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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숭고함(2)

  • 작성일 2014-09-01

 

 


패자의 숭고함(2)

 

도로 내려와야만 할진대, 네가 왜 가장 높은 저 언덕의 정상에 기어오르려 할 것이며, 일단 내려온 후, 어떻게 거기를 오르기 시작했는지를 주절거리며 네 인생을 보내지 않으려면 너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조르주 페렉 1)

 

 

조재룡(문학평론가)

 

 

*

 

    시라는 가교가 있어서, 중도에 좌절된 자들과 그럴 운명에 처한 자들을 우리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유와 연결해 주는 것일까? 문학은 패자들에게 최소한의 정당한 몫을 돌려주려 한 장본인이다. 시는 공적인 영광을 기리거나 호사롭고 장대한 장례를 치르는 일보다 더 오래 지속될 헌사를 패자들에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몸짓이다. 시는 이야기에 의탁해 패자들을 소모하려 들지도 않는다. 시는 철학이라는 사변의 늪으로 패자들을 몰아넣고, 그런 다음 이들에게 난해한 구원의 손짓을 보내지도 않는다. 시는, 타락했으나 순수하고, 아름다우나 연약한, 삶을 좀 더 살아 보기 전에 벌써 절망한, 불가능해서 위대한 감정에 사로잡힌, 지나가는 여인에게 무턱대고 말을 걸어 보거나 사랑을 구걸하는, 자기를 이끌고 있는 타락의 감정을 치료할 처방을 술과 우애에서 찾고자 하는, ‘지금’ 침묵하고 있는 지상 위의 풍경들에 추파를 던지며, 예정되어 있지 않는 것들을 힐끔거리고, 자명하지 않은 것들에 손길을 뻗어, 미지의 무언가를 우리의 삶에서 길어 올리려 하는, 아무도 격려한 적이 없고, 그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았던 길 위에 홀로 서서 세계를 향해 홀로 터뜨리는 알 수 없는 함성이다. 열정이 곧 타성에 젖을 것이라고 예견하는 자,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행복에 젖은 성취감으로 지어 올린 황홀한 궁전이 아니라, 폐허 위에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을 떠나보내야 할 때라고 남몰래 속삭이는 사람들, 아름다움의 창조는 감수성으로 지어 올린 질서 속에서 위대한 파괴자가 되도록 자신을 기혹하게 몰아붙일 때, 잠시 틈입을 허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 이 획일화의 일로에서 앞만 보고 질주하라고 강요하는 이 세상에 시라는 형식의 글을 토해 낸다.

 

   1)   「잠자는 남자」(조재룡 번역), 문학동네, 2013, 39쪽.

 

 

돌연 젖는다, 나는 철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따로 앉은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 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나는 불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함께 벌 받을 자격이 없다.
원인이기는 하나 해결을 모르는 불구로서
그 진흙 몸의 충혈 껴안지 못했던 것.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몸 적실 의향이 있지만
그것은 모독, 모독이 아니라 해도, 이 어지러움으론
그 무엇도 진화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랑보다 더 깊고 무서운 짐승이 올라오기 전에
피신할 것이다 아니, 피신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을 것이다.

 

네가 단풍처럼 기차에 실려 떠나는 동안 연착하듯
짧아진 가을이 올해는 조금 더디게 지나가는 것일 뿐이리라.
첫눈이 최선을 다해 당겨서 오는 강원도 하늘 아래
새로 난 빙판길을 골똘히 깡충거리며,
점점 짙어 가는 눈발 속에 불길은 서서히 냉장되는 것이리라
만병의 근원이고 만병의 약인 시간의 찬 손만이 오래
만져 주고 갔음을 네가 기억해 낼 때까지,
한 불구자를 시간 속에서 다 눌러 죽일 때까지
나는 한사코 선량해질 것이다.
나는 한사코 평온해져야 한다.

- 이영광, 「사랑의 미안」 전문 -

 

