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작성일 2025-06-01
- 댓글수 0
[문장웹진 REWIND]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문장웹진》2007년 5월호)
서경석(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문장웹진>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자연의 질서와 공동체의 관습, 그리고 어민으로서의 노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고향’인 것이다.
그러니까 떠날 수 없는 세대와, 어떡해서든 떠나야 하는 세대가 완충 세대 없이 맞붙어 버린 경우인데, 하긴, 험한 바다 일은 죽어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하여 별로 내켜하지 않던 아들딸 육지의 학교로, 학원으로 올려 보낸 게 자신들이기도 하니 딱히 누구를 탓하기도, 세상을 한탄하기도 뭐합니다.1)
이러한 삼도 노인들이 어떤 고립감 혹은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섬을 떠나 보려는 용기를 낸 것이다. 그 여행기가 바로 이 소설의 내용이다. 노인회에서 여행은 쉽게 결정되었으나, 장소가 문제였다. 불국사, 설악산, 63빌딩, 놀이공원, 모 랜드, 금강산, 일본, 대만, 태국 등이 후보에 올랐다가 최종적으로 지리산과 제주도로 결정되었다. 바다만 보아 온 남자 회원들은 지리산을, 여자 회원들은 제주도를 원했다. 노인회 집행부는 역만에게 찾아온다. 이야기의 중심인물이자 화자인 이 섬의 청년회장 역만은 어쩔 수 없이 이 여행의 ‘리더 겸 가이드’라는 책무를 맡게 된다. 역만의 사정은 어떠한가?
그는 장인의 퇴직금까지 쏟아부어 참돔과 우럭 양식을 하였다. 그러나 최근 병이 돌아 죽은 물고기들을 건져 내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치어를 지나치게 많이 넣어 그 욕심 때문에 병이 났다고 비난하는 아내에게 변변한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처지라,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노인회의 여행을 수락한다. 아내가 격렬히 반대했지만, 여행은 시작되었다. 우리 소설에서 여로를 중심 플롯으로 삼는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생이 곧 여행이라는 비유가 투영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여로는 작품의 주제를 암시한다.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여로인 것이다. 잘 알려진 근대 초기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북방의 외딴 지역으로 떠나는 젊은 청년의 이야기이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그 여행에 내재된 의미이다. 그리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젊은이의 편지가 여행의 결말을 맺는다. 같은 작가의 「만세전」은 회귀형의 여로이다. 동경에서 유학하던 학생이 아내의 병으로 급히 귀국하여 식민지 조선의 여러 비참한 실정들을 확인하고 안타까워하며 다시 돌아가는 구조이다. 여행 자체가 조선을 두루 살피고 비판하며 자기 분발, 혹은 자아 각성의 염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도시로 떠나온 젊은이의 고향행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잠시 들른 고향에서 느끼는 고향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책감,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도시의 삶에 적응해야 하는 어떤 타협이 그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 유명한 구절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무진기행>2))를 기억해 보자. 이러한 여행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여행을 통해 그간 부인되었거나 외면했던 ‘자신’, ‘고향’, 혹은 식민지 조선을 다시 한번 대면하고 ‘지양’한다. 이는 일종의 부정의 부정으로서, 그간 부인되었던 것들에 대한 보람찬 ‘지양’, 최소한 ‘타협적인’ 극복의 결말을 보여 준다. 그들의 여행은 ‘보람이 있었다’.
