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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요약이 없다

  • 작성일 2024-11-01
  • 조회수 531

[에세이]


   바다는 요약이 없다


이서안


   “샘, 꼭 전문 다 읽어야 해요? 수능에 안 나올 수도 있잖아요.” 매 수업마다 이런 대사를 읊는 학생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전문 줄거리 요약한 건 없나요?” ‘요약한 것?’ 가슴 언저리를 뭔가 콕콕 찌른다. 시간이 부족해 그것도 걷기 중에 영화 줄거리와 결말을 보는 내 모습이 돌연 떠오른다. 나에게 꼭 집어달란다, 수능에 나올 작품들만. 중편 분량에도 못 미치는 소설을 혹 가다가 추천하거나 충분한 시간을 주어 과제를 내면 “이걸 언제 다 읽어요?”라며 지겹다는 낯빛을 단번에 드러낸다. 현대소설은 너무 길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데다 주제가 애매해 문제 풀기 어렵다나······ 고전소설은 글자가 아니라 기호 같다고······ 지겹지 않도록 강약을 조절하며 한껏 신나 가르침에도 괴로운 표정으로 시간을 견디는 학생들에게 나도 조금씩 지쳐 간다. 비단 소설 외에 다른 장르라고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의 이야기꾼 전기수들은 낭독의 귀재들이었나. 그들은 얼마나 맛깔나게 지은이의 숨은 의도까지 찾아내 상상력을 더 보태 구연했을까? 소설책을 구하기 힘든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 시대의 애독자들은 세책점에서 신간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가슴 저민 스토리에 같이 공감하고 감동 어린 몸짓으로 전기수들에게 반응했다. 장터나 마당에 앉아 전기수에게 귀 기울이는 애독자들이 있는 현장으로 마구 달려가고 싶어진다.

   “영웅소설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게 놀랍지 않나요? 옛날에는 남성 중심 사회였잖아요. 그러나 여러분이 만난 홍계월전에서는 무엇보다 오랑캐와 싸우는 계월, 평국의 활약이 두드러지죠······.” 

   오늘 읽은 고전 소설은 그렇게 재미없는 소설이 아니었다. 그 시대를 앞서가는 근대적 가치를 담을 줄 아는, 진보적 소설인 동시에 핫한 소설이었다. 도적 때문에 강에 버려진 계월이 조력자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구출되고, 신분을 감추기 위해 남장한 긴장 모티브도 있었고, 여성이 중심인물이 되어 나라를 구한 박진감 넘치는 활약의 절정과 사이사이 평국과 보국의 쿵쿵 로맨스와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해피 엔드까지······. 

   하나 내 생각과 달리 나는 다른 색깔의 언어로 학생들을 간곡하게 유혹해야 했다. 

   “얘들아, 홍계월전 만화책으로 나온 것도 있으니 그걸 보면 좀 쉽게 이해가 될 거야.” 

   학생들에게 제시한 유혹 계책에 씁쓰레하면서 ‘지금의 학생들은 영상세대들이잖아. 난 합리적 제안이라고 봐’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다가도 잠깐이나마 청중을 휘어잡는 전기수가 못 된 아쉬움이 물결 가득 밀려온다.

   문장 하나에 눈빛이 살아난 아이들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밤을 새워 소설을 읽고 감명 받아 울었다는 학생들은 희귀식물 채집하듯 아주 이따금 발견한다. “왜 소설을 읽기 싫어하니?” “재미없어서요.” 이런 즉답을 들을 때마다 내 미래 독자가 점점 두려워진다. 만약 내 소설을 읽고도 이런 반응들이라면······.

   떠들썩한 수업이 끝나면 바스러진 육체에 기를 불어넣듯 긴 심호흡을 해본다. 돌아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 출근한다. 내 글쓰기의 비롯한 공간으로. 해거름은 벌써 지고 내가 앉은 의자 뒤 창문에 어둑한 그림자가 차오르기 시작하면 육체와 정신이 어느 정도 지친 상태에서 한 가닥 정신 줄을 잡으려고 집중하는 나를 발견한다. 재미없는 소설은 절대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한번은 자주 가는 카페에서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카페 주인을 만났다. 그 카페는 북 카페가 아닌데도 여러 문학책이 켜켜이 진열돼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녀가 소설도 많이 읽었으리라 생각했다. “소설책을 자주 읽으시나 봐요?” “아뇨, 소설책보다는 시나 수필집을 읽어요.” 질문한 내가 민망스러워 나도 모르게 건드리지 말아야 할 본질을 건드리고 말았다.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군요.” "네, 하루하루 사는 것도 힘든데 소설까지 읽어 복잡해지고 싶지 않아서요. 등장인물들의 처절한 사연들에 빠져들기보다 머리가 아파져 잘 읽게 되지 않더라고요. 그냥 짤막한 내용이나 가볍게 읽는 게 마음에 힐링 되죠.”

