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산책
- 작성일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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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산책
-소설가 정용준 씨의 일일
글‧그림 도재경
설레는 아침입니다. 저는 지금 한 연구실 앞에 있는데요, 굉장히 조용하네요.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독자 여러분이 좋아하는 소설가이자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정용준 작가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평소 너나들이하는 친구지만 오늘은 작가님의 그림자가 되어 어떠한 일상을 보내고 계시는지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평소 작가님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책을 통해 접하거나 넌지시 들은 적은 있지만 작업 공간을 직접 찾아온 건 처음이라 무척 두근거립니다. 자, 이제 그림자가 될 시간인데요, 노크를 해 보겠습니다. 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리네요. 은은한 커피 냄새가 코끝에 스칩니다. 때마침 커피를 내리고 계셨군요.
안녕. 작가님은 생글생글한 미소로 저를 반깁니다. 어떻게 지냈어?
예나 지금이나 작가님은 한결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작가님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기에 앞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열심히, 구체적으로 듣습니다. 작가님의 동그란 두 귀에 얼마나 많이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미주알고주알 근황을 늘어놓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이십여 분 후에 오전 강의가 시작될 예정이라 여담은 저녁에 나누기로 하고, 저는 작가님의 그림자로서 본분을 다하며 잠자코 곁에 있을 거라고 약속합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스피커에서 잔잔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네요.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실내는 아늑한 카페 같아서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합니다. 반면 작가님은 정말 분주합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이런저런 업무를 처리하는 중인 것 같아요.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자 연구실을 슬며시 둘러봅니다. 책장엔 문학, 철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혀 있는데요, 단연코 소설책이 가장 많이 눈에 띄네요. 작가님이 읽은 책들에는 어떤 메모가 적혀 있을지 정말 궁금한 거 있죠. 하지만 그림자가 제멋대로 움직이면 곤란할 것 같아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립니다. 또 다른 책장에는 손때 묻은 공책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데 마치 오래된 책을 보는 듯합니다. 다시 한번 펼쳐 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릅니다. 블라인드가 쳐진 쪽창 아래엔 통기타와 전기 기타가 세워져 있고요, 통창을 가린 광목 커튼에는 아기자기한 엽서가 붙어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 소설의 표지 엽서도 보이네요. 그 옆 나무 선반에는 여러 색깔의 도미노를 쌓아 놓은 듯한 일고여덟 개의 키보드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접대용 탁자 위에는 매끄럽게 깎아 놓은 한 다스 분량의 연필이 필통에 꽂혀 있고, 머그잔에는 알록달록한 사탕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어쩌면 소설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연구실에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을 때 그 사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땝니다.

타닥타닥.
작가님이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사실 제가 가장 기다렸던 순간인데요.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가님의 손을 카메라에 꼭 담고 싶었거든요. 우리가 좋아하는 수많은 소설을 쓴 그 손을 말이죠. 저는 슬그머니 작가님 뒤로 다가가 스마트폰을 들이댑니다. 그런데 웬걸, 작가님이 잽싸게 책상 아래로 손을 숨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한 컷만 찍을게.
안 돼.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두 눈이 더 커집니다. 그림자로 있겠다는 약속은 오간 데 없고 졸라대고 또 졸라댑니다. 독자님들이 궁금할 거란 핑계도 대어 봅니다.
딱 한 컷만.
부끄러워.
엉?
예상치 못한 답변에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습니다. 언젠가 보았던 작가님의 손이 떠오릅니다. 반가워서 하이 파이브 하던 손과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던 손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며 악수했던 손 말이에요. 그런데 그 손이 부끄러워하고 있다니. 책상 아래로 내려간 작가님의 손은 좀체 키보드 위로 올라올 낌새가 없네요. 별수 있나요.

