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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고른 빛

  • 작성일 2026-04-01

[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스스로 고른 빛


허희


   1. 주어진, 선택한 이름


  본명은 주어진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먼저 도착해 있다. 이름으로 불리고 거기에 반응하며, 어느 순간 명명된 내가 곧 나라고 믿으며 자란다. 그러한 점에서 본명은 숙명과 비슷하다. 삶의 첫머리에 놓인, 직접 쓰지 않은 나의 첫 단어. 반면 필명은 스스로 취한다. 이러한 선택이 자율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시대 정신, 언어 감각, 타고난 기질 등이 개입하니까. 그럼에도 마지막에 나의 의지는 남는다. 새로운 이름으로 한번 살아 보고 싶다는 미래형의 소망이 필명에 깃든다. 그래서 필명은 완성된 자아의 명패라기보다, 아직 닿지 못한 어떤 상태를 향한 선언에 더 가깝다. 

   그러기에 왜 필명을 쓰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략 두 갈래의 답이 떠오른다. 하나는 일상을 살아가는 나, 글 쓰는 나를 분리하기 위한 실용적 장치라는 설명. 다른 하나는 본명보다 조금 더 문학적 자아를 추구한다는 낭만적 소명이다. 실제로 나의 경우 필명은 어떤가 하면, 그 두 지점 사이 생활의 편의와 문인-되기의 욕망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러기에 필명을 둘러싼 사정은 꽤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직접 이름 하나를 골라 자기 앞에 내세우려면 오랫동안 자신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필명은 자기를 향한 해석의 과정이자,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장의 행로를 설정하는 제일 짧은 서문이라고 할 만하다.

   내 필명은 ‘허희’다. 성은 내 본래 성인 양천 허씨의 ‘허’이고, ‘희’는 ‘빛날 희’다. 여기에는 극적인 계시나 비밀 따위는 없다. 다만 이러한 고민은 품었다. 필명으로 불릴 때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어떤 글쓰기의 윤리를 두 음절로 새겨야 하나. 따져 보면 필명의 두 음절 안에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이어받은 것(계보)과 내가 갖고 싶었던 것(지향)이 나란히 들어 있다. 사람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전적으로 주어진 것도, 온전히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 존재. 물려받은 것 위에 스스로를 덧쓰고, 선택한 것을 통해 과거를 다시 반추하며 산다. 반은 유산이고 반은 결심인 셈이다. 

   나는 이름이 한 사람의 캐릭터를 표상하는 한편으로, 그에 따라 그 사람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고 여겼다. 운명론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명은 애초에 그러려고 지은 이름이 아닌가. 사람들은 필명으로 나를 부르고, 나는 그 이름으로 원고를 보내고 서명한다. 호명이 누적될수록 필명은 실체화되고 힘을 갖는다. 필명이 가면과 다른 이유도 거기 있다. 가면은 상황에 따라 벗을 수 있지만, 오래 사용한 이름은 어느새 나와 일체화된다. 그러니까 필명은 나에게 자기를 감추는 수단만은 아니었다. 자기를 재발명하는 방법이었다.

   필명에는 묘한 이중성이 있다. 사적으로 고른 이름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공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사소한 일에 마음이 흔들리고, 어떤 날은 쓸 문장을 한 줄도 찾지 못한 채 서성인다. 한데 원고의 맨 앞에 필명을 적는 순간, 생활인으로서의 나는 공적인 책임의 자리로 위치를 옮긴다. 그 이름은 단지 저자를 표시하는 기호가 아니다. 이 글을 누가 감당할 것인지를 대중에게 고지하는 표식이다. 나는 그 점이 설레면서도 두렵다. 한 편의 원고는 발표된 뒤 잊힐 수 있고, 한 시기의 견해는 나중에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름은 모든 글의 마지막까지 남아, 좋든 싫든 그것을 묶어 내는 연결고리가 된다. 

   그리하여 때때로 서가나 데이터베이스에 정렬된 필자들을 보면서 상념에 젖기도 한다. 여러 이름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작품 제목과 출간 연도 및 발행처와 쪽수가 깔끔하게 표기되어 있는 장면들. 그러나 거기에는 그것을 쓴 사람들의 시행착오, 어떤 원고를 두고 밤늦게까지 고뇌했던 시간, 보다 적실한 문장을 쓰기 위해 몇 번이나 글을 갈아엎었을 고투 같은 것은 스며 있지 않다. 이름만 남아 있다. 한 사람의 문학적 생애는 수많은 망설임의 총합이 아니라, 정리된 이름의 목록으로 남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래서 필명은 타인과 맺는 관계 양식을 미리 규정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 이름 때문에 내가 쓴 글을 신뢰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 이름 탓에 내가 쓴 글을 오해할 것이다. 나는 이를 통제할 수 없다. 그저 글에 투영된 진심이 가닿기를 바랄 뿐이다.



