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배달하는 소설가 하성란
- 작성일 201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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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인터뷰]
문학을 배달하는 소설가 하성란
─ 소설가 하성란 인터뷰
● 일시 : 2012. 2.
● 장소 : 홍대 앞 카페
● 진행/정리 : 주하림(시인)
1996년 단편소설 「풀」로 등단한 이후 『루빈의 술잔』, 『웨하스』, 『삿뽀로 여인숙』, 최근 발표한 『A』까지.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사실주의적인 묘사와 삶의 이면을 치밀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며 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하성란 소설가를 만났다. 유독 매섭던 한파가 지나간 봄날 같던 오후 세 시. 홍대 한복판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만난 하성란 소설가는 체호프 소설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인 같았다. 맛있는 빵과 타르트를 파는 카페에서 무거운 겨울 외투를 벗고 오후의 수다 같은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 주하림 : 책이나 지면에서만 뵐 수 있던 분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제 막 데뷔 삼 년차인데 아직도 견습생처럼 헤맬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선생님은 1996년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막 데뷔하셨을 때의 심정을 듣고 싶어요.
▶ 하성란 : 스물아홉에 데뷔를 했는데요. 처음에는 장난 전화가 온 줄 알았어요. 그즈음이면 과 친구들이 그런 장난 전화를 하곤 했지요. 그해 신춘문예에 응모했든 하지 않았든 우리에겐 모두 열망이 있었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혹시나 싶어 다시 신문사에 확인 전화를 했었지요. 고 3 겨울에 처음 친구와 원고가 든 봉투를 들고 혜화우체국까지 걸어갔던 것이 기억나요. 1995년 겨울 신문사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까지 여덟 번 정도 떨어졌지요.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땐 별 기대 없이 갓난아이와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그런 전화는 꼭 그럴 때 와요.
▶ 주하림 : 습작기나 등단 무렵에는 어떤 일이나 작업을 하면서 데뷔를 준비하셨나요?
▶ 하성란 : 그냥 계속 썼어요. 그 방법밖에는 몰랐죠. 필사라는 걸 몰랐지요. 알았다면 도움이 많이 되었을 거예요. 여름까지 게을렀다가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원고지를 펼치고 잠을 설쳤지요. 문학과는 영 딴판인 회사에 다녔지만 가방 속에 늘 문학책을 넣고 다녔지요. 그걸로도 위안이 되었어요. 현대문학을 정기구독하고, 여러 작가의 소설들도 문예지를 통해 읽었지요. 이론이나 작법을 알려주는 책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읽을 땐 이해하겠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 거죠. 체득밖에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속 썼지요.
▶ 주하림 : 선생님이 졸업하신 서울예대는 쟁쟁한 작가들을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죠. 서울예대 문창과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는지 궁금해요.
▶ 하성란 : 그땐 술을 마실 줄도 몰랐어요. 학교가 명동 한복판에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요. 거리를 걷는 것도 공부였어요. 클럽도 다니고 맥주집도 다니고, 그러다 지도교수이신 오규원 선생님께 혼이 나기도 했고요. 오규원 선생님이 곁에 있었던 게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학보에 공모한 소설이 당선되었는데 선생님께서 따끔하게 지적을 해주셨어요. 인물들이 땅을 딛지 않고 있다, 고 하셨지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죠.
▶ 주하림 : 작품에 영향을 준 인물이나 사연에 대해 듣고 싶어요. 가령 연애에 관련된 추억이라든지, 소설의 모티브가 된 사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하성란 : 연애에 대한 건 별로 없어요. 단편 「1968년의 만우절」에 남편 얘기가 좀 나오고, 전체적으로 아버지 얘기가 많이 나와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썼어요. 결핍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가 늘 그리웠어요. 여느 딸들과 마찬가지겠지만 아버지에게 퍽 많은 사랑을 받은 편이였거든요. 연애 경험은 별로 없어요. 첫 연애 후 곧바로 결혼했어요. 연애를 비롯해 많은 경험이 한 사람을 성숙시키지요. 문학의 자양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으로 인한 기쁨과 슬픔. 사람을 많이 만나 보는 게 중요하지요.

