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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사랑의 기록

  • 작성일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거대한 사랑의 기록   

- 김명순 창작집 『생명의 과실』


박소란

사진1. 『생명의 과실』 (한성도서주식회사, 1925) 표지


   지난 2025년은 『생명의 과실』(한성도서주식회사, 1925)이 출간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생명의 과실』은 김명순(金明淳, 1896~1951 추정)이 쓴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창작집이다. 국내 서지 기록에 등록된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 문학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명의 과실』도 김명순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때문에 100주년은 터무니없이 고요했다. 별다른 의식이나 언급 없이 우리 문학장은 지난 한 해를 지나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전 김명순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난과 핍박을 떠올리게 된다. 혹여 김명순이라는 선구적 예술가를 아직까지도 과거 그늘진 그 자리에 세워 둔 것은 아닐까, 못내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조금만 검색을 해 봐도 대략의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김명순은 쉽게 소거될 수 없는 이름이다. 1917년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문예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친 한국 문단 최초의 여성 작가다. 1920, 30년대 누구보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친 김명순은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하는 등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피아노를 잘 치고 독일어로 곡을 만들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신문기자, 영화배우로도 활동할 만큼 다재다능했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첩'이라는 이유로,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자유연애’를 주창한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을 받았다. ‘부정한 혈액’ ‘문란한 여자’ 등 모욕적인 꼬리표가 일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공부와 집필에 힘썼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힘겨움이 잇달았고, 결국 1951년경 일본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명순은 생전 시, 소설, 수필, 희곡(각본) 등을 한데 묶은 두 권의 창작집을 냈다.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회동서관, 1929 추정)이 그것이다. (세 번째 창작집을 준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과적으로 불발되었으며, 때문에 창작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도 상당하다.) 이 중 『생명의 과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으로 그 의미가 각별하다.    



   1

 

   『생명의 과실』에는 등단작 「의심의 소녀」를 포함해 소설 2편, 시 24편, 수필(목차에는 ‘감상(感想)’이라 표기되어 있다) 4편이 수록되었다. 소설 「돌아다볼 때」나 시 「유언」, 「저주」, 「탄실의 초몽」, 「유리관 속에」, 수필 「대중 없는 이야기」, 「네 자신의 위에」 등의 빼어난 작품들이 모두 이 첫 창작집에 담겨 있다. 시집이나 소설집과 같은 하나의 장르에 국한된 형태가 아니라 여러 장르의 작품이 두루 담긴 창작집 형태 또한 김명순이라는 작가의 개성에 걸맞은 다분히 현대적인 방식이라 여길 만하다.  

   책의 표지를 넘기면 곧장 내지 제일 첫 페이지 상단에 적힌 ‘生命의 果實’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 바로 그 위에 우뚝 자리한 ‘金明淳․創作集’이란 글자가 보인다. 같은 페이지 하단에는 ‘京城 漢城圖書株式會社 發行’이라고 적혀 있다. 이어 1~3페이지에 시, 수필, 소설 순으로 목차가 게재되어 있고, 그 바로 앞 페이지에는 ‘머리말’이 실려 있다. “이 단편집을 오해받아 온 한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여름(열매)으로 세상에 내노음니다(내놓습니다)”. 읽을 적마다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아직 재래의 인습이 지배적이던 시절, 자기 발성으로 새로운 신념을 주창하는 여성 창작자로서 그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그런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창작에 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각 장르별로 고루 아끼지만, 그중에서 먼저 시 「유언」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시를 통해 나는 처음 김명순이라는 작가에게 매료되었다. 


   세상이여 내가 당신을 떠날 때  

   개천가에 누웠거나 들에 누웠거나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하시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있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하시오,

   그러면 나는 세상에 다신 안 오리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작별합시다.

-「유언」(1924) 전문


   7~8년 전 어느 앤솔러지에선가 읽은 것 같은데, 지금은 그만 그 책의 제목도 잊어버렸다. 다만 이 시를 읽자마자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문장마다 깃든, 입술을 잘끈 깨물듯이 참아 내는 울음을 누가 쉽게 지나칠 수 있을까. 아, 이건 진짜구나! 좀처럼 본 적 없는 진정과 절절한 몸부림을 엿본 순간, 매료되었다고 할까, 감염되었다고 할까.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시는 1924년 5월 29일 「조선일보」 지면에 처음 발표된 것이었다. 