연구실을 나와 강의실로 이동합니다. ‘□’자 형태로 책상이 배치된 강의실은 예상대로 만석입니다. 수강생도, 청강생도 아닌 그림자로서 당당히 강의실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기회는 흔치 않겠지요. 오래전부터 작가님이 소설 창작 강의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거든요. 섬세한 설명과 반복되는 문답, 일상에 숨어 있는 글감과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와 쓰게 될 이야기들, 그리고 소설가의 자세까지. 이따금 늦은 밤 과자 봉지를 들고 동네를 산책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한다는 작가님의 일상조차도 흘려들을 수가 없네요. 입안이 헐도록 과자를 먹는다는데,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됩니다.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의 삶에 빚지고 있어요. 삶을 벗어나는 완벽한 허구는 없지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가님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받아 적습니다. 창밖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습니다. 바람을 머금은 숲이 출렁이고, 새들은 쉴 새 없이 지저귑니다. 어느덧 화이트보드에는 판서가 빼곡해져 있습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구내식당으로 가는 길에 만난 학생들이 작가님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안부를 주고받고, 또 주고받습니다. 마치 다정한 친구 사이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일정이 생겼지 뭡니까. 오후에 한 학생과 상담이 예정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림자의 자리를 내줘야 합니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한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 작가님은 이내 연구실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교정 벤치에 홀로 앉아 작가님을 기다리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 학생은 지금쯤 사탕을 몇 개쯤 먹고 있을까. 우리의 삶이 그렇게 쓴 것만은 아닐 거야,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몇 년 전 작가님이 열창했던 노래 한 구절이 떠오르는데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1)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 사람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꽤 오랜만인 듯한데요, 몇 해 전 작가님이 이 학교 저 학교로 출강하던 때가 생각나네요. 늦은 밤에 만난 작가님의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곤 했습니다. 작가님의 가방은 돌덩이를 넣은 것처럼 무거웠습니다. 얼핏 본 가방 속은 노트북과 책과 강의 자료 등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시간이 부족해서 오가는 기차에서도 읽고 쓴다는 걸 모르지 않았는데요, 심지어 잠깐씩 틈날 때조차도 노트북을 꺼내어 놓고 무언가를 쓰더라고요.
불현듯 혼자만의 공간에서 키보드를 조립하는 작가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정성스럽게 악기를 조율하는 악사 같아 보입니다. 작가님의 소설은 바로 그 키보드 위에서 탄생했겠지요. 카메라에 담지 못한 작가님의 손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가님의 손을 그리기 위해 패드를 꺼냅니다. 그림 솜씨는 젬병이지만 시도는 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어라, 금방 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지 않네요. 작가님의 손을 두 눈에 담은 지 불과 서너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흐릿해진 거 있죠. 일단 키보드를 먼저 그려 봅니다. 그러고 나서 머릿속에 떠오른 작가님의 손을 얹어 봅니다. 아이고, 이게 아니네요. 지워야 할 선도 너무 많고,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해 보이지 않겠어요. 뭐가 잘못된 거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손부터 그린 후 키보드를 그립니다. 그제야 앞뒤가 맞는 그림 같아 보입니다. 뒤늦게 알았네요. 손을 먼저, 그다음에 키보드를 그려야 한다는 것을요. 만약 작가님의 손을 즉석에서 카메라에 담았다면 몰랐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림의 주인공은 키보드가 아니라 손이라는 사실을요. 이제 제가 부끄러워야 할 시간이네요. 한번 보시겠어요.

조금 더 잘 그릴 수 있었는데,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뭔 짓을 한지 알 리 없는 작가님이 싱글벙글 가방을 메고 내려오고 있거든요. 서둘러 패드를 가방에 넣습니다.
오래 기다렸지?
왜 이렇게 빨리 나온 거야.
뭐 하고 있었어?
‧‧‧.
저는 그림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무턱대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쪽 아닌데.
작가님을 따라 교정 밖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학교 앞 소박한 식당에서 어묵탕을 놓고 반주를 곁듭니다. 식당 주인은 얼마 전까지 작가님을 학생으로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럴 만도 하죠.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이니까요. 비단 저에게만 그렇게 보였던 것은 아니었나 봐요. 작가님을 보고 있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 해변을 홀로 거니는 소년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쪼그려 앉아 조가비를 줍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하얀 모래 위에 무언가를 쓰기도 합니다. 가만히 파도가 다가와 소년이 쓴 글을 바다로 데리고 갑니다. 소년은 우두커니 먼바다를 바라봅니다. 지금쯤 소년의 글은 바다 건너편 어느 누군가의 손에 닿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집필은 언제 어디에서 하는지, 최근에 무슨 책을 읽었고 읽고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아주 잠깐 나눈 것 같습니다. 땅거미가 내려앉고 어묵탕이 식어 가는 동안 식탁 위에는 소소한 일상과 느닷없이 문을 두드리는 실의와 사소한 농담이 두서없이 오르내립니다. 늘 그렇듯, 사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림자처럼 있겠다는 약속이 무색할 만큼 시도 때도 없이 작가님의 일상에 끼어들어 발걸음을 멈추게 해서 미안했는데, 도리어 그 마음까지도 다독여 줍니다. 하루를 함께할 수 있어서 마냥 좋았다며.
