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먹튀 시대에서 예술의 쓰임에 관하여
- 작성일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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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대먹튀 시대에서 예술의 쓰임에 관하여
오웅진
벨라 타르가 세상을 떠났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번역 신간이 집에 도착한 직후 그의 부고 소식을 들어 공교롭다는 생각을 했다. 소식을 듣고 멍청하니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벨라 타르의 1994년도 영화 〈사탄탱고〉의 한 주인공 이리미아스 역할을 했던 배우(Víg Mihály)가 동시에 이 영화의 음악 감독이었다는. (실은 주인공 같은 건 없다, 감독에 따르면 자신의 영화에서 굳이 주인공이라면 ‘시간’ 정도)1) 작품에서 그가 분(扮)한 역할을 설명하자면, 아니 그를 쉬이 욕할 수 있도록 거칠게 요약하자면 ‘곗돈을 들고 튄 계주’쯤 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죽는다. 아이의 죽음, 그로 인한 공통의 슬픔을 바탕으로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집 가장 깊숙한 곳에 박아 두었던 돈을 모으게 되는데, 계주는 그 돈을 들고 튐으로써 스스로를 사탄과 편히 겹쳐 보게 돕는다. 소설은 카프카의 짧은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2)
앞서 언급한 떠난 계주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도, 작품 속 마을 사람들 삶의 대부분은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음악이란 게, 혹은 춤이라는 게 실은 곗돈을 들고 튄 저 악마 같은 계주쯤 되는 것은 아닌지 말해 보고자 한다. 소설 『사탄탱고』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85년, 그의 최근작 『헤르슈트 07769』가 쓰인 것은 2021년이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그가 좀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의 첫 장을 펼쳐보고 안도했다. 짧은 문장 한 줄이 나를 반겼다.
“희망은 실수다.”3)
그가 여전히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 그를 믿게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다수가 음악인인데, 이는 독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예컨대 누군가 주말마다 부장님에 의해 호출되어 산을 탄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어쨌든 그가 산에 성실히 오르고 있으니 산악인이라 충분히 불릴 자격이 있다고 믿는 이라면, 이 소설 속 다수의 인물을 또한 능히 음악인이라 불러도 좋다. 소설에선 부장님 대신 ‘보스’라는 이름으로 음악인들의 리더를 달리 부른다. 보스는 바흐에 관하여 얘기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단원들 역시 보스가 바흐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건 그들이 바흐에 관해 듣길 좋아한다는 말과는 사뭇 다르다.
“보스는 그들이 바흐에 대한 보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리허설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카나 심포니는 아마추어 음악가들로 자기 악기에 어느 정도 능숙하게 다루긴 해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이 요구하는 수준까지 아니었고, 그들은 뮤지컬 《헤어(Hair)》에 나오는 〈태양이 비춰주길(Let the Sunshine In)〉이나, 비틀스 노래,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드래곤스톤〉 혹은 〈내 피의 피〉 같은 늘 사랑받는 멜로디의 연주에 좀 더 적합한 악단이었고 그럴 목적이지만, 에둘러 표현하자면, 바흐는 그들에게 어려웠고 그래서 보스는 조바심치고 화를 냈다,”4)
보스는 독일 튀링겐 주 내 한 지역인 ‘카나’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단장이자 지휘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원 중 한 명인 헤르슈트 플로리안이 막귀라는 이유로, 토요일 오전 11시마다 “음악적 청감 훈련”에 참석하게 할 정도의 악덕 사장이었지만, 한편으로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해할 수도 있는 게 모든 음악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장 아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독일 튀링겐 주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런 바흐가 자랑스러운 독일의 음악가가 된 배경에 그의 외조부가 있다. 본디 헝가리 출신이었던 바이트 바흐(Veit Bach)가 독일로 넘어와 제분소를 차렸고, 그 뒤로 바흐 가문은 독일에 자리를 잡아 국가의 자랑스러운 음악 명가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러니 이 제분소는 과장 보태지 않고도 충분히 독일 음악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에서 몹쓸 누군가, 이 위대한 제분소에 늑대 문양의 낙서를 함으로써 사건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여하간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사실은 빵 나고 음악 났지, 음악 나고 빵 난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과거에나 그랬다는 것이지 지금, 여기는 또 다르다. 진짜 현실엔 더 이상 빵은 없고 종소리만 나는 괴랄한 제분소(mill)가 있을 뿐이다.
