는데요. 저는 전자책의 디바이스가 좋아요. 전자책 디바이스만 모으고 싶은 느낌이에요. 더 다양한 디자인이 생긴다면 그 디바이스를 모으고 싶은, 어쩌면 껍데기 파가 아닌가 싶어요.
이소: 다들 전자책의 장점을 잘 활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좀 질척대는 질문 같지만, 그래도 종이책으로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은 어떤 것인가요?
한영원: 저는 만화책이요. 삽화가 아름다운 그래픽노블은 특히 그렇습니다.
곽선희: 만화책은 오히려 무조건 전자책이요. 만화책을 정말 많이 읽는데, 만화책은 하나의 작품이 수십 권씩 나오잖아요. 도저히 제 부동산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요. 장면을 짤로 쓸 때도 많은데 전자책을 캡처하는 게 가장 깔끔해서 만화책은 책장 한 칸 정도로만 가지고 있고, 대부분 전자책으로 읽습니다.
한영원: 저도 만화책을 전자책으로 보긴 하지만, 꼭 소장해야 하는 그림 같은 건 종이책으로 사는 것 같아요.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전자책으로 내용을 보고, 좋다면 다시 종이책으로 구매해요, 그런데 반드시 종이책으로 꼭 소장해야 할 것, 반드시 전자책으로 소장해야 할 것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남겨야 할 종이책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이 났어요. 왜인지 후자는 제게 있어서 잘 없는 것 같은 거예요.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내가 아직 종이책의 물성 중 ‘실제로 있음’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연관 지어서 껍데기를 좋아한다고 한 이유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유물성이 제게는 중요한가 싶었어요.
김은혜: 저는 절판될 것 같은 사회과학 서적은 종이책을 선호하는 것 같아요. 리커버 도서는 웬만하면 종이책으로 구매하고요. 반대로 꼭 전자책으로 사야 할 것들이라면, 책등이 너무 두꺼운 책들인 것 같아요. 예전에도 너무 두꺼운 책은 삼등분해서 읽곤 했는데, 책을 쪼개는 느낌이 좋진 않더라고요.
이유리: 저는 스캔할 수 없을 것 같은 책은 사지 않아요. 예전에는 그림책을 참 좋아했는데, 스캐너가 생각보다 작거든요. 큰 동화책은 안 들어가기도 해서 눈물을 머금고 구매하지 않아요.
곽선희: 혹시 처음부터 전자책을 구매하시는 선택지도 있는지 여쭤 보고 싶어요.
이유리: 당연히 전자책이 있으면 사는데, 전자책이 없는 경우가 훨씬 많더라고요. 최신간 같은 경우 동시 발간이 불가능하니 빨리 읽고 싶어서 구매해 스캔하는 편이에요. 아참, 그리고 덧붙여 스캔의 가장 좋은 점은 쌓이는 계간지를 처리하기 아주 좋다는 점입니다.
이소: 저는 계간지는 1년이 지나면 바로 갖다 버립니다만.
곽선희: 계간지에 수록된 작품이 나중에 단행본으로 나온다고 해도 계간지에 실린 것이 원본이잖아요.
이소: 그런 말씀을 들으니 여러분이 저보다 더 수집욕이 있어서 전자책을 선호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유리: 저는 텍스트를 소유하고 싶은 거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것은 아니거든요. 모든 계간지를 보관할 수 있으니 너무 속 시원하고, 작가가 되고 나서 받게 되는 증정본들 중에 분명히 새 책이지만 제가 읽을 것 같지는 않은 것들이 있거든요. 그런 것도 스캔해서 보관하면 깔끔하고, 스캔한 PDF는 OCR 기능도 있잖아요. 책 읽다가 다시 보고 싶은 부분이 나오면 검색할 수도 있고요. 혹시 궁금해하시는 분이 계실까 싶어 책을 스캔하는 과정에 대해 알려 드리자면 필요한 준비물은 스캐너와 재단기예요. 양장본 뜯고 표지를 세게 접어 선을 낸 다음 칼로 그은 뒤에 면지는 따로 보관하고, 면지가 없으면 종이만 남잖아요. 그러면 제본된 부분을 재단기에 넣고 잘라요. 그러면 이게 낱장이 되고, 그걸 통째로 스캐너에 집어넣으면 알아서 양면 스캔을 해 줘요. 보통 단행본의 경우 5분이면 끝나요. 두꺼운 책 같은 경우 한 번에 안 들어가니까 여러 번 나눠 넣기도 하고요.
이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늘 주제가 단순히 전자책과 종이책 사이의 선호가 아닌, ‘텍스트로 이루어진 나의 세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 일종의 세계관에 대한 문제 같기도 합니다.
