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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의 방식

  • 작성일 2025-07-01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해서. 



   누구에게나 방이 필요하지만


   중심인물인 이십구 년 차 중개업자인 김 씨는 “햇빛이 잘 들고 보증금 천오백만 원 정도의 방을 원하는” 손님을 위해 불광동 1-173번지를 찾아갔다가 그곳이 없어진 걸 보았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은 사라지고 “그곳엔 그저 오래된 잿빛 시멘트벽만이” 서 있었다. 어쩌면 김 씨라는 인물이 자신이 하는 일에 소신이 있지도 않고, 자신이 소개해 준 세입자들에게 관심도 애정도 없는 중개업자였다면 그 일은 그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 씨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며 직접 발품을 팔아 일대의 ‘지도’까지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의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 대단해 보이지 않는 불광동 1-173번지의 옥탑방, 그 방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새로 생긴 소명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 방에 살았던 사람들, 김 씨가 모두 세세히 기억하고 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런 전개 방식에서 독자는 작가가 공교히 마련해 둔 상황의 인과에 저절로 설득당해서 앞으로 김 씨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궁금해져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불광동 1-173번지는 ‘옥탑방’이었다. 여름에는 뜨겁고 겨울에는 추운 방, 대개는 임시 거처로 지내다 가는 방. 김 씨가 소개해 줘서 오 년 동안 그 방을 거쳐 간 사람들은 모두 이십 대 젊은이들이었고 독신 남성들이었다. 그 방을 떠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시인이 되고 싶어 했던 청년은 꿈을 이루었을까. 지금은 1-173번지보다 안전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그런 방에서 살고 있을까.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으며 많은 부분은 방, 즉 안전한 거주지로서 개념의 집일 가능성이 크지 않나. 누구에게나 필요하나 누구나 가질 수 없고, 더 나은 공간을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소설은 여덟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플롯을 염두에 둔 듯, 작가는 두 번째 장부터 다섯 번째 장까지 예전 세입자들을 찾아다니는 순차적인 이야기를 멈추곤 여섯 번째 장에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보여 준다. 장마다 소제목을 붙이고 이 장의 제목은 ‘고! 고를 해야죠!’. 나름대로는 친절한 부동산 중개업자라고 여겼던 자신을, 그리고 그 방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친 김 씨가 아직 한 명 더 남은 청년을 찾아 나서게 되는 감정의 인과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고 좀 이상하지만, 어쩌면 그사이 잠시 자신의 집까지 떠나서 아무에게도 증명할 수 없고 물질적으로도 도움도 안 되는 그 방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찾는 여정을 나선 김 씨를 독자가 응원하게 되고 그래 고, 계속 가 보는 거라는 말을 해 주고 싶어지게 되는. 

   김 씨는 자신의 집을 떠나서 어쩌면 그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는 옥탑방에 살았던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이 단순한 표면적 이야기 밑에는 김 씨의 존재에 대한 증명,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김 씨의 여정이 계속될수록, 그 방에 살았던 사람들의 공통점 한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제가 이사를 좀 자주 다니는 편이라서 말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말한다. 이 서글픈 진술은 그들이 1-173번지의 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뒷받침해 줄뿐더러 독자에게 잠시 멈춰서서 이런 질문을 하게 한다. 서울에서 이사를 자주 다녀야만 하는 이십 대의 삶은 어떠할까‧‧‧. 고향을 떠나, 어딘가를 떠나 이 지역에 방을 구할 때, 두 번째 장의 소제목 ‘나름대로 로망’이 있었던 사람들의 삶은. 갑, 을, 병, 정, 무.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김 씨의 여정은 타인에 대한 이런 관심이 생긴 독자의 여정 대신이기도 한 셈이리라.



   “묘하게 슬프면서” 박수를 쳐 주고 싶은


   김 씨가 만난 이십육 세의 마지막 청년은 명동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전단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김 씨와 그 옥탑방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그제야 김 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1-173번지를 기억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고”. 왜냐하면 그들이 너무나 “빡빡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뭔가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게 가혹한 일 같아서. 

   김 씨는 이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귀환의 여정에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이 단편 내내 김 씨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덧붙이고, 설명하고 되묻고 털어놓으며 자신의 장부와 지도를 들고 흔들어 보이기도 한다. 때때로 그 대상은 부동산을 찾아온 손님으로, 공무원으로 보이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짐작이 든다. 혹시 소설 내내 김 씨가 말을 건넨 사람은 독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방에 누워서 김 씨는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며 진술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먼지 쌓인 사무실에서 나름대로 로망 있는 합동결혼식을 준비하는 갑, 이 나라의 중년들을 멀티플레이어로 만들겠다고 목 놓아 부르짖는 을, 자신의 이름이 도용되는 것을 막고자 가로 뛰고 세로 뛰는 병, 요식업 종사자들의 엄지손가락 안전을 사수하기 위해 부루스타의 레바 리콜을 요구하는 정, 이 사회를 쿨 드링커들로 채워 건전한 음주 문화를 사수하겠다고 노래하는 무, 그리고··· 이제 와 새삼 그들을 찾아다니며 불광동 1-173번지에 살았던 것을 기억하느냐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냐고 애원하듯 물어보는 김 씨 자신. ““지금으로서는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조차 사실 잘 분간이 가질 않습니다. 분명 다섯 명을 만났는데, 꼭 한 사람을 만나고 온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오. 어쩐지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묘하게 슬프기도 하고, 묘하게 슬프면서 그게 또 웃기기도 하고···.””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한때 북한산이 내려다보이고 벌레가 많았던 그 옥탑방을 거쳐 간 청년들은 다들 어디선가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모두 이사를 너무 자주 다니느라 1-173번지 방을 기억하진 못해도, “필사적으로”. 이 소설을 이제 와 다시 읽으니 이런 마음이 저절로 든다. 모두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는. 이러한 마음이 드는 건 시대 때문일까, 나라는 독자의 지나친 감정이입 때문이었을까. 

