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청탁
- 작성일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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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황당한 청탁
손세실리아
몇 해 전 일이다.
모 공공기관의 잡지 외주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편집 담당 아무개라 자신을 소개하곤 산문 청탁 건으로 연락했단다. 마침 산문집 준비 중이었고, 써야 할 글감이 몇 있어 흔쾌히 수락하곤 착실하게도 마감 날짜를 지켜 넘겼다.
언제 끝날지 모를 팬데믹 상황에서의 거리 두기, 인원 제한, 방역 등 여러 규제와 제약으로 인해 경영난에 허덕이는 책방카페 운영자로서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풀어냈던 것인데 담당자로부터 게재 불가 통보를 받았다. 두려움에 처한 자영업자와 소시민들로부터 공감을 받을 만한 내용인지라 어리둥절했더니, 자신도 당혹스럽다며 사과하고선 기획위원들의 반대라서 하는 수 없단다.
이유를 묻자 제목 때문이라며, 재난지원금은 정부에서 지급했는데 어째서 돌아가신 시부가 지급한 것으로 표현했느냐는.
혹여 불온한 내용은 아닌가 상상할 수도 있어 간추려 말하자면, 공간 오픈 10년이 지나도록 번듯한 영업용 커피 기계도 없이 꾸려 오던 중, 코비드19 장기화로 인해 한가해진 틈을 타 당근마켓에서 구입한 중고 기계를 설치하며 겪게 된 일이다. 하는 김에 서가 리모델링도 감행했던 건데 빠듯한 형편을 알고 있다는 듯 작고하신 후 팔리지 않아 오래 비워 둔 시부님의 시골집이 처분돼 자녀 넷이서 공평하게 나눴다는 사연을 유산이라는 상투적 표현 대신 재난지원금으로 비유했던 것. 실제로 그렇게 여겨지기도 했고.
생전에도 이과 성향이셨는데 여전하시구나 싶게 액수도 타이밍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보다 처지가 더 어려운 이들에게 양도할까 하다가 유산이라기보다 어쩐지 시부님께서 보내 주신 재난지원금 같아 감사히 받기로 했다.
주위에 휴업과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그나마 문을 열고 있는 가게도 대부분 버티기 작전에 돌입한 듯한 분위기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보니 ‘어렵다’는 푸념도 금기어다. 오죽하면 천국에서 보내 준 재난지원금을 넙죽 받았겠나. (중략) 각설하고, 팬데믹이 아니었음 앞만 보고 내달렸을 내 인생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긴 건 분명하다. 주위에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는지 살피고, 미력하나마 챙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런 내 모습이 저승에 계신 시부님의 마음까지 흔들었을지도.
- 졸저 『섬에서 부르는 노래』 중 「천국에서 지급된 재난지원금」 일부
은유를 팩트로 읽고 내린 결정이 어처구니없었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구차해 입을 다물었다. 괜찮다며 실소하는 내가 이해심 많아 보였던 걸까? 최종 편집까지 열흘쯤 여유가 있으니 다른 글을 써준다면 기다리겠단다. 지면의 앞부분에 실리는 꼭지라서 비울 수 없다며.
담당자가 무슨 죄냐 싶어 수락했다.
비록 전화 통화와 이-메일로 나눈 대화였지만 내 글을 꼭 싣고 싶노란 그의 정중하고도 간곡함이 고맙기도 했고, 한편으론 어차피 책에 수록할 산문 한 꼭지가 더 생기는 거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손님 뜸한 가게의 며칠 매출 총액보다 원고료가 후했다.
이번엔 요양병원에 계신 노모 이야기를 썼다.
섬과 육지로 떨어져 지내고 있어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밖에 상봉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다소나마 적적함을 달래 드리고자 젊으실 적 즐겨 부르시던 십팔 번을 사흘에 한 번 꼴로 전화기에 대고 부르면서 피어난 모녀간의 애틋함과 울컥함과 그리움에 대한 사연이다. 팬데믹 동안 이와 같은 이별이 비단 우리 모녀만의 문제는 아니기에 저마다의 처지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성심껏 서로를 위로하며 헤쳐 나가자는 바람이었달까?
목포 태생이라 유독 즐겨 부르시던 「목포의 눈물」도, 「하숙생」도, 「가슴 아프게」와 「꿈속의 사랑」도 아예 처음 듣는 노래처럼 가만히 귀 기울여 듣기만 하다가 중간중간 열심히 추임새를 넣으셨다. “얼씨구, 잘헌다 잘혀, 눈물이 다 나올라고 허네. 그려그려 아조 잘헌다. 가수네 가수여.”, 십팔번 가사를 까먹다니 혹시 치매는 아닐까? 근심에 근심인데 다행히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게 얼마 지나지 않아 증명됐다. 어찌나 다행이던지. 「비 내리는 고모령」을 무심히 선창하자 구성지게 따라 부르신 게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거짓말처럼 따라 부르기 시작했으므로 얼른 입을 다물었다.
