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적 소설과 인간적 인간
- 작성일 2026-06-01
- 댓글수 0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설적 소설과 인간적 인간
― 정영수 「지평선에 닿기」(2016년 7월호 수록)
최예솔
최근 나는 단편소설을 한 편 썼다. 작년 7월에 처음으로 한 문단 정도를 써두었고 그 후로는 내내 생각만 하다가 올해 3월과 4월을 거치며 20매, 50매, 90매로 늘어났다. 매번 소설을 쓰면서 하는 생각이지만 소설은 결코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흘러가지 않는다? 써지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아무튼 계획대로는 되지 않는다. 사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번 소설을 쓰면서는 어떤 생각을 가장 많이 했느냐면 도대체 소설적인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건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라는 어느 아이돌 그룹의 노래 가사처럼 너무도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소설이…… 소설적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또 괜찮은 일일까?
지금까지의 나는 보통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다.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소설을 생각했지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본 일은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그야 읽는 사람으로 작동하는 나는 ‘즐겜러’처럼 그냥 ‘즐감러’로 존재하니까. 하지만 내가 모든 게임을 마냥 즐겁게 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모든 소설을 마냥 즐겁게 읽지는 않는다. 어떤 소설은 읽고 나서 불편하기 때문에 좋고 어떤 소설은 하염없이 생각나기 때문에 좋고 어떤 소설은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좋다. 사실 소설은 ‘즐겁다’기보다는…… ‘이상하다’에 가까운 게 아닐까.
나라는 독자가 소설에 바라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는 삶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상하고 또 합리적인 삶. 매사에 지루한 동시에 절절매는 삶. 나는 그런 것을 인간적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런 삶은 그다지 소설적이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삶은 매일같이 씻고 먹고 자고 입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잠들기 싫어하며 잠들고 일어나기 싫어하며 일어나고. 출근을 앞둔 휴일에는 미리 울적해졌다가 일하기 싫어하며 일하는 것이다. 그러다 잠깐 웃기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슬프기도 하다. 그것의 반복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반복이야말로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소설적’인 동시에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소설은…… 거창하지 않은 소설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국엔 일상으로 끌어내려지는 소설. 이건 나라는 독자에 한정되어있음을 다시 한번 밝힌다. 왜냐하면 내가 그다지 거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무언가에 오래 골몰하는 사람은 아니다. 저게 뭐야. 그런 생각으로 잠시 멈추기는 하지만 금방 잊고 다른 일을 한다. 내게는 멈추는 마음과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적당히 섞여 있고 가끔은 더 오래 멈추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서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다시 간다. 그러다가 까먹는다. 그런 의미에서 정영수의 「지평선에 닿기」는 내게 끝까지 궁금했던 것들을 금방 잊어버린 소설이었다.
「지평선에 닿기」에는 어릴 적 쌍둥이 자매를 잃은 ‘지연’이 등장한다. 지연은 이제까지 큰 비밀 하나를 마음에 품고 살았는데, 사실은 자신이 죽은 쌍둥이 자매 ‘주연’이라는 것. 어릴 적 지연은 별생각 없이, 주연이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가 그대로 지연이 되어버린다. 주연의 납치살해사건이 밝혀지는 동안 지연은 사실을 고백할 기회를 놓친다. 너무 큰 일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소설 속 지연은 이제 나이를 꽤 먹었다. 전에 사귀었던 애인인 ‘나’와 함께 암 투병 중인 어머니에게 찾아가 “나 지연이 아니라고. 주연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연이가…… 도대체 누구”냐고 묻는다. 지연의 비밀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말하자면 지연의 비밀이 ‘소설적’인 것이 아닐까. 상실이나 애도 같은 것과는 별개로, 죽음은 항상 무거우니까. 심지어 지연의 입장에서는 쌍둥이 자매와 내가 동시에 죽은 사건이 되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그런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이 사건은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지평선에 닿기」는 이 비밀을 더 크게 부풀리거나 포장하려고 들지 않는다. 어떤 일은 발생한 것만으로 충분히 무거워서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내게는 지연의 비밀이 그런 것으로 느껴졌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글쎄, 나라도 이제는 다시 만날 일 없는 옛 애인에게나 얘기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든달까.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이 소설의 화자이자 한때 지연의 연인이었던 ‘나’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 ‘나’는 지연의 고백이 담긴 메일을 받고 한동안 답장을 하지 못한다. 그사이 ‘나’의 가족에게도 나름의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매사에 지긋지긋한 가족이긴 했지만 이번에는 무려 형이 구속을 당한다. ‘나’는 형이 이전부터 얼마나 자주 폭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명확하게 서술해주지 않는다. 더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런 일이 ‘나’를 통과하고 있음을 지연에게 말했을 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지연이 자신의 비밀을 고백했으니 ‘나’도 무언가 고백을 해버렸을 뿐이다.
