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고백
- 작성일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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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백
- 진은영 『고백』 (문장웹진 2010년 11월호 수록) 읽기
이영주(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시 쓰기는 재미있다. 인간의 언어란 흥미로운 것이니까. 인간의 언어란 오염과 환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그것을 이상한 쾌락으로 즐기게 해 주는 수수께끼의 세계. 시는 이런 언어의 가장 예민한 촉수이다. 우리에게서 가장 멀리 가고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 내부에 가장 깊이 침투해 있다. 시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이런 멀고, 가깝고, 깊은 주름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 존재들.
시인들은 주름을 펼쳐 보이고 때로 섬세하게 접기 위해 늘 몸이 열려 있다.
열린 몸이란,
복잡하고 구불구불하고 황폐하고 어지럽고 축축하고 미끌거리고 우수수 돋는‧‧‧ 아무런 규정도 할 수 없는 무정형의 상태.
시인들이 몸을 열고 받아 적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고백
진은영
내 죄를 대신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내 병을 대신 앓고 있는 병자들에 대해
한없이 맑은 날 나 대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 버린 사람들에 대해
나의 가득한 입맞춤을 대신하는 가을 벤치의 연인들
나 대신 식물원 화단의 빨간 석류를
따고 있는 아이의 불안한 기쁨과, 나 대신
구불구불한 동물내장을 가르는 칼처럼 강, 거리, 언덕을
불어 가는 핏빛 바람에 대해
할 말이 있다
달콤한 술 향기의 전언을
빈틈없이 틀어막는 코르크 마개의 단호함과 확신에 대해
수음처럼 또다시 은밀해지려는 나의 슬픔에 대해
할 말이‧‧‧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
나 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 하늘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
나 대신 울고 있는 어머니에 대하여
잠깐 딴 이야기를 해야겠다. 시인인데 시인이 아닌 채로 살아야 하는 순간들에 대하여. 내가 생활의 우악스러움을 드러내면 누군가 내게 시인 아니에요? 라고 미묘한 공격성을 띠고 물어볼 때, 그러니까 시인은 삶에 대해 초연해야 하고, 가난도 자랑스러워해야 하며, 슬픔도 웃어넘기는, 여유로운 포즈로 뭐든지 받아안고 가는 존재여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강요할 때, 그러니까 시인이 (과장해서) 영양실조에 걸려도 역시 시인이란 그런 존재지‧‧‧ 하고 동정의 포즈를 보낼 수 있는 존재여야만 할 때(전근대적인 낭만성이 아직도 있긴 하다‧‧‧), 나는 시인 아니에요? 라는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깊은 함정에 빠진다.
시인은 원고료나 특강비 등 돈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일종의 허상에 가까운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여러 시선에 대하여‧‧‧ 나는 종종 공중누각에 던져져 온몸이 찢겨 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지? 시를 쓰지 않는 순간들이 더 많은 ‘나’의 생활과 삶은 어떻게 하지? 그 생활과 삶의 세부들이 모여 하나의 시를 탄생시키는데, 결국 시를 쓰지 않는 순간에도 시를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시인의 의식주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시대는 시인을 이중의 아이러니 안으로 밀어 넣는다. 약자들의 삶을 받아안는 존재로서의 시인, 이미 자체가 약자인 시인. 시인은 약자들의 슬픔과 환희를, 희망을 받아안는 몸이자 시인이 바로 그 약자라는 것. 그러니까 시인은 어떤 의미를 담기 위해 그들을 향해 몸을 여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이미 약자로서의 몸이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진은영의 「고백」은 나를 대신하여 절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기본 정서이기도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 부끄러움은 왜 발생했을까. 그것이 시인의 염결성 아닐까. “나 대신”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 한없이 맑은 날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 버린 사람들. 그들의 마음을 시인은 받아 안는다. 부끄러움을 넘어선 이 다정하고 의연한 결기 앞에서 “대신”이라는 말은 반대로도 느껴진다.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병자들, 투신자들, 투약자들이 바로 “나”라고.
세상에서 이탈된 자들, 현실의 끝에서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떠밀려 가는 슬픈 존재들이 잠시나마 거주하는 처소로서의 시인. 안식처이자 삶의 전장터이기에 “대신” 짊어진 것을 넘어서서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시인. 이러한 이중의 겹이 시인의 운명이 아닐까.