이렇듯 살펴보면 앞선 소설들의 여행에 비추어 삼도 노인회의 여행은 과연 무엇일까. 그 차이를 암시하고자 작가는 작품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번에 삼도(三島) 청년회장 김역만이 삼도노인회 회원들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왔는데, 돌아온 후로는 서로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객선을 타고 항구로, 다시 버스를 이용하여 지리산으로 이동했다. 가이드인 역만은 아내가 화가 난 것이 마음에 걸리거나, 막상 집을 떠나 여행을 하게 되니 홀가분하다는 등의 한가로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노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또 안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요구는 이러했다. 덥다, 춥다. 목마르다, 체한 것 같다, 좀 쉬자, 걷자, 신발이 안 보인다, 안 묵을란다, 국이 짜다, 차멀미 난다. 일행은 선암사를 들른 다음 매화마을과 악양 최 참판 댁을 거쳐 쌍계사 근처 숙소에 도착한다. 여기서 사달이 난다. 일행 중 비교적 젊은 편인 집사 할머니가 “절 한 군데 갔으믄 됐지, 잠도 절에서 자는 것은 뭔가.” “우상 옆에서 마음이 편하겄소. 옮깁시다.” 두 사람의 신자 때문에 열댓 명의 일행 모두가 함께 백 리나 떨어진 온천 여관으로 옮겨야 했다. 첫날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둘째 날, 제주도로 출발했지만 일행들은 모두 고향 섬에 두고 온 일들을 더욱 걱정했다. 역만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행기로 제주도에 도착한 후, 점심 식사 때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오분자기탕을 먹던 중, 예전에 고기잡이를 하다 삼 일 동안 표류하다가 기적적으로 제주도에 닿았던 신 노인이 순식간에 소주에 취해 버린 것이다. 술에 취한 기색을 보이자 사람들이 만류했고, 결국 신 노인은 소주 두 병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역만은 노인을 업고 뛰었다. 이어진 일정으로, 중산간 지대의 목장에서 말을 타기로 되어 있었으나, 높은 곳은 싫다는 노인들 때문에 역만만 말을 타고 이동했다. 고난은 저녁 식당에서도 계속되었다. 여행사에서 정해 준 식당은 자리돔구이 전문점이었다. 자리돔은 삼도에서도 거의 매 끼니 구워 먹던 생선인데, 이곳에서는 자리돔의 비늘을 제거하지 않은 채로 굽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왜 비늘을 벗기지 않고 구웠느냐는 노인회 부회장의 항의가 이어졌고, 젊은 여종업원은 원래 그렇다는 답변으로 맞섰다. 대화는 자칫 성희롱으로 여겨질 수 있는 위험한 수준까지 이르렀고, 주인과의 긴급 조정 끝에 다금바리회를 추가로 제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행 중 평생 어부였던 노인이 다금바리는 하찮은 생선이라며, 똥을 먹는 고기라고 지적했고, 결국 주인마저 노인들과 함께 회를 먹지 않기로 하고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 채 또 하루가 흘러갔다. 마지막 날, 역만이 일정에 있던 가두리 양식장 견학을 잠시 다녀온 사이, 일행들은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근처 공원을 산책하며 불만을 키웠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심심할 수 있다니. 대체 이런 여행은 왜 온 것일까?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그 순간, 제주도 하늘에 때마침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역만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시청에 노인회를 환영하는 축포를 쏘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거짓말을 한다. 좋은 구경거리가 생긴 듯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교회 집사 노인과 불교도 노인 사이에 설전이 벌어진다. 하나님이 놀라셨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비롯된 기도와, 이를 비아냥거리는 노인 사이에는 거친 말들이 오고 갔다. 이로써 여행은 아무런 재미도, 휴식도 되지 못했으며, 서로에게 낯선 이질감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에 역만은 마지막 수단을 강구한다. 모두를 극장식 술집으로 데려가 붉고 푸른 조명 아래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함께 술을 마시게 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역만은 “피로와 여독, 이곳은 관광특구, 노래와 술, 단합과 즐거움 따위의 단어를 적절히 조합하여 멘트를 했다.” 이제 억지로라도 마무리가 되는 듯했다. 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할 수 있다면 술을 마시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수영복 차림의 무희들이 무대에 등장하면서 일행은 혼란에 빠진다. 눈뜨고 보기 민망하고, 늙은 남편이 넋 놓고 바라보는 모습에 괴로워하는 할머니들의 동요가 시작된다. 역만은 중도 퇴장하면 이곳에서 벌금을 부과한다고 위협한다. 역만은 혼자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여행을 마무리했지만, 노인들은 서로 간에, 혹은 바깥세상과의 어떠한 소통이나 공감도 없이 여행을 끝마쳤다.
이러한 여행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자신들의 고된 삶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을 도시로 떠나보내고, 그들을 위해 평생을 노동 속에서 희생하며 살아왔다. 그들의 삶에는 고립과 가난, 그리고 고독한 노동만이 존재했다. 변두리, 주변부의 ‘내 몫 없는 삶’, 자신의 ‘활기찬 자리’가 없는 삶을 감당하며 살아온 것이다. 이제 이러한 낡은 삶에 새로움을 불어넣을 방법은 없을까. 삶의 폭을 넓히고 세상과 소통할 방도는 없을까. 바깥세상으로 나가 보자. 그리하여 그들은 여행을 택했다. 물론 여행은 비유이다. 현재의 삶을 더욱 나은 활기 있는 방향으로 ‘극복’, 즉 지양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그러나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들의 초라했던 삶 자체가 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부정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 어느 과정도 만족스럽지 못했고, 즐거운 사건 또한 없었다. 말들은 엇갈리고, 소통의 길은 막혀 버렸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인정받는 어떠한 경험도 없었던 것이다. 사회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으로 포섭되지 못하고, 주변부의 덧없는 존재로만 남겨진 경험이었다. 가 보려 했던 수많은 장소들조차 결국 그들을 외면했고, 절에서의 숙소 사용마저 의견이 갈리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 가야 했다. 식당 종업원과는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불쾌한 경험을 했으며, 만나는 사람들의 몰인정에 분노했다. 가는 곳곳마다 낯설고 어색했으며, 그리하여 스스로에게조차 불편함을 느꼈다. 스스로의 삶을 부정하며 자식들을 도시로 내몰았던 삶, 그 희생적인 삶에 활력을 되찾으려 했던 시도는 또다시 좌절되었다. 도약하려 했던 여행은 오히려 그들의 삶을 더욱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앞선 소설에서 여행이 어떤 바람직한 ‘위로의 지양’을 이루어 냈다면, 여기서는 한 번 부정된 삶이 다시 부정되는, 부정의 부정이되 하향적인 지양이라는, 앞선 소설들과는 상반된 결말을 보여 준다.