   2. 오래 바라보게 하는 빛


   필명을 처음 입에 올렸을 때 말맛이 나쁘지 않았다. 짧고 또렷했다. 들었을 때 쉽게 잊히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앞으로 나서 과시하는 이름도 아니었다. 필명을 정할 때 그러한 균형감을 중요하게 고려했던 것 같다. ‘허희’라고 발음하면 첫음절은 입안에서 가볍게 열리고, 둘째 음절은 살짝 닫힌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은 뜻 외에도 음감과 리듬, 입안에서 굴러가는 소리의 영향까지 고려하는 법이다. (일제강점기 시인 김영랑이 대표적이다. 그의 본명은 김윤식이다.) 아무리 의미가 좋아도 소리가 지나치게 무겁거나 미끄러우면 곤란하다. 이름도 하나의 문장 성분이라면, 내용과 결부된 리듬을 가져야 한다. 

   이름이 앞서 나가 사람을 끌고 다니는 것도 부담스럽고, 반대로 너무 희미해 아무 자취도 남기지 못하는 이름도 원하지 않았다. 아주 눈부시지는 않지만, 칠흑 같은 어둠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빛. 나에게 ‘희’는 이 같은 빛의 질감에 가까웠다. 무엇을 드러내기보다 오래 바라보게 하는 빛 말이다. 물론 어느 자리에서든 필명이 ‘빛날 희’임을 밝힐 때는 약간의 쑥스러움이 따라붙는다. 농담처럼 “스스로 빛나겠다고 외치는 셈이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나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도 맞다. 그러나 내가 바랐던 빛은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나 모든 것을 단박에 환히 드러내는 빛이 아니었다. 사물의 윤곽을 천천히 드러내면서,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면면을 포착하는 낮은 조도의 빛이기를 바랐다.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빛도 그렇지 않을까. 눈부심보다는 잔광에, 계시보다는 감응에 가까운 속성. 필명의 ‘희’가 부디 그런 빛이었으면 했다. 나는 ‘밝히는’ 일과 ‘비추는’ 일의 차이를 생각해 왔다. 강한 조명은 세부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림자를 지워 버린다. 그런데 문학은 본래 그 그림자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양식이다. 진실은 환한 곳이 아니라 그로부터 약간 비켜난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텍스트를 몰아세우는 빛과는 무관한, 텍스트가 스스로의 결을 부각할 수 있도록 곁에 놓이는 빛이 그것이다. 

   승리의 휘광과는 무관하다. ‘희’는 나에게 이해(할 수 없음)의 미광과 친연성 있는 글자였다. 10년 넘게 문학판에 있다 보니, 얼마나 크게 빛나느냐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비추느냐가 관건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물을 제 모양으로 보게 하는 빛,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서서히 드러내는 빛. 비평이 그렇다. 독자가 정답을 알았다고 느끼는 것보다 재차 그 작품을 읽고 싶다고 느끼게 만드는 역할이 핵심인 까닭이다. 그래야 나는 비로소 글이 누군가의 세계를 조금 넓히거나 깊게 파고들었다고 본다.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않을 것, 이해하고 싶어 하는 문장을 쓰되, 이해한 척하는 문장을 쓰지 말 것. 

   현실의 나는 늘 그 다짐에 미치지 못한다. 필명은 그러한 불일치를 부단히 상기시킨다. 너는 이 이름으로 쓰고 있지 않느냐고, 적어도 네가 따르려고 하는 뜻을 배반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살다 보니 가끔은 필명이 본명보다 더 본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가 부르는 본명은 또 다른 시간의 층위를 환기한다. 거기에는 문장으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던 시절, 이름이 그저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의 온기가 남아 있다. 그럴 때 이름이 관계망에 따라 달리 호응하는 여러 겹의 성질을 가졌다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문학 하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의식은 필수적이다. 사람은 익숙해질수록 스스로를 자명하고 당연한 존재로 여기기 쉬우니까. 

   그런데 이름 하나를 따로 세워 두면 그로 인해 약간의 거리감이 생긴다. 그 거리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되 유익하다. 글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과도하게 밀착되어서도 안 되고, 붙잡을 수 없이 멀어져서도 안 된다. 자기연민에 기울거나 생동감을 잃어버리므로 그러하다. 필명은 여기에 적절한 간격을 만들어 준다. 사는 나와 쓰는 나를 단절시키기보다, 서로가 쉽게 포개지지 않도록 조율해 주는 장치. 일상의 내가 문장을 압도하지 못하게 하고, 문장의 내가 일상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 필명은 그러한 거리감을 제어하고 싶은 소망의 일환이었다. 그 이름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스스로를 낯설게 받아들이며 지면과 마주한다.