나는 문학예술공간 <포에트리앤(poetry &)>을 운영하기 시작한 지 4년 차가 되어 간다. 시 쓰고 강의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능력자 바보인데 K 시인과 H 시인의 응원 아래, 부동산 매니저 언니의 독려 아래, 남편의 목숨 건 반대 아래‧‧‧ 절벽에 선 심정으로 공간을 열었다. 어떤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고쳐 말하겠다. 시인의 정체성으로 보자면 실패라는 말은 맞지 않는 어떤 실패가 있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아무도 절벽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나의 심정은 모르니까. 나조차 그 깊은 심연의 정체를 몰랐으니까. “나 대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 버린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나의 투신이자 투약이었다. 그것은 나 대신이 아니라 나 자체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포에트리앤을 운영하면서도 절벽 밑으로 고개를 떨어트리고 언제든 뛰어내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포에트리앤에서 만난 친구는 아니지만 어떤 이슈로 가까이 지냈던 젊은 친구 하나가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현실과 꿈 안에서 수많은 낙서를 했고 때로 너무 피 칠갑인 문장들 때문에 나는 나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언제든 추락할 수 있으니 공간을 깨끗이 하고 정갈하게 몸단장을 하고 예쁜 것만 보려고 애썼다. 언제든 다른 세계로 갈 수 있으니 자주 웃었고 크게 웃었고 마포구의 귀여운 골목들을 눈과 마음으로 깊이 깊이 간직했다. 걷고 또 걸으면서 이미 죽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일을 잔뜩 늘리기도 했다. 시는 별로 쓰지 않았다. 너무 어두워서 사물이 식별이 안 될 때는 언어도 뭉개져 버린다. 나는 계속 걸었다. 지구 끝에서도 걸었다. 나 자신을 잊기 위해서.
가을이 되었고 곧 겨울이 올 것이다. 어떤 일은 그만두었고, 어떤 일은 잘렸다. 그래도 일이 있는 사람처럼 계속 걷는다. 아무도 걷지 않는 길 위에서 혼자 걷는다. 어느 순간 친구가 모두 사라졌는데 이미 내가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좋고 가을이 좋다.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 / 나 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 하늘 /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 / 나 대신 울고 있는 어머니에 대하여”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사실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곧 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 있음으로, 생존함으로 말을 대신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 “대신”하여 죄와 병을, 투신과 투약을, 입맞춤과 석류를 따는 불안한 기쁨을, “구불구불한 동물내장을 가르는 칼처럼 강, 거리, 언덕을” “불어 가는 핏빛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으로 연루되어 있는 우리. 서로를 대신하는 우리.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더욱 커지는 우리. 커지면서 희망이 되는 우리.
우리는 별의 잔해로 만들어졌으니까. 우주는 잔해들의 집약이니까. 할 말이 있고 할 말이 없고‧‧‧. 시인은 시를 통해 타자에게로 건너간다. 시라는 할 말을 통해서 너를 만난다. 하지만 시인은 우수수 떨어지는 잔해의 집약물이고,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비단 시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살아 있음으로 서로를 지지하지만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우리는 근원적 상실로 연결되어 있고 텅 빈 지대에 서로에 대한 애도로 가득하다. 남겨진 자가 떠난 자를 그리워하고 그 흔적들로 아름다워진다.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은 나의 이름이자 너의 이름이다. 누군가가 생존함으로써 떠난 자의 이름을 새겨 주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사실 죽음으로 연루되어 있다. 살아 있음이자 죽음으로써.
진은영 시인의 시에는 언제나 세상의 고통과 맞서는 유약한 자들의 상처와 슬픔의 언어가 담겨 있다. 그 유약함으로 희망이 되어 가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부조리 안에서 합리화하거나 도망치지 않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상처로 연대하여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따뜻하고 결연한 의지에 있다.
진은영의 「고백」1)은 나의 고백에 다름 아니다. 시인의 고백이자 우리의 고백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시를 읽기 시작하면 타자의 지대를 헤매는 방랑자가 된다. 세계의 끝으로 걸어가 끝이 없는 끝을 향해 가는 이상한 존재가 된다. 나 대신 울고 있는 어머니를 만난다. 이미 죽은 존재인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엄마 이제 그만 울어요, 라고 토닥이고 있다. 울음으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일은 아름답지만 이미 우리는 함께 울고 있으니 언제든 멈춰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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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REWIND]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
1) 이 작품은 『훔쳐가는 노래』(창비,2012)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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