“후터키는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소리가 들려올 가까운 데라곤 남서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호흐마이스 지대의 외진 소성당 하나뿐인데, 거기엔 종이 없는데다 종탑은 전쟁 중에 무너졌으며, 멀리 있는 도시의 소리가 여기까지 닿을 리도 없었다. 게다가 어쩐지 의기양양하게 울리는 종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아주 가까운 곳으로부터(아마도 방앗간에서...)(“It’s as if they were coming from the mill…”)”5)
1. 현재들끼리 추하게 엉겨 붙은 채 끌어안고는, 탱고
우리에겐 아주 오래되고 못된 버릇 하나가 있다. 파악 완료된 현재는 서둘러 과거로 치부해 버리고, 그럴싸해 보이지만 아직 점령되지 않은 현재는 미래로 미뤄 버리는 버릇이 그것이다. 그렇게 현재는 양쪽으로 대부분을 뜯기고 아주 앙상한 형태로서, 우두커니 자리에 남아 목격된다. 그것은 마치 지옥처럼 생겼고 크러스너호르커이의 픽션은 그 앙상한 ‘현재-지옥’의 비교적 높은 함량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그리고 춤이란 이 현재의 자리에서 미래를 향해 손발을 휘저어 그러잡아 보는 행위이다. 뻗었던 사지는 이내 접혀 들어온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랑시에르가 벨라 타르에 관해 쓴 책 가운데 한 구절이 떠오른다. “The devil is the movement that turns in circles.(악마는 원을 그리며 도는 움직임이다)”6)
소설 『사탄탱고』는 실제 그 구성이 탱고의 동작을 따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부, 12장‘(1-2-3-4-5-6, 6-5-4-3-2-1)’이 바로 그것인데 탱고에선 여섯 걸음을 나아가고 돌아오는 이 연습 동작을 ‘살리다Seis Salida’라고 부른다. 여기서 ‘살리다’는 스페인어로 “Exit”, 즉 출구를 의미하는데 정작 이러한 연속 동작 끝에 도달하는 종착지가 출발 지점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로 소설은 종지 무렵의 문장을 첫 문장이 동일하게 따름으로써 아주 구체적으로 탱고를 구사한다. 그러니 소설의 구조만 놓고 보자면 출발지에서 가장 멀리까지 나아가는 것은 6장이다. 6장의 마지막 페이지에선 술에 취한 아코디언 연주자의 연주가 흘러나온다. 언제고 그 페이지를 펼치면 술집 안의 모두가 취해 잠들어 있는 가운데, 그가 홀로 깨어 헝가리의 춤곡 챠르다시(Csárdás)를 연주하고 있다. “곡이 끝났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던 그는 간격을 두지 않고 다시 처음부터 연주하기 시작한” 덕분에 그 아코디언 연주자만이 유일하게 깨어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를 만난다. 그리고 그것은 모르긴 몰라도 가까이, 고작 200미터 정도 떨어진 폐허에서 쥐약을 입에 털어 넣고 천사를 기다리고 있던 소녀의 레퀴엠이었으리라.
그리고 벨라 타르의 영화에서는 렌즈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가려져 있던 문을 비춘다. 앞으로 곗돈을 들고 튈 이리마아시와 그의 무리가 열고 들어서는 그 문이다. 문은 스스로 미동도 없지만 장면의 한가운데 놓여 주인공이 된다. 그것이 영화의 재능이다. 그렇게 카메라가 문을 응시하는 가운데 우측으로 무빙하면서 연주자의 등 뒤를 천천히 지난다. 연주자의 등에 렌즈가 완전히 덮여 화면은 잠시 까맣게 되지만 이내 벗어나 다시 우측으로 가던 길을 간다. 연주되는 곡의 리듬처럼, 마치 저 스스로가 시간 그 자체인 양 미끄러지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미끄러진다. 좌측으로 연주자의 팔, 우측으로는 거미줄 성긴 술병과 컵, 그 사이로 ‘문’이 정확히 도착할 때까지.
