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시작을 위한 커튼콜

  • 작성일 2026-01-01

   시작을 위한 커튼콜


송희지



   2025년은 내게 변화와 도전의 해였다. 짧지 않은 학부 생활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두 번째 시집을 펴내면서 지난 이삼 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작업물과 사유들을 털어 냈다. 문화센터 등에서 시 창작 수업을 하며 학생들을 만났고, 창작촌에 입주하며 잠깐의 서울살이를 해 보기도 했다. 또 그 변화와 도전의 한 축에는 극(劇)이 있었다. 새해 첫날, 신문을 통해 첫 희곡 「탐조기」를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직전까지도 연극에 대한 지식이라곤 소나기 오는 날 도로변에 생기는 웅덩이만큼이나 얕았던 내겐 그 일이 어떤 사건처럼, 무척 고되고 생경한 모험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희곡이 무엇인지, 연극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한 해 동안 고군분투했었다. 많은 희곡을 읽었고 많은 연극을 보았다. 한 명의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손꼽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수의 좋은 작품들을 만났다. 특히 와즈디 무아와드의 작품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음이 틀림없다(나는 『화염』을 각기 다른 극단의 낭독 공연과 무대 공연으로 한 번씩 봤고, 희곡을 여러 번 반복해 읽었다). 또 한 차례의 무대 공연과 한 번의 낭독 공연에 작가로 참여하면서, 연극이라는 무대예술이 가진 힘과 가치를 몸소 익혔다. 시나 소설은 작가의 머리에서 태어나, 그의 손으로 옮겨지고, 그의 품 안에서 완결된다. 희곡은 그와 다르다. 희곡의 완성은 실연(實演)을 위한 하나의 단계이며, 그것은 연출과 배우, 드라마터그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조력을 바탕으로 비로소 몸과 숨을 얻는다. 두 번의 공연 연습에 참여하면서, 나는 배우들의 호흡과 몸짓이 어떤 위력을 가지는지, 연출의 창의적인 시선이 어떻게 무대를 빛나게 하는지, 드라마터그의 예리한 질문이 어떻게 희곡의 골간을 드러내도록 이끌어주는지를 보고 배웠다. 공연으로 다시 만난 나의 희곡은 내가 생각지 못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 나를 작가가 아닌 한 명의 관객으로서 감동하고 환호하게끔 만드는, 기분 좋은 낯섦의 생기였다.       

   처음 신년 에세이 청탁을 받고, ‘반성, 시작, 소망’이라는 주제를 접하고 나서 자연히 지난 2025년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지나간 일상에 관해 떠올리기보다는, 내 ‘씀’이 한 해 동안 어떻게 몸을 바꾸어 왔는지를 주로 되짚은 듯하다. 이를테면 이전까지는 거의 시만 쓰고 발표해 왔던 내가, 희곡이라는 장르를 접하고 익히게 되면서 겪은 생각·언어·감각의 변화에 대해서, 또 그것이 내 시의 지형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에 대해서. ‘반성, 시작, 소망’이라는 키워드 아래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초점도 분명 그곳을 향해 있을 것이다. 이 에세이는 지난 1년간 내 변화한 내 ‘씀’에 관한 내밀한 살핌, 일종의 고백에 다름 아닐 것이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기억 하나를 먼저 꺼내 본다. 지난가을 나는 연희동의 단란하고 아름다운 창작촌 작업실 안에서, 세 번째 시집의 초고를 다 쓴 바 있다. 초고는 막 원고를 묶기 시작할 적 기획했던 대로 고대의 극과 서사시, 신화의 영향이 곳곳에 반영된 장시집이 되었는데, 원고를 한 데 묶는 축으로서 가장 큰 구심력을 발휘해 준 것이 바로 희곡의 장르적 특징과 형식이었다. 초고의 마지막 장을 다 써낸 순간, 불현듯 사위가 훅, 하고 깜깜해지던 것을 나는 느꼈다. 그건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극의 마침표를 찍는 형식으로서의 암전이었다. 하나의 극이 살아 움직이기를 그만두고 어둠의 널따란 관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나는 방 안에서 홀로, 시를 쓰며 실감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무척이나 감사했다. 뜻밖의 기회로 극과 가까워지게 된 것이, 또 지난 한 해 동안 창작진들 바로 곁에서 (나 역시 한 명의 창작진이 되어)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 실로 대단한 행운 같았다. 