   「유언」을 만난 후 나는 몇 년에 걸쳐 김명순의 전작을 탐독했다. 지금은 절판된 전집을 구해 열어 보기도 하고 작가가 작품을 발표한 옛 신문이며 잡지를 뒤적여보기도 했다. (알다시피 요즘은 컴퓨터 앞에 가만히 앉아서도 이런 일이 능히 가능하므로.) 그렇게 다소 부산스레 여러 작품들을 만난 뒤에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김명순의 작품을 현대어로 편역하는 작업에까지 도전하게 되었다. 2023년 2월 출간한 김명순의 산문집 『사랑은 무한대이외다』를 시작으로 2025년 6월과 7월에 잇달아 출간한 소설집 『내 마음을 쏟지요 쏟지요』, 문장집 『사랑하는 이 보세요』가 그 결과물이다. 

   편역 준비 과정에서 나는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 원본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기관을 수소문했고, 얼마 뒤 근대서지연구소의 서지학자 오영식 선생님을 통해 원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명의 과실』의 경우 아직 몇 권의 원본이 남아 있고, 1970년경 문학사상사에서 ‘한국현대시 원본전집’ 시리즈로 발간한 복각본 또한 있지만 『애인의 선물』 원본은 오직 한 권뿐이다. 그것을 소지하신 분이 오영식 선생님이다.) 

   처음 근대서지연구소에서 『생명의 과실』을 대면한 당시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누렇게 변색된 낱낱의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기자 금세 김명순이 살던 100년 전 그 시절로 거슬러 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조금만 세게 만지면 곧장 으스러질 것 같은 종이를 딛고 있음에도 한 글자 한 글자가 뿜어내는 위용은 대단했다. 당시의 책이 으레 그렇듯 세로쓰기 방식,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이 이어지는 우종서(右縱書)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데다 한글과 한자가 뒤섞여 있는 등 오늘날의 관점에서라면 결코 읽기 수월하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 자리한 단어와 문장 들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으로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내게 오영식 선생님은 왜 하필 이제는 완전히 잊힌 이 작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인지 물으셨다. 여러 대답이 속에서 맴도는 가운데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저 “작품이 좋아서요” 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생명의 과실』 속 「유언」은 개고를 거친 모습이다. 1924년 조선일보 발표작과 비교했을 때 시의 첫 대목과 마지막 대목을 비롯 부분부분 달라진 점들이 보인다. 언어나 감정에 있어 다소간 정제된 면이 있다. 초고 버전과 개고 버전, 두 버전을 비교해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독자로서 누리는 뜻밖의 즐거움이라 하겠다.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때

   개천가에 고꾸라졌든지 들에 피 뽑았든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구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유언」(1925) 전문


   현재 『생명의 과실』 원본을 직접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김명순의 문장을 원문으로 확인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출판사 핀드가 지난해 김명순이 낸 두 권의 창작집을 복원했기 때문. 오영식 선생님을 통해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 원본을 확인한 뒤, 당시 창작집의 규격이며 장정까지 고스란히 살려 냈다. (아쉽게도 『애인의 선물』 원본은 판권란을 포함한 뒷부분 몇 장이 소실된 상태로 남아 있어 이 책 마지막에 실린 각본 「두 애인」의 결말 내용은 확인이 불가하다. 출판사 핀드는 복원 과정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몇 곳의 도서관을 수소문했고, 어렵사리 「두 애인」이 발표된 문예지 『신민』 36호(1928년 4월)를 찾아 그 누락된 내용을 메웠다.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그간 근대 여성 작가의 단행본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더욱이 근대 여성 작가의 단행본을 복원하다니, 아마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한국 여성 작가의 계보를 되짚고 한국문학의 보배로운 유산을 발굴한 뜻깊은 작업이라 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2. 『생명의 과실(복원본)』(핀드, 2024) 표지



   2

 

   『생명의 과실』 속 한 편 한 편을 찬찬히 읽어 나갈수록 그 속에 담긴 겹겹의 사유는 가슴속에 거센 파문을 일으킨다. 사는 내내, 쓰는 내내 치열한 내적 전투를 멈추지 않았던 김명순의 작품은 더없이 처연하고 동시에 굳세며, 무엇보다 깊다. 작품을 통해 보건대, 여러 불행의 증거에도 김명순은 결코 지치거나 꺾이지 않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절망하고 비탄하면서도 끝내 굳건한 마음으로, 의지로 삶을 일으키는 사람.