소녀 에슈티케에겐 조금의 정신 박약이 있던 것 같다. 하여 세계에 있는 몇몇 단어들을 파악하기 힘들었는데, 희망이나 미래 혹은 관심과 같이 비교적 추상적인 단어가 그랬다. 단순히 그녀가 삶에서 그런 종류의 단어를 담뿍 체험해 본 적 없어서만은 아니다. 예컨대 돈은 알았으니까. 정확히는 돈이 없을 때 삶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통해 그것의 속성을 알았다. 다만 조금만 더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해 오빠의 꾐에 넘어간다. 땅을 파고 거기 돈을 심으면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돈이 열린다는 오빠의 말을 에슈티케는 믿는다. 그래서 2포린트짜리 동전을 넣고 기다린다. 돈이 열릴 때를, 아니 “멋진 방의 커다란 침대에서 솜털 이불을 덮고 잠들” 그날을.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빠 서니는 현재를 꼭 닮아서, 땅에 동전을 심고 에슈티케가 돌아서자마자 그것을 파내어 제 주머니에 넣는다. 그 사실을 알게 되고 흔들리는 에슈티케가 곧장 주점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다, 그곳에서 아이는 본다. 현재들끼리 추하게 엉겨 붙은 채 서로를 끌어안고 탱고를 추고 있는 그 모습을. 소녀는 다시 200m 거리에 떨어진 다 부서져 폐허가 되어 버린 성을 향해 걷는다. 그러고는 옆에 죽어버린 고양이를 뉘고 자신도 나란히 눕는다. 그리고 죽는다.
2. 생에서 진짜는 바흐도 예술도 아닌, 공허함뿐.
『헤르쉬트 07769』의 헤르쉬트 플로리안 역시 한 성에 도착한다. 폐허였던 에슈티케의 성과 달리 이 성에는 팔백 년 역사의 현재 진행형 합창단이 있을 정도로 압도적 권위를 자랑했다. 에슈티케와 플로리안은 대부분이 닮았고 약간 달랐다. 가령 소녀는 고양이와의 싸움에서도 겨우 이길 정도의 힘을 지녔지만, 우둔한 청년은 마음만 먹으면 체력 단련실의 온갖 쇳덩이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셌다. 그의 힘은 늑대의 악력이라고 딱 오해받기 쉬운 수준이었다.
“바흐의 음악을 원래 장소에 가서 라이브로 듣는다면 바흐가 어떤 소리가 나는지 듣고 싶었고, 그래서 벌어진 일이었다, 플로리안은 뒤쪽에 자리를 하나 골랐고, 그는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처음 조율 음이 들리고, 프렌치 호른과 트럼펫, 트롬본이 울려 퍼지고, 청중이 점점 조용해지자, 그는 교회 좌석에 약간 기대어 앉아, 앞에 있는 교회 좌석의 맨 아래 틈새에 발을 넣고, 무릎 위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는 여기에 있는 것이 너무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성 토마스 교회 안에 앉아 있고, 바흐가 실제로' 어떤지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니, 그런 탓으로 그래서 얼마 후에야 누군가가 그의 옆구리를 쿡쿡 건드리고 신도 좌석 앞자리 틈새에 발을 넣지 말라고, 적절한 행동이 아니다, 가리키는 것을 알아챘다, 플로리안은 재빨리 발을 뒤로 잡아당기고 몸 아래로 끌어당겨 모은 뒤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고, 아무도 그를 교회로 데려간 적이 없었다, 시설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보스가 데려갈 리도 만무했다, 플로리안은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툭 건드려 눈치를 받은 후로는 그는 똑바로 앉아 다리를 몸 아래로 잔뜩 당기고 있는 일에만 집중하며 다시 누가 툭 건드리나 기다렸다, 그는 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성가대의 노래가 울려 퍼졌지만 몸을 잔뜩 긴장하고서 그가 뭔가 부적절한 일을 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이 시점에는 이런저런 행동을 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주의를 주면서 쿡 찌르는 손길만 기다리며 대비했다, 아무도 다시 쿡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그는 음악에 집중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음악이 끝나고 쏟아져 나오는 군중들에 휩쓸려 그 역시 교회를 나섰을 때, 그는 전례 없는 피로감을 느꼈고, 모든 팔다리가 아프고 모든 근육이 쑤셨으며, 광장을 마주한 엄청난 교회 대문 앞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토마스 교회를 떠나, 작은 골목길로 얼른 종종걸음으로 숨어 들어가 아무도 쿡쿡 찌를 사람 없는 데서 혼자 앉아 있고 싶었지만, 주변은 카페와 맥도날드, 레스토랑, 술집, 요한 제바스티안에 관한 기념비, 박물관으로 가득해 어디에도 피난처를 찾을 수 없었다.”7)
