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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 대한 글

  • 작성일 2026-05-01

  [편집위원 기획 – Game & Writer]


  게임에 대한 글


김승일


  1.

  내 친구랑 나는 운동을 싫어한다. 담배를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는 매번 담배를 끊자고, 운동도 열심히 해보자고 각오를 다진다. 오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뇌신경에 게임을 직접 연결할 수 있는 기계가 나올 거다. 그 기계로 VR MMORPG를 해야 한다. 적어도 그게 나올 때까지는 살아야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아직 해보지 않은 게임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 작품도 아직 내가 읽지 않은 작품이다. 그래서 시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직접 아직 없는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게임을 만드는 모임도 만들었다. 셋이서 10년 동안 게임을 구상하기로 했다. 10년 후에 무조건 게임이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10년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렇게 계속 미루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모임의 이름은 원래 ‘베이퍼웨어 프로젝트’였다. 근데 혹시 언젠가는 진짜로 게임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 모임 이름을 ‘언메이드’로 정했다. 우리는 일단 우리가 만들 게임에 대한 글을 써서 책을 내기로 했다.


  2.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이미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도 좋다. 게임에 대한 글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게임에 대한 글은 게임을 죽이는 글이다. 게임을 죽여서 세상에 없는 게임으로 만드는 글이다.

  나는 게임 방송을 딱히 즐겨 보지 않는다. 게임 방송은 게임을 죽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시청자가 게임을 직접 하는 대신 게임 방송을 본다. 그것도 게임을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게임에 대한 글이라고 별다른 것도 없다. 내가 아직 해보지 않은 게임의 공략, 비평, 에세이를 읽으면 언제나 그 게임을 직접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게임에 대한 글이 흥미로우면 흥미로울수록, 이상하게 게임을 실제로 구매하지는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게임의 근본적 재미는 직접 뭔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게임 방송의 시청자가 게임을 구매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클리어하는 데 100시간 걸리는 게임의 방송을 100시간 동안 시청한 시청자가 다시 100시간의 모험을 떠나기 위해 게임을 구매할 확률은 확실히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게임 방송이 게임을 죽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게임 방송이야말로 게임을 가장 생생하게 잘 전달하는 매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플레이하면 다양한 변수들이 생길 수 있지만. 어쨌든 게임 방송을 본 다음 게임을 하면 방송에서 본 것들을 똑같이 만날 수 있다.

  오히려 게임에 대한 글이 문제다. 게임에 대한 글은 게임을 결코 생생하게 전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게임 에세이는 이미 서비스가 종료된 온라인 게임에 대한 글이다. 내가 오늘 원래 쓰고자 했던 글도 <아키에이지>라는 게임에서 만난 친구들 얘기였다.

  시인은 추억을 죽이는 사람이라고 한다. 추억을 풀어놓으면 추억은 실제보다 단순해진다. 가끔은 실제 있었던 일보다 아름다워지기도 한다. 어쨌든 추억을 말로 꺼내면, 추억은 다시 겪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게임에 대한 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게임에서 있었던 일을 글로 적으면, 그걸 쓴 사람은 그 게임을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그것은 그 글의 독자도 마찬가지다. 게임에 대한 글을 읽는 순간, 독자는 결코 그 게임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특이하게도, 이런 현상은 게임 비평을 쓰거나 읽을 때도 발생한다. 물론 문학 작품 비평이나 영화 비평도 작품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례사 비평을 읽든 엄청난 혹평을 읽든, 지혜로운 분석을 읽든, 문학 작품이나 영화 비평은 오히려 내가 그 작품을 실제로 감상하고 싶게 만들곤 한다. 내가 직접 그 작품을 접하면 뭔가 좀 다를 것 같기 때문이다. 비평이 죽인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직접 만나면 더 많이 감동할 수도 있고, 더 많이 욕하면서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예술 작품들에 관한 비평은 언제나 내가 그 작품과 관계하고 싶게 한다. 그러나 게임 비평은, 특히 아주 흥미로운 게임 비평은 이상하게도 그런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재밌는 게임 비평을 읽으면 그 게임의 규칙, 스토리, 세계를 직접 겪어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비평을 끝까지 다 읽은 그 순간, 나는 알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글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 게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글에 등장하는 게임 시스템에 대한 경탄은, 글쓴이의 경탄이지 결코 나의 경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내가 게임에 대한 글을 게임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3.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학 작품이나 영화, 미술 작품은 이미 누군가가 세계를 감각하고 해석하여 우리에게 선사한 창작물이다. 그 창작물에 대한 비평이나 에세이는 세계를 필터링한 작가의 작품을 다시 필터링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 걸러진 것이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창작물은 뭐랄까 좀 다른 것 같다. 게임은 세계를 필터링하여 만들었어도 이미 하나의 세계다. 그러니 게임이라는 세계를 겪고 나서 쓴 글들은 그게 비평이든 에세이든 2차 창작물이든 문학 작품에 가까울 확률이 더 높다.