지연이 주연인 것, 형이 교도소에 가는 것. 「지평선에 닿기」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을 꼽으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소설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지연과 ‘나’는 어떤가. 그런 비밀을 품고도 잘 살아간다. 한 번쯤은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기 애매했던 것을, 비슷하게 애매한 사이인 서로에게 이야기해주고는 또 알아서 잘 산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부분이다. 아무래도 보통의 사람이라면 나 자신에게 너무 야박하게 굴 수는 없다. 나를 괴롭히는 기억에 평생을 골몰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지연이든 주연이든 관계없이 살아온 일상이 있고 살아갈 날들이 있으며 형이 무슨 일 때문에 교도소에 갔는지 모르는 채로도 면회를 가고 책을 빌려주고 출소 날 두부를 건넬 수도 있다. 그런 건 그다지 의미심장하지 않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나에게도 아직은 살 날이 많이 남았을 것이고 그런 날들도 그다지 의미심장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면 ‘소설적’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게, ‘인간적’이라는 말은 아주 평범하게 남겨놓아도 되는 것일까? 그런 건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매사에 그럴 수 있지,를 달고 살고 그럴 수 있다는 말은 곧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게 삶이란 것은, 의미란 것은 결코 고정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돈다. 확정되지 않는 것. 어딘가에 수렴되지 않고 오히려 점점 흐려지거나 넓게 퍼져가는 것. 지연의 결말이자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지평선’도 사실은 닿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지구는 둥글고 지평선도 우리의 삶처럼 끊임없이 이어질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은 어떨까. ‘소설적’인 것은 독자를 소설 안에 붙들어 놓고 ‘인간적’인 것은 그 독자를 다시 소설 밖으로 건져 올린다. 그야 소설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사람이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소설 밖의 일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에게는 소설 안에서의 삶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존재하기를 선택했다니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것들이 모여서 또 소설이 된다. 그래서 소설은, 읽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즐겁기보다는 이상한 일이다. 가끔은 즐겁지만. 가끔 슬프고 가끔 웃기지만. 그런 걸 모두 합치면 결국에는 나라는 인간이 되고 결국 소설적이란 말과 인간적이란 말은…… 별로 다르지 않은 말이 된다.
올해 4월부터 6월까지, 나는 총 3편의 작품에 대해서 리뷰를 썼다. 하지만 내가 이제껏 다뤄온 작품들을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것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방향으로 가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가 바라는 문학은 단정 짓기가 아니니까. 어떤 사람도 쉽게 단정 지어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 그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벼랑 끝에 세워 놓고, 결코 밀어 넘어뜨리지는 않은 상태로 이리저리 훑어보고 물어보고,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하더라도 더 넓은 땅으로 보내주는 것. 내가 읽고 쓰고 싶은 소설은 그런 것이다. 정영수의 「지평선에 닿기」가 그랬던 것처럼.
|
《문장웹진》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25년 한 해 동안 진행한 <문장웹진 Rewind>를 <문장웹진 다시 읽기>라는 이름으로 이어 갑니다. |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우아한 세계에서 현관 닫기[문장웹진 다시 읽기] 우아한 세계에서 현관 닫기 ― 황인찬「현관을 지나지 않고」(2015년 10월호 수록) 최예솔 5월의 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지독한 집순이라는 점이다. 내가 집을 사랑함에 있어서 계절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기온이 오르고 꽃이 피고 온갖 가정의 달 행사로 거리가 북적거려도 나는 집에 있는 것이 좋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추우나 더우나 집이 좋다. 집은 언제나 집이고 나는 그 안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느낀다. 바깥이 유독 불안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집에 있을 때, 거실 소파에 누워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바깥의 내가 가짜라는 건 아니지만. 바깥의 나는 목이 늘어난 잠옷을 입거나 푹신푹신한 쿠션을 머리와 다리 아래에 각각 두 개씩 끼고 있거나 앞면이 어디든 관계없이 대충 이불을 휘둘러 덮고 있을 수 없다. 몇 시간 동안 누워서 소설만 생각(쓰지 않고!)할 수도 없고 내 베란다의 식물들을 가만 바라보거나 시든 잎을 잘라주면서 혼잣말을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내게 불편한 일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집 밖의 나는 보통 불편한 사람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게 사실이라는 점이…… 가장 불편한 일이다. 