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그 슬픔의 음역
- 작성일 2025-08-01
- 댓글수 0
[문장웹진 REWIND]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그 슬픔의 음역
-강성은의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문장 웹진》 2008년 6월호)
최하연(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떠오른 첫 문장은 이랬다. 이 첫 문장의 그 앞 문장은 없으므로, 돌아갈 곳이 없으니, 불능의 세계인데, 나는 없는 출발점으로 자꾸 돌아가고 있다.
어쩌면 나는 몇 덩어리의 문장을 쓴 뒤에, 원래의 첫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는지도 모른다. 쓰던 글을 재차 읽어 가며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면, 그땐 첫 문장을 또 고치게 될까. 그렇게 고친 문장이 사실 저 앞의 문장이라면―아니 고친 뒤에 읽어 보니 아까 것이 나은 듯싶어 고민 끝에, 원래대로 돌려놓은 문장이라면―출발점 없는 출발점은 글 안에 있고, 여전히 불능한 첫 문장은 불능을 모른 채 남게 될 것이다.
2008년 5월호 문장 웹진엔 강성은의 시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이 실려 있다. 이 글의 진짜 출발점은 사실 여기이다.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
구름의 얼룩진 편지를 읽은 어떤 이들은
울음을 멈추고 검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도시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녹색의 박쥐 떼가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창백한 입술을 잃은 자들은
곧 두 손과 머리털을 잃고 두 눈알과 심장을 잃었지요
점점 희미해져 우리는 우리를 잃었지요
당신과 나의 비밀 이야기는 입속에서 입속으로
공기와 밤의 중얼거림을 통과하고
얼룩진 편지는 얼룩 고양이가 물고 밤의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
빗방울은 때로 격렬하게 내립니다
한 방울 뒤에는 수천만 우주의 모든 물방울들이
뾰족하고 오래된 첨탑 위의 편지는
전해 오는 이야기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 갑니다
우리는 첨탑 위로 답장을 보내는 법을 모르고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 전문
회고가 실패의 알리바이를 지워 내듯, 전망이 이 지울 수 없는 실패의 유예이듯, 지속 가능한 내일에 대한 일반의 믿음 또한 불능을 모르는 불능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언제나 힘이 셌다. 우리는 그것을 산문의 세계로 불렀고, 시는 산문의 세계로부터 이격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가 그곳에서 늘 첫 문장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시작한 시는 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산문의 세계로 붙잡혀 돌아오는 “내일의 악몽”이다.
이 정황에는 하나의 커다란 허방이 있다. 누가 누의 내일이 될 수 있는가. 혹은 되어야만 하는가. 시인은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발견한다. 그런데 빙점은 과연 물의 내일일까, 얼음의 내일은 아닐까. 그렇다면 녹는점은 과연 누구의 자정일까. 불가역성을 견고한 신앙으로 한 우리 세계의 언어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질문은 그 자체로 악몽이 된다.
시인은 오직 이 사태의 음역만을 듣는 자이다. 듣지만 알 수는 없는 자이다. 감각하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할 수 없는 세계. “내일의 악몽”은 우리가 이미 꾼 꿈이지만, 언어로는 재현 불가능한 악몽이다. 재현할 수 없으므로, ‘오늘의 우리’는 그 자체로 ‘어제 꾼 악몽이’다.
강성은의 「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은 《문장 웹진》에서 그의 첫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로 자리를 옮긴다. (《문장 웹진》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한국문학의 비옥한 못자리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은 여기에서도 확인된다.) “내일의 악몽”은 시집 곳곳에서 변주된다.
어제는 취한 자였는데
오늘은 병든 자로구나
-「안식일의 유령들」 중에서
무한히 이어진 격자 안에 이 문장을 옮겨 보면, 취한 자와 병든 자가 한 칸에 한 명씩 순서대로 잘 들어갈 것 같지만, 몇 번 지나지 않아 취한 자와 병든 자는 한 격자 안에 존재하게 된다. 오늘은 내일의 어제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이 내일의 어제가 되면 병든 자는 취한 자여야 한다. 따라서 무한의 격자 안에서 우리는 병든 자이면서 동시에 취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분명히 다르다. 그렇다는 것은 격자 안에 하나의 격자를 더 만들거나, 아니면 격자 위에 하나의 격자를 더 쌓아 올려야 한다. 현실을 두 배로 늘릴 수는 없으므로, 두 격자 중의 하나가 현실이라면 다른 하나는 악몽이다. 이렇게 구성된 이중 격자를 시인은 “내일의 악몽”이라 명명한다. 우리는 매일은 “내일의 악몽”일 뿐이다. 오직 유령만이 이 격자 사이를 유영한다.
