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든 유령들
- 작성일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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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다시 읽기]
우리가 만든 유령들
―김종옥 「유령의 집」(2014년 2월호 수록)
최예솔
유령이란 무엇일까? 내가 아는 유령으로는 오페라의 유령 에릭, 꼬마 유령 캐스퍼,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에 등장하는 NPC 깨빈 정도가 있다. 말하자면 아주 대중적인 유령일 것이다. 물론 각자 가진 서사나 특징은 다르지만 이들이 어쩌다 유령이 되었나를 생각하면 일단은 죽어야 한다. 에릭은 사회적으로 죽었고(결국에는 진짜로 죽지만), 캐스퍼는 실제로 죽었으며(잠깐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깨빈은 잘은 모르겠지만 죽었기 때문에 유령이 되었을 것이다(그럼에도 플레이어를 유령이라 부르며 무서워한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이 죽지 않고, 소위 말하는 언데드(undead)로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위에 적은 대중적인 유령처럼 이제 유령은 단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캐릭터로 소비된다. 죽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덧입히고 공포를 떨쳐 내려는 것은 그 주체가 산 사람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과정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임과 동시에 죽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니까. 모르는 채로 맞이하는 일은 두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산 사람의 두려움이 유령을 만들었을까? 그건 오로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죽음은 유령의 선행조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령이 단지 죽음의 다른 얼굴이라는 추측은 너무 단순한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이 유령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할까?
“정말 괜찮아. 우리가 무슨 그런 사이도 아니잖아. 그리고 결국 오빠는 전화했잖아.”
“그랬지.”
“그러니까 괜찮잖아. 오빠가 나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해서 내가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야.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 봐. 내가 이제 오빠 앞에 있잖아.”
김종옥의 「유령의 집」에서 남자는 여자와 함께 간 호텔에서 유령의 존재를 느낀다. 남자는 한동안 여자에게 전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자에게 잘 곳을 제공하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점에서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평범한 연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연락하지 않은(혹은 하지 못한) 시간에 대해 변명한다는 점에서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여자와의 관계가 남들의 시선에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 쓴다는 점에서 동시에 사랑을 배반한다.
아마도 우리는 이 관계 역시 사랑인 동시에 사랑이 아닌, 죽었지만 죽지 않은 유령적 존재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우리가 무슨 그런 사이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남자의 반응은 유령처럼 희미하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에도 당연히 존재하지만, 남자의 부름에 의해서만 실존한다. 남자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상상을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남자에게 여자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남자가 그렇듯이 어딘가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여기 있지.”
“뭐가?”
“유령이.”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그녀의 눈가가 웃음으로 겹겹이 접혔다. 그는 그녀의 그런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이번에는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눈가에도 입을 맞췄다.
“내 유령이 여기 있지.”
“내가 유령이면 오빠도 유령이게.”
“맞아. 그리고 여긴 유령의 집이지.”
어쩌면 진짜 유령이 존재할지도 모르는 호텔 방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유령이라고 부르며 사랑을 나눈다. 물론 「유령의 집」에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는 산 사람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죽은 사람은 남자가 조교로 일하는 대학의 학생뿐이다. 그런데 이 호텔을 부유하는 유령이 과연 그 학생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호텔의 유령은 이 호텔에 찾아온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부터 발생한다. 거래가 오가는 남녀의 관계. 언뜻 연인처럼 보이지만 결코 연인일 수 없는 관계. 이 마땅찮은 관계의 위험성에 골몰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유령은 위험한 유령일까? 쉽사리 정의 내릴 수 없는 이들의 관계에 흰 천을 씌워 놓고 둥둥 떠다니게 만든다고 해서 이것을 공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남자는 여자와 시간을 보내며 많은 기억을 떠올린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마을. 하늘에서 탄피가 쏟아지던 훈련. “죽었다 해도 죽었다는 걸 증명할 수 없”는 마을 사람들과 “자꾸만 뭔가가 무너”지고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들. 여기서 우리는 남자가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남자는 살아 있고, 일단은 살아 있음을 견디는 중이다. 무엇이 무너지는지, 무엇을 견디지 못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살아 있음을.
어떤 죽음이 증명되지 않아서 죽지 않은 것이 된다면, 남자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지 못해서 살지 않은 것이 된다. 그렇다고 불에 탄 마을의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까? 남자는 살지 못할까? 그렇지는 않다. 그 언저리에서 배회하는 유령이 될 뿐이다. 이 유령은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름을 붙여 주지 못하는, 어쩌면 이름 붙이기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이다. 이건 산 사람의 미련이고 후회이며 죄와 벌일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듯 모든 유령도 이토록 거창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유령은 우리가 없는 셈 치고 버려둔 구질구질한 마음에 깃든다.
“무슨 전화야? 뭐래?” 그녀가 물었다.
“아니야.” 그가 대답했다.
“아니야?”
“응. 아니야.”
유령은 부정에서 탄생한다. ‘dead’ 앞에 붙는 ‘un’이 곧 유령이다. 남자는 여자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호텔 직원의 전화에 “그런 건 없”고, “잘못 본” 거라고 말한다. 여자가 없는 사이 남자가 겪은 일이 존재하듯이 남자가 없는 사이 여자가 겪은 일도 존재한다. 다른 남자와 몇 번이고 이 호텔에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함께하는 동안에는, 적어도 남자에게는 남자가 모르는 모든 것들이 “아니”게 된다.
남자는 호텔 직원의 질문을 없던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공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여자와 떡볶이를 먹었던 포장마차 주인의 시선에서, 호텔 직원의 전화에서, 엘리베이터에 포탑처럼 달린 CCTV에서 남자는 공포감을 느낀다. 남자는 여자에게 돈을 주지 않았지만 잘 곳을 준다. 이건 남자가 부정하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공포를 해소하는 열쇠인 동시에 함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들 사이에 오가는 게 돈이 아니라면 괜찮을까? 단지 떡볶이를 먹는 정도라면 괜찮을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순간 남자는 이미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 관계의 유령, 존재의 유령, 과거와 미래로부터 오는 부채의 유령. 이건 단지 남자가 여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이 ‘잘못’이라고 심판하는 유령이 아니다. 유령은 심판하지 않는다. 으스스할 뿐이다.
그는 계속 그대로 서 있었다. 다시 문이 닫혔다. 그는 7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그 방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그곳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소설의 말미에 남자는 죽은 학생의 장례식장에 가려다 말고 다시 호텔방으로 올라간다. 여자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불과 방금전에 장례식장에 함께 가자는 여자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나오는 남자를 맞이할 호텔 직원의 반응을 상상하고는 결국 도망친다. 이 한심스러운 남자의 도피처는 다시 여자와의 호텔 방, 유령의 집이다.
이제 남자는 평생 유령에 쫓길 것이다. 이 남자의 주위를 떠도는 유령에게는 어떤 원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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