▶ 주하림 : 글 쓸 때 특별한 노하우가 있나요?
▶ 하성란 : 노하우가 있다면 좀 알려주세요. 매번 처음인 것처럼 쩔쩔매지요. 절대 끝맺지 못할 것처럼 끙끙대기도 하구요. 그런데 노하우가 없다는 것, 공평하다는 생각도 하지요. 어느 작가든 공편한 조건 속에서 첫 문장을 시작하지요.
▶ 주하림 : 작품을 쓸 때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점은 무엇인가요?
▶ 하성란 : 이야기 얼개를 짜는 게 가장 어려워요. 머릿속에서 사건을 만들고 소설의 전체적인 틀을 짜는 게 어려워요. 하나라도 맞물리지 않으면 안 돼요. 대신 한번 정확하게 짜지면 그때부터 쓰는 건 수월한 편이죠.
▶ 주하림 : 아까 노하우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건 다시 말해 아직까지 창작에 대해 괴로움을 많이 느낀다고 봐도 될까요?
▶ 하성란 : 어제는 친한 소설가 다섯 명이 내 소설을 비난하는 꿈에 시달렸지요.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지요. 그런 꿈은 꾸지 않았는데, 왜 그런 걸까. 아침에 곰곰 생각했어요. 아직까지 자기 검열에 시달리는 것 같아요.
▶ 주하림 : 등단한 지 16년 되었는데요. 장편과 단편 중에서 어떤 게 더 즐겁게 써지나요?
▶ 하성란 : 둘 다 어려운데(웃음), 장편은 장편대로 단편은 단편대로요. 장편이니 단편이니 하는 것보다, 쓰고 읽는 습관이나 관성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 주하림 :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집은 따로 있나요?
▶ 하성란 : 그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끔 소설을 읽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놀랄 때도 있지요. 일상적인 나와 소설을 쓰는 나 사이의 간극이랄까, 그런 것이 느껴지지요. 어떤 것이 나일까, 물론 둘 다 나이겠지만, 둘 다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요.
▶ 주하림 : 저는 개인적으로 소설가들에게 체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평소 몸 관리,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 하성란 : 건강한 편이에요. 조깅과 수영, 인라인을 잠시 배웠지요. 운동은 왜 이렇게 지루한 걸까요? 오래가지는 못해요.
▶ 주하림 : 책을 삼킨 tv나, 문학집배원 등 소설 쓰는 것 외에 다양한 글쓰기 관련 일을 하고 계신데, 소설 창작에 방해가 되지 않나요?
▶ 하성란 : 책을 삼킨 tv 경우 평소 만나기 힘든 분들과 문학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방송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조명이 딱 켜지면 머릿속이 하얗게 됐어요. 소설 외의 글을 쓸 때면, 솔직히 소설만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어요. 하지만 글을 써서 그 노동의 대가를 받는다는 것, 감사하고 있지요.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 주하림 : 갑자기 조금 다른 질문이 떠올랐는데요. 저는 여름에 태어나서 여름을 참 좋아하는데, 어떤 계절을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계절이 소설에 영향은 미치나요?
▶ 하성란 :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진 않아요. 저도 여름을 좋아해요. 여름에 태어나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계간지에 계절에 걸맞은 소설을 써서 발표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전 물을 무척 좋아해요. 물속에서 노는 걸 참 좋아하는데, 피곤하면 잠수하는 꿈을 꿔요. 물속에서 눈을 떠서 물속 흐릿한 사물을 보는 꿈을 꾸다 일어나면 몸이 개운해요.

▶ 주하림 : 선생님 작품을 보다 보면 섬뜩하리만큼 치밀한 묘사가 인상적인데, 문득 그림이나 명화에 관심이 있을 거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특별히 좋아하시는 그림이나 화가가 있나요?