   아- 비웃는 이들이여 당신들이 나를 실연자라고 오래 비웃어왔다. 하나 불행히도 당신들은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한 처녀가 불의의 능욕을 받고 살기를 원해서, 썩은 기둥으로 기왓장을 받쳐온 것을 도무지 헤아려주지 못했다. 

   당신들은 나를 비웃기 전에 내 운명을 비웃어야 옳을 것이다. 나는 이 지경이 겨우 이르렀어도 힘 있는 대로 싸워왔노라. 

- 수필 「대중없는 이야기」 부분


   대체 그 근저에 무엇이 있었기에? 『생명의 과실』을 비롯 김명순의 다양한 작품들을 짚어 보자면 그는 분명 혼자였으나 실은 ‘사랑’과 함께였구나 알 수 있다. 마치 가슴 깊숙이 하나의 씨앗을 심어 둔 듯이. 그 하나만을 정성으로 보살펴 가꾸듯이.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는 사랑을 버리지 않았구나. 그의 삶은 사랑으로 기어코 충만할 수 있었구나. 김명순이 그린 사랑에 대해 헤아릴수록 이 거대한 사랑이야말로 김명순이 수확한 ‘생명의 과실’과 동의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련 씨, 사람은 절대로 누구와든지 꼭 육신으로 결합해야만 살겠다고는 말 못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을 유통시켜보지 못하고 이 세상에 대항하여 발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능할 것이지만 우리는 한 대상을 앎으로 그 주위의 모—든 것까지 곱게 보지 않습니까.” 

- 소설 「돌아다볼 때」 부분


   강렬한 만남 이후 남몰래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된, 「돌아다볼 때」 속 주인공 소련과 효순은 결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안착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감정을 간직하는 것으로 서로의 삶을 보다 성숙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김명순이 그린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보다 훨씬 광의의 개념이다. 동경이자 이상이자 신념인 것. “육적 충동과 호기심 만족에 불과한”(희곡 「의붓자식」) 일반의 ‘사랑 운운’과는 완전히 다른 것. 결혼과 같은, 자기 결정권이 박탈된 낡은 사회 제도나 도덕관념과도 철저히 대척하는 것이다. 자유를 향한 분투로 봐도 무방하겠다. 

사랑은 결국 그 누구도 아닌 ‘나’의 것. 내가 나로서 온전하고자 한 의지. 오롯한 한 존재로서 자유로이 삶을 일구고 올바로 세우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을 향한 거센 집중. 이로써 빚어진 사유는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자신에 오롯이 몰두하며 사색하는 한 인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숭고함. 


   탄실아 너는 간다. 네 한몸의 영화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 너는 간다. 그리고 입을 다문다. 

   오오 탄실아 탄실아.

   네 한몸의 문제만 풀러 너는 간다. 

- 수필 「네 자신의 위에」 부분 


   사랑으로 충만한 ‘탄실’(김명순의 호이자 대표 필명)이 향하는 곳은 다른 어디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간 자신을 괴롭히던, “값없이 던져지던 남의 생활의식 남의 감정” 따위 “전부 뽑아내어 던져”(수필 「겨울 앞 독백」)버리고 나 자신을 위해, 나 “자신 위에 고요히 돌아가 정밀히 생각해보”(「네 자신의 위에」)고자 하는 것이다. 오직 이 하나의 사실을 새기는 것만으로도 그의 작품이 지닌 깊이를 확인하기란 충분하겠다. 

   이처럼 김명순이 일군 문학의 힘은 의심할 나위 없이 건재하다. 그러나, 그 힘과는 별개로, 김명순을 생각하는 이따금 나는 사무친다. 힘겨운 매 순간 그가 혼자였으리라는 짐작 때문에. 생의 마지막까지 가정이나 국가 같은 최소한의 울타리도 그에겐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로서, 그리고 자유롭고자 한 한 인간으로서 전심으로 분전했기에 더욱 외로웠을 그 삶을 떠올리게 된다. 