   그럼에도 밤하늘에 별을 찾듯 희망을 오늘도 나는 찾는다. 소설이 진짜 좋아서 즐겨 읽는 사람들이 없지 않을 거였다. 드문드문 만나게 되지만 여름날 무더위에도 추운 겨울에도 카페나 도서관이나 작은 책방에서 애독자들이 들고 있는 소설책에서 나는 적지 않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애독자가 되었다가 그중에 소설이 좋아서 쓰는 사람들도 생겼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좋다기보다 삶을 살아가듯 덤덤하게 쓴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성취감이 주는 도취에 중독되었다고 해야 하나. 매번 미완의 마무리라도 인쇄를 누르는 그 몇 초의 순간, 검은 활자로 도배된 종이가 쓰륵쓰륵 쌓여 가는 그 찰나의 맛이 고된 시간을 투쟁했던 나의 연대기에 스스로 위로받고, 어쩐지 나도 모르는 상상이 시작될 것만 같아서, 라고 봐야 하나······. 

   키보드를 한참 두드리며 서사의 세계에서 헤매다 농익어 가는 밤과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의 경계에서 나는 컴컴한 어둠 속을 뚜벅뚜벅 걷는다. 적요한 거리는 이제 새벽 어스름 녘에 퇴근하는 나를 주시한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짙은 그림자에 잠든 건물들과 다문다문 불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에 지쳐 잠들지 못한 나무들을 등지고, 쓰레기수거차가 골목을 비집고 서둘러 달린다. 한두 건물 지나면 ‘임대’라는 노란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비어 있는 공간에는 어둑한 물체들이 굴곡진 서사를 안고 버텨낸다. 정적을 깨는 건 간간이 스치는 자동차 바퀴소리와 발정 난 고양이들의 자지러진 소리뿐이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다 나는 깊숙이 간직한 그리움을 안고 스르륵 잠이 들고······ 그렇게 꿈꾸다 나는 바다를 만나러 바다를 향해 내달린다.


   바다를 만나면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돌아오는 게 태반이었다. 노트북의 배터리를 가득 충전해 출발하지만 정작 노트북은 꺼내 보지도 못하고, 구멍 난 마음들만 더욱 확인해야 했다. 그렇다고 아주 빈손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내가 바로 깨닫지 못할 뿐 핍절한 내 삶에 녹아들어 일주일을 살아가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주 5일을 학생들을 가르치며 퇴근과 출근이 반복되는 공간에서 글을 쓰고 정작 그리워하던 바닷가에서는 썼던 것을 잊기 위해 바다를 찾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여류 작가 린드버그는 바다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사색에 잠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화려한 유혹 앞에 속수무책 혼을 빼앗긴 게 틀림없었다. 

   날것의 바다, 정제되지 않은 바다, 바다는 언제나 벌거벗은 육체를 들이밀었다. 거리낌 없는 바다에 움츠러드는 건 오히려 나였다. 집착과 가식을 내려놓으라고 해변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밀물이 되어 쓰르륵 충고했다. 진실의 대가는 소금기 가득 담은 바닷물처럼 짜고 쓰디쓰다. 진실을 구현하는 소설, 심해 깊이 숨겨진 정체들을 밝혀야 하는 소설, 인물들을 향한 지대한 관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릿한 바다 향기로 먼저 나를 맞은 정오의 바다는 온몸으로 파닥파닥 뛰어올랐다. 은빛의 난무는 태양을 따라 한층 도드라져 멈출 줄을 모르고, 오늘도 눈에 익은 진한 푸른빛의 수평선 해도는 또 다른 누군가의 도발로 바다에 선을 긋고 생경한 길을 만들었다.

   푸르디푸른 저 멀리에서부터 하얀 메밀꽃이 피어올랐다 사그라졌다. 파도는 일정한 간격으로 몽돌해변에 닿았다가 다시 밀려나기를 지겹도록 반복한다. 비죽 솟은 바위에 느슨하게 부딪힌 파도는 잠시 물러갔다가 드센 힘으로 다시 바위를 들이친다. 

   바다를 처음 만난 느낌은 뭐랄까, 어마어마한 광활함에 놀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동시에 색다른 세상의 한 페이지는 낯선 세계로의 방문처럼 잔뜩 호기심을 남발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날선 바다에 불편했고 무한정 스며드는 날것들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피부에 와 닿는 센 소금기가 그랬고, 파도를 안고 들이치는 생 비린내가 그랬고, 갯벌의 역한 냄새가 그랬다.

   어린 시절, 나를 설레게 만든 건 선창가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와 넘실대는 파도를 가르는 배들이었다. 수평선 너머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며 나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배처럼 훨훨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배말뚝의 고박(固縛)처럼 내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고, 머뭇거리다가 단지 너머를 향한 그리움만 가득 안고 돌아왔다.