▶ 하성란 : 뭔가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해요. 돋보기로 한참 그림을 들여다본 적도 있었지요. 그림의 균열, 눈빛, 물감의 결 같은 것. 예전에는 살바도르 달리를 좋아했어요. 새로운 감각의 화가들을 두루두루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림에서 나타난 장치들을 통해서 소설의 형식을 끌어올 때가 있어요. 대신 무서운 그림은 싫어요.
▶ 주하림 :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게 뚜렷한 것 같아요.(웃음) 평소 좋아하는 것에는 어떤 게 있나요?
▶ 하성란 : 퀼트하고 뜨개질하는 거 좋아해요. 뭐 만드는 것, 주로 혼자 하는 일을 좋아해요. 낯선 사람들은 두렵지만 친한 친구들 만나는 거 좋아해요. 좋은 친구들과 맛있는 밥, 그리고 술 한 잔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죠. 남편은 좋은 술친구예요.
▶ 주하림 : 한국 소설가 중에서 어떤 작가를 좋아하시나요?
▶ 하성란 : 동년배 작가들을 좋아해요. 그들의 소설이 없다면 지금도 갈피를 잡기 어려울 거예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미처 내지 못한 목소리를 찾고. 뛰어난 동료 작가가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인 것 같습니다. 누구 한 사람 딱 꼽아서 거론하긴 좀 애매하네요.

▶ 주하림 : 문학집배원을 하면서 많은 소설이나 에세이를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문장은 어떤 게 있을까요?
▶ 하성란 : 『행복한 세계 술맛 기행』을 쓴 니시카와 오사무라는 일본 작가가 기억나요. 그 사람은 사진가인데요, 카메라를 맡기거나, 팔아 술을 마셨다더군요. 싸구려 위스키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글을 읽다 보면 위스키 한 잔이 간절히 생각나요. 일 때문에 지방에 들렀을 때였어요. 모임에서 한 분이 문장배달을 잘 받아 읽고 있다고 하셨지요. 좋은 문장을 읽으면 하루가 행복하다고 하셨어요. 아, 더욱 열심히 좋은 문장을 찾아야지, 란 생각을 했지요. 한참 소설을 읽고 좋은 문장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아요. 밑줄을 긋고 싶은 멋진 문장이 아니라 소소한 여운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읽고 있는 문장은 똑같지만 개인의 체험은 다 다르니까요. 아마 문장배달이 끝나더라도 이 습관은 오래 남을 듯해요. 문장을 찾는 습관요.
▶ 주하림 : 문학집배원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이나 원칙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 하성란 : 이 세상의 책을 다 읽었고 인상 깊은 문장이 저절로 떠오른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그렇지 못하니 늘 새로운 문장을 찾아야 하지요. 먼저 문학집배원의 기본적인 선정 기준을 맞추려 하지요. 문장배달에 많이 소개된 작가의 작품보다는 덜 소개된 작가의 작품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보다는 아닌 작품으로. 그 다음엔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문장을 읽게 되지요. 작가 이름보다 작품으로 먼저 만나는데 저도 놀랄 때가 많아요. 이 작품의 작가가 이분이었다니, 이 작가가 이렇게도 글을 쓰는구나, 등등요. 문장은 전체가 아닌 부분을 소개하기 때문에 맥락이 닿지 않거나 뜬금없는 부분은 좀 곤란하지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소설이고 산문이고 부분부분 인용해 왔는데, 그 부분으로 전체가 설명되는 거예요. 참 신기하지요.
▶ 주하림 : 문학집배원으로 활동해 오면서 겪은 애환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 하성란 :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가끔 문장배달을 잘 읽고 있다는 분들과 마주칠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아, 정말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구나, 더욱 좋은 문장을 찾아야지, 부끄러우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 등기우편이구나, 문장배달은. 수신인 손 안에 잘 도착했으니까요.