   3. 시간의 시험대 위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필명이 미완의 기호라는 사실을 자주 곱씹게 된다. 그래서 필명을 궁굴릴 때 도착보다 지속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린다. 어떤 이름은 이미 다 이루어진 상태를 연상시키지만, 필명은 더 살아 내야 증명되는 이름이 아닌가. 완결되어 틈이 없는 상태는 삶의 가변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 반대로 다 채워지지 않은 이름은 앞으로의 시간을 품을 수 있는 여백이 있다. 사람은 그 속에서 조금씩 변하고, 덕분에 문장은 다음 문장을 불러낸다. 그러므로 필명은 앞으로의 생을 어떻게 써 나갈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형식이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이름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다. 등단 초기에는 필명이 나를 돋보이게 해 줄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이름이 나를 더 그럴듯한 곳에, 멀리 데려가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이제는 안다. 필명이 나를 자꾸만 원점으로 되돌려 놓으려고 한다는 것을. 네가 처음 이 이름을 글쓰기의 자아로 삼았을 때 무엇을 바라보았는지 잊지 말라고, 문장을 치장하는 데 급급하지 말고 더 정확하게 쓰라고, 조급함과 허영을 경계하라고. 필명은 어떤 때는 채찍같이 준엄하게 다가온다. 이름을 골랐다는 사실이 곧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라고. 도리어 그 반대라고. 이름은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 앞으로도 거듭 지켜 내야 할 약속이라고.

   필명이 지닌 또 하나의 성질은 그것이 생의 시간과 함께 천천히 늙어 간다는 점이다. 좋은 이름은 특정 시기의 열정에만 기대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조금씩 다른 빛깔을 띠며 살아남는다. 나의 필명도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야심만만한 포부와 무너지지 않는 윤리를 같이 지닌 이름. 처음 필명을 지을 때 무의식적으로 원했던 것은 아마 그러한 지속 가능성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뜻이 닳아 없어지기보다, 많이 불릴수록 작지만 다른 결을 드러내는 이름 말이다. 문학이 본질적으로 시간의 예술이라면, 이름 또한 시간의 시험대에 놓인다. 한 번의 멋진 작명보다 어려운 것은 그 이름으로 오래 버티는 일이다. 

   같은 이름으로 변곡점을 지나는 자신을 감당하고, 변해 가는 생각과 달라지는 문체, 젊은 시절의 과장과 그에 따라 뒤늦게 엄습하는 반성을 함께 품는 일. 필명은 이러한 긴 시간을 견디는 그릇이자 동반자다. 어떤 날의 나는 더 예민하고, 어떤 날의 나는 더 격정적이며, 어떤 날의 나는 부끄러울 만큼 서툴다. 이상의 다양한 나를 하나의 이름 아래 다시 묶기. 그것이 필명이 하는 일일 테다. 그래서 필명은 작명의 의의와 별개로, 그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문장을 감당했는가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이름의 가치는 뜻풀이보다 지속의 두께에 바탕을 둔다.

   이런 상상도 해 본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필명은 남겠지. 누군가의 서가 한쪽, 오래된 잡지의 목차, 인터넷 검색창의 결과 목록 같은 데에 드문드문 이름이 보일 것이다. 그런 공상을 하고 있으면 필명은 현재의 이름이 아니라 미래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지금 여기의 나를 가리키는 이름이면서, 언젠가 나 없는 자리에서도 나를 대신할지도 모를 흔적. 그러면 조금 숙연해진다. 내 삶은 지속되지 않겠지만 이름은 내 삶보다는 좀 더 여기에 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무엇을 전하고 싶나. 대단한 포부? 그보다도 성실하게 문학을 향유하고, 그에 대해 쓰고자 했던 한 사람의 조용한 분투를 떠올리게 한다면, 필명의 사명은 이로써 충분하다. 필명은 계속해서 나를 써야 하는 사람, 읽어야 하는 사람, 조금 더 밝아지려 애쓰는 사람으로 남게 한다. 

   누군가 내게 필명이 무엇을 뜻하느냐고 묻는다면, 이 글을 쓴 이후부터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필명은 본명을 숨기려고 만든 그늘이 아니라, 스스로 감당하고자 선택한 빛의 방향이라고. 필명은 물려받은 시간 위에 내가 조심스럽게 올려 둔 소소한 광원이다. 세상을 환하게 비출 만큼 크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읽고 쓰는 자리만큼은 따스하게 비추고 싶다는 마음. 이는 문장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어두워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빛이고, 섣불리 밝아지지 않도록 절제하게 하는 빛이기도 하다. 더 크게 말하기 위한 이름이 아니라, 더 오래 궁리하기 위한 이름. 이를 잊지 않으려고, 내가 택한 글 쓰는 자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려고, 나는 오늘도 원고 맨 앞에 필명—두 글자를 적는다.



 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4월호의 기획 콘텐츠는 ‘작가들의 필명’이에요. 필명으로 활동 중인 시인, 소설가, 평론가 3인이 자신의 필명에 얽힌 이야기들을 독자분들께 전해드립니다. 일상의 시간과 작가로서의 시간을 구분해 주는 필명이 세 사람의 글쓰기와 삶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함께 살펴봐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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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희
  • 201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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