태어나자마자 길 위에 버려지는 아름다운 발, 발자국들
-「잠의 형제」 중에서
발과 발자국 사이의 인과는 비교적 분명하다. 발이 디뎌진 뒤에라야 발자국이 찍힌다. 그러나 “내일의 악몽” 속에서는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는 발이 찍어 놓은 발자국들로 가득하다. “태어나자마자 길 위에 버려진” 존재는 기능을 상실한 존재이다.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은 발자국을 남길 수 없는 발이라는 뜻이며, 걸을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발자국들은 이미 그곳에 있다. 한편, 거꾸로 생각하면 발자국이 발을 버린 것일 수도 있다. 찍히는 순간 과거가 되는 발자국은, 남겨진 것이 아니라 발을 버림으로써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역치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무엇이 무엇을 ‘낳음’이라는 숭고함에 의구심을 던진다. 아름답게. 발자국은 발이 남긴 “내일의 악몽”이고 발은 발자국이 지워지며 앓아야 할 “내 일의 악몽”이기에.
저 무거운 실들은 모두 그녀의 백발이라네 물레는 돌아가고 소녀는 비명을 지르고 늙은 여인은 노래를 부르고 창밖에는 눈이 내린다 하얀 머리 위에 또 하얀 머리칼 하얀 눈 위에 또 하얀 눈송이들
-「겨울밤」 중에서
이제 우리의 시는 시인의 몸을 통해 물성을 띠고, 이 물성은 가시적 세계의 구성 원리를 새롭게 포착해 낸다. 소녀의 “비명”과 늙은 여인의 “노래”는 “어제는 취한 자”와 “오늘은 병든 자”를 매개하며 서로 교감한다. 이 교감은 버려지는 “발”과 “발자국”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우리의 몸 안으로 한때 ‘비명’이었다가 한때 ‘노래’인 것들이 쌓이면서 우리 자신은 “내일의 악몽”이 된다. ‘취한 자’가 찍은 ‘발자국’은 ‘병든 자’가 버린 ‘발’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 하얀 눈 위에 또 하얀 눈송이들”이 내려앉듯이―취한 자를 아픈 자가 끌어안듯이―악몽 위로 악몽이 소복하게 쌓여 가듯이―소녀의 악몽이 늙은 여인의 노래이듯이.
최초의 메트로놈이었던 빗방울들
-「잠의 형제」 중에서
그럼에도 켜켜이 쌓이는 악몽 속에서도 삶은 영위되는데, 그것은 정박이 아닌 무작위의 빗방울이 우리에게 견디고 버틸 만한 리듬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오늘 내리는 비와 어제 내리는 비, 소녀의 이마 위의 비와, 늙은 여인의 하얀 머리 위에 내리는 비 사이에서 우리는―우리 자신인 악몽을 변주하며 악몽 속에 악몽을 낳을 수 있기에.
잠든 사이 붉은 가로등이 켜졌다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言)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 길들도 사라졌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그 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열두 켤레의 구두를 더 신는 사이 계절은 바뀌지 않았다
구두의 계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구두의 수를 세지 않았다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전문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는 강성은 첫 시집의 표제작이다.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생각하면’이라고 쓴 이 글의 불능한 첫 문장처럼, 이 시에서도 신고 있는 겹겹의 구두 속에서 첫 구두를 찾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첫 구두를 찾을 수 없어 그다음 구두를 벗을 수 없고, 그렇게 구두를 더 신는 사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의 ‘악몽’이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내일의 악몽”인 이상, 역설적으로 우리는 “구두 속에서” 나올 수 없고 그렇기에 절벽 앞에 가지런히 벗어 놓을 구두는 우리의 것이기는 하나, 내어놓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산문의 세계, 언어가 썩어 가는 자리에서, 구두를 신은 채 잠이 들고, 그 잠 속에선 “내일의 악몽”이 삶을 발이 없는 발자국으로 남겨 간다.