    패배는 전적으로 이지적인 무엇이다. 우리는 패배를 깊이 숙고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도 있다. 하기야 그것 외에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기만의 활력을 창조해 내고, 자신의 복수심을 고귀하게 승화시키려는 의지가 패배와 함께할 때 우리를 찾아온다. 시인은 가장 반사회적 인물이며, 펜과 가슴으로 무장한 무법자이자 열정의 폭풍우에 휩쓸려버린, 한 번쯤 제게 내린 알 수 없는 저주를 버거워해야만 하는 운명을 선택한 자다. 그의 분노와 고통은, 공동체의 법률에 순응할 수 없는 것인 동시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태도에도 달려 있다. 그는 전통의 굴레를 견디지 못해, 끝끝내 참을 수 없어, 끓어오른 말을 들고서, 도덕률의 편협하고도 밀폐된 원칙에 저항하려는, 외로운 길로 접어든 자다. 새로운 감각과 알 수 없는 풍경들, 이루어지지 않는 꿈을 탐욕스레 갈망하는 모험가가 세상에서 시를 쓴다.
    그들은 음울하고도 신비한 절망과 패배의 영광을 어쩔 수 없이 갈구하는 자이며, 그래서, 세계의, 비자발적인, 아니 자발적인 반역자이기도 하다. 사회가 가한 제약의 장애물들을 걷어내려 끊임없이 시도하는 자와 예외적인 개인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와 함께, 패배와 함께, 패자들과 함께 열린다. 시인은 종잡을 수 없으며, 변화무쌍하여 비범하다고 불려 마땅한 제 재능을 놀라울 정도의 순진함과 광기로 표현해 낼 줄도 안다. 나약하면서 억세고, 너그러우면서 에고이스트인, 세련되었지만 난폭한 힘을 꿈꾸는 사람들이 시를 쓰는 것이다. 그는 불행을 개선하려 하기보다, 냉정하게 불행의 그 편폭과 자장과 굴곡을 유심히 바라보고, 불행이 몰고 온 온갖 죄악을 자신의 삶과 언어로 감내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시인은 애초부터 번민하는 영혼을 들여다볼 만화경 하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빼어난 감수성에 의지해 세상을 표현하기에 적합할, 풍부하고 창의적이며 재기발랄한 언어를 구사하는 뛰어난 자질의 소유자였던 것도 아니다. 시인의 재능은 오히려 균형을 잡지 않으려 하는 데 있을 수도 있다. 그의 재능은 우박같이 쏟아지는 삶의 면면들과, 이때 흩뿌리는 고통의 파편들을 마주하고서도 “아니, 피신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상한 용기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의 재능은 패배의 재능, 패배하는 재능과 다른 것이 아니다.

 

    조그맣게 쭈그러든 할멈은 아기를 보자 아주 기뻤다. 누구나 예뻐하고 모든 사람이 즐겁게 받들어 주려는 그 귀여운 아기는 작은 할멈처럼 가냘프고 또 할멈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그래서 할멈은 아기에게 다가가 웃음을 띠우며 보기 좋은 얼굴을 지어 보이려 했다.
    그러나 아기는 이 착한 늙다리 여자의 손길에 겁이 나서 발버둥을 치며, 온 집 안에 가득 차게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댔다.
    그 서슬에 착한 할멈은 제 몫의 영원한 고독 속으로 밀려나, 한쪽 구석에서 울며 중얼거렸다. ―“아! 불쌍한 우리 늙은 여편네들은 누굴 즐겁게 해줄 나이가 지났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어린애들을 사랑해 준답시고 두렵게 할 뿐이구나!”

- 샤를 보들레르, 「늙은 할멈의 절망」2) 전문 -

 

    낭만주의에서 만개하였고, 상징주의가 부패하며 차츰 제 언어와 논리를 갖추어내고 또 무르익어 갈 때, 멜랑콜리와 권태, 사랑의 분노와 자기 파멸, 법률의 군림과 나르시시즘의 저주, 삶의 고통과 불행에 사로잡히기, 자살 충동과 댄디즘, 막연한 사랑과 데카당스 같은 온갖 주제들이 시를 통해 우리의 삶에 잦아들었다. 예술가는 만족을 몰라, 저주의 엄습을 받은 자, 행복도 휴식도 알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통념의 문턱을 넘어설 수밖에 없는 자일 수밖에 없었다. 예술가는 우리가 돌보지 않았던 것, 돌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 잊으려고 했던 것, 사회의 질서와 법망이 피해 가는 것, 그것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 그러니까 “현대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거대한 도시를 빈번하게 왕래하고, 그 수많은 관계와 교섭을 하다” 생겨난 “끈덕진 이상” 3)을 실현하고자, 아케이드에 진열된 복제 상품을 힐끔거리며, 거리를 한없이 배회하는 저 익명의 군중들, 가난뱅이들, 한물간 광대, 과부, 구걸하는 거지, 추악한 몰골의 노파, 길거리에 버려진 고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감시하는 경찰,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는 개, 몰락한 왕, 알코올에 찌든 창녀, 도박꾼, 성도착증에 시달리는 의사 등에서 뿜어 나오는 기이한 광기와 알 수 없는 감정을 제 글로 적어내고, 제 붓을 들어 캔버스에 담아내려 한 자였다. 그들은 패배를 그려내려는 몸짓으로, 패배에 대한 오마주로, 삶의 밑바닥을 샅샅이 훑어 나가면서, 성스러운 것과 대별되는 세속적인 것들을 자본주의가 만개한 세상 한복판으로 끌고 와 펼쳐 보이는 일에도 사활을 건다. 합리적 근대화와 이성과 질서의 물결에 파묻혀, 제 가치를 상실하여 차츰 쓰레기가 되어 가는 것들, “불합격품, 불량품, 폐기물, 찌꺼기 ― 와 그리고 쓰레기 ― 와 의미론상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 바로 이 “불확실성이라는 유령” 4)을 솎아내고, 그 양상을 기록하는 일은, 세계와 우주의 질서 사이에서 보편적인 유비(劉備)를 꿈꾸고, 추상이나 형이상학을 실천하면서, 한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자 하는 원시(遠視)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황사가 물러난 자리를 대신해 방문한 미세먼지에도 눈을 돌렸던, 진정한 패자들이었다.

