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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죽어

  • 작성일 2026-05-01

  [편집위원 기획 – Game & Writer]


  모르면 죽어


박서련


  근황 얘기에 영 소질이 없다. 웃길 의도가 없었는데 상대를 박장대소하게 하거나 전혀 어두운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소재로 분위기를 망치거나. 요즘은 게임도 그렇게 재미 있지가 않아요. 최근에는 이 말을 좀 자주 했다. 별생각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를 말한 거지만 듣는 분마다 놀라셔서 내가 더 놀랐다. 헉 진짜요? 서련 씨가요? 작가님이요? 그게 그렇게 의외이실까, 약간은 머쓱해하다가 내가 한 말이 왠지 ‘요새 밥도 맛이 없어요’처럼, 그러니까 중증 우울증 환자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음을 조금 의식하곤 했다. 

  그럼 이제 여가 시간에 뭘 하세요? 요즘엔 뭐가 재미있어요? 

  그래도 여전히 게임을… 합니다. 안 하는 게 아니고요 재미있지는 않아도 그냥… 해요. 전보다 게임 하는 시간이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습하듯 덧붙이곤 최근에 삭제한 어떤 게임을 떠올린다. 영주가 되어 한 도시국가를 경영하고 연맹의 일원으로서 왕국 간의 전쟁에 참전하는 콘셉트의 모바일 게임이었는데, 삭제하기 직전 확인한 플레이 타임은 대략 700시간 정도였다. 작년 이맘때였나, 한국인 유저가 별로 없을 때 시작해서 다국적 연맹에 가입했고 이따금 인도네시아에 사는 여성 연맹원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이런 게임에서 아시안 여성 게이머를 알게 되어서 좋아요. 

  나도 그래요. 

  연맹원들에게 내가 한국인 여성인 것을 밝히고 받은 메시지는 대체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에서도 인기가 있나요?’ 같은 것이었고, 그 사람과 내가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대화도 내가 잘 모르는 케이팝 아이돌 그룹에서 역시 크게 관심 없는 멤버가 탈퇴했다는 소식에 대한 거였다. 상대방이 아주 슬퍼했기에 나는 그 주제에 그리 관심이 없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그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 며칠 후에 별다른 개연 없이 그 사람이 다른 왕국(이 게임에서 ‘왕국’은 서버를 의미한다)으로 이주했다. 뒤따라 이주할 만큼 그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그 사람과 대화할 수 없으니 더는 이 게임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들었다. 

  내가 떠난 후에 나의 성은 연맹 내 등급이 차츰 떨어진 후에 연맹에서 자동 탈퇴될 거다. 그러면 연맹 사냥터 인근 개꿀 자리에 위치한 내 성이, 연맹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방해물처럼 여겨질 거다. 그럼 연맹원들이 내 성을 공격하겠지. 성이 충분히 데미지를 입으면 왕국 내 랜덤 위치에 자동 이동하게 되니까. 그렇게 되기까지 한 일주일 걸리려나? 길면 2주? 

  이 게임을 그만두기로 마음먹기 직전 나는 전투력 1억을 막 넘긴 상태였다. 축하해, piupiu. 아이디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연맹원이 연맹 채팅 채널에서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내 성의 전투력이 그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내 성을 공격할 때 연맹원들은 애를 좀 먹으려나? 아니겠지, 우리 연맹에는 일명 ‘고래’라고 불리는 빅 플레이어들이 꽤 있었다. 그 사람들이 나서면 내 성은 유산지보다도 빠르게 연소될 거다. 내가 애면글면 모은 기병, 보병, 궁병이 전부 야전병원에 입원하거나 전사할 거다. 솔직히 말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봐야 디지털 재화 사이버 자원인 것을 잘 아는데도. 

  언제일지 모를 결정적 순간을 위해 쓰지 않고 똔똔 꿍쳐두었던 25만 개의 다이아와 총 300여 개의 영웅 소환 카드도 게임을 그만두기로 한 지금은 의미가 없다. ‘아끼다 똥 된다’라는 말의 뜻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이 분야(아껴서 똥 만들기)에서 나는 스스로를 거의… 거장이라고 느낀다. 


  리그 오브 레전드를 시작했을 때(2012년이었던가?) 내게 게임의 개요를 가르쳐준 사람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님 저는요(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이겨도 가끔 허무해요. 아무리 잘 키운 캐릭터라도 게임이 끝나면 사라져 버리잖아요. 롤은 그런 게임이니까요. 


