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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곡선이다

  • 작성일 2025-09-01


  [문장웹진 REWIND]


 삶은 곡선이다

    -염승숙의 「곡선을 걷는 시간」(《문장 웹진》 2009년 8월호)



고봉준(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염승숙의 「곡선을 걷는 시간」은 ‘곡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곡선’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단어이며, 이때의 ‘곡선’은 ‘직선’이 아닌 것, ‘직선’과는 다른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곡선을 걷는 시간’이라는 제목은 이미-항상 대척점, 즉 ‘직선을 걷는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직선’과 ‘곡선’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곡선을 걷는 시간」은 ‘곡선’의 의미를 해석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부러 그렇게 만들어진 경우를 제외하면, 세상 모든 휘어진 것들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휘어진 것이란 “노인의 굽은 등과 허리, 사춘기 아이의 비뚤어진 성격이나 오래된 연인들의 등 돌린 마음, 사고에 의해 부러진 뼈, 아주 추운 겨울날 주머니 안에서 곱아드는 손, 허리가 꺾인 붓의 단면 등”처럼 유무형의 곡선 형상을 모두 포함한다. 곡선에 대한 화자의 해석은 “부러 그렇게 만들어진 경우를 제외”하므로 결국 여기에서의 ‘곡선’은 원래는 곡선이 아니었던 것이 어떤 이유에 의해 휘어졌다는 의미이다. 화자는 “어쩌면 휘어진다는 건 ‘충격’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진술처럼 그 이유를 정신적․물리적 ‘충격’에서 찾는다. 요컨대 화자에게 ‘곡선’이란 원래는 곡선이 아니었던 것이 정신적․물리적 충격을 받아 휘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이전 상태의 회복, 즉 “곧아지기 위해 일생을 견뎌야 하는 불행한 존재들”로 인식된다. 

   이 소설의 핵심적인 사건은 주인공이 “내 아버지의 집이며, 내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붉게 웃다 떠난, 그런 공간”으로 돌아온 것, 즉 귀향(歸鄕)이다. 이때 ‘귀향’은 고향에 돌아왔다는 공간적․장소적 의미보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긍정한다는 정신적 의미에 가깝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아버지에 대해 “이유 없는 분노”를 갖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제아무리 팽개쳐도 부서지거나 깨어지지 않는 내 아버지란 사람에 대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굴레 같은 것을 알아 버린, 사춘기 아이의 치기(稚氣)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는 아홉 살 무렵 엄마가 식도암으로 사망한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한결같은 사람이다. 엄마가 떠난 후 ‘나’는 이따금 방안에 엎드린 채 “집 안과 밖을 개미처럼 바지런히 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고, 때로는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비가 오면 아버지는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아버지는 코트를 입을 테지. 시간이 흘러 다시 푹 팬 주름들 사이에서 바짓단이 젖거나 쑥쑥 발이 빠지면서도 부서진 시멘트 가루와 아스팔트 조각을 쓸어 내고 또 바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멈추지 않고 다만 허허 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마음은 점차 아버지에게서 멀어진다.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자 ‘나’는 “아버지를 떠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나’에게 대학 진학은 “아버지가 쫓아올 수 없는 정당한 거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서울행 기차의 창밖으로 아스라하게 멀어지는 고향 풍경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이유로도 이곳을 찾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주인공은 왜 아버지에게 “이유 없는 분노”의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 그것은 엄마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관계가 있다. 유년의 ‘나’에게 엄마와 아빠는 특유의 ‘냄새’를 지닌 사람, 즉 냄새의 존재였다. 아스팔트를 까는 일이 직업이었던 아버지는 ‘기름 냄새’가 나는 존재였다. 반면 동네 여자들을 찾아다니며 화장품을 팔던 엄마는 ‘향기’와 32색 크레파스의 “서른두 가지의 색깔로는 감히 붙잡을 수 없던, 마술 같이 진한 색”의 입술을 지닌 존재였다. 이런 까닭에 주인공은 엄마와 함께 한 시간, 가령 “방바닥에 엎드려 누운 엄마의 허리를 베고 누워 구구단을 외거나 동화책을 읽던 시간들”을 향기로운 시간으로 기억한다. 