 

   2)  in 『소산문시집 / 파리의 우울』, 황현산 번역, 2014년 12월 문학동네 출간 예정.
   3)  Ch. Baudelaire, 「Preface」, in Petits po」mes en prose(Le Spleen de Paris), Poesie/Gallimard, 1973, p. 22
   4)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것들-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정일준 옮김), 새물결, 2008, 32쪽, 164쪽.

 

*

 

    나는 패자들의 목록을 만들 수도 있다. 사실,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는 행위 자체가 이미 패배하는 것이나, 그 과정과 몹시 닮아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無)의 현기증 위에 자신의 연약하고 초라한 오두막을 짓고, 제 불안한 삶을 견뎌내며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이 불안이라는 말에는 사실 편견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불안에는 오히려 가혹한 평등과 부당한 정의(正義), 교환되지 않는 등가(等價)와 파편으로 지어 올린 공동체가 자리한다고 해야 할까? 불안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나 마음속에 천박하고 비루하게, 나약하고 비장하게, 길거나 짧게, 머물고픈 불안이라는, 저 익명의 인장을 하나쯤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쳐야 할 것도, 징그러운 벌레를 보듯 혐오하거나 회피해야 할 것도 아니며, 삶에서 박멸하거나 추방해야 할 것은 더욱 아니다. 의식을 하건 그렇지 않건, 우울과 슬픔에 젖어들어,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 확인하려 들려는 자, 오로지 그러한 인간의 자격으로만 지금-여기의 삶을 살아내려 각오한 자, 그런 제 생각을 글로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에 다소 예민한 모험가들이, 결국 자발적으로 실패를 선택하고, 또 시를 쓴다.

 


나는 항상 실패한다. 나는 항상 시도한다. 나는 항상 물거품이다. 나는 항상 신비하고 절망한다. 나는 항상 이유다. 나는 항상 결론이고 거의 없다. 나는 항상 무한하고 있다. 나는 항상 결정적이고 온다. 멀어져 가는 대상에 대하여 나는 항상 단정하고 대상이다. 나는 항상 불가능하고 없다. 홀로 던져져 있다. 나는 항상 마주하고 적이다. 흑이고 백이다. 더 많은 색깔이 필요하다. 더 많은 삭제가 필요하다. 나는 항상 흘러넘치는 선물. 거리 곳곳을 옮겨 다니는 식물. 어떤 시각이든 필요하고 어떤 청각이든 고통을 빼먹는다. 핑계가 아니면 변명으로. 흐름이 아니면 덩어리로. 액체가 아니면 젤이라도 바르고 나타나서 밤을 움직인다. 나는 항상 서 있다. 거의 죽어 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묵직하게 달아나는 영혼을 붙잡고 있다. 돌로 눌러 놓고 있다.

- 김언, 「나는 항상 실패한다」 전문 -

 