알랭 바디우는 이러한 삶을 ‘몫 없는 자’의 삶이라 칭하며, 현대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소외된 자들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섬에서 평생토록 노동에 시달리며 자신을 소진해 온 이 인물들을 낙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환상의 투사에 불과하다. 이러한 추락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만이 그들의 ‘실재’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며, 그 실패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정면으로 진실하게 새기는 행위이다. 그들은 실로 고귀하다.
1)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3000000&bid=0003&act=view&ord=B&list_no=1694&nPage=1&c_page=
2) 문학동네, e-book, 42/100.
|
[문장웹진 REWIND]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
추천 콘텐츠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소심록(素心錄)』, 그 마음의 울림과 여운 정혜경 연주홍빛 표지 배경에 민들레 씨앗이 날아다니고 있다. 표지 왼쪽에는 한자 세로쓰기로 素心錄(소심록) 柳達永(류달영) 著(저)라고 저자가 직접 쓴 글씨가 굳건하게 새겨져 있다. 성천(星泉) 류달영의 수상록 『素心錄(소심록)』(경문사, 1961)이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우선 성천의 수상록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웠고, 소박하면서도 여운 있는 표지가 마음을 끌었다. 장정을 맡은 월전 장우성은 농민이 ‘생각하는 민들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성천의 뜻을 이렇게 담았다. 1961년 초판본 민들레 씨앗 하나가 이제사 마음터에 내려앉았다. 저자 성천 류달영(1911~2004)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농촌 계몽의 최용신 소전』을 저술해서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양정고보 스승이었던 김교신은 최용신을 만나 보았던 성천에게 이 책을 쓰도록 권유했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직 중이던 성천은 제자들에게 최용신 전기를 읽히고 싶었다. 일본 경찰 검열을 의식하며 어려움 속에 완성한 최용신 전기는 초판 1천 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품절되었을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에 민족 사랑과 계몽 운동의 불씨를 심어 준 책이었다. 그 시절부터 성천의 글은 독자를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되어 6·25전쟁과 4·19혁명 후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발표했던 성천의 글이 했던 역할을 『소심록』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소심록』은 ‘평소의 마음을 기록한 책’이란 뜻으로 근래에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모아 내었다는 겸손한 제목이다. 성천은 이 글모음이 자신에게만이라도 사람다운 사람을 위하여 훗날까지 격려하는 힘을 가질 것으로 믿었다. 그 ‘격려하는 힘’은 충분히 전해져 강렬한 울림으로 왔다. 가로 12.5cm 세로 19cm의 이 아담한 책 405쪽에 51편의 글이 빼곡히 담겨 있다. 『소심록』의 글들은 1959년 3월부터 1961년 2월까지 이 년 동안 《사상계》, 《새벽》, 《사조》, 《신태양》, 《식량과 농업》, 《여원》 그 밖의 여러 잡지와 《조선일보》, 《대학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에 발표한 것이다. 이 책은 1961년 5월에 출간되었으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지 일주기가 되는 시점이었다. 마지막 장 ‘사월혁명’의 다섯 편은 혁명 때 쓰러진 꽃다운 젊음들과 같은 행진 속에서, 거친 호흡을 함께 하면서 쓴 글들이었다. 성천은 4·19혁명은 학생들의 피로 성공했으니, 그 정의로운 피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깊은 존경으로 명복을 빌었다. 성천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특별했던 점은 나라의 현실에 대해 고뇌하면서 비전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현실에서의 타개책까지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성천은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 사토
- 관리자
-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거대한 사랑의 기록 - 김명순 창작집 『생명의 과실』 박소란 사진1. 『생명의 과실』 (한성도서주식회사, 1925) 표지 지난 2025년은 『생명의 과실』(한성도서주식회사, 1925)이 출간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생명의 과실』은 김명순(金明淳, 1896~1951 추정)이 쓴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창작집이다. 국내 서지 기록에 등록된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 문학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명의 과실』도 김명순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때문에 100주년은 터무니없이 고요했다. 별다른 의식이나 언급 없이 우리 문학장은 지난 한 해를 지나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전 김명순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난과 핍박을 떠올리게 된다. 