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한때
- 작성일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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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다시 읽기]
다 한때
ㅡ 「리 반 클리프」(2013년 1월호 수록)
현재(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라는 소개를 달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뭔가 아직도 어색하고 민망스럽다. 평소 문화생활이랑은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인지라··· 나는 내가 비평을 하고 있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다만 좀 섬뜩한 타입의 독자였을 뿐. 다독하는 독자는 결코 못되고, 그렇지만 한번 꽂힌 것에 대해서는 광적으로 집착하는, 흔히 말하는 전작주의를 앓는 타입. 20대 전반을 방구석에 처박혀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사이버 스토킹했는데, 당시 나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내가 디깅할 수 있는 루트란 루트는 모조리 다 동원해서 작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한다. 그들이 읽는 책과 같은 책을 읽고, 그들과 같은 영화를 보고, 그들과 같은 동선을 따라가 본다(비록 내가 방을 나서는 일은 한 달에 한 번뿐이었지만). 그러고 나서 그 모든 것들을 강박적으로 기록하고 저장한다(다시 쳐다볼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등단을 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비평에 대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찾아 읽게 된 『비평적 의식』에서 소위 주네브 학파의 일원인 조르주 풀레는 다음과 같이 서두를 떼고 있었다. “진정한 비평적 사고의 귀착지라고 할 수 있는 독서 행위는 독자의 의식과 작가의 의식이라는 두 의식의 일치를 전제한다.” 어라, 근데 이거 난데···. 풀레에 따르면, 어쩌면 나는 적어도 의식만큼은 타고난 비평가였던 셈이다. 말하자면 스토커형 비평가.
지금도 내가 비평문을 쓸 때 첫째로 하는 일은 자료 조사다. 보통 비평이란 작품을 ‘잘’ 읽는 게 관건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내 생각엔 그렇지 않다. 나에게 작품은 비평가가 경유할 수 있는 일차적인 경유지에 불과할 뿐, 나는 내가 다루고자 하는 작가의, 말하자면 그의 ‘체취’를 맡아볼 수 있는 자료란 자료는 낱낱이 찾아보며 가능하면 그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이런 글들을 쓰게 되었고 또 지금도 그러고 살고 있는지 그와 같은 입장에서 한번 느껴 보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가끔 왜인지 그와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질 때도 더러 있는데, 심지어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인데 이미 지겨워져 버린 사이도 있다. 마치 못 볼 꼴 다 보고 난 뒤,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다짐하며 헤어진 오래된 친구나 연인처럼. 혹은 또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내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를 더 잘 이해하고 있으며, 나야말로 그에게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당신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내 말이 맞다는 걸 당신도 곧 알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위험한 착각이다. 그리고 문학이라는 이상한 장르가 유독 이런 관계 망상을 잘 유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극히 사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마찬가지로 아주 사적인 목소리처럼 느껴지는 작가의 문체나 내밀한 고백을 읽다 보면 우리는 어떤 전도된 현실 속에서 그 사람의 영혼을 만졌다고 착각하게 되니까. 특히나 자기 일상이랄 게 전혀 없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동화 과정에 부대낄 만한 자의식이랄 게 거의 없기 때문에. 마틴 스콜세지의 1982년 작 〈코미디의 왕〉에는 풀레가 묘사한 비평가상(像)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코미디언 지망생 루퍼트 펍킨은 자기 자신이라고 할 만한 알맹이가 거의 없는 인물이다. 루퍼트는 그가 동일시하는 거물 코미디언 제리 랭포드라는 ‘이상적인 자아’ 안에 자신을 밀어 넣으려 온갖 수단을 다 쓴다. 제리의 말투, 몸짓, 옷차림을 모방하는 둥 풀레가 말하는 ‘자아를 버리고 대상에게 동화되려는 비평 행위’와 루퍼트의 행동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닮은 구석이 있다. 펍킨은 단순한 광팬(fanatic)을 넘어 스스로 숭배하는 대상의 일부가 되었다고 믿고, 제리의 사진으로 도배된 그의 초라한 방안에서 훗날 유명 코미디언이 된 자신이 제리와 어깨를 견주고 있는 장면을 리허설하는데에 열중한다. 현실의 ‘루퍼트 펍킨’이 아닌 망상 속의 그 누군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루퍼트! 이렇게 밤늦게까지 도대체 뭐 하는 거니?”
“엄마! 제발 내 이름 좀 부르지 마요!”