   1월 1일 자 신문, 그 특별한 지면에 내 희곡이 실린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조금 두려워졌다. 12월의 불법 계엄 사태 이후로 내 쓰기는 멈춘 상태였다. 어떤 것이 시가 될 수 있는지, 시를 향할 수 있는지, 어떤 시가 현실의 압도적인 불합리함에 대응하는 목소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시라고 부를 만한 텍스트라곤 단 한 자도 쓸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또 다른 ‘씀’의 길이 열린 것이다. 낯설고 어려운 길이었다. 내 희곡 등단작 「탐조기」는 24년 봄, 대학에서 희곡 창작 수업을 들을 때 썼던 것으로, 「탐조기」를 쓰고 투고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살면서 본 연극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입센이나 체호프를 비롯해 유명한 작가의 희곡 몇 편을 읽긴 했고 <오레스테이아> 같은 비극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실제로 공연되는 동시대 연극에 관한 정보라곤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한국연출가협회의 주관으로 「탐조기」의 공연화가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동료 작가들과 연출들을 비롯해 연극계에 몸담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나 혼자만 너무 많은 걸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위축되는 한편, 그 어떤 배움이라도 얻기 위해서 그들 곁에서 끊임없이 귀를 쫑긋 세웠던 듯하다. 어쩌면 시를 쓸 수 없는 상태, 거의 증상에 가깝게 느껴지는 그 반강제적인 함묵의 입장이 나를 극에 더더욱 골몰하도록 이끌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그때 함께 작업에 참여한 동료들에게는 실로 많은 것을 배웠다. 「탐조기」를 공연화 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내 작품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했는데, 대사와 지문 하나하나의 의도를 타인에게 설명하는 그 낯선 작업을 통해 나는 내 텍스트를 더욱 면밀하게 재독할 수 있었다. 극의 막바지에 이르러 조가 뱉는 대사(“아저씨 저요, 정말로 언젠가는 떠날 수 있겠죠?”)가 왜 낙관적인 뉘앙스를 가져서는 안 되는지, 훤이 읊는 하이쿠(“안착 못 하는 / 나그네 심경이여 / 고타쓰 화로”1))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작가로서 한 번 더 고민해 보고, 이야기 나누었던 기억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연출가와 배우분들의 빛나는 의견은 희곡을 다듬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공연화된 탐조기에 두드러지는 것은 배경음악을 포함한 음향적 요소들이었는데, 희곡을 쓸 당시에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던 부분이 극에 큰 정서적 울림을 덧입혀 주는 핵심 요소가 되어주었다는 점에 즐거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공연을 앞두고 연습실에서 진행한 리허설을 지켜보다가 나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탐조기」를 쓸 땐 한 번도 울적한 기분에 젖어 들지 않았었는데. 낯선 얼굴을 갖고 내 앞에 나타난 그 「탐조기」가 좋았다. 변방으로 쫓겨나다시피 떠나야 했던 이들의 연약한 목소리들이 섬세한 음악과 배우들의 몸을 만나 발화되고 있었다. 그를 통해 나는 내가 왜 이 극을 쓰기 시작했는지, 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다시 실감했다.

   「탐조기」의 공연화를 지켜보는 동안 나는 희곡을, 연극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에 관해 아는 것이 여전히 협소함에도 그렇게 되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희곡이 극의 실연을 위해 쓰이는 텍스트라는 점이 좋았다. 희곡이 희곡의 형식에서 멈춰야만 했다면, 고정되었더라면, 하여 희곡을 쓰는 나 역시 시 쓰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단독 창작자로서의 자아를 가졌다면 나는 결코 극작을 통해 ‘쓰는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희곡과 시는 모두 완성되지 않은 텍스트, 하나의 가능태이지만 그 빈칸이 성립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일상의 언어들, 지시적 기표를 재료로 시적 언어를 창조함으로써 의미의 부딪힘, 깨짐, 산란(散亂)하는 이미지, 하나의 메시지로 완결되지 않는 리듬을 빚어내는 것이 시의 존재 방식이라면, 희곡의 대사와 지문들은 하나같이 실연의 가능성을 품에 안고 잠들어 있다. 많은 경우, 희곡의 의미는 단지 텍스트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희곡 텍스트와 무대화 가능성 사이의 빈틈을, 희곡의 문학적 발화와 (아직 실연되지 않은/실연될) 실제의 발화 사이의 낙차를 떠돌고 있는 부유체에 가깝다. 바로 그 점이, 비슷하지만 다른 두 문학 장르의 비완결성이 나는 사랑스러웠다. 

