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에 바라는 것
- 작성일 20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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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장에 바란다]
〈문장〉에 바라는 것
이계윤
(의정부 신곡중학교 국어교사)
2000년대 초반, 교육과정에 예술교육이 포함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발 빠르게 방학 동안 교사연극연수를 받았다. 연수에 참여한 선생님들과 직접 연극을 만들었다. 대본도 같이 쓰고, 소품도 준비하여 이틀 만에 공연을 올렸다. 연극 공연을 하며 성취감이 느껴져서 뿌듯했다. 개학이 되어 얼른 그 교육과정이 시작되기만을 바랐다. 그 후로 십 년 넘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교육청에서는 예술교육에 대한 지침이나 다른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개인적으로 수업시간을 통해 책을 읽고 읽은 독후감으로 모둠별로 연극의 한 장면으로 표현하는 등의 소소한 작업을 했을 뿐이다. 국어라는 과목에 예술의 옷을 입히려는 작은 노력을 개인적으로 하고 있다.
예술교육은 이 시대 교육의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선행학습으로 이미 교과서 지식을 세 번 이상 배운 아이들에게 무엇이 더 필요할까? 내면에 가지고 있는 것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은 학생들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다. 자신만의 언어를 가진 사람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내가 국어교육에서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시를 배우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시를 ucc로 만들어 보는 작업 등등이 내가 수업시간을 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문장〉에서 나오는 문학집배원 동영상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거기에 나오는 시와 소설의 문장들이 아이들에게 새롭게 다가간다. 〈문장〉 사이트는 아니지만 문학나눔 사이트에 있는 시낭송 축제 동영상 백석의 ‘국수’를 보여준다. 그 영상은 아이들에게 백석의 감성 이상을 전달할 만큼 충분하다. 국어교육이, 문학교육이 교과서를 넘어서야 하는데 그것을 〈문장〉 사이트는 충분히 보조 자료로서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글솜씨가 있는 학생에게 〈글틴〉에 들어가서 솜씨를 뽐내보라고 조언해 주기도 했다. 단지 조금 아쉬운 것은 훌륭한 사이트가 문학에 관심을 갖는 특정 아이들에게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장〉 사이트가 모든 아이들의 문학 놀이터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학이 자연스럽게 놀이로 다가와서 상처 받은 아이들이 치유 받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치의 공포에서 다락방에 숨어 있던 안네가 ‘키티’라고 이름 붙인 일기장에 자기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적어내면서 인류를 위해 살아가겠다는 꿈을 키웠던 것처럼 아이들도 이 공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볍게 ‘나의 일기장’이라는 공간도 있었으면 좋겠다.
‘스마트폰 백일장’, ‘손바닥 백일장’ 이렇게 짧은 글로 아이들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자리도 있었으면 좋겠다. 읽은 책이나 교과서에서 본 좋은 구절이나 문장들을 적어내는 자리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름은 ‘필사 한마당’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겠다.
학교에서는 문학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들도 물론 있지만 작가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예를 들어 김소월의 고리대금일, 김유정의 연인 이야기 등등의 소소한 작가들의 이야기가 잘 설명되어 있는 ‘죽은 작가와의 대화’라는 공간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을 통해 인생을 불태울 수 있는 예술에 대한 사랑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연대기로 정리되지 않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작가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소설과 시들이 잘 낭송되거나 동영상 자료로 만들어져 수업시간에 많이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학생들에게 수업에 쓸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만나기 위해 교사는 인터넷 서핑을 하며,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에도 그냥 보지 않는다. 빈약한 문학 자료를 〈문장〉에서 만날 수 있다면, 물론 다양한 문학 콘텐츠를 담은 여러 사이트가 있지만, 좀 더 재미있고 다양하게 문학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문장’이었으면 좋겠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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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이버문학광장(www.munjang.or.kr)’은 홈페이지 개편 작업이 한창 진행입니다. (2013. 1. 10 오픈 예정) 본 내용은 새 '사이버문학광장'에 대한 다양한 기대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올 12월과 내년 1월 두 달에 걸쳐, 각 분야 다양한 필자의 글이 릴레이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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