   올해 2026년은 김명순 탄생 130주년이 되는 해다. (그의 생일은 1월 20일!) 지난해에 이어 올 한 해 그의 작품을 읽고 그의 책을 되살리는 일이 더 중하게 여겨진다. 이제 우리에게는 읽는 일이 남았다. 어떻게 해서든 읽는 일이 가장 필요한 것이다. 김명순, 그 빛나는 사유의 힘을 믿고 독자로서 부지런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문득 소설 「돌아다볼 때」 속 주인공 소련의 방 머리맡에 족자로 걸려 있다는 롱펠로의 시 「화살과 노래」를 떠올린다. 그 시에는 허공에 쏘아 올린 화살도, 허공을 향해 부른 노래도 땅에 떨어져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시의 마지막은 이렇다. “아주 오랜 뒤 한 그루 참나무 속에서 / 나는 그 화살을 찾았네, 여전히 부서지지 않은 채로 / 그리고 그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 한 친구의 마음속에서 다시 찾았네.” 『생명의 과실』과 100년 전 김명순의 빼어난 작품들은 오늘날의 친구들, 독자들에게 조금도 부서지지 않은 채로 가닿을 것이라 믿는다. 

  『생명의 과실』에 수록된 수필 「계통 없는 소식의 일절」의 한 대목을 전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랑은 지극히 드물게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 완성과 같이 드물게 있습니다. 아득거리고 변하고 속이는 것이 사랑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참사랑을 얻으면 노래하지요. 그때까지 밀어(密語)입니다.



 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2월호의 기획 콘텐츠 ‘단 한 권의 책’에서는 시인, 연구자, 학예사 3인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을 독자분들께 소개합니다. 김명순의 『생명의 과실』부터 염상섭의 『해바라기』, 류달영의 『소심록』까지. 각각의 책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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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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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6-03-01
지문 너머로 하나의 선율이

[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지문 너머로 하나의 선율이 아를 lilysacredlily · 20251228_slowslofi playset 최초의 기억은 들렸던 것이다.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 할머니는 늘 자기 전에 적혀 있는 그것들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할머니가 나를 부를 때,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또 다른 생경한 목소리와 리듬으로 그것들은 발화되었고 그 목소리는 음악처럼 들렸다. 할머니는 거기에 분명히 있었지만 어느 영겁 너머 다른 차원에서 내려오는 작은 신의 목소리처럼 들렸기에 그 소리의 흐름 속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나 또한 내가 무엇인지, 내가 있는 곳을 잊어버렸다. 그 뜻 모를 말들을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듣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거의 기도처럼, 주문처럼, 노래처럼 들렸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전해지고 또 쓰인 것들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나에게로 전해졌고 어린 나는 그것들을 어설프게나마 소리 내어 보기도 했다. 그 유년의 밤 동안 할머니는 나의 유일한 이야기꾼이었으며, 어린 나의 두 귀가 되어 주는 밤의 훌륭한 안내자였다. 구전. 우화. 신화. 전설. 민담. 시대를 넘어서도 계속되는 이야기들. 되풀이되는 노래 같은 것들. 요정. 고블린. 거인. 요괴. 도깨비. 기사와 문지기. 바드와 리라. 검과 용사. 광장의 하프 소리. 그것들은 때때로 꿈속을 수호하며 때론 일상의 그림자들이 되어 호출하면 응답할 것만 같았다. 들려지는 것들이 쓰여질 때, 쓰여진 것들이 들릴 때. 적혀 있는 것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귀로 전해지는 것. 반복해서 전해지고 지금도 여전히 전승되고 있는 것. 어느 날 들렸던 하나의 목소리가, 어느 한 구절이 누군가를 살렸다면, 그로 인해 살아갈 수도 있다면 그것은 신앙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빌어 준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기대어 계속 갈 수 있었던 수많은 시간들로부터 지금도 계속되는 어떤 순간들이 지속될 수 있었을 뿐이고 그다음이 있기를 그 순간들로부터 감히 바랄 수 있었던 것이다. 늘 목숨처럼 붙들고 있지만 동시에 늘 너무 아득하기만 한 것에 대해 대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끝에 일주일도 안 되어서 나는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며칠 동안 정신이 몇 번이나 나갈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셀 수 없을 정도로 꿈을 정말 많이 꿨는데 잠깐의 꿈에서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의 소리였겠지만 귓가에서 목소리는 오래 머물렀다. 병실의 침대가 아니라 이제 마침내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나는 온 건가? 눈을 뜨면 나의 옆에 누워 그것을 읽어 주는 할머니는 없었지만 나는 들었다. 이곳을 넘어서, 시간을 넘어서, 세월을 넘어서. 그 밤 이전의 무수한 밤들로부터, 그 밤의 영겁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던 목소리를. 초연해지고자 열망하는 마음을 이미 초월해 있는 곳으로부터 목소리는 들린다는 것이. 나의 뼈의 일부는 부러졌고 언제까지 누워 있어야 할지 그때는 몰랐다. 부서진 건 뼈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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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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