   늦은 봄 「탐조기」 공연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시를 쓸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묻는다면 여전히 대답할 수 없었음에도 그랬다. 나는 그때 내가 품었던 것이 단순한 낙관이라기보다는, 내가 사랑하게 된 두 문학 장르와 닮아 있는, 쉽사리 규정할 수 없는 유동적인 가능태에 가까웠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순간의 인상이되, 손에 잡힐 듯 선연한 예감이었다.   


                   

   나의 첫 장막 희곡 「리암 빌」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 <봄 작가 겨울 무대>에 참여하면서 쓰게 된 것이다. 1월에 의뢰받고 5월 말 초고를 제출했으며, 8월에 같은 해 등단한 동료 작가들과 함께 낭독 공연을 올렸다. 9월경 출판사에 수정 원고를 넘겨 11월쯤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으니, 거의 한 해를 통으로 그 작품과 함께한 셈이다. 이 때문에 그 작품에 내가 갖는 애정도는 동 시기에 출판한 시집 『잉걸 설탕』이나, 공연 이후 쓰게 된 세 번째 시집 원고에 갖는 것과 정도가 거의 같다. 

   「리암 빌」 서사의 골자는 학부 때 쓴 중편소설에서 가져온 것인데, 원래부터 그 중편을 확장해 장편소설을 쓸 용의가 있었던 내게 그 작업은 단순한 개작 이상으로, 요컨대 어떤 한 시절 끝마치지 못했던 문학적 여정을 완수해 내는 일로서 의미 있었다.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살아남아 자신들의 방공호를 이룬 두 남자와 한 침입자에 관한 이야기’로 요약되는 「리암 빌」은, 처음에는 ‘증언’이라는 특정 형식이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극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200매 분량을 썼을 즈음, 기획 초기부터 도움을 주었던 드라마터그 선생님의 조언을 바탕으로 아이디어를 전면 수정했다(썼던 원고들은 몇 개의 문장을 제외하고 전부 폐기했다).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입을 빌려 너무 작위적으로, 또 설명적으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장막극을 쓰면서 나는 비로소 인물들의 전사를 비롯해, 극을 이루고 있는 여러 설정들을 어떻게 읽는 이/보는 이들에게 ‘연극적으로’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희곡에서 어디까지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떤 것은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지 파악해야 했다. 무엇을 발설하고 무엇에 침묵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리암 빌」은 대폭 수정되었다. 본래 2막에 해당하는 내용을 1막으로 옮겼으며, 인물들의 ‘증언’이 반복되는 형식을 버리고 서스펜스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극의 방향을 틀었다.     

   이 과정은 초고를 완성한 이후, 연출과 배우들을 만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그들의 조언과 아이디어, 질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예컨대 나는 리암과 빌, 두 인물이 서로를 바라보며 애정 어린 대화를 길게 나누는 장면을 보여 주는 것보다, “나는 믿어.”라는 대사 하나로 그들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연극적으로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인물의 전사는 그 전부를 제시하기보다 드러내지 않는 쪽이─그러는 한편 그의 대사, 눈빛과 몸짓을 포함한 비언어적 표현 등으로 암시하는 쪽이 낫다는 것을 상기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여전히 쓰는 이로서의 권위, 서사를 틀어쥔 손의 아귀힘에 갇혀서, 관객의 상상력이 연극에 참여할 여지를 줄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백의 모호함이 주는 즐거움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원래 쓰던 장르─시부터가 여백의 문학, 비약의 난장(亂場)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리암 빌」 낭독 공연 준비를 진행하던 중에 다시 시가 써지기 시작했던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거라고 믿는다. 희곡의 가능성을 배우고 동시에 그 가능성이 시와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금 깨닫는 그 일련의 과정 끝에, 나의 시는 또다시 작동한 것이다. 그때 나는 단지 희곡을 쓰는 데에 그치지 않고, 희곡의 형식이 어떻게 시에 접목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과거의 나는 대사와 지문으로 대표되는 희곡의 가시적인 형식만을 빌려 와 시를 썼다. 그 이상을 희구하고 싶었다. 더욱 본질적인 희곡의 성질, 혹은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시에 옮겨 오고 싶었고 동시에 그 지난한 작업에 실패하고 싶었다(나는 예정된 실패에 뛰어드는 그 모든 작업, 삶의 궤적을 모방하는 그 움직임들이 문학적 운동에 다름 아님을 열렬히 믿는다). 