문제는 그가 이 망상을 그저 망상으로 남겨 두지 않고 실현시키려고 할 때 발생한다. 망상이 그저 망상에 불과할 때, 독자는 이 관계가 일방적이라는 사실을 아직은 체감하기가 힘들다. 독자는 작가의 텍스트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투사하지만(“이 작가 나랑 생각이 똑같아!”), 그러나 이 내적인 친근감에는 치명적인 균열이 존재한다. 사실 이는 텍스트가 설계한 친밀성일 뿐, 실제의 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애초에 당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설령 그가 누구를 염두에 쓰더라도, 그건 절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익명의 독자인 당신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관계는 처음부터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였던 셈이다. 루퍼트의 비극 또한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는 이 일방적 관계를 쌍방으로 만들려 한다. 단순히 팬으로 머무는 것에 견디지 못한 루퍼트는 제리의 사생활 속으로 무작정 쳐들어가 기어코 그를 납치하지만, 제리의 입장에서 루퍼트는 그저 한 사람의 섬뜩한 미치광이일 뿐이다. 그리고 이 익명의 팬에게 자의식이 생겨나는 순간도 바로 이때다. 환대는커녕 피로와 곤란과 경멸이 뒤섞인 눈빛을 마주하고서, 자신이 그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는 걸 체감하게 될 때, 공감대가 박살이 나버릴 때, 대체로는 원한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스토커형 비평가는 내가 아니고 싶다는 슬픈 열망에서 탄생하지만, 그가 돌아가야 할 곳은 결국 다시 자기 방안뿐이다. 이 열망은 어쩌면 그 어떤 비평보다도 뜨겁고 절실한 문장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겠으나, 때로는 비평의 객관성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풀레 역시 이와 같은 비평적 의식이 실은 비평가 자신의 상상적 투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풀레가 제안하는 대안은 다음과 같다. 차이로부터 기인하는 거리를 원한이 아닌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풀레는 말한다. “결정적인 인식은 결합만큼이나 이별을 가능케 한다. (···) 이별은 아픔을 느끼는 그릇뿐만이 아니라, 아픔을 생각하는 그릇까지도 한껏 확장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름 없는 작가가 쓴 「리 반 클리프」라는 시를 다루기로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첫째로는 작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데에 지쳤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럼에도 이 시가 내게 소외를 바라보는 조금 다른 방식의 성찰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단서라고는 제목의 리 반 클리프라는 인물뿐, 본문의 시 한 편을 달랑 제외하고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맞수로 유명한 리 반 클리프는 스파게티 웨스턴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전설적인 배우 중 하나다. “총구 조준경 같은 눈빛을 가진 남자”로 불렸던 리 반 클리프는 40년이 넘는 연기 경력 동안 서늘한 카리스마로 수많은 명작을 남겼지만, 한때 인생 최악의 슬럼프를 맞이한다. 그의 나이 서른, 음주 운전으로 인한 심각한 교통사고는 배우 경력을 위태롭게 만든다. 사고로 인한 무릎 부상으로 의사들은 그에게 다시는 말을 탈 수 없을 것이라 말했고, 이 때문에 그는 서부극 연기를 중단해야 했으며, 커리어가 무너져 돈이 궁했다. 건강이 악화하고, 아내와 이혼했으며, 알코올 중독에 빠져 프리랜서 목공으로 이집 저집을 전전하다 마침내 실수로 자신의 오른손 손가락을 절단했을 때, 리 반 클리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전망을 아예 상실했을까, 아니면 강인한 의지로 조용히 인내하며 때를 기다렸을까? 어찌 됐든 그는 곧 인생의 전성기를 다시 한번 맞이한다. 당시 풋내기 감독이었던 세르지오 레오네가 그를 찾아내 〈석양의 건맨〉에 캐스팅한 것이다. 그는 이후 ‘달러 3부작’을 통해 전 세계적인 스타로 재기하는 데 극적으로 성공한다. 〈코미디의 왕〉과 그의 이야기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루퍼트와 달리 용감하고 정직한 리 반 클리프는 순전히 직업적인 정신으로 연기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라는 대로 군말 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연을 탐하는 대신, 이 생에서 자신이 치러야 하는 역할이 악역이라는 것에 만족했다. 그는 서부극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자진해서 이스트우드의 총알 세례를 맞았다. 인생에서 가능한 한 가지 낙관은,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떤 역할극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사막의 열기를 가로지르던 저 말굽 소리처럼, 사랑도 비극도 모두 다 한때이자 옛날 옛적 이야기의 일부인 것처럼.

그를 기억하나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모래바람 속에서 시가를 질겅이며 노려보는 곳에 그는 서있었죠. 하늘로 날아오를 듯 찢어진 눈꼬리에 힘겹게 매달고 있던 매부리코와 날카롭게 다듬어진 콧수염, 장인이 갈아 놓은 듯 날 선 턱은 절제된 검은 슈트와 어울려 어떤 죽음도 깍듯하게 만들었습니다. 선한 악마성이라고 할까요. 악당을 노리는 주인공의 눈이 노련한 사냥꾼의 것이었다면 악당으로 변신한 그의 눈은 종말과 싸우는 야수의 그것이었습니다.
기억하시죠? 이스트우드의 빠른 권총에 쓰러지던 매순간 그가 응시했던 공허를. 쓰러진 악당을 뒤로하고 망토를 휘날리며 지평선의 점으로 사라지는 주인공의 뒷모습이 내게 해피엔딩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은 그가 풍기던 운명의 냄새 때문이었습니다. 이 생에서 치러야하는 역할, 그러나 한 발 물러서 모든 것을 알아버린 이가 도리 없이 감당해야하는 막다른 이성의 비극이 그것입니다. 거기에는 그가 죽여야 했던 이들을 축복하는 냉소와 그를 노리는 총구를 향한 연민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죠.
혹시 기억하십니까? 배우 리 반 클리프의 배후는 오직 허공이라며 메아리치던 총성을, 심장을 후비던 햇볕을, 사막의 가운데로 등 떠밀던 열기를, 세상에 끝이 있다면 마지막 낭떠러지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는 공포와 똑바로 눈 맞추던 그의 화약 냄새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잦아들던 말굽소리를.
(「리 반 클리프」, 작자 미상. 원문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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