사실 플로리안은 에슈티케만큼이나 어리숙하다. ‘시설’ 출신에다가, 읽지도 않을 메르켈 총리에게 손 편지나 써 부치고 있는 그에게 삶을 친절히 알려 주는 이는 없었다. 그런 그가 교회에서 무엇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턱이 있겠나. 위 내용에 따르면 그가 바흐의 신전으로부터 완전히 튕겨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설을 완독해 보면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소설을 한 편으론 ‘막귀’ 플로리안이 점점 바흐를 제 안으로 체화해 가는 내용으로서 파악할 수도 있다. 그저 물질과 반물질에 관한 탐구만 좇았던 그가 막귀 탈출을 위해 매주 주말 오전 청음 시간을 갖다가, 저 스스로 주변의 대도시인 라히프치히에 가서 바흐의 ‘원래 장소’에 가서 들어 보고, 나중에는 어떤 주변의 도움 없이도 귀에서 바흐의 칸타타가 절로 들려오는 단계에 이른다. 문제는 그 곡이 그의 귀에 “너무 크게 들리고” 내내 멈추지 않는 지경까지 도달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 곡, 〈Tilge, Höchster, meine Sünden(높으신 분이여, 나의 죄를 사하소서), BWV 1083〉은 플로리안의 레퀴엠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의 힘은 늑대의 악력이라고 딱 오해받기 쉬운 수준이었다. 이게 그를 늑대라 불러도 좋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우리 스스로가 거듭 주지해야 한다. 그게 이 소설이 우리에게, 그리고 미국의 한 수장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플로리안은 오히려 바흐의 성전에 늑대 문양의 멋대로 칠해진 낙서를 지우는 청소 용역 업체의 직원이었다. 자, 한 청소 용역 업체 직원의 귀에서 바흐의 칸타타 레퍼토리 하나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 것이 문제인가. 문제라면 대체 어떤 지점에서? 그 문제에 대해 온전히 지적하려면 우선 삶 곳곳에서 들려온 음악과 목격되는 춤, 그것들이 무엇을 증언하는지에 대해 먼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랑시에르는 벨라 타르에 관해 언급한 또 다른 글에서 언제나 만착(瞞着)하려 드는 스토리의 속성에 대해 역설한다.8) 그것은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정말로 기다리기만 하는 이들의 삶에 누군가 덜컥 도착이라도 한다면, 정말 돈나무에서 돈이 열리기라도 해 버린다면, 코뮤니스트들이 옳았다는 게 증명이라도 되어버린다면, 이때 가장 먼저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은 은행의 벽도 그 어떤 공관의 벽도 아닌, 온갖 픽션 기반의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예술의 전당 내벽일 테다. 누구나 삶에서 예술만이 진짜라고 크게 외치고 싶은 시기를 지나게 된다. 애석하게도 생에서 진짜는 공허함뿐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근사한 예술을 할 수 있을까요? 또는 볼 수 있을까요?”라고 외치고 다니는 이는 실상 “왜 우린 아직 덜 굶주린 거죠? 덜 공허한 것이죠?”라고 세계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다니는 비관론자에 불과하다. 돈이 가짜라고 해서, 정치인들의 공약이 거짓이라고 해서 허겁지겁 예술을 무턱대고 ‘진짜’의 좌대에 올려, 위선자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에겐 그럴 자격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럴 욕망조차도 없다.
희망은 실수와 같고, 생에서 진짜는 공허함뿐이며 현재와 지옥이 동의어라면 그 속에서 탱고의 리듬과 바흐의 칸타타, 예술은 대체 어떤 쓸모를 가질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1940년 개봉한 영화의 한 장면 속에 작은 힌트가 있다. 배경은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한 이발소. 작은 라디오에서 “디스 이즈 해피 아워!”라는 짧은 소개 멘트가 지나고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Hungarian Dances, WoO 1: No. 5 in G Minor)이다. 브람스 역시 바흐와 마찬가지로 ‘보스’가 자랑해 마지않는 독일의 훌륭한 음악가이다.