   언젠가 아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표상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감춰진 것이 많아 바다가 무섭다고 했다. 그리고 가라앉음이 본질이 아니냐고 했다. 가라앉은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잠수부들이 그러하듯 훈련이 필요할 것이라고, 그럼에도 우리가 접근 가능한 바다의 영역은 제한적이라고······.


   망망하고 굵직한 바다에 하얀 부표가 물결에 떠다닌다. 짜디짠 소금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일상을 천연히 살아가는 생물들이 바다를 에워싼다. 뜨거운 태양에 고무된 갈매기들도 나름 지쳤는지 해변 가까이 바위들을 찾아 오수에 젖어 있다. 바다에 순응한 개체들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늘 인간 문제는 순응하지 않는 데 있는지 몰랐다.

   이제 바닷가 마을에는 고기를 잡는 본토박이 사람들은 점점 사라지고, 횟집들과 민박과 펜션이라는 큼직한 글자를 내건 생계의 현장만 씨름한다. 포구에 그물을 깁는 거친 손등들은 먼 나라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두려움과 기대를 안은 눈망울을 굴리는 다문화 노동자들이 저들만의 사연을 안고 다문다문 서사를 만들어 갔다. 저들에게 바다는 어떻게 기억되는 것일까? 결핍을 채우러 노동의 고된 현장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거친 삶처럼 바다를 기억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바다를 보며 만선의 꿈을 안고 고국의 바다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타국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묵묵히 응원할 뿐.  

 

   해거름의 바다는 행간의 의미를 찾게 만든다. 마음을 휘젓는 화려한 놀을 바라보며 그 어느 누구도 숙연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감미로운 오렌지빛 하늘가에 열기 식은 저녁 빛이 깜박이면 수평선 너머로 강렬한 집어등이 하나둘 저녁을 밝힌다. 집어등이 없었다면 하늘과 바다가 맞물린 수평선을 짐작조차 못 했을 것이다. 하늘과 하나가 된 바다는 빛나는 별들과 달빛을 물결에 투영한다. 

   우리의 인생처럼 바다에도 발단이 있고, 전개가 있고, 위기가 있고, 절정이 있고, 결말이 있을까? 꾸밈없이 벌거벗어 보인 바다가 어떤 때는 불편했다. 바다는 나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냥 투명하게, 천진하게 벗어 보였다. 나는 바다가 준 것들을 선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내가 본 바다는 지극히 나의 관점으로만 본 바다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르게 바다를 만났을 것이다. 배에 가득 고기들을 싣고 돌아오는 어선처럼 받은 선물들을 안고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다.

   바다는 요약이 없다. 

   전체가 스토리고 전체가 행간이다. 파도가 행간이고 내밀한 바다 향내가 행간이다. 시험에 출제되는 문항들과 달리 저자의 의도보다는 독자에게 감상이 오롯이 맡겨진다.

   어둠 속에서 메밀꽃이 다시 뽀얀 포말을 일으키며 나를 향해 달려든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바다와 다시 오는 다른 날의 바다는 어떻게 될까? 내가 바뀐 것일까? 바다가 바뀌는 것일까? 밀물과 썰물이 무한히 반복되는 공간에서 지금 오는 파도와 다음에 오는 파도가 다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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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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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바틀비
    감동했어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학창시절, 시험을 보기 위해 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고 두려웠다. 다들 글만 읽으면 문제의 답이 보인다는데 나는 아무리 읽어도 납득이 되지 않아 되려 탐구 과목만큼이나 암기할 것이 많은 과목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걸 즐거워하면서도 시험을 위해 읽는 텍스트들에 한해서는 과정을 기뻐할 수 없었다. 정독하는 시간이 사치스럽고, 오히려 내게 불확실한 결과로 가는 길목을 터주는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글에서도 보이다시피, 그런 교육 환경에서 자라면 자발적으로 소설이라는 삶의 전체성이 담긴 텍스트를 선택하기가 선뜻 쉽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작가는 요약본을 바라는 아이들에게 탄식하고 있지만, 이것이 내게는 책망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되려 위로 받는 느낌도 든다. ‘바다는 요약이 없다.‘는 문장에서 특히나 눈이 뜨이는 기분이다. 우리가 아무리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와중에, 과정과 덧붙여지는 설명들을 불필요 하다며 제거해나가도 요약이 없는 바다처럼 인생에는 줄곧 파도가 들이치고 그 과정 사이에 물결은 불가피하다. 물에 잡힌 주름들이 우리의 삶에 남는 길고 짧은 에피소드, 그러니까 꼭 기억처럼 남는 것 아닐까. 자신의 삶을 요약해버리고자 하는 사람 없듯이, 또한 용건과 정보로만 기록되는 인생이 과연 인생 같지 않듯이, 우리는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진 인생을 담은 소설을 줄곧 붙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읽었습니다.

    • 2024-11-03 16:13:46
    바틀비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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