▶ 강성은의「고딕 시대와 낭만주의자들」: 고딕시대와 낭만주의자들 | 시 | 문장웹진 : 문학광장 웹진
|
[문장웹진 REWIND]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
추천 콘텐츠
[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비비디바비디부 홍순인 이거 제가 쓴 건데 들어 보세요. 나는 ‘네튤농’이라는 포크 밴드에 소속된 ‘작가’다. 밴드에 작가가 웬 말이냐고 따진다면 뭐라고 할 말은 없다. 네이버에서도 네튤농을 등록할 때 밴드에 작가라는 포지션은 있을 수 없다며 결국 나를 퍼커션으로 소개하게끔 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작 열여섯 가지 유형으로 인간 유형을 분류하는 건 신봉하면서 전 세계 보편적인 밴드 구성에 반기를 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뭐, 고분고분 인정하면서도 서운하긴 했다. 참고로 나는 INFP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시를 써 가면 죄다 디테일한 묘사뿐이라 시인이 될 수 없다는 평가를 받던(싱잉랩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평가도 있었다.), 화성학의 기초도 떼지 못했지만 밴드의 일원으로서 약 100회가량의 공연을 해낸 돌팔이 음악가이자,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에서는 비록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런, 정말 그런 내가 포크 밴드에서 ‘작가’로 살아가게 된 어떤 우연에 관한 이야기다. 때는 바야흐로 2013년, 대학교 4학년 1학기에 축제 위원장을 맡으며 학교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였다. 당시 학교 축제 기획에 도움을 주었던 기획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진짜 시에 대해 공부하고자 했지만 너처럼 노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책상에 앉아 있겠냐는 주변의 만류로 기분 좋게 기획사에 입사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특히 ‘이규범’을 만났다. 나와 같이 하루하루 일을 쳐내 가며 밤이 되면 야근을 하다가 술을 마시고 좁은 방에 여럿이 구겨져 자고 다음 날에는 이걸 또 반복했다. 대학원에 가면 불행해진다지만 기획사에 가도 불쌍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다만 그런 의미 없는 날들 속에서 이규범이 나와 달랐던 점이 하나 있었는데, 이규범에게는 ‘싱어송라이터’라는 꿈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신기했다. 어떻게 싱어송라이터가 된단 말인가. 이규범은 노래도 못 했고 가사도 못 썼다. 나는 회사의 기획서와 제안서 내의 글과 카피를 대부분 담당하고 있었고, 평소 인디 밴드 음악을 굉장히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규범은 가사와 관련해 나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나는 싱잉랩 정도는 할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을 제안해 줬고 종종 밤늦게까지 회의실에서 같이 노래를 불렀다. 꿈이 있다는 게 부럽다기보다 나도 싱어송라이터가 되어 보면 어떨까 막연한 상상을 해 보던 밤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이규범은 회사를 떠났다. 정이 많이 들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규범이 첫 앨범을 낸다며 찾아왔다. 나는 그 앨범의 소개 글을 써 주었다. 솔직히 좋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안티팬의 입장에서 소개를 하는 글을 써 주었다. 나는 진심을 담은 글로 편하게 족발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이규범은 두 장의 앨범을 더 냈고, 나는
- 관리자
- 2026-03-01
[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대먹튀 시대에서 예술의 쓰임에 관하여 오웅진 벨라 타르가 세상을 떠났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번역 신간이 집에 도착한 직후 그의 부고 소식을 들어 공교롭다는 생각을 했다. 소식을 듣고 멍청하니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벨라 타르의 1994년도 영화 〈사탄탱고〉의 한 주인공 이리미아스 역할을 했던 배우(Víg Mihály)가 동시에 이 영화의 음악 감독이었다는. (실은 주인공 같은 건 없다, 감독에 따르면 자신의 영화에서 굳이 주인공이라면 ‘시간’ 정도)1) 작품에서 그가 분(扮)한 역할을 설명하자면, 아니 그를 쉬이 욕할 수 있도록 거칠게 요약하자면 ‘곗돈을 들고 튄 계주’쯤 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죽는다. 아이의 죽음, 그로 인한 공통의 슬픔을 바탕으로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집 가장 깊숙한 곳에 박아 두었던 돈을 모으게 되는데, 계주는 그 돈을 들고 튐으로써 스스로를 사탄과 편히 겹쳐 보게 돕는다. 소설은 카프카의 짧은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2) 앞서 언급한 떠난 계주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도, 작품 속 마을 사람들 삶의 대부분은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음악이란 게, 혹은 춤이라는 게 실은 곗돈을 들고 튄 저 악마 같은 계주쯤 되는 것은 아닌지 말해 보고자 한다. 