3. 진창만이 열병식의 칼각을 막을 수 있다면
“우린 긴 춤을 추고 있어”라는 근사한 첫 문장과 함께 세계로의 출항을 시작한 한 밴드를 알고 있다. 이 마법의 문장은 밴드의 첫 앨범명 만큼이나 충분히 “보편적인” 것이라 실은 우리 모두의 첫 문장이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실제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약간의 춤을 춘다. 문고리를 잡고 안으로 들어설 때면 왈츠를, 발 빠짐에 주의해야 하는 다소 터프한 지하철 플랫폼에서는 열차 안으로 들어설 때 일제히 엷은 폴로네이즈를 추기 마련이다. 이처럼 몇 번의 군무를 지나 저마다의 의자에 도착하면 다음부턴 독무 타임이다. 앞선 이발사 찰리의 헝가리안 댄스도 마찬가지다. 이발사의 모습을 한 집시 무용수가 무곡(舞曲)에 맞춰 춤을 추듯, 우린 긴 춤을 추고 있다. 참고로 여기서 춤이란 후기 자본주의 속에서 한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각개의 신체적 분투 또는 발악을 넘어선다. 그저 중력에 저항하려는 태도만으로 춤의 속성 전부를 읽어낼 수는 없다.
‘춤이란 긴 생에 대한 짧은 미니어처!’ 정도의 투박한 가설을 하나 설정한 채 니체의 글로 들어간다. 실제로 현대무용의 창시자로 알려진 던컨(Isadora Duncan)이 그랬던가, 니체야말로 정신으로 추는 “춤의 창시자”라고. 그는 신을 죽었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신이 춤출 줄 아는 존재라면 믿겠노라고 말한 적 있다. 그 초인은 누군가 제 길을 잘 걷고 있는지 보려면 그의 발걸음을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거의 다 도달한 이들은 아예 “춤danceth”을 춘다고9). 이때 춤이란 대체 뭔가. 자리에서 스스로를 흩뿌리며 여기 뭐가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일까. 바디우에 따르면 (니체가 말하는) 춤은 몸 이전의 몸이다.10) 그렇게 춤이 ‘몸 이전의 몸’이 자리에 도착했음을 선언한다면 사탄의 탱고는 춤 이후의 춤에 해당한다.
그저 무게에 대한 망각이나 비상(飛上)을 소환하기보다는, 지나버림을 일깨우는 그것으로서 춤을 받아들이는 게 트럼프 월드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에게 훨씬 유익할 것이다. 하원하는 다섯 살짜리 아이의 행선지가 맘껏 춤출 수 있는 근처 놀이터나 집이 아닌, 이민단속국(ICE)이 만들어 둔 유치장이라면, 어차피 그따위 세상에서의 춤이라면 비상 같은 유치찬란한 단어는 애초에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다. 니체에 따르면 춤의 반대편엔 독일인이 있다.11) 정확히는 나쁜 독일인, 즉 그 몸이 군대의 행진에 특화되어 있어 단조로운 박자에 맞추어 집체를 곧잘 이루는, 그런 몸말을 구사하는 이들을 뜻한다. 춤은 그에 반하여 가장 수직적인 사유, 자신의 높이를 향하는 사유를 향한다. 그러니 자신의 자오선에 높게 바쳐진 몸인 셈이다. 춤은 일괄적으로 앞을 향해 내딛는 행군에 반하며, 한 신체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서의 사유를 표상한다. 그러므로 춤이란 깨어있는 것이고 각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집요하게 한 번 더 질문할 수 있다. 대체 무엇에 대한 각성인지에 관하여. 이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춤이 실은 위험한 장르라는 걸 알게 되는데 이 신체 예술은 정녕 이름을 잊으라 부추기기 때문이다. 춤을 통해 닿는 사유란, 이름을 가지기 이전, 즉 이름이라는 피난처가 없는 사건으로서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복귀한다. 춤이라는 이 위험한 장르에 관한 설명의 출발지에 한 청소 용역 업체 직원이 있었다. 그의 귀에서 바흐의 칸타타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 것이 문제인지를 가늠하는 과정에서 이 모든 논의가 나왔다. 무사히 복귀하기 위해 과감한 설정을 하나 더해본다. 세상 모든 음악이 실은 춤곡일지도 모른다는. 이것은 얼핏 가능한 가설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 많은 음악이 춤을 위해 탄생했거나 민족의 춤곡에서 온 것이다. 헝가리 무곡인 차르다시뿐만 아니라 헝가리 가까운 나라들의 랜틀러(Ländler), 폴로네이즈, 트레파크(Trepak), 그리고 왈츠에, 탱고까지도! 다만 그렇다면 앞서 등장한 장송곡 같은 음악에는 그 누가 어떤 춤을 출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정도가 남는데, 방법은 하나뿐이다. 생을 춤 아래 두는 것이다. 춤이란 것을 생의 중간에 거쳐 가는 레저 활동 정도로 여기는 게 아닌, 아예 몸짓 아래에 사람의 사지를 둬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몰락 직전의 축축한 헝가리 한 국영 농장은 어떤 ‘춤’을 위한 무대로 단박에 올라선다. 그 인디밴드의 첫 문장이 옳았다.
