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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세계에서 현관 닫기

  • 작성일 2026-05-01

  [문장웹진 다시 읽기]


  우아한 세계에서 현관 닫기

  ― 황인찬「현관을 지나지 않고」(2015년 10월호 수록)


최예솔


  5월의 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지독한 집순이라는 점이다. 내가 집을 사랑함에 있어서 계절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기온이 오르고 꽃이 피고 온갖 가정의 달 행사로 거리가 북적거려도 나는 집에 있는 것이 좋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추우나 더우나 집이 좋다. 집은 언제나 집이고 나는 그 안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느낀다. 바깥이 유독 불안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집에 있을 때, 거실 소파에 누워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바깥의 내가 가짜라는 건 아니지만. 

  바깥의 나는 목이 늘어난 잠옷을 입거나 푹신푹신한 쿠션을 머리와 다리 아래에 각각 두 개씩 끼고 있거나 앞면이 어디든 관계없이 대충 이불을 휘둘러 덮고 있을 수 없다. 몇 시간 동안 누워서 소설만 생각(쓰지 않고!)할 수도 없고 내 베란다의 식물들을 가만 바라보거나 시든 잎을 잘라주면서 혼잣말을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내게 불편한 일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집 밖의 나는 보통 불편한 사람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게 사실이라는 점이…… 가장 불편한 일이다.

  이제까지 내가 집(보다는 나의 집을 향한 사랑)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은 내가 이번에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은 시 역시 집에 대한 시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를 읽는 동안 가만히 집을 떠올리는 것이 좋았고 그게 내 집도 아닌 남의 집임에도 불구하고(심지어 누구의 집인지도 모른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 시가 그렇게 마냥 편안하고 좋고 재미있는 시였느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현관을 지나면, 이 현관을 지나면, 불 꺼진 거실이 보이고, 낡은 소파가 보이고, 그 소파에 누우면 서늘한 기분이 들겠지 식탁이 보이고, 식탁보가 보이고, 빈 의자가 보이고, 의자의 네 발에 씌워 둔 테니스공이 보이고, 꽃무늬 벽이 보이고, 벽에 붙은 두 연인의 오래된 사진이 보이고, 낮은 탁자와 그 위에 놓인 빈 쟁반이 보이고, 낡은 유리장이 보이고, 유리장 안으로 그릇이나 항아리 따위가 보이고, 항아리의 흐린 무늬가 보이고, 유리장은 닫혀 있고, 닫혀 있는 많은 문들이 보이고, 불은 꺼져 있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너는 언제까지나 물을 틀어 두고, 그밖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현관을 지나면, 이 현관을 지나면, 물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죽은 사람의 혼령을 마주하는 일이 자꾸 계속되겠지 현관을 지나면 그런 일이 벌어지겠지


그러니 앞으로는 이 집을 나가지 말자


―「현관을 지나지 않고」 전문



「현관을 지나지 않고」에서 현관을 지나면 보이는(혹은 보이리라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화자의 상상을 따라간다. 화자가 그려보는 집 안의 풍경은 그다지 낯설지 않고 어디선가 한 번쯤 마주친 집 안의 풍경이라고 해도, 혹은 내가 살았던 어느 집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화자의 상상을 따라 “꽃무늬 벽이 보이고, 벽에 붙은 두 연인의 오래된 사진이 보이”는 집을 둘러보고 있으면 나는 더 이상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의 집에 들어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화자의 서술만이 아닌 시선이고, 화자의 POV이며, 화자는 곧 카메라고 나는 그 카메라에 찍힌 것들을 가만히 앉아 감상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집에서.