▶ 주하림 : 문학집배원으로서 독자들에게 바라는 점 혹은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살짝 공개해 주세요.
▶ 하성란 : 좋은 문장을 읽으면 그 문장의 의미를 짐작하는 일도 재미있지만, 전 자연스럽게 제 경험이 떠올라요. 그렇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배달하며’는 2매 분량으로 짧은 글인데, 이 문장을 읽는 분들의 ‘받아보며’라는 글도 개인적으로 읽고 싶어요. 아마도 다들 다르실 거예요. 얼마나 다양한 개인적 경험이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 주하림 : 최근 ‘예술진흥기금 확충’과 관련한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석하셨는데요. 작가들의 창작기금에 대한 이야기, 작가들의 현실에 대해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 하성란 : 지금까지 직장에 다녔다면 아마 과장은 됐을 텐데(웃음), 소설 창작만으로 생활하기 어려워요.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었는데, 그처럼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글을 쓰는 좋은 환경이 우리 작가들에게도 주어지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지요. 다른 문화를 향유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야 우리 문학도 더욱 다양해질 수 있지요. 현실에 급급해 써내는 게 아니라 정말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창작지원금도 심사를 거치지 않고 필요한 이들에게 모두 지원되면 좋겠어요. 또한 기금을 받으면 정해진 기한 안에 실적을 제출해야 하는 시스템도 바뀌었으면 해요. 우리 작가들이 핍진해지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여유를 가지고 창작을 즐길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요.
▶ 주하림 : 최근 경험한 것(책, 영화, 음악 등등) 중에서 특히 인상 깊었고 여러분께 소개해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나만 소개해 주세요.
▶ 하성란 : 얼마 전에 프린스의 노래를 다시 들었어요. 프린스는 마이클 잭슨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가수지요. 가사가 노골적이에요. 그런데도 뭐랄까, 어떤 선을 지키고 있어요. 시 같았어요. 이 노래 어때? 아이에게 들려줬는데 앞부분을 조금 듣고선 바로 “낡았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 면에서 퀸과 비틀스는 우리 둘 다 좋아하지요. 낡은 것에 대해 생각했어요. 가끔 일드나 애니메이션도 즐겨 보지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좋았어요.

대학시절 도서관 귀퉁이에서 읽었던 그녀의 소설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사물과 현상을 향한 혀를 내두를 정도의 예리한 관찰력과 사실적인 묘사는 만나 보지도 않은 작가를 어딘가 굉장히 메마르고 차가운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처음 그녀의 작품을 접했을 때 받았던 느낌은 그녀를 만나기 전 초조함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그동안의 긴장과 의구심은 깨끗이 씻겨 나갔다. 도리어 내내 헤매고 있었던 삶과 문학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다정한 이웃집 언니에게 적절한 위로와 조언을 받은 기분이었다. “쓰지 않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곤조곤한 말씨 속에서도 작품을 향해 번득이는 그녀만의 고투(苦鬪)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곳을 오래 응시하길 좋아하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땐 잠수하는 꿈을 꾼다는 그녀. 그녀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계에서는 또 어떤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질까. 하성란 소설가의 다음 페이지가 기대된다.