   그 뒤로 쓰인 나의 시란, 수많은 ‘나’들을 무대 위에 올리는 작업과 다르지 않았다. 희곡-텍스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는 가능의 공간, 무대 위에서 발화하고 변태하는 ‘나’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어쩌면 내가 이전에 천착해 왔던 시적 사유로부터 한 발짝 나아갔을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마침내 세 번째 시집의 초고를 다 썼을 무렵, 나는 24년 가을쯤,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면서 썼던 학업 계획서의 문장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중학교에 다닐 때 장래 희망 설문지에 내내 ‘시인’이라고 적었다가 삼 학년 때쯤 ‘문학가’라고 고쳐 썼던 것을 기억합니다. 시인이 되는 것을 넘어 소설이나 희곡 등을 함께 쓰고 공부하며, 종국에는 여러 장르를 자유롭게 횡단하는 작품을 만드는 이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욕심은 지금도 저를 추동합니다. 다른 장르의 문학을 쓰게 만들고, 여러 장르와 형식을 경유하는 복합적 텍스트의 성립 가능성에 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결국 그 욕망이 나를 움직이고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내 욕망의 충실한 개로서 한 해 동안 이 낯선 길들을 달려왔어.  

   극은 욕망의 지도다. 인물들은 욕망에 추동되어 행동하며, 그 행동이 관계를 낳고 사건을 발생시킨다. 플롯의 씨실과 날실을, 수많은 갈림길과 지형을 창조한다. 어떤 욕망은 완전한 암전 이후에도 지속되고, 어떤 욕망은 잠시간의 ‘사이’에도 스르륵 휘발되어 버린다. 세 번째 시집 초고를 다 쓰고 내 몸 안에 암전을 들였던 그 순간, 나는 사라지지 않는 욕망을 느꼈다. 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 밖으로 하나둘 퇴장하는 데도 그치지 않는 박수 소리처럼, 경쾌한 타격음이 내 뼈 안쪽을 둥둥 찧었다. 쓰는 것이 기뻐. 쓸 수 있어서 기쁘다.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이 질긴 함묵의 천을 벗길 수 있어.    



   이 글을 쓰고 있는 12월 중순으로 돌아오자면, 

   「탐조기」와 「리암 빌」, 두 개의 공연을 마무리한 일이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지금 나는 세 번째 시집의 구성을 한창 수정하는 중이다. 또 장막극을 하나 쓰는 중인데, 여러 지원을 받았던 전작과 달리 오롯이 혼자 써내야 하는 작업인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희곡은 여전히 내게 아주 넓고 생경한 황무지처럼 느껴진다. 자연을 손쉽게 쥐거나 휘두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협소한 인간주의적 관점일 따름일 터다. 나는 아주 냉정한 태도로 내 한계를 판단하며, 또 내 발아래에 파묻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그 땅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다만 나는 내가 궁금해했으면 좋겠다. 그 땅을, 그 땅의 안팎을, 나아가 그 땅 너머와 그 땅 아닌 곳까지, 영원히 궁금해했으면. 내 안쪽의 안쪽까지 들여다보고 싶은 이 호기심의 성화가 좀처럼 꺼지지 않았으면.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소망은 그뿐이다. 다른 것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1) 마츠오 바쇼, 『바쇼의 하이쿠』, 유옥희 역, 민음사, 2020.



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1월호에서는 2026년 새해를 맞아 시인과 소설가 등 총 4인의 작가가 참여한 신년 에세이를 소개합니다.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4인 4색의 소회가 ‘반성, 소망, 시작’이라는 주제로 펼쳐집니다. 네 명의 작가가 연말연시에 펼쳐놓는 소회와 바람을 지켜보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해 보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마련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기획은 <문장웹진>이 독자분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이자 새해 응원입니다.