“부어엉새에도 우울었다아오오(울먹)~~~ 나아도오 우울어어어었소(울먹울먹)~~”
감정이 북받치셨던지 더는 잇지 못하셔서 다시 내가 이어 불렀는데
“가랑잎이 휘날리는~”에 이르자 노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독백처럼
“사랑해. 사랑해. 우리 딸을 많이 사랑해” 하시는 게 아닌가.
결국 그날 완창은 불발.
졸저 『섬에서 부르는 노래』 중 「고아의 노래」 일부
새벽 산책길 파도소리를 코러스 삼아 연습했다가 노모에게 들려주며 ‘가요무대’ 시간이라 너스레를 떨면 추임새도 넣고, 박수도 치고, 다인실 노인들께 자랑도 하고, 사랑한단 고백도 하는, 그러다 웃기도 하고 그리움에 사무치기도 한다는 내용인데 이번에도 역시나 게재 불가 통보를 받았다. 내용이 너무 어두워서라고.
뭐지? 싶었지만 처음만큼 놀라진 않았다. 심지어 각계 문화예술인으로 구성됐다는 기획위원이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잣대에 들어맞지 않는다니 잣대로부터 벗어나면 되는 거니까. 하여, 기어드는 목소리로 사과하는 담당자에게 쿨하게 괜찮다 답했다. 덧붙여, 맞지 않는 글이라 심려를 끼쳤노라 오히려 사과하곤 인연이 아닌 듯하니 다른 필자를 찾으시라 통보하고선 전화를 끊는데 불현듯 고딕체로 뇌리에 떠오른 단어.
검열!
그것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순 없지만, 한동안 흡사한 기분에 휩싸여 지냈었다. 어쩌면 블랙리스트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던 즈음이라 더 그랬을지도.
‘검열’을 네이버 지식백과에 검색하면 공권력이 언론·출판·예술 등에 대해 검사하는 제도로서 일반적으로는 신문·잡지·서적·영화·연극 등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표현 내용에 대한 검사를 뜻한다고 나온다, 다시 말해 발언이나 작품 등이 세상에 나왔을 때 파장이 클 경우 가능한 일이다. 민주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게다. 그러니 검열은 얼토당토않은 혼자만의 착각인 셈이다. 그의 말마따나 기획 의도와 맞지 않아서일 공산이 크다. 하지만 처음 겪는 일이기도 하고, 특히 ‘재난지원금’에 대한 ‘정부’ 운운은 무지하기 짝이 없어 이해 불가라서 혼자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본 셈이다.
여하튼, 돌이켜 정리해 보면 나처럼 평범한 삶을 사는 무명 시인을 대관절 누가, 어디서, 대체 무엇 때문에 검열한단 말인가. 거들떠보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만한 시간 낭비, 인력 낭비, 감정 낭비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두 차례의 거절은 단순한 해프닝이라 결론 내린 후 덮어버렸다.
그런데 맙소사!
두어 해가 지난 바로 얼마 전, 문제의 그 담당자가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일전엔 자신이 개입할 수 없어 유감이었다며,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쓸 테니 글 좀 부탁한단다. 예의 그 정중하고도 간곡한 어투로 말이다. 순간 짜증이 났지만 체면상 최대한 진정하며 거절했다.
“청탁이 밀려 있어서 받을 수 없어요.”(밀리긴 무슨!)
두 번 당했으면 됐지 세 번 당할까 싶기도 하고, 소심하게라도 골탕 좀 먹이자 싶어, 산문집이 출간됐는데 그때 거부당한 글이 독자로부터 가장 많은 리뷰를 받고 있노라 전했다. 유치하지만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 다음, 아무래도 그 지면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으니 다른 작가를 섭외하시라 했다. 어찌나 후련하던지. 그런데 전화를 끊자마자 혹시 그가 X맨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밀려들었다. 두 번까진 그렇다 쳐도 세 번씩이나 한결같은 어투로 청탁을 하기란 일반적인 상식으론 쉽지 않은 법이니까. 만일 나의 이런 추측이 맞는다면 기획위원들만 비문학적이라고 오인을 받은 꼴일 터.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아 그의 전화번호를 수신 차단했다.
과잉해석, 왜곡해석뿐 아니라 감정선을 자극하는 능구렁이 같은 화법을 교양 있는 척 감당해 주고픈 아량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그와 나눈 문자메시지와 통화 내역이 사라짐과 동시에 불현듯, 이처럼 비상식적인 청탁을 받은 작가가 나말고도 또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일었다. 물론 아닐 테지만, 만약에, 만약에 그런 일이 있었고, 청탁을 받은 작가가 있었는데, 그가 마침 일자리는 끊기고, 고시원 월세는 밀리고, 공과금 체납은 눈덩이고, 지병은 깊고, 먹거리마저 바닥난 처지의 전업 작가였다면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 생각하니, 정말 있었던 일처럼 쓸쓸하고 씁쓸했다.
대체 왜 내게 이런 황당한 일이? 라며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디선가 나말고 누군가도 겪었을 수 있던 일 아닐까 싶으니, 오히려 내가 겪은 게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래도 난 그런 일로 일상이 붕괴되진 않으니까. 게다가 이런 황당한 일을 글로 남길 만큼의 뚝심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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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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