적당히 취기가 오르자 그림자가 제멋대로 이탈할 조짐을 보입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오자 시간을 자주 확인합니다. 오늘 하루 특별한 일이 생겼거나 예상치 못한 사건을 맞닥뜨렸다면 작가님에 대해 할 이야기가 더 많았을지 모르겠네요. 물론 꼼꼼히 찾아보면 그런 시간이 없진 않을 겁니다. 일테면 소설적 장면 같은 순간을 말이죠. 하지만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소망하는 일상이 아니겠지요. 모쪼록 오늘도 내일도 평온했으면 좋겠습니다.
중앙역 앞에서 작가님과 악수를 나눕니다. 작가님의 손을 힐끗 봅니다. 아! 생각보다 손이 크네. 어쩐지 손가락 끝에 굳은살도 박여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작가님의 손을 다시 그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맙소사. 예상치 못한 사건이 기어이 터지네요. 작가님과 헤어지고 귀가하는 길에 알았습니다. 온종일 틈틈이 스케치해 둔 메모지를 분실했다는 것을요. 왠지 뭔가 허전하다 싶었습니다. 되돌아가면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작가님을 한 번 더 만날까, 별별 생각이 다 드네요. 작가님의 하루를 독자 여러분께 온전히 보여 드리지 못한 건 순전히 제 역량이 부족해서입니다.
오늘 밤에도 작가님은 입안이 헐도록 과자를 먹으며 동네를 산책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요? 잘 귀가했는지 문자를 주고받습니다. 작가님과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도 과자를 한 봉지 샀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밤하늘이 깊어 보입니다. 여러분도 작가님과 함께 산책하실래요?
작가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요?
실은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펼친 소설책 안에서 늘 기다리고 있거든요.
1) 전인권, 〈걱정 말아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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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입니다. 이번 11월 호의 주제는 이주란 편집위원이 참여한 ‘ㅇㅇ씨의 일일’입니다. 누구나 그렇듯, 어느 하루는 한 사람의 일부가 됩니다. 때로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는 삶을 지탱하는 것은 그런 평범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날들은 흘러가기도 하고 오래 머물기도 하고 흘러갔다가 되돌아와, 움직임이 되고 표정이 되고 장면이 되고 문장이 됩니다. 이번 기획에서는 세 명의 작가가 각자 세 명의 작가를 만나 미래의 문장이 될지도 모를 일상 속 순간들을 기록해보았습니다. 익숙한 듯 하지만 문득 낯설기도 할 이야기를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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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5-11-01
우리의 고백 - 진은영 『고백』 (문장웹진 2010년 11월호 수록) 읽기 이영주(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시 쓰기는 재미있다. 인간의 언어란 흥미로운 것이니까. 인간의 언어란 오염과 환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그것을 이상한 쾌락으로 즐기게 해 주는 수수께끼의 세계. 시는 이런 언어의 가장 예민한 촉수이다. 우리에게서 가장 멀리 가고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우리 내부에 가장 깊이 침투해 있다. 시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이런 멀고, 가깝고, 깊은 주름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 존재들. 시인들은 주름을 펼쳐 보이고 때로 섬세하게 접기 위해 늘 몸이 열려 있다. 열린 몸이란, 복잡하고 구불구불하고 황폐하고 어지럽고 축축하고 미끌거리고 우수수 돋는‧‧‧ 아무런 규정도 할 수 없는 무정형의 상태. 시인들이 몸을 열고 받아 적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고백 진은영 내 죄를 대신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내 병을 대신 앓고 있는 병자들에 대해 한없이 맑은 날 나 대신 창문에서 뛰어내리거나 알약 한 통을 모두 삼켜 버린 사람들에 대해 나의 가득한 입맞춤을 대신하는 가을 벤치의 연인들 나 대신 식물원 화단의 빨간 석류를 따고 있는 아이의 불안한 기쁨과, 나 대신 구불구불한 동물내장을 가르는 칼처럼 강, 거리, 언덕을 불어 가는 핏빛 바람에 대해 할 말이 있다 달콤한 술 향기의 전언을 빈틈없이 틀어막는 코르크 마개의 단호함과 확신에 대해 수음처럼 또다시 은밀해지려는 나의 슬픔에 대해 할 말이‧‧‧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 나 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 하늘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 나 대신 울고 있는 어머니에 대하여 잠깐 딴 이야기를 해야겠다. 