〈폐회〉
추천 콘텐츠
시작을 위한 커튼콜 송희지 ❋ 2025년은 내게 변화와 도전의 해였다. 짧지 않은 학부 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두 번째 시집을 펴내면서 지난 이삼 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작업물과 사유들을 털어 냈다. 문화센터 등에서 시 창작 수업을 하며 학생들을 만났고, 창작촌에 입주하며 잠깐의 서울살이를 해 보기도 했다. 또 그 변화와 도전의 한 축에는 극(劇)이 있었다. 새해 첫날, 신문을 통해 첫 희곡 「탐조기」를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직전까지도 연극에 대한 지식이라곤 소나기 오는 날 도로변에 생기는 웅덩이만큼이나 얕았던 내겐 그 일이 어떤 사건처럼, 무척 고되고 생경한 모험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희곡이 무엇인지, 연극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한 해 동안 고군분투했었다. 많은 희곡을 읽었고 많은 연극을 보았다. 한 명의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손꼽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수의 좋은 작품들을 만났다. 특히 와즈디 무아와드의 작품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음이 틀림없다(나는 『화염』을 각기 다른 극단의 낭독 공연과 무대 공연으로 한 번씩 봤고, 희곡을 여러 번 반복해 읽었다). 또 한 차례의 무대 공연과 한 번의 낭독 공연에 작가로 참여하면서, 연극이라는 무대예술이 가진 힘과 가치를 몸소 익혔다. 시나 소설은 작가의 머리에서 태어나, 그의 손으로 옮겨지고, 그의 품 안에서 완결된다. 희곡은 그와 다르다. 희곡의 완성은 실연(實演)을 위한 하나의 단계이며, 그것은 연출과 배우, 드라마터그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조력을 바탕으로 비로소 몸과 숨을 얻는다. 두 번의 공연 연습에 참여하면서, 나는 배우들의 호흡과 몸짓이 어떤 위력을 가지는지, 연출의 창의적인 시선이 어떻게 무대를 빛나게 하는지, 드라마터그의 예리한 질문이 어떻게 희곡의 골간을 드러내도록 이끌어주는지를 보고 배웠다. 공연으로 다시 만난 나의 희곡은 내가 생각지 못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 나를 작가가 아닌 한 명의 관객으로서 감동하고 환호하게끔 만드는, 기분 좋은 낯섦의 생기였다. 처음 신년 에세이 청탁을 받고, ‘반성, 시작, 소망’이라는 주제를 접하고 나서 자연히 지난 2025년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지나간 일상에 관해 떠올리기보다는, 내 ‘씀’이 한 해 동안 어떻게 몸을 바꾸어 왔는지를 주로 되짚은 듯하다. 이를테면 이전까지는 거의 시만 쓰고 발표해 왔던 내가, 희곡이라는 장르를 접하고 익히게 되면서 겪은 생각·언어·감각의 변화에 대해서, 또 그것이 내 시의 지형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에 대해서. ‘반성, 시작, 소망’이라는 키워드 아래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초점도 분명 그곳을 향해 있을 것이다. 이 에세이는 지난 1년간 내 변화한 내 ‘씀’에 관한 내밀한 살핌, 일종의 고백에 다름 아닐 것이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기억 하나를 먼저 꺼내 본다. 지난가을 나는 연희동의 단란하고 아름다운 창작촌 작업실
- 관리자
- 2026-01-01
소망, 반성, 시작 김상규 1. 소망 여러분은 언제부터 새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분은 1월 1일을 새해로 생각하실 것이며, 또 어떤 분은 설 명절을 생각하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또 어떤 분은 해가 다시 길어지는 동지를 새해의 시점으로 잡으실 수도 있겠군요. 저는 새해의 시작을 정월대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과학적으로 분명하거나 이론적으로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릴 적 할머니와의 기억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할머니는 늘 정월대보름이 되면 가족 수에 맞게 하얀 종이를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지(燒紙)라고 불렀습니다. 준비된 소지를 앞이 두껍고 기다란 직사각형으로 접고 나면 우리 집 정월대보름 준비는 끝마친 것입니다. 저녁이 되면 할머니는 나를 부르시곤 그 소지에 가족의 나이와 이름을 적게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소학교도 나오지 않으셨기에 글을 더듬더듬 읽을 줄 아나 쓸 줄은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불러 이 일을 시키신 것이지요. 잘 정리된 소지와 초 하나를 들고 할머니는 마당 구석으로 향했습니다. 불을 태우는 방향을 해마다 바뀌었는데 아마 동네 용한 무당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그리했다고 짐작할 뿐입니다. 남쪽이 흉하면 남쪽으로 소지를 태우고 북쪽이 흉하면 북쪽으로 소지를 태우는 것입니다. 준비가 다 되면 할머니는 이름이 적힌 소지를 순서대로 가슴에 품고 무언가를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그 소원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서서히 몰락해 가는 집안에서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기도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기도가 다 끝나면 가슴에 품었던 소지를 촛불에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더 멀리 소지의 불꽃이 퍼지기를 바라며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했습니다. 