추천 콘텐츠

『소심록(素心錄)』, 그 마음의 울림과 여운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소심록(素心錄)』, 그 마음의 울림과 여운 정혜경 연주홍빛 표지 배경에 민들레 씨앗이 날아다니고 있다. 표지 왼쪽에는 한자 세로쓰기로 素心錄(소심록) 柳達永(류달영) 著(저)라고 저자가 직접 쓴 글씨가 굳건하게 새겨져 있다. 성천(星泉) 류달영의 수상록 『素心錄(소심록)』(경문사, 1961)이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우선 성천의 수상록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웠고, 소박하면서도 여운 있는 표지가 마음을 끌었다. 장정을 맡은 월전 장우성은 농민이 ‘생각하는 민들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성천의 뜻을 이렇게 담았다. 1961년 초판본 민들레 씨앗 하나가 이제사 마음터에 내려앉았다. 저자 성천 류달영(1911~2004)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농촌 계몽의 최용신 소전』을 저술해서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양정고보 스승이었던 김교신은 최용신을 만나 보았던 성천에게 이 책을 쓰도록 권유했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직 중이던 성천은 제자들에게 최용신 전기를 읽히고 싶었다. 일본 경찰 검열을 의식하며 어려움 속에 완성한 최용신 전기는 초판 1천 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품절되었을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에 민족 사랑과 계몽 운동의 불씨를 심어 준 책이었다. 그 시절부터 성천의 글은 독자를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되어 6·25전쟁과 4·19혁명 후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발표했던 성천의 글이 했던 역할을 『소심록』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소심록』은 ‘평소의 마음을 기록한 책’이란 뜻으로 근래에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모아 내었다는 겸손한 제목이다. 성천은 이 글모음이 자신에게만이라도 사람다운 사람을 위하여 훗날까지 격려하는 힘을 가질 것으로 믿었다. 그 ‘격려하는 힘’은 충분히 전해져 강렬한 울림으로 왔다. 가로 12.5cm 세로 19cm의 이 아담한 책 405쪽에 51편의 글이 빼곡히 담겨 있다. 『소심록』의 글들은 1959년 3월부터 1961년 2월까지 이 년 동안 《사상계》, 《새벽》, 《사조》, 《신태양》, 《식량과 농업》, 《여원》 그 밖의 여러 잡지와 《조선일보》, 《대학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에 발표한 것이다. 이 책은 1961년 5월에 출간되었으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지 일주기가 되는 시점이었다. 마지막 장 ‘사월혁명’의 다섯 편은 혁명 때 쓰러진 꽃다운 젊음들과 같은 행진 속에서, 거친 호흡을 함께 하면서 쓴 글들이었다. 성천은 4·19혁명은 학생들의 피로 성공했으니, 그 정의로운 피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깊은 존경으로 명복을 빌었다. 성천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특별했던 점은 나라의 현실에 대해 고뇌하면서 비전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현실에서의 타개책까지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성천은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 사토

  • 관리자
  • 2026-02-01
거대한 사랑의 기록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거대한 사랑의 기록 - 김명순 창작집 『생명의 과실』 박소란 사진1. 『생명의 과실』 (한성도서주식회사, 1925) 표지 지난 2025년은 『생명의 과실』(한성도서주식회사, 1925)이 출간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생명의 과실』은 김명순(金明淳, 1896~1951 추정)이 쓴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창작집이다. 국내 서지 기록에 등록된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 문학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명의 과실』도 김명순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때문에 100주년은 터무니없이 고요했다. 별다른 의식이나 언급 없이 우리 문학장은 지난 한 해를 지나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전 김명순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난과 핍박을 떠올리게 된다. 혹여 김명순이라는 선구적 예술가를 아직까지도 과거 그늘진 그 자리에 세워 둔 것은 아닐까, 못내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조금만 검색을 해 봐도 대략의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김명순은 쉽게 소거될 수 없는 이름이다. 1917년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문예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친 한국 문단 최초의 여성 작가다. 1920, 30년대 누구보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친 김명순은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하는 등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피아노를 잘 치고 독일어로 곡을 만들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신문기자, 영화배우로도 활동할 만큼 다재다능했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첩'이라는 이유로,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자유연애’를 주창한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을 받았다. ‘부정한 혈액’ ‘문란한 여자’ 등 모욕적인 꼬리표가 일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공부와 집필에 힘썼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힘겨움이 잇달았고, 결국 1951년경 일본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명순은 생전 시, 소설, 수필, 희곡(각본) 등을 한데 묶은 두 권의 창작집을 냈다.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회동서관, 1929 추정)이 그것이다. (세 번째 창작집을 준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과적으로 불발되었으며, 때문에 창작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도 상당하다.) 이 중 『생명의 과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으로 그 의미가 각별하다. 1 『생명의 과실』에는 등단작 「의심의 소녀」를 포함해 소설 2편, 시 24편, 수필(목차에는 ‘감상(感想)’이라 표기되어 있다) 4편이 수록되었다. 소설 「돌아다볼 때」나 시 「유언」, 「저주」, 「탄실의 초몽」, 「유리관 속에