  그런데 이 시를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돌연 의아해진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 집을 나가지 말자”니. 지금까지 이 화자는 어디에서 현관을 지났던 것일까? “현관을 지나면, (…) 불 꺼진 거실이 보이고, 낡은 소파가 보이”리라고 상상하던 화자는 이제까지 현관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현관을 지나지 않고 현관을 지난 상상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아무래도 이쯤에서 다시 화자와 카메라를 분리해야 할 것 같다. 화자는 현관을 지나지 않은 상태로 카메라를 집 안으로 들여보낸다. 나는 화자의 카메라(이걸 여전히 POV라고 부를 수 있을까?)를 따라 집 안을 구석구석 둘러본다. 그러다 “이 집을 나가지 말자”는 화자의 선언과 함께 그 집에 갇힌다. 이때 시의 화자는 아직도 현관 밖에 있고 나만 현관 안에 있다. 이토록 무책임한 화자가 있다니. 저는 아직도 저 밖에 있고 나 혼자 누구의 집인지도 모르는 집 안에 남겨두다니. 나는 여기까지 이 시를 읽고 나서 조금 억울해졌다. 나, 이대로 내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집 아닌 집에 갇힌 사람의 이야기는 많다. 소설도 그렇지만 영화도 마찬가지다. 「현관을 지나지 않고」의 집으로부터 내가 떠올린 영화 속의 집은 <우아한 세계>(한재림, 2007)였다.

  가장이자 조직폭력배(이 순서는 중요하다)인 강인구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가족이 살 수 있는 좋은 집을 마련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일이 조폭 일을 그만두기였지만 영화 속 모든 인물이 그러하듯 강인구의 욕망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강인구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아내에게 이혼당하지 않고 딸에게도 사랑받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하지만, 동시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온 가족이 모여 살 수 있는 집을 사고 캐나다에서 공부하는 아들의 유학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다른 직업을 찾을 수 없다.

  여기서 강인구가 바라는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강인구의 욕망은 상태다. 가족과 함께 하는 상태.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는 상태. 삶이 고달픈 가장이 바라는 것은 결국 가족이라니 이거 너무 상투적인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사람이란 게 그렇듯이 이 영화 또한 그렇다. 강인구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집으로 들어가려는 동시에 집에서 벗어난다. 강인구가 현관을 지나려고 애쓸수록(그것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든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든 간에), 현관을 지나지 않는(혹은 지나지 못하는) 존재로서 집 안팎을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물론 영화의 말미에서 강인구는 우여곡절 끝에 꿈에 그리던 전원주택에 살게 된다. 그런데 이 집이 진정 강인구가 바라던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한 마지막 장면은…… 아무래도 얘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 영화를 직접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왜 <우아한 세계>의 강인구에 대해서 또 이다지도 길게 말을 해두었냐면, 내게는 이 시의 화자가 떠올리는 집이 왜인지 모르게 강인구를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불은 꺼져 있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너는 언제까지나 물을 틀어 두”는 집.

  영화 초반의 강인구가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은 수도관이 노후되어 자주 막힌다. 가족들은 머리를 감다가도, 세수를 하다가도 더는 흐르지 않는 물에 가로막혀 멈춰 선다. 아내는 양동이에 미리 받아둔 물을 가져오라고 소리치지만 강인구는 그마저도 쏟아버린다. 그러니까 “언제까지나 물을 틀어두”는 집은…… 언제든 다시 물이 흐르지 않는 집이 될 수 있다. “앞으로는 이 집을 나가지 말자”는 화자가 사실은 현관 밖에 있는 것처럼. 현관을 지나지 않고도 현관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갇혀서 리뷰를 쓰고 있었다. 현관 밖에 있을 화자를 상상하면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못 들어오는 것인지 안 들어오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렇게까지 이 집을 잘 아는 사람이,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저 밖에 있다니.

  나는 여전히 이 집이 어떤 집인지 모르고 문 밖의 화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집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누구든 현관을 지났으면 좋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현관을 지나야 결국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집은 좋은 집이다. 이렇게까지 떠올리고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나 혼자만 여기 있기에는 조금 아깝다.



《문장웹진》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25년 한 해 동안 진행한 <문장웹진 Rewind>를 <문장웹진 다시 읽기>라는 이름으로 이어 갑니다.
<문장웹진 다시 읽기>는 과거 《문장웹진》에 수록된 작품을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읽고 재조명하는 연재 기획으로, 등단 10년 이내의 젊은 작가와 평론가들이 참여합니다.
2026년 4·5·6월호는 최예솔 소설가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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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예솔
  •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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