제주 중간산 마을의 거친 겨울바람을 타고 훨훨 오르는 종잇장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할머니 제 소지는 제가 가슴에 품고 불을 붙일게요.” 할머니는 흔쾌히 제 말을 따르셨습니다. 그것은 제가 우리 집안 종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잔병치레가 많아 유난히 병약했던 나에게 할머니는 무엇이든 다 주고 싶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날 버리고 떠난 엄마가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는 소원을 빌었을까요? 교도소에 들어간 아버지와 삼촌이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는 소원을 빌었을까요? 그게 아니면 빨리 어른이 되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가슴에 품었던 하얀 종이를 촛불에 붙여 하늘로 올려보냈던 기억과, 제 소원이 담긴 소지의 불꽃이 더 멀리 퍼지기를 바라며 손바닥을 휘저었던 기억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2. 반성 소지를 태우며 빌었던 소망은 이루어졌을까요? 불행하게도 그 기도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집안은 철저하게 몰락했으며 저 역시 혈족의 굴레 속에 벗어나지 못했으니까요.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 관리자
- 2026-01-01
한 해의 뒷면 최현진 첫 눈이 내린다. 나의 글쓰기 방에 난 창문으로 흰 원들이 신호등과 선로 위에 앉는 걸 본다. 눈과 바람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외투를 되살리며 종종종 걸어간다. 눈이 쌓인 지면은 세상으로부터 떠 있는 것 같다. 사물의 형체를 지우며 공백에 가까워진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공백(空白)에서 찾아온다. 이 글은 지난겨울에서 다시 첫눈이 내리는 동안의 이야기다. 아홉 살 때 ‘단감’이라는 시를 써 본 것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내 꿈은 작가였다. 2025년은 꿈을 이루며 시작했다. 나의 첫 책이 나온 것이다. 출간 이후의 삶이 책의 질량만큼 가벼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연초 문학상 시상식을 하루 앞두고 아버지가 바터팽대부암이라는 희귀암 진단을 받으셨다. 시상식 가는 길이 앞으로 펼쳐질 투병과 간병의 길처럼 더디고 어려웠다. 이른 봄, 나는 희미한 감각으로 수상과 첫 책의 기쁨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최종 교정지를 만지는 날에 아버지가 누워 있는 고층 병동에서 쏟아지는 폭설을 보다가 그만 커피를 쏟고 말았다. 얼룩이 책에 인쇄되어 나올 것도 아닌데 참을 새 없이 눈물이 푹신 떨어졌다. 나는 서운했다. 내 삶에. 작가는 어떻게 가족구성원 내에서 돌봄이라는 균형을 지키며 자신의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는가. 휠체어를 끌다가 메모를 하고 병실에 불이 꺼지면 노트북을 켜 타닥타닥 불씨를 지피기도 하지만 일순간에 불과하다. ‘작업을 이어 나가고 싶다’는 마음과 ‘중지해야 한다’는 갈등은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서성거린다거나, 환자에게 무뚝뚝하게 군다 거나. 간병 일수를 줄여 보자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러기에 내 직업은 출퇴근이 따로 없는 작가이고 또한 애매한 태도가 걸림돌이었다. 수상과 첫 책의 행운이 함께 왔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쉽사리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나를 축하해 줄 때였다. 병원 앞에 뜬 부드러운 점선의 구름을 보며 사진을 찍어 두는 것이 기쁨의 전부였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문학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작가가 무엇인지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탓인지 모른다. 나는 빠져나갈 출구를 찾고 있었다. 첫 강연은 부산이었다. 책을 내고 공식적으로 들어온 첫 번째 일이었다. 식구들에게 떳떳하게 통보하고 짐을 쌌다. 얼마나 걸리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하루가 걸린다고 했다. 강연은 두 시간이었지만 부산까지 가는 데 오고 가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런데 왜 짐을 싸냐고 물어보셔서 간 김에 글을 쓰고 오겠다고 말했다. 여기서도 글을 쓸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시는 게 아버지 입장에서는 당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글을 쓸 수 없었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내가 초청받은 곳은 시외에 위치한 고등학교였다. 따뜻한 땅에서 올라온 연둣빛 들판을 거쳐 봄 멸치를 잡던 배가 묶여 있는 작은 항구와 벽돌로 쌓은 젓갈 공장을 지나서 달려간 곳에 아늑한
- 관리자
- 2026-01-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