   「지도에 없는」처럼 “이야기는 아주 엉뚱한 곳에서, 어쩌면 조금은 사소하달 수도 있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진정한 허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는 전혀 엉뚱한 데서 시작한 게 아니었으며 사소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지점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암묵적 전제가 필요하기도 할 터이다. 손수 만든 지도에서 1-173번지의 옥탑방이 어느 날 살아졌다, 라는 엉뚱한 지점에서 시작한 단편에서 작가가 보여 주고 싶었던 의미는 무엇일까. 거기 살았던 갑, 을, 병, 정, 무라는 다섯 청년의 삶은 십팔 년이 지난 지금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1-173번지의 옥탑방에는 “분명 사람이 살았었”고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김 씨뿐만이 아니게 되었다. 독자는 이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지켜본 기억의 목격자가 되었다. 거기엔 사람이 살았었고 거기엔 방이 있었고 그들이 꾸던 ‘나름대로 로망’, 꿈들이 거기에 있었다. 묘하게 슬프면서도 웃기기도 한 건 김 씨와 이십 대 청년들을 포함한 모든 인물이 아직도 그 꿈을 잃지 않고 분투하고 있으며 어딘가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자가 본 것은 주변에 있을 수 있는, 갑을병정무기경신임··· 등으로 명명한, 눈에 띄지 않는 타인들의 살아감의 증명 같은 게 아니었을까.

   2025년에 이 단편을 읽는 일은 그 시절 젊은 작가가 고심해 낸 응원의 방식에 동참해 ‘자신의 현재’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브이”를 만들어 보내는 일과 같을지도.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이 단편을 읽기로 한다. 이제 네 번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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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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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1
신년 기획좌담 3차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차별 구성 -1차: 책장 업고 튀어 -2차: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3차: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의명: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일 시: 2024년 12월 7일(토) 17:30~19:30 ㅇ 장 소: 온라인 zoom ㅇ 참여자 -사회자: 김준현(소설가, 목포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참여자: 이지용(단국대학교 HUSS사업단 연구교수), 이명현(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염승숙(소설가, 문학평론가), 이어진(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웹문예학과 객원교수, 웹소설 작가 레고 밟았어) 〈개회〉 김준현: 반갑습니다. 사회를 맡은 국립목포대학교 김준현입니다. 먼저 이번 좌담의 기획 의도를 다시 짚어 보는 것을 통해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래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과는 제도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다양한 ‘콘텐츠’, ‘웹’, ‘크리에이티브’ 관련 전공들이 두 학과 제도를 대체하고 있다. 반대로 전통적인 ‘문학 산실’인 국어국문학과/문예창작학과는 점점 다른 교육 체계로 변화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시대, 교육 현장에서 교강사와 학생들이 어떻게 이러한 체제 변화를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본다.” 기획 의도는 이러하고, 이러한 의도를 참가자 선생님들과 공유하며 먼저 자기소개를 하면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 맥락에서 제 소개를 드리면, 올해 4월부터 국립목포대학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제 전 직장은 서울사이버대학교 웹문예창작학과였고요. 이 기획 의도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야말로 학과의 이름에 ‘웹’이 들어가는 학과였습니다. 제가 올해 4월부터 일하게 된 국립목포대학교도 아마 국립대 최초로 문예창작에 웹소설, 웹문예교육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겠다고 하여 직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웹문예창작학과 학과장으로 3년 정도 있었고요.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이지만, 웹소설 특화를 표방한 학과에서 두 학기 정도 일한 셈입니다. 4년 정도를 소위 말해 ‘전통적인 문예 창작 교육’이 아닌 새로운 문예 창작 교육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요. 웹소설 작가이기도 하고, 데뷔는 2012년에 장르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 문학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가 사회를 맡게 됐고, 패널로 초대받게 된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반갑다는 말씀드립니다. 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열심히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화면에 떠 있는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들마다 화면이 다를 텐데, 제 화면으로 보기에 제일 위에 떠 계신 분은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명현 선생님이십니다. 이명현 선생님 자기소개를 한번 받아 보겠습니다. 이명현: 안녕하십니까.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과 문화콘텐츠를 가르치고 있는 이명현입니다.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2016년부터 근무했고,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면서 고전문학

  • 관리자
  •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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