  • 관리자
  • 2026-02-01
100년 전 멋진 신혼여행의 기억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100년 전 멋진 신혼여행의 기억 -염상섭의 『해바라기』와 나혜석의 결혼 전후 박진영 노처녀 결혼 풍경 신부 나이 스물넷이면 노처녀인 시절이었다. 서른넷의 신랑이라고 첫혼인일 리 없었다. 암만해도 결혼식을 버젓하게 치러야 했다. 둘 다 유명 인사다 보니 결혼 소식이야 진작에 왁자그르르 퍼졌고, 신문에 신랑 신부 사진까지 실렸건만 그래도 아쉬웠다. 내친김에 결혼 기사 아래 청첩장을 내기로 했다. “저희는 목사 김필수 씨의 지도를 받자와 4월 10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옵나이다. 이날에 귀댁 왕림의 광영 주심을 엎드려 빕니다. 경신년(1920) 4월 3일, 김우영 · 나혜석.” 신문에 청첩장을 광고한다고 발칙한 일은 아니다. 대체 뉘 집 아들딸인지 이름이 없는 게 문제다. 1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청첩장은 신랑 신부가 아니라 부모 이름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무릇 결혼이란 당사자들의 일이기에 앞서 엄연히 집안 대사인 까닭이다. 요즘에야 신랑 신부가 나란히 팔짱 끼고 걸어 들어가는 일도 흔하다지만 여태 청첩장 문화는 그대로 아닌가? 이만한 기세라면 혈기 넘치는 청년들이야 박수 칠 법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못마땅하다 못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둘 다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 내로라하는 집안 자식들이었다. 그나마 넷째, 다섯째 자식이라서 불행 중 다행이지만 대체 무슨 남부끄러운 짓이란 말인가? 시아버지는 기어코 폐백을 물리치고 술잔이나 기울이러 나갔다. 하기야 목사 주례에 답사랍시고 감히 신부가 한마디 아니라 일장 연설을 떠든 예식이었으니 결혼식이고 피로연이고 애당초 안 들어선 게 차라리 나은 지경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신랑 신부는 이튿날 식전 댓바람부터 양가에 차례로 들이닥쳐서는 신혼여행 떠난답시고 들썩여 놓고는 훌쩍 기차를 탔다. 신부는 두 주일쯤 예정이라고만 무지르고는 어디로 가는지 신랑에게도 도통 알려 주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잡아끌다시피 했다. 이쯤 되고 보면 아무래도 웬만한 신혼여행이 될 리 만무했다. 신랑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의 변호사 김우영, 신부는 진명여학교 최우등 졸업생이자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의 화가 나혜석이다. 사진1. 나혜석 결혼사진 (1920) 출처: 수원시립미술관 남도 신혼여행 사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전에서 잠시 여관에 들렀다가 호남선으로 갈아탄 신혼부부는 한밤중에 목포에 도착했다. 열 시간 넘게 걸린 곤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인력거 잡아타고 곧장 여관에 들어서서는 하녀 이름부터 대는 신부가 영 수상쩍다. 초행길이 아니었던 셈이다. 신부는 3년 전 그 여관 2층에서의 하룻밤을 홀로 추억했고, 영문 모르는 신랑은 얼추 짐작이 나섰지만 섣불리 입을 열 계제가 아니었다. 아직 신혼 둘째 날 밤이었으니. 부산 유곽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하녀와의 사연인즉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신부는 3년 전 도쿄에서 다니던 학교를 빼먹고 홀로 바

  • 관리자
  • 2026-02-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