   반면 주인공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아스팔트와 기름 냄새로 기억될 뿐이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주인공의 상상 - “엄마의 붉은 입술 위에서 묵묵히 선 채로 잿빛 시멘트를 바르거나 새까만 아스팔트를 부어대는 아버지.”나 “바짓단이 젖거나 쑥쑥 발이 빠지면서도 부서진 시멘트 가루와 아스팔트 조각을 쓸어 내고 또 바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 속에서 아버지가 늘 ‘아스팔트’와 연결되는 장면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엄마의 붉은 입술 위에서 묵묵히 선 채로 잿빛 시멘트를 바르거나 새까만 아스팔트를 부어대는 아버지. 조심조심 걸으며, 때론 천천히 자전거 페달도 밟으며, 엄마의 입술을 도로 삼아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아버지.”라는 장면에서 드러나듯이 ‘나’에게 아버지는 엄마의 위, 즉 엄마 위에 군림하거나 그녀의 희생 위에 존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서 엄마가 식도암으로 사망했을 때, 그러니까 늘 붉은 루주가 발려 있던 그녀의 입술이 주름이 아로새겨진 검은색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아버지가 엄마의 입술을 빼앗아서 생긴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밤마다 “기름 냄새가 밴 아버지의 큰 손바닥”을 뒤집어 확인한다. 요컨대 어렸을 적에 ‘나’는 엄마의 죽음이 ‘기름 냄새’로 표상되는 아버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고,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결국 아버지에 대해 “이유 없는 분노”를 갖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이유 없는 분노”는 ‘습성 황반변성’으로 인해 “짧으면 몇 달, 길어야 2년” 내에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급격하게 방향이 바뀐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나’의 태도 변화는 곡선에 대한 인식 변화, 즉 “모든 휘어진 것들”이 “곧아지기 위해 일생을 견뎌야 하는 불행한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휘어진 그대로가 아름답다면 용기 내어 떠나리라”로 바뀌는 과정과 나란하게 진행된다. 의사를 만나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기도 하고, “세상 모든 아버지란 불우하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의 변화는 결국 4년 만의 귀향으로 현실화되며, 귀향 이후의 시간, 즉 즉 ‘곡선을 걷는 시간’은 아버지와 화해하는 시간으로 흘러간다. 이 화해의 과정은 돌아누운 아버지의 등을 ‘붙잡고 싶다’는 욕망(“작게, 그러나 힘겹게 요동치는 아버지의 등을, 어깨를, 다리를, 가만 붙들어 주고 싶다고. ‘아버지’하고 나직이 부른 뒤 그의 뒷모습 전체를, 스케치하듯 그려 간직할 수 있다면 좋으려만.”)으로 시작해 그 욕망의 현실화(“나는 몸을 더욱 웅크린 뒤 아버지에게 슬며시 다가붙었다.”)로 종결된다. 이러한 화해의 모티프는 2000년 이후에 발표된 젊은 소설가의 소설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특징이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패잔병처럼 축축한 몸을 이끌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첫날 밤 ‘나’는 힘겹게 요동치는 아버지의 몸을 붙들어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흔들리는 것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의 시력임을 깨닫는다. 유년 시절 아버지에 대한 ‘나’의 상상에서 드러나듯이 아버지는 한결같은 존재이다. 그는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코트를 입는다. 비와 눈이 내려 “ 바짓단이 젖거나 쑥쑥 발이 빠지”는 상황에서도 그는 항상 “부서진 시멘트 가루와 아스팔트 조각을 쓸어 내고 또 바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처럼 이 소설에서 흔들림은 시력의 문제만이 아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를 가슴에 품고 떠난 후 4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의 집에서 ‘나’는 4년이라는 시간이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곡선의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돌아오고 나서야, 직선을 달려 나갔다 믿었던 뜨거운 철로 위의 쳇바퀴는 기실, 곡선의 제자리걸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가는 이러한 심적 변화의 계기를 정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만일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사춘기 아이의 치기(稚氣) 같은 것”에 불과했다면, 이 소설은 ‘나’가 시력상실을 계기로 삶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임을 깨닫고 성숙해지는 성장소설의 성격을 띤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듯하다. 


   “세상엔 주름도 많고 많고, 곡선도 많고 많고, 따지고 보면 직선이 없는 곳이야. 흔들리는 게 눈인지 세상인지 알 게 뭐냔 말이다. 제 몸의 터럭 한 올 흔들리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동물은 없어. 휘면 휘는 대로, 꼬부라지면 꼬부라지는 대로 가는 거야. 걷는 순간엔 다 일직선으로 보이는 법이니까. 이리 기울, 저리 기울, 사는 게 다 기울 기울, 그렇단다. 따지고 보면 매끄러운 길만큼 걷기 힘든 곳이 또 어디 있겠니. 그러니 마찰이 생기는, 주름지고 접히는 자리마다 이리들 함께 모여 사는 것이지.”