    그들은 제가 기획한 삶의 모험에서 끝내 종착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자들이며, 운이 좋아 샘물 근처에 당도한다고 해도, 물을 마시지 못해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벌써 예감하고서, 아스팔트 위에 착시로 피어올린 오아시스를 제 삶과 글 속에서 애써 지워내려는 자들이다. 대신, 그들은, 모르는 것, 확정되지 않은 것, 그러니까 움직임 속에서 계속 ‘생성 중인 것(energeia)’을 대면하려, 포착하려 시도하며, 그 과정에서 끝없이 절망을 경험하고, 그럼에도 그 불가능성을 하나씩 실험해 나가면서 “묵직하게 달아나는 영혼을 붙잡”아 보고자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정신과 사유에서의 패배자들, 과연 어떤 작가가, 어떤 시인이 여기에 속하지 않는 것이며, 어떻게 여기에 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서 제 글감을 찾아내고, 그것들의 이면과 내면을 쟁취하면서도 무언가에 취한 자신만의 정신을 덧대어 사회에 빗금을 치거나, 예기치 않은 일격을 가하려 마음의 빗장을 풀지 않는 자가 어떻게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패배자, 시인, 그는 결코 하찮은 인간이 아니다.
    시인은 매순간 망설이고 동요하며, 공포에 반응하면서, 모순되어 보이는 말을 내뱉는 자들이다. 그에게는 기댈 만한 사람이 달리 없다. 그는 자신의 불안이나 혼란,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까닭 없이 찾아오는 모순과 고통과 무지를 제 언어의 무대 위로 과감히 올리려는 사람이다. 시인은 자기 삶의 모순과 씁쓸한 제 꿈을 반사하거나 튕겨내는 거울 놀이에 고무된 자인 듯해도, 이제 막 생겨난 또 다른 상처 때문에, 그 거울 앞에서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자이며, 그러나 제 언어의 뭉치를 쥐고서, 문자들의 광란에 힘을 보태고자 힘겨운 시간을 맞이했을 때조차도, 독자에게 참여나 동정은커녕 이해나 지지를 요구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시인이 추억의 침대 위에서 무언가를 부둥켜안으며 삶의 패배와 배덕을 확인해 나갈 때, 그들이 삶의 수많은 거짓말을 제 입술로 포개며 활활 불태우고 있을 때, 비평가가 움켜쥘 수 있는 배반의 비극은 어떻게 시가 투척한 이 파멸의 유혹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일까?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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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같은 소리 (1)

사랑, 같은 소리(1) 내게 말해다오, 사랑이여,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이 짧고 몸서리치는 시간을, 그저 생각과 교류하며 오로지 사랑이 아닌 것만 알며 사랑이 아닌 것만 행해야 하는가? 잉게보르크 바흐만 1) 조재룡(문학평론가) * 사랑이 무엇일까, 뭐 이런 멍청한 물음을, 그러나 한 번쯤 던져 보지 않은 청춘이 또 있을까? 누구나 그랬을 것이며, 그랬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거나, 어느 시각, 어느 정해지지 않는 순간들을 몰래 열고, 그래서 급습해 오는 기억에다가, 까닭을 모를 발작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사랑이라는 관념을, 사랑이라는 몸의 경험과 시간의 뭉텅이를 개인의 역사라는 허명을 들고 불러내고, 또 거기에 나름의 윤색을 가해, 암튼, 저 지리멸렬의 순간들을 빛나는 교집합으로 추려내기도 하면서, 그렇게 가끔씩 우리는 모두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무시로 찾아드는 걸 막아낼 재간이 없다고, 제 앞에, 친구건 동료건, 앉혀 놓고 고백을 한답시고, 듣는 사람의 찡그린 미간은 본 체 만 체, 지루한 제 사랑 이야기를 신이 나서 주구장창 늘어놓는 사람은 필경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무언가를 선택하라고 돌아오고 또 돌아 나가는 초밥집의 회전 벨트처럼, 하루하루 반복되는 지루한 삶 속에서, 제 무른 속살과 거기에 묻어 있는 감정들이 마모되어 가는 바로 그만큼 두꺼워진 표피를 잠시 망각하고서, 우리는 언제고 사랑이라는 이름을 불러낼 기회를 일상에서 만들어내고, 그 기회가 연출될 때마다, 감상에 젖어 무언가를 한 움큼씩, 뱉어내고, 쏟아내고, 토해 내고, 그러면서, 술을 한잔 입에 털어 넣으며, 또 후회를 하고, 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사랑에 관한 담론들은 사랑 자체에 온전히 바쳐지지 않는, 거개가 무언가를 사칭하기 마련인 옛이야기요, 한갓 공설이라는 것인데, 십분 양보한다 해도, 그걸 묻곤 했던 모일모시의, 단속이 없어 느슨했던 저 과거의 어떤 순간에조차, 나는 사랑이 온갖 개인적-사회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문화적-정서적 후유증으로 생겨난 쭈글쭈글한 고난이나,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삶의 피곤과 그 피곤들로 구겨진 주름들을 말끔하게 펴주거나, 그 사이사이 더께 낀 흔적들을 깨끗이 닦아내고, 개인적-사회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문화적-정서적 억압의 사슬과 절연해 낼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흔히들 말하던, 그 무슨 미지의 가능성이라고도 믿지도 않았다. 차마 믿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이었을 개연성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지금에서 주절거릴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1) 「내게 말해다오, 사랑이여」, in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김재혁 옮김), 자연사랑, 1999, 55쪽. 그러니까 ‘사랑’과 ‘동지’는 같은 말이 될 수 없었다. 그건 막연한 희망이었을 뿐이다. 사랑을 손에 쥐고서, 사람 자체를 보는 일이 그리 쉽던가? 젊은 시절,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 사

  • 조재룡
  • 201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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