시인인데 시인이 아닌 채로 살아야 하는 순간들에 대하여. 내가 생활의 우악스러움을 드러내면 누군가 내게 시인 아니에요? 라고 미묘한 공격성을 띠고 물어볼 때, 그러니까 시인은 삶에 대해 초연해야 하고, 가난도 자랑스러워해야 하며, 슬픔도 웃어넘기는, 여유로운 포즈로 뭐든지 받아안고 가는 존재여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강요할 때, 그러니까 시인이 (과장해서) 영양실조에 걸려도 역시 시인이란 그런 존재지‧‧‧ 하고 동정의 포즈를 보낼 수 있는 존재여야만 할 때(전근대적인 낭만성이 아직도 있긴 하다‧‧‧), 나는 시인 아니에요? 라는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깊은 함정에 빠진다. 시인은 원고료나 특강비 등 돈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일종의 허상에 가까운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여러 시선에 대하여‧‧‧ 나는 종종 공중누각에 던져져 온몸이 찢겨 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지? 시를 쓰지 않는 순간들이 더 많은 ‘나’의 생활과 삶은 어떻게 하지? 그 생활과 삶의 세부들이 모여 하나의 시를 탄생시키는데, 결국 시를 쓰지 않는 순간에도 시를
- 관리자
- 2025-11-01
파고 한영원 그날, 은선 씨가 나를 데리러 와 주었다. 은선 씨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빨간 잠바를 입고 갔는데 은선 씨 역시 빨간 카디건을 입고 있었기에 차에 타면서 멋쩍게 조금 웃었다. 은선 씨는 내게 음악 하는 A와 만난 적이 있냐고 물었고 난 그렇다고 대답했다. 은선 씨가 자신이 그와 친구라고 대답해서 나는 어쩐지 그 둘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조근조근한 어조와 노래를 부를 때 예쁠 것이 분명한 음색이 비슷하다고.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처음 들을 때 그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마음대로 상상해 버린다. 그리고 잘 부를 것 같은 목소리를 짐작하고 그러한 짐작은 대부분 잘 맞는다. 차는 영종도로 들어가고 있었고 공항 가는 목적이 아닌 영종도 놀러 가는 일은 꽤 오랜만이라 생각했다. 은선 씨가 내게 말했다. 바다를 좋아해서 자주 가요. 아, 저도요. 그렇게 대꾸했다. 나는 바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인천에서 태어나서인지 내가 여태껏 본 바다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차는 영종도 안에 작은 섬인 무의도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해루질을 하러 가나요? 내가 묻자 은선 씨는 첫 만남에 해루질을 좀 그렇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것도 꽤 시인 같고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시인을 관찰하러 간다니 나의 소설가 친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 멋있을 것 같아. 비 오는 해변을 마구 걸을 것만 같고···, 라고 말한 적 있다. 나는 당신에게 시인이란 그런 이미지냐고 물으려다 그냥 관두었다. 물론 나는 시인이 되기에 조금 모자란 것만 같지만 은선 씨는 정말로 시인이다. 시집을 몇 권이나 냈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시인. 은선 씨는 내게 오늘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일단 엄청나게 맛있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갈 거예요. 그리고 갯벌을 좀 걸을 것이고요. 갯벌은 모래펄이라 부드럽고 더럽지도 않아요. 은선 씨의 계획은 멋져 보였다. 나는 어떤 것이든 좋다고 말했고 근사한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더 섬의 안쪽으로 몇십 분 들어간 뒤 우리는 곧이어 무의도에 있는 한 식당의 주차장에 내렸다. 나는 내리며 언뜻 식당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길래 영업을 하나 보다 했으나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였다. 들어간 사람들과 우리는 불이 꺼진 식당 안에서 화요일은 영업을 안 한다는 문구를 보곤 헛웃음을 지었다. 식당에서 나오며 은선 씨는 그럴 줄 알고 다른 식당 두어 군데를 더 찾아 놓았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차에 탔다. 은선 씨는 내게 식당에 가면 메뉴를 많이 주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다 먹지도 못하면서 음식 욕심은 많아요. 나도 조금 그런 편이라 답하고 우리는 깔깔 웃었다. 그러나 은선 씨가 두 번째로 찾은 식당 역시 닫혀 있었다. 은선 씨는 당황해하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고 했다. 나는 아까 지나가다가 보인 그 쌈밥집에 들어가자고 했다. 은선 씨가 고개를 끄덕
- 관리자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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