  ‘그런 게임’. 게임이 끝나면 열심히 모은 재화와 자원이 무효가 되는 게임. 사실 그런 게임은 많다. 주로 로그라이크-로그라이트 장르의 게임들이 그렇다. 로그라이크 장르를 관통하는 명제 ‘모르면 죽어’도 내 생각에는 그런 뜻이다. 그전까지 얼마나 열심히 했든 게임의 문법을 조금이라도 잘못 이해하면 속절없이 죽어야 하고, 죽으면 그 모든 발버둥 몸부림 옆돌기 차력쇼가 무로 돌아간다. 

  엄격하게 따지면 리그 오브 레전드는 ‘그런’ 게임까지는 아니다. 적어도 챔피언이 죽는 순간 게임이 끝나버리지는 않으니까, 죽는다고 해서 경험치와 구매한 아이템이 초기화되지는 않으니까. 다만 약속된―어느 한쪽의 넥서스가 파괴될 경우, 그 즉시 해당 팀의 패배가 확정된다―조건이 달성되면 게임이 끝나고, 끝난 게임의 자원과 재화는 다음 게임에 계승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다면, 애초에, ‘그런’ 게임이 아닌 게임이 있기는 한가? 게임 내에서 형성한 자산을 위주로 생각하면 로그라이크/트와 로그라이크/트 아닌 게임을 구분하는 게 크게 의미 없는 일이 된다. 게임 속의 자원과 재화는 원래부터 게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캐삭하고 세이브 파일 지우고 겜 접으면 아무리 오래 한 게임이어도 로그라이크나 마찬가지가 된다. 언제든 초기화면으로 돌아가 허접한 기본 스킨만을 장착한 캐릭터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물론 그 게임을 다시 하기로 마음 먹었을 경우에 말이지만. 

  물론 로그라이크/트가 아닌 게임을 로그라이크/트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나도… 최근에야 삭제했다는 그 게임을 끊으려는 시도를, 사실은 작년 겨울에도 했었다. 조카에게 금반지를 두 돈은 맞춰줄 수 있을 돈을 한 달만에 써버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게임 삭제 대신 계정 삭제를 시도했는데(이편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시도해 본 바 그 게임의 계정 삭제 과정은 이마를 치고 싶을 만큼 짜증이 나는 거였다. 계정 고유번호와 최근 결제한 과금 내역의 영수증 번호 등 복잡한 숫자 조합을 포함하여 수십 개의 개인정보 필드를 채우고 고객센터에 전송한 후 평균 2주가 걸리는 심사까지 거쳐야 했다. 

  아니 내가 겜 접겠다는데 심사는 무슨 어거지 수염 땡기는 소리야… 결국 나는 계정 삭제를 포기하고 대안이랍시고 ‘과금 참기 챌린지’를 시작했다(당연히 이런 이름의 챌린지는 없고 그냥 내가 개인적으로 했다는 거다). 그다음 달에는 1인분 저녁 식대 정도밖에 과금하지 않았으니 그럭저럭 성공이라 할 만하지만, 이미 앞서 말한 것처럼 게임을 완전히 끊을 마음을 먹기까지는 또 몇 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기에는 제법 일가견이 있고 끊기에는 소질이 더럽게 없는 사람 같다. 기질상 로그라이크/트가 잘 맞지 않을 것 같지만(차마 다 셀 수도 없는 끊어짐을 영원히 되풀이하며 경험해야 하는 장르라서), 내가 가장 오래 플레이해 온 게임은 로그라이크/트 장르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아이작의 번제, 하데스, 다키스트 던전 시리즈. 아이작의 번제는 대략 11년 사이 5천 시간 가까이 플레이했고 하데스 2는 전 세계 플레이어 중 0.05% 순위 이내에 전체 업적 달성… 다키스트 던전과 관련해서는 그리 자랑할 만한 실적이 없지만 아무튼 많이는 했다. 참기와 끊기에 대한 나의 적성이 로그라이크/트 장르에서는 영구적 죽음과 완전한 무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참고’, 게임 플레이 자체를 ‘끊지 못하는’ 식으로 발휘되어 왔기 때문이다. 

  나라고 늘 괜찮지는 않다. 정말 심혈을 기울여 키운 캐릭터가 어이없는 실수로 죽을 때나 이만하면 보스와 비벼볼 만한 스펙이라 믿었던 캐릭터가 최후 결전에서 아깝게 죽을 때는 나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쌍욕을 내지르고 침대에 스팀 덱을 던진 다음 책상 앞으로 가서 이마를 짚고 앉아 곰곰 생각에 빠지곤 한다. 상태가 아주 안 좋을 때는, 진지한 생각은 아니지만, 나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죽는 게 일이고, 운 좋게 죽지 않더라도 어차피 게임이 끝나면 사라질 캐릭터가 내 기대보다 일찍 죽은 것 정도로. 