《문장웹진 6월호》
※ 본 인터뷰 원고는 제201호 〈웹진 아르코〉(2012. 1. 30)에 실린 인터뷰 기사의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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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소심록(素心錄)』, 그 마음의 울림과 여운 정혜경 연주홍빛 표지 배경에 민들레 씨앗이 날아다니고 있다. 표지 왼쪽에는 한자 세로쓰기로 素心錄(소심록) 柳達永(류달영) 著(저)라고 저자가 직접 쓴 글씨가 굳건하게 새겨져 있다. 성천(星泉) 류달영의 수상록 『素心錄(소심록)』(경문사, 1961)이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우선 성천의 수상록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웠고, 소박하면서도 여운 있는 표지가 마음을 끌었다. 장정을 맡은 월전 장우성은 농민이 ‘생각하는 민들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성천의 뜻을 이렇게 담았다. 1961년 초판본 민들레 씨앗 하나가 이제사 마음터에 내려앉았다. 저자 성천 류달영(1911~2004)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농촌 계몽의 최용신 소전』을 저술해서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양정고보 스승이었던 김교신은 최용신을 만나 보았던 성천에게 이 책을 쓰도록 권유했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직 중이던 성천은 제자들에게 최용신 전기를 읽히고 싶었다. 일본 경찰 검열을 의식하며 어려움 속에 완성한 최용신 전기는 초판 1천 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품절되었을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에 민족 사랑과 계몽 운동의 불씨를 심어 준 책이었다. 그 시절부터 성천의 글은 독자를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되어 6·25전쟁과 4·19혁명 후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발표했던 성천의 글이 했던 역할을 『소심록』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소심록』은 ‘평소의 마음을 기록한 책’이란 뜻으로 근래에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모아 내었다는 겸손한 제목이다. 성천은 이 글모음이 자신에게만이라도 사람다운 사람을 위하여 훗날까지 격려하는 힘을 가질 것으로 믿었다. 그 ‘격려하는 힘’은 충분히 전해져 강렬한 울림으로 왔다. 가로 12.5cm 세로 19cm의 이 아담한 책 405쪽에 51편의 글이 빼곡히 담겨 있다. 『소심록』의 글들은 1959년 3월부터 1961년 2월까지 이 년 동안 《사상계》, 《새벽》, 《사조》, 《신태양》, 《식량과 농업》, 《여원》 그 밖의 여러 잡지와 《조선일보》, 《대학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에 발표한 것이다. 이 책은 1961년 5월에 출간되었으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지 일주기가 되는 시점이었다. 마지막 장 ‘사월혁명’의 다섯 편은 혁명 때 쓰러진 꽃다운 젊음들과 같은 행진 속에서, 거친 호흡을 함께 하면서 쓴 글들이었다. 성천은 4·19혁명은 학생들의 피로 성공했으니, 그 정의로운 피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깊은 존경으로 명복을 빌었다. 성천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특별했던 점은 나라의 현실에 대해 고뇌하면서 비전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현실에서의 타개책까지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성천은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 사토
- 관리자
-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거대한 사랑의 기록 - 김명순 창작집 『생명의 과실』 박소란 사진1. 『생명의 과실』 (한성도서주식회사, 1925) 표지 지난 2025년은 『생명의 과실』(한성도서주식회사, 1925)이 출간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생명의 과실』은 김명순(金明淳, 1896~1951 추정)이 쓴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창작집이다. 국내 서지 기록에 등록된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 문학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명의 과실』도 김명순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때문에 100주년은 터무니없이 고요했다. 별다른 의식이나 언급 없이 우리 문학장은 지난 한 해를 지나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전 김명순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난과 핍박을 떠올리게 된다. 