이제까지 내가 집(보다는 나의 집을 향한 사랑)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은 내가 이번에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은 시 역시 집에 대한 시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를 읽는 동안 가만히 집을 떠올리는 것이 좋았고 그게 내 집도 아닌 남의 집임에도 불구하고(심지어 누구의 집인지도 모른다!)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 시가 그렇게 마냥 편안하고 좋고 재미있는 시였느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현관을 지나면, 이 현관을 지나면, 불 꺼진 거실이 보이고, 낡은 소파가 보이고, 그 소파에 누우면 서늘한 기분이 들겠지 식탁이 보이고, 식탁보가 보이고, 빈 의자가 보이고, 의자의 네 발에 씌워 둔 테니스공이 보이고, 꽃무늬 벽이 보이고, 벽에 붙은 두 연인의 오래된 사진이 보이고, 낮은 탁자와 그 위에 놓인 빈 쟁반이 보이고, 낡은 유리장이 보이고, 유리장 안으로 그릇이나 항아리 따위가 보이고, 항아리의 흐린 무늬가 보이고, 유리장은 닫혀 있고, 닫혀 있는 많은 문들이 보이고, 불은 꺼져 있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너는 언제까지나 물을 틀어 두고, 그밖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현관을 지나면, 이 현관을 지나면, 물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죽은 사람의 혼령을 마주하는 일이 자꾸 계속되겠지 현관을 지나면 그런 일이 벌어지겠지 그러니 앞으로는 이 집을 나가지 말자 ―「현관을 지나지 않고」 전문 「현관을 지나지 않고」에서 현관을 지나면 보이는(혹은 보이리라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화자의 상상을 따라간다. 화자가 그려보는 집 안의 풍경은 그다지 낯설지 않고 어디선가 한 번쯤 마주친 집 안의 풍경이라고 해도, 혹은 내가 살았던 어느
- 최예솔
- 2026-05-01
문장웹진 기획
우리가 만든 유령들[문장웹진 다시 읽기] 우리가 만든 유령들 ―김종옥 「유령의 집」(2014년 2월호 수록) 최예솔 유령이란 무엇일까? 내가 아는 유령으로는 오페라의 유령 에릭, 꼬마 유령 캐스퍼,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에 등장하는 NPC 깨빈 정도가 있다. 말하자면 아주 대중적인 유령일 것이다. 물론 각자 가진 서사나 특징은 다르지만 이들이 어쩌다 유령이 되었나를 생각하면 일단은 죽어야 한다. 에릭은 사회적으로 죽었고(결국에는 진짜로 죽지만), 캐스퍼는 실제로 죽었으며(잠깐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깨빈은 잘은 모르겠지만 죽었기 때문에 유령이 되었을 것이다(그럼에도 플레이어를 유령이라 부르며 무서워한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이 죽지 않고, 소위 말하는 언데드(undead)로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위에 적은 대중적인 유령처럼 이제 유령은 단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캐릭터로 소비된다. 죽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덧입히고 공포를 떨쳐 내려는 것은 그 주체가 산 사람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과정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임과 동시에 죽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니까. 모르는 채로 맞이하는 일은 두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산 사람의 두려움이 유령을 만들었을까? 그건 오로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 죽음은 유령의 선행조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령이 단지 죽음의 다른 얼굴이라는 추측은 너무 단순한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이 유령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할까? “정말 괜찮아. 우리가 무슨 그런 사이도 아니잖아. 그리고 결국 오빠는 전화했잖아.” “그랬지.” “그러니까 괜찮잖아. 오빠가 나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해서 내가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야.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 봐. 내가 이제 오빠 앞에 있잖아.” 김종옥의 「유령의 집」에서 남자는 여자와 함께 간 호텔에서 유령의 존재를 느낀다. 남자는 한동안 여자에게 전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자에게 잘 곳을 제공하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점에서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평범한 연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연락하지 않은(혹은 하지 못한) 시간에 대해 변명한다는 점에서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여자와의 관계가 남들의 시선에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 쓴다는 점에서 동시에 사랑을 배반한다. 아마도 우리는 이 관계 역시 사랑인 동시에 사랑이 아닌, 죽었지만 죽지 않은 유령적 존재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우리가 무슨 그런 사이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남자의 반응은 유령처럼 희미하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에도 당연히 존재하지만, 남자의 부름에 의해서만 실존한다. 남자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상상을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남자에게 여자는, 이 소설
- 최예솔
- 2026-04-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