  그런데 그런 후에는 뭘 어떡하냐면 다시 게임을 한다. 아무 아이템도 장비하지 않은, 좋게 말해 순정하고 나쁘게 말해 허접한 기본 스킨 캐릭터가 주어지고… 나는 곧 이전 게임을 거의 잊어버리게 된다. 


  가끔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게임을 하다가도, 게임을 하지 않을 때도. 죽음이 언급되는 장면이기 때문에 게임을 할 때 더 자주 떠오르긴 하는 것 같다. 서영주 배우가 분한 김양희라는 여자가 먼저 말한다, 언니 나 정말 죽고 싶어요. 너무 죽고 싶어요. 사실은 이런 대사가 아닐 수도 있다, 김양희가 오열하고 있었던 건 기억나는데 대사는 정확히 뭐였는지 떠오르지 않아서 다음 대사를 참조해 대충 이런 문맥이겠지 상상한 말이다. 발작적으로 우는 양희를 안아서 달래주며 금자가 대답한다. 풀로 만든 것처럼 파릇파릇하고 애틋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그럼 죽어. 김양희는 그 말에 흠칫 놀랐던가? 양희가 놀라건 말건 금자는 이어 말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 


  그래서 가끔은 내 멋대로, 로그라이크/트라는 장르가 다른 어떤 장르의 게임들보다 다정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모르면 죽어. 그런 다음 다시 태어나. 계속 죽어야 하는 규칙을 가진 게임이라는 건 몇 번이든 다시 태어나기를 허용해 주는 게임이라는 뜻과 같다. 현실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 물론 현실에서의 죽음은 게임에서의 죽음보다 훨씬 힘들고 고통스럽지만-즉 어렵지만, 그런 대신 다시는 다시 살게 해 주지 않으니까. 필요한 만큼 죽고 죽고 또 죽은 후에, 결국에는 짧더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약속은 내게 그리 나쁘지 않게 들린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로그라이크/트 식의 다정. 요구되는 것은 기꺼이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뿐이다. 

  어쩌면 나는 최근에 끊었다는 그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건 그냥 다시 그 게임이 재미있게 느껴지겠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 그러면 나는 그 게임을 거의 처음 시작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재건해야 할 것이다. 새 연맹을 구하고, 랭킹을 올리기 위해 군사 훈련 시설을 돌리고, 성내의 건물들을 고치고 업그레이드하고… 당장으로선 그런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걸 보면 아직은 다시 시작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다만 그 게임을 할 동안에 가장 재미있던 순간만은 자주 곱씹는다. 

  나보다 게임을 먼저 그만둔 사람 중에 카이저소제 어쩌고 하는 아이디를 쓰는 미국인이 있었는데, 그는 젊을 때(지금 그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아이티의 봉사활동 단체 같은 것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일하는 단체는 가톨릭 재단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근무 중에 다양한 국적의 수녀님들과 브로큰 잉글리시로 대화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번은 대화 도중 한 수녀님이 갑자기 화를 내며 외쳤다고 한다. “완전히 차고 속의 문어 같잖아!”

  그건 그 수녀님이 속한 문화권의 속담이었다고 하는데,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었다는 뜻이라나…. 

  카이저소제가 그 이야기를 한 직후에 우리 연맹은 꽤 큰 전투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연맹 채팅창은 문어 이모지로 도배되었다. 그 속담은 이런 상황에 대한 말이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을 나는 했지만, 그래서 나야말로 차고 속 문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나도 문어 이모지를 빠르게 다섯 개 정도 눌러 보냈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길을 잃은 듯한 어리둥절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시 그런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순간은 그리 흔하게 되풀이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런 한편, 게임을 해서 감동을 얻으려면 게임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몇 번이고 강조했고 스스로도 내내 곱씹고 있듯 나는 그 게임을 언제든 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든 플레이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로그라이크/트 장르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게임의 다정이 아닐까. 

  나는 그냥 마음을 정하기만 하면 된다.



<Game & Writer>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종류와 형식의 게임을 애호하고 더러는 ‘플레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작가들은 각자 어떤 방식으로 게임과 연루되어 있을까요. 이번 호 기획 는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게임과 함께해 온 ‘플레이어로서의 작가’들의 일상과 경험에 귀 기울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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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서련
  • 201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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