   주인공은 자신이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선배 T가 가보고 싶어했던 ‘협곡’에 다녀올 것을 결심한다. “미국 애리조나 주 북부에 그랜드캐니언이라는 곳이 있대요. 콜로라도 강의 급류에 꺾이고 파여 형성된, 세계에서 가장 깊고 거대한 협곡.” 이 소설에서 ‘협곡’은 “입술 말이다. 색에 가려졌던 주름 같은 것.”이라는 진술처럼 엄마의 ‘입술’과 연결된다. ‘주름’과 ‘협곡’의 형상은 곡선, 즉 휘어진 것들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변주라고 말할 수 있다. 협곡으로 여행을 떠나겠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조언과 위로를 건넨다. 아버지는 아스팔트를 깔아 길을 포장하는 노동 행위를 통해 그것이 “지구에 굵은 주름을 만들어” 주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아들에게 인간의 삶과 지구에서 ‘주름’과 ‘곡선’의 의미에 대해 들려준다. 이 설명에 따르면 세상은 ‘주름’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곳, 즉 ‘직선’이 없는 곳이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동물은 몸의 털이 흔들리는 상태로 걷고, 인간이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이리 기울, 저리 기울, 사는 게 다 기울 기울”하는 과정이다. 인간의 삶, 아니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우리의 인생이 ‘곡선’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이때의 ‘곡선’은 우여곡절일 수도 있고, “함께 모여 사는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원리가 ‘곡선’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직선을 용납하지 않는” 아들의 눈 상태를 염두에 둔 이야기로서 그 핵심은 “세상이 울퉁불퉁해 보일 때마다” 좌절하지 말고 “나는 지금 지구의 주름을 보고 있다”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곡선’이 외면할 수 없는 삶의 필연적 조건이라면 세상 모든 것이 울퉁불퉁한 곡선으로 보인다고 해서 좌절할 이유는 없다. 휘어진 것-곡선-주름-협곡으로 연결되는 이미지의 계열은 이들 부자가 유사성에 근거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아버지는 유사성에 근거하여 지구에 주름을 만들어 주는 행위와 인간의 삶이란 직선이 아니라 곡선에 따른 “기울 기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이러한 아버지의 발견에 응답하듯이 “참 많은 것들이 서로 닮”았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아버지의 손과 엄마의 입술이 그렇고, 이 둘과 함께 내가 발 딛고 선 지구의 표면마저도 무수한 주름으로 뒤덮여 있을 터였다. 더불어 사라진 T와, 소정과, 나의 몸 구석구석에도 굽고, 곱고, 휘고, 둥근 그것들로 가들막이 채워져 있겠지.” 화자의 곡선적인 것의 발견, 즉 “굽고, 곱고, 휘고, 둥근” 것들이 지구는 물론이고 우리의 신체마저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은 ‘나’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계기를 제공한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두 가지 구체적인 행동과 결심으로 표현된다. 하나는 “휘어진 그대로가 아름답다면 용기 내어 떠나리라, 나는 결심했다.”라는 진술처럼 “휘어진 그대로”를 긍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모든 직선이 사라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생의 기운을, 그 곡선 위에서 마음껏, 붓질해 볼 수도 있겠다.”라는 진술처럼 직선이 사라지는 것(황반변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곡선 위에서 자유롭게 붓질을 하겠다는 다짐이다. 주인공의 이러한 생에 대한 긍정과 다짐은 분명 그 자신이 외면하고 떠났던 한 존재와의 재회로 인해 가능한 것이니 이 소설의 주요 공간인 ‘아버지의 집’은 재생의 장소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듯하다.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아버지의 조언으로 마무리된다. “곧아지기 위해 너무 애쓸 것 없지 않니. 주름지고 잡혀야, 마찰도 생기는 법이야. 생의 즐거움도, 삶의 고단함도, 언제나 그 마찰의 지점에서 잉태된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조언은 200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는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는 작가의 목소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이 처음 발표된 후 16년이 지난 아버지(또는 소설가)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할까? 이 물음에 대한 각자의 답변을 제시하는 일이야말로 이 소설을 가장 흥미롭게 읽는 방식이 아닐까.



▶ 염승숙의 「곡선을 걷는 시간」: 곡선을 걷는 시간 | 소설 | 문장웹진 : 문학광장 웹진


[문장웹진 REWIND]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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