  사람들은 문학 작품 역시 하나의 세계로 취급한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아무리 단순한 게임이라도 문학 작품보다 더 본질적으로 세계 그 자체인 것 같다. 문학 작품은 규칙을 포함한 창작물이지만 게임은 규칙 자체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의 시에 규칙만 쓰여 있다면, 그건 사실상 시가 아니라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잘 봐줘도, 게임을 시라고 우기고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어차피 시라는 게 시가 아닌 걸 시라고 우기는 장르이긴 하지만, 문학이라는 장르가 언어로 형식(규칙)을 만드는 일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문학은 게임이라는 매체의 하위 장르에 불과한 것 같다. 우리는 규칙 속에서 규칙을 만든다. 그리고 게임은 규칙이다. 하나의 게임은 하나의 세계다. 그리고 나는 문학을 게임보다 더 사랑하는 것 같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건 다른 것 같다. 나는 게임을 문학보다 더 좋아한다. 게임은 항상 문학보다 더 낫다. 더 풍족한 즐거움을 주고, 더 예쁘다. 책을 읽을 때보다 게임에서 훨씬 더 많은 추억을 쌓았다. 하지만 게임과 문학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될래, 시인이 될래. 누가 내게 총을 겨누며 물어본다면 나는 아마도 시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문학이 한심하기 때문이다.

  게임 속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게임을 하면서 나는 인간을 초월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학 작품을 쓰거나 읽으면서는 그러지 못한다. 문학 작품에서 작가가 신이 되더라도, 나는 작가가 신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여길 뿐 진짜로 신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장르다. 그러나 미래의 게임은 과학적으로 곧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내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임에 접속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가 상실되고 완전히 타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이 만약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문학은 더 이상 문학이 아닐 것이다.

  나는 내 한계를 마주하기 위해 시를 쓰고 시를 읽는다. 그러나 게임 속에서는 항상 한계를 넘을 준비가 되어 있다.


  4.

  게임에 대한 글은 게임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쓴 글이다. 나는 사람들이 게임에서 돌아와 마주한 현실을 더 사랑한다. 좋아하진 않는다. 그들이 게임에서 있었던 일을 과대포장하고, 호들갑을 떨고, 특정 게임 때문에 현실을 살아낼 수 있었다고 고백할 때. 그들이 게임이란 무엇인지, 게임이 얼마나 대단한 매체인지 서술할 때. 게임이 선사하는 쾌락과 무지성적인 폭력이 얼마나 훌륭한 철학적 깨달음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혹은 쾌락만이 전부라는 것을 알려주는지) 주장할 때.

  나는 그들이 느낀 것을 실제로 느낄 수 없다는 상실감에 젖는다. 그들의 황홀감이나 불쾌감이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낀다. 그러다 보면 그들이 하는 얘기가 다 지어낸 얘기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나도 게임에 대한 글을 읽고 실제로 그들이 다룬 게임을 해본 적이 있다. 확실히 훌륭한 게임이었다. 확실히 쓰레기 게임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그들이 말했던 것이 없었다. 게임 방송에서 본 것은 게임에 있지만, 게임에 대한 글에 있었던 것은 게임에 없었다.

  2006년이 떠오른다. 호주로 여행을 가서 30일 넘게 있었다. 백패커 호텔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여행정보지인 <론리 플래닛>만 계속 읽었다. 거기서 추천하는 식당이나 관광지를 찾아가면, 그 사람들이 묘사한 맛이 거기 없었다. 온도도 습도도 분위기도 없었다. 그들이 다녀온 호주는 책 속에만 있었다. 나는 호주에서 그들의 호주를 상상하며 하루 종일 침대에서 숙취를 견뎠다.

  어린 시절, 나는 게임을 살 돈이 없어서 게임 잡지만 계속 읽었다. 잡지 부록이었던 <사일런트 힐 2>의 공략집 겸 대사집을 하도 읽어서, 아직도 그 게임의 엔딩 분기가 뭔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 그 게임은 일본어로 되어 있었고, 당시의 내 또래 애들은 공략집이 없으면 게임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공략집에서 시키는 대로 캐릭터를 움직이고, 사라는 대로 아이템을 샀다. 게임 기자가 공략집에 써 놓은 감상을 사랑했다. 욕했다는 곳에서 욕을 했고, 경악했다는 곳에서 경악하려고 했다. 실제로는 하나도 슬프지 않았던 히로인의 죽음 앞에서, 게임 기자가 울었다는 이유만으로 눈물을 짜내려고 했다. 게임에 대한 글을 쓴 사람은 게임 속에 없었다. 나는 항상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게임 공략집에서 게임 기자를 온전히 찾을 수 있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항상 자기가 왜 울었는지, 뭐가 그렇게 경악스러웠는지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5.

  글로 세계를 언급하면 그 세계로는 절대로 갈 수 없게 되는구나. 그러니 게임에 대한 글은 절대 써서는 안 된다. 게임에 대한 글은 갈 수 없는 세계를 만드는 글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추천할 때는 게임의 제목만을 알려줘야 한다. 사실 그것도 위험하다. 제목으로 상상한 세계로는 절대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 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에 대한 글을 쓴다. 우리는 오늘도 우리가 떠나온 세계를 죽이는 일에 몰두한다. 아무도, 자기 자신도 거기로 돌아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게임에 대한 글을 마주한 독자는 난처해지곤 한다. 보르헤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소실점, 바빌론의 도서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있는 정원은 보르헤스가 가본 적 없으면서 감각한 세계이거나 가상의 대상이다. 하지만 게임에 대한 글에 존재하는 세계는 분명히 실체가 있었던 세계이며, 원한다면 구매해서 즐겨볼 수도 있는 세계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속지 않는다. 나는 글로 먼저 만난 세계를 믿지 않는다. 게임에 대한 글은 나를 잘 믿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믿지 못하면서 사랑하기. 이건 정말 낭만적인 사랑이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종류와 형식의 게임을 애호하고 더러는 ‘플레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작가들은 각자 어떤 방식으로 게임과 연루되어 있을까요. 이번 호 기획 는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게임과 함께해 온 ‘플레이어로서의 작가’들의 일상과 경험에 귀 기울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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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일
  • 201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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