모든 언어는 그 안의 위대한 시 속에서 제 역량을 재발견하는 법이랬다.12) 그러라고 시가 세계에 도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의 쓰임이 그러하다. 그리고 밀로시(Czesław Miłosz)는 거대한 고통으로 무장한 생동하는 언어의 파수꾼인, 동유럽이 민족 전체가 노래할 수 있는 시가(詩歌)로 향하는 길을 우리에게 되돌려 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희망이 실수를 통해서만 세계에 도착할 수 있다면, 그 세계에서의 병설 유치원은 어디 위에 세워져야 하는가. 크러스너호르커이에 따르면 그것은 배수가 원활하고 푹신하여 아이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탄성포장재 위가 아니다. 차라리 진창, 조금만 방심하면 희망이 2포린트 동전처럼 움푹 빠져버리는 헝가리의 국영 농장이야말로 그것의 설립 부지로서 적합하다. 농장이야말로 춤의 텃밭이기 때문이다. 질척거려 그 어떤 부대도 열 맞춰 행군하기 부적절하며, 반대로 뒤엉키고 동작은 이내 추해지기 때문이다. 아이가 그곳에서 근력을 기르고 위험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돈을 들고 튀기로 결심한 채 다가오는) 계주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뭣 좀 없냐?’ 하며 우리 주변을 기웃대고 꺼떡거리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예술(가)이 추는 춤의 전형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대부분의 우리는 대략 티켓 값이나 작품값 정도를 우아 떨며 빼앗기겠지만, 진정으로 신도가 된 이들은 티켓 값은 물론이거니와 시간과 공간, 각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근거로 시스템 장부에 치부(置簿)되어 있는 자산 전부를 빼앗긴다. 심지어는 이름까지도. 이 사기꾼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들고 달아난 이들의 이름을 완성한다. 그 이름이 고작 어디를 다녀오는 정도로는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혹은 돌아오기엔 너무 큰 이름이라는 걸 영영 오지 않음으로써 세계에 천명하는 셈이다. 그러니 글은 다시 소설 『사탄탱고』의 첫 문장에 해당하는, 카프카 『성』의 한 줄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
앞서 바흐의 “원래 장소”에 다녀온 플로리안을 상기한다. 마태 수난곡이 처음으로 불린 이 신성한 교회 시설엔 이리마아시와 같이 질 낮은 수준의 사기꾼이 없었다. 서툰 플로리안을 지적할 “누군가”만 가득했으며, 그들은 바흐의 원래 장소에서 프렌치 호른과 트럼펫, 트롬본으로 충분히 조율된 상급 제품으로서의 바흐를 들었다. 그들은 늑대도 사기꾼도 아닌, 교양인이었다. 플로리안은 원래의 장소라고 부르는 곳에 앉아 몸이 잔뜩 구겨지는 경험을 한다. 일종의 ‘제품통’을 겪은 것이다.13) 이곳 성 토마스 교회에선 제분소의 밀 냄새도, 불협화음도 더 이상 일지 않았다. 플로리안은 보스에게 간택되어 청소 용역 업체의 직원이 되기 전, 제빵 기술을 배웠었다. 하마터면 진짜 음악가가 될 수도 있던 셈이다. 만약 라이프치히의 이 신성한 교회 옆자리에 이리마아시와 같은 사기꾼 신도가 앉아 있었다면, 소설 『헤르쉬트 07769』의 결말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의 꾐에 넘어가 이 어수룩한 늑대인간이 우직하게 번 자신의 모든 돈과 편지, 자신의 이름으로 수납된 모든 걸 그에게 넘겼더라면, 그러고는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더라면 적어도 그가 표적의 ‘이름’으로서 대상화되거나, 동굴로 숨어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예술은 오늘날 당신이 당신의 이름 밖에서도 엄존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당신의 이름을 포함해, 당신에게 이정표가 되는 미래적 속성의 모든 걸 쥐고 달아남으로써. 이것이 지리멸렬한 수탈의 시대에서 예술의 대표적 쓰임이다.