소설 『사탄탱고』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85년, 그의 최근작 『헤르슈트 07769』가 쓰인 것은 2021년이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그가 좀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의 첫 장을 펼쳐보고 안도했다. 짧은 문장 한 줄이 나를 반겼다. “희망은 실수다.”3) 그가 여전히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 그를 믿게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다수가 음악인인데, 이는 독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예컨대 누군가 주말마다 부장님에 의해 호출되어 산을 탄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어쨌든 그가 산에 성실히 오르고 있으니 산악인이라 충분히 불릴 자격이 있다고 믿는 이라면, 이 소설 속 다수의 인물을 또한 능히 음악인이라 불러도 좋다. 소설에선 부장님 대신 ‘보스’라는 이름으로 음악인들의 리더를 달리 부른다. 보스는 바흐에 관하여 얘기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단원들 역시 보스가 바흐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건 그들이 바흐에 관해 듣길 좋아한다는 말과는 사뭇 다르다. “보스는 그들이 바흐에 대한 보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리허설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카나 심포니는 아마추어 음악가들로 자기 악기에 어느 정도 능숙하게 다루긴
- 관리자
- 2026-03-01
[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지문 너머로 하나의 선율이 아를 lilysacredlily · 20251228_slowslofi playset 최초의 기억은 들렸던 것이다.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 할머니는 늘 자기 전에 적혀 있는 그것들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할머니가 나를 부를 때,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또 다른 생경한 목소리와 리듬으로 그것들은 발화되었고 그 목소리는 음악처럼 들렸다. 할머니는 거기에 분명히 있었지만 어느 영겁 너머 다른 차원에서 내려오는 작은 신의 목소리처럼 들렸기에 그 소리의 흐름 속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나 또한 내가 무엇인지, 내가 있는 곳을 잊어버렸다. 그 뜻 모를 말들을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듣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거의 기도처럼, 주문처럼, 노래처럼 들렸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전해지고 또 쓰인 것들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나에게로 전해졌고 어린 나는 그것들을 어설프게나마 소리 내어 보기도 했다. 그 유년의 밤 동안 할머니는 나의 유일한 이야기꾼이었으며, 어린 나의 두 귀가 되어 주는 밤의 훌륭한 안내자였다. 구전. 우화. 신화. 전설. 민담. 시대를 넘어서도 계속되는 이야기들. 되풀이되는 노래 같은 것들. 요정. 고블린. 거인. 요괴. 도깨비. 기사와 문지기. 바드와 리라. 검과 용사. 광장의 하프 소리. 그것들은 때때로 꿈속을 수호하며 때론 일상의 그림자들이 되어 호출하면 응답할 것만 같았다. 들려지는 것들이 쓰여질 때, 쓰여진 것들이 들릴 때. 적혀 있는 것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귀로 전해지는 것. 반복해서 전해지고 지금도 여전히 전승되고 있는 것. 어느 날 들렸던 하나의 목소리가, 어느 한 구절이 누군가를 살렸다면, 그로 인해 살아갈 수도 있다면 그것은 신앙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빌어 준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기대어 계속 갈 수 있었던 수많은 시간들로부터 지금도 계속되는 어떤 순간들이 지속될 수 있었을 뿐이고 그다음이 있기를 그 순간들로부터 감히 바랄 수 있었던 것이다. 늘 목숨처럼 붙들고 있지만 동시에 늘 너무 아득하기만 한 것에 대해 대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끝에 일주일도 안 되어서 나는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며칠 동안 정신이 몇 번이나 나갈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셀 수 없을 정도로 꿈을 정말 많이 꿨는데 잠깐의 꿈에서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의 소리였겠지만 귓가에서 목소리는 오래 머물렀다. 병실의 침대가 아니라 이제 마침내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나는 온 건가? 눈을 뜨면 나의 옆에 누워 그것을 읽어 주는 할머니는 없었지만 나는 들었다. 이곳을 넘어서, 시간을 넘어서, 세월을 넘어서. 그 밤 이전의 무수한 밤들로부터, 그 밤의 영겁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던 목소리를. 초연해지고자 열망하는 마음을 이미 초월해 있는 곳으로부터 목소리는 들린다는 것이. 나의 뼈의 일부는 부러졌고 언제까지 누워 있어야 할지 그때는 몰랐다. 부서진 건 뼈뿐
- 관리자
- 2026-03-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