혹여 김명순이라는 선구적 예술가를 아직까지도 과거 그늘진 그 자리에 세워 둔 것은 아닐까, 못내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조금만 검색을 해 봐도 대략의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김명순은 쉽게 소거될 수 없는 이름이다. 1917년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문예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친 한국 문단 최초의 여성 작가다. 1920, 30년대 누구보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친 김명순은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하는 등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피아노를 잘 치고 독일어로 곡을 만들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신문기자, 영화배우로도 활동할 만큼 다재다능했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첩'이라는 이유로,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자유연애’를 주창한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을 받았다. ‘부정한 혈액’ ‘문란한 여자’ 등 모욕적인 꼬리표가 일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공부와 집필에 힘썼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힘겨움이 잇달았고, 결국 1951년경 일본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명순은 생전 시, 소설, 수필, 희곡(각본) 등을 한데 묶은 두 권의 창작집을 냈다.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회동서관, 1929 추정)이 그것이다. (세 번째 창작집을 준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과적으로 불발되었으며, 때문에 창작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도 상당하다.) 이 중 『생명의 과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으로 그 의미가 각별하다. 1 『생명의 과실』에는 등단작 「의심의 소녀」를 포함해 소설 2편, 시 24편, 수필(목차에는 ‘감상(感想)’이라 표기되어 있다) 4편이 수록되었다. 소설 「돌아다볼 때」나 시 「유언」, 「저주」, 「탄실의 초몽」, 「유리관 속에
- 관리자
-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100년 전 멋진 신혼여행의 기억 -염상섭의 『해바라기』와 나혜석의 결혼 전후 박진영 노처녀 결혼 풍경 신부 나이 스물넷이면 노처녀인 시절이었다. 서른넷의 신랑이라고 첫혼인일 리 없었다. 암만해도 결혼식을 버젓하게 치러야 했다. 둘 다 유명 인사다 보니 결혼 소식이야 진작에 왁자그르르 퍼졌고, 신문에 신랑 신부 사진까지 실렸건만 그래도 아쉬웠다. 내친김에 결혼 기사 아래 청첩장을 내기로 했다. “저희는 목사 김필수 씨의 지도를 받자와 4월 10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옵나이다. 이날에 귀댁 왕림의 광영 주심을 엎드려 빕니다. 경신년(1920) 4월 3일, 김우영 · 나혜석.” 신문에 청첩장을 광고한다고 발칙한 일은 아니다. 대체 뉘 집 아들딸인지 이름이 없는 게 문제다. 1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청첩장은 신랑 신부가 아니라 부모 이름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무릇 결혼이란 당사자들의 일이기에 앞서 엄연히 집안 대사인 까닭이다. 요즘에야 신랑 신부가 나란히 팔짱 끼고 걸어 들어가는 일도 흔하다지만 여태 청첩장 문화는 그대로 아닌가? 이만한 기세라면 혈기 넘치는 청년들이야 박수 칠 법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못마땅하다 못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둘 다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 내로라하는 집안 자식들이었다. 그나마 넷째, 다섯째 자식이라서 불행 중 다행이지만 대체 무슨 남부끄러운 짓이란 말인가? 시아버지는 기어코 폐백을 물리치고 술잔이나 기울이러 나갔다. 하기야 목사 주례에 답사랍시고 감히 신부가 한마디 아니라 일장 연설을 떠든 예식이었으니 결혼식이고 피로연이고 애당초 안 들어선 게 차라리 나은 지경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신랑 신부는 이튿날 식전 댓바람부터 양가에 차례로 들이닥쳐서는 신혼여행 떠난답시고 들썩여 놓고는 훌쩍 기차를 탔다. 신부는 두 주일쯤 예정이라고만 무지르고는 어디로 가는지 신랑에게도 도통 알려 주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잡아끌다시피 했다. 이쯤 되고 보면 아무래도 웬만한 신혼여행이 될 리 만무했다. 신랑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의 변호사 김우영, 신부는 진명여학교 최우등 졸업생이자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의 화가 나혜석이다. 사진1. 나혜석 결혼사진 (1920) 출처: 수원시립미술관 남도 신혼여행 사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전에서 잠시 여관에 들렀다가 호남선으로 갈아탄 신혼부부는 한밤중에 목포에 도착했다. 열 시간 넘게 걸린 곤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인력거 잡아타고 곧장 여관에 들어서서는 하녀 이름부터 대는 신부가 영 수상쩍다. 초행길이 아니었던 셈이다. 신부는 3년 전 그 여관 2층에서의 하룻밤을 홀로 추억했고, 영문 모르는 신랑은 얼추 짐작이 나섰지만 섣불리 입을 열 계제가 아니었다. 아직 신혼 둘째 날 밤이었으니. 부산 유곽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하녀와의 사연인즉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신부는 3년 전 도쿄에서 다니던 학교를 빼먹고 홀로 바
- 관리자
- 2026-02-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