4. 흑백 속에서 진정 컬러를 보는 동유럽의 감독처럼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작년 말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벨라 타르 감독을 언급했다. 아직 그가 살아있을 때였다. 소설가는 인간이란 게 모두 죄짓고 허물 가득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연민해야 하는 죄인으로서 그려낸 감독에 경의를 표했다. 덧붙여 영화에서 색을 지워버림으로써 진정 그것을 창조해 낸 것에(To Béla Tarr, who created colours by making them disappear) 대하여 또한 경의를 표했다. 무엇 속에서 음악을 듣는지, 무엇으로부터 컬러를 보는지, 누구로부터 사람을 목격하는지 이 둘은 지난 다섯 차례의 협업을 통해 우리에게 물었다. 자, 모두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앞에서, 외시경을 들여다보라. 거기 렌즈를 시커멓게 가득 채우고 누가 목전에 서 있는지 확인하라. 아니, 볼 것도 없다. 보나 마나 어차피 사기꾼 또는 괘씸한 계주, 또는 예술가 중 하나일 테니까. 소설가와 영화감독, 두 거인의 질문에서 태어나 우리의 현관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온 자들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단단하고 성능 좋은 걸쇠가 아니다.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허허롭게 문을 열어 그들에게 그 모든 걸 털릴 준비를 하는 용기, 최후까지 가장 따뜻한 단어로 우리를 덮어주던 시인으로부터 버림받는 그런 용기, 즉 완전히 부서지는 그런 용기, 가장 낮고 추한 곳에 현재가, 내가 있다고 과감히 고백하는 그런 종류의 용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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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3월호의 기획 콘텐츠 ‘문학, 음악, 장면들’에서는 세 분의 필자가 음악과 문학을 둘러싼 고유한 에세이와 선율 들을 들려드립니다. 한번은 가장 먼 곳에서, 몇 번은 내 안에서 뒤섞이고야 말았던 장면들에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1) https://www.bfi.org.uk/interviews/bela-tarr-satantango-werckmeister-harmonies
2)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조원규 옮김, 알마, 2018, 5쪽.
3)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헤르쉬트07769』, 구소영 옮김, 알마, 2026, 5쪽.
4) 위의 책, 64쪽.
5)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조원규 옮김, 알마, 2018, 13쪽.
6) 자크 랑시에르, 『Bela tarr, the time after』, Univocal Publishing, 2013, 24쪽.
7)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헤르쉬트07769』, 구소영 옮김, 알마, 2026, 249~250쪽.
8) 자크 랑시에르, 『Bela tarr, the time after』, Univocal Publishing, 2013, 63쪽.
9)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2025, 227쪽.
10) 알랭 바디우, 「사유의 은유로서의 춤」, 『비미학』, 장태순 옮김, 이학사, 110쪽.
11) 위의 책, 113쪽.
12) 위의 책, 72쪽.
13) 김민경 해외문학편집자가 유튜브에 나와서 얘기하는 걸 들었다. ‘서민통’, ‘외향통’과 같이 삶에서 겪는 아픔을 ‘○○통’ 온다고 표현하는 유행이 있다고. 그걸 따라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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