혹여 김명순이라는 선구적 예술가를 아직까지도 과거 그늘진 그 자리에 세워 둔 것은 아닐까, 못내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조금만 검색을 해 봐도 대략의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김명순은 쉽게 소거될 수 없는 이름이다. 1917년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문예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친 한국 문단 최초의 여성 작가다. 1920, 30년대 누구보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친 김명순은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하는 등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피아노를 잘 치고 독일어로 곡을 만들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신문기자, 영화배우로도 활동할 만큼 다재다능했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첩'이라는 이유로,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자유연애’를 주창한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을 받았다. ‘부정한 혈액’ ‘문란한 여자’ 등 모욕적인 꼬리표가 일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공부와 집필에 힘썼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힘겨움이 잇달았고, 결국 1951년경 일본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명순은 생전 시, 소설, 수필, 희곡(각본) 등을 한데 묶은 두 권의 창작집을 냈다.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회동서관, 1929 추정)이 그것이다. (세 번째 창작집을 준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과적으로 불발되었으며, 때문에 창작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도 상당하다.) 이 중 『생명의 과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으로 그 의미가 각별하다. 1 『생명의 과실』에는 등단작 「의심의 소녀」를 포함해 소설 2편, 시 24편, 수필(목차에는 ‘감상(感想)’이라 표기되어 있다) 4편이 수록되었다. 소설 「돌아다볼 때」나 시 「유언」, 「저주」, 「탄실의 초몽」, 「유리관 속에
- 관리자
-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100년 전 멋진 신혼여행의 기억 -염상섭의 『해바라기』와 나혜석의 결혼 전후 박진영 노처녀 결혼 풍경 신부 나이 스물넷이면 노처녀인 시절이었다. 서른넷의 신랑이라고 첫혼인일 리 없었다. 암만해도 결혼식을 버젓하게 치러야 했다. 둘 다 유명 인사다 보니 결혼 소식이야 진작에 왁자그르르 퍼졌고, 신문에 신랑 신부 사진까지 실렸건만 그래도 아쉬웠다. 내친김에 결혼 기사 아래 청첩장을 내기로 했다. “저희는 목사 김필수 씨의 지도를 받자와 4월 10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옵나이다. 이날에 귀댁 왕림의 광영 주심을 엎드려 빕니다. 경신년(1920) 4월 3일, 김우영 · 나혜석.” 신문에 청첩장을 광고한다고 발칙한 일은 아니다. 대체 뉘 집 아들딸인지 이름이 없는 게 문제다. 1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청첩장은 신랑 신부가 아니라 부모 이름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무릇 결혼이란 당사자들의 일이기에 앞서 엄연히 집안 대사인 까닭이다. 요즘에야 신랑 신부가 나란히 팔짱 끼고 걸어 들어가는 일도 흔하다지만 여태 청첩장 문화는 그대로 아닌가? 이만한 기세라면 혈기 넘치는 청년들이야 박수 칠 법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못마땅하다 못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둘 다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 내로라하는 집안 자식들이었다. 그나마 넷째, 다섯째 자식이라서 불행 중 다행이지만 대체 무슨 남부끄러운 짓이란 말인가? 시아버지는 기어코 폐백을 물리치고 술잔이나 기울이러 나갔다. 하기야 목사 주례에 답사랍시고 감히 신부가 한마디 아니라 일장 연설을 떠든 예식이었으니 결혼식이고 피로연이고 애당초 안 들어선 게 차라리 나은 지경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신랑 신부는 이튿날 식전 댓바람부터 양가에 차례로 들이닥쳐서는 신혼여행 떠난답시고 들썩여 놓고는 훌쩍 기차를 탔다. 신부는 두 주일쯤 예정이라고만 무지르고는 어디로 가는지 신랑에게도 도통 알려 주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잡아끌다시피 했다. 이쯤 되고 보면 아무래도 웬만한 신혼여행이 될 리 만무했다. 신랑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의 변호사 김우영, 신부는 진명여학교 최우등 졸업생이자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의 화가 나혜석이다. 사진1. 나혜석 결혼사진 (1920) 출처: 수원시립미술관 남도 신혼여행 사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전에서 잠시 여관에 들렀다가 호남선으로 갈아탄 신혼부부는 한밤중에 목포에 도착했다. 열 시간 넘게 걸린 곤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인력거 잡아타고 곧장 여관에 들어서서는 하녀 이름부터 대는 신부가 영 수상쩍다. 초행길이 아니었던 셈이다. 신부는 3년 전 그 여관 2층에서의 하룻밤을 홀로 추억했고, 영문 모르는 신랑은 얼추 짐작이 나섰지만 섣불리 입을 열 계제가 아니었다. 아직 신혼 둘째 날 밤이었으니. 부산 유곽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하녀와의 사연인즉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신부는 3년 전 도쿄에서 다니던 학교를 빼먹고 홀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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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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