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같은 소리 (2)
- 작성일 2014-11-01
- 댓글수 0
사랑, 같은 소리(2)
조재룡(문학평론가)
현대는 정말 춥다. 혼자서는 불을 못 피운다.
바람을 막으며 손바닥만 한 얼음 위에 불을 피우려면
두 사람이어야 한다.
최인훈 1)
*
당신은 살짝 스쳐도 온몸이 나른해지고 긴장이 풀려버리는, 황홀한 마사지 같은 걸 받은 것과도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바라보는 것만으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순간도 몇 번은 겪어 보았을 것이다. 마주 앉아 한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지껄이는, 그러나 정신이 좀 멀쩡한 사람이라면, 채 일 분이 지나기 전에 그의 말이나 몸짓이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하며 과장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한나절 내내 들어도 지루해하지 않았던 경험도 겪어 보았을 것이며, 그랬던 소싯적을 몇 개쯤 호주머니에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앞에 앉혀 놓고, 아주 오래전 건성으로 넘긴 책의 몇몇 구절이나 심심해서 시간이나 때우려고, 이 정도 수준은 봐줘야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이상한 허영에 힘입어 주저하며 들어갔던 영화관에서 졸면서 보았던 몇몇 작품의 얼개는 물론, 주인공의 이름이나 자잘한 디테일마저 제 머릿속에 떠올리거나, 알고 있는,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던, 온갖 지식들과 개념 나부랭이들은 물론, 상대방 앞에 풀어 놓는 데 더없이 효율적인 예들조차, 무의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어떤 저장고로부터 끊임없이 샘솟아, 당신의 세 치 혀 앞에 고스란히 바쳐지는 것과도 같은 경험, 그렇게 이상한 기운에 자신을 내맡기며 무슨 말이건 상대방 앞에서 주둥이가 시키는 대로 몇 시간을 지껄이고,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박식하고, 똑똑하고, 기억력이 좋고, 재치 있는 사람이 되어 본 적도 있었을 것이다. 컴컴하고 음침한 제 자취방에 한줄기 서광이 비치고, 한 달 전 벌써 바닥을 친 통장의 잔고가 제아무리 삶의 누추함을 경고해 주어도, 거기에 최소한 제로 두 개가 더 붙어 있을 때나 갖게 될 법한 까닭모를 자신감에 차, 저도 모르는 사이, 그러니까 마치, 악당 앞에 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총 지갑에서 잽싸게 권총을 빼내는 바로 그 속도로, 호기롭게 제 지갑을 흔쾌히 꺼내들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아뿔싸, 그런데, 이런 게 사랑과 무슨 관계가 있나? 그건 그저 둘이,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감정,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누군가에게 씹던 껌처럼 눌어붙고 싶은 그런 마음이나 그 분위기에 잠시 속거나, 알면서도 자신을 속이거나 다른 사람마저 속이는 것일 뿐이라고. 그런데, 둘, 둘이라고?
1)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최인훈 전집6』 , 문학과지성사, 1976, 235쪽.
|
간절히 총을 사고 싶은 적이 있었다
한때 천사였던
지금 내 마음속에 없고
그는 그가 사라진 줄을 모른다
그를 비춰볼 웅덩이 - 최정례, 「천사」 전문 |
‘둘’이라는 것도 차라리 허상일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러니까, “나조차 사라지면”, “그는 아예 없었던 것”이라는 말은 잠시 곱씹을 필요가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그리워했던 두 사람, 그들의 관계, 둘의 ‘관계 지움’은, 애초에 아예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삶은 지워지지 않지만 사랑은 지워진다. “그를 비춰볼 웅덩이”이자 “그를 파낼 유일한 광부”인 내가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아니, 그에게 내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나 혼자 그를 죽이고 살리는 이 관계는, 그러나, 애당초 없었던 것보다 못한 것인가?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와 함께, 자신이 살아갈 시간들이 주어지는 것일 뿐이라면, 오로지 그것만이 의미가 있는 거라는 이 말은 그러나 너무도 치명적이지 않는가. 나를 포기했기 때문에 사랑이 소멸된다고? 나 혼자 할 수밖에 없어서? 그래서 허무하다는 말일까? 혼자 사랑한 사람은 사랑 자체를 만들어냈기에 사랑의 조물주이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것인가? 혼자 한 사랑은 사랑일 수 없다는 것일까? 나를 몰라보는 그에게 내가 존재할 수 없지만, 그가 나의 전부였던, 그런 이야기는 사랑일 수 없다. 사랑에는 항상 둘이 결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라는 것,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것, 그 이상도 아니라는 것인가?
이 둘이 결국 또다시 문제가 된다. 늘 둘이 맺는, 둘에게서 비롯되는 이 사랑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사랑은 둘의 평등함을 보장하기는커녕, 몹시 이기적이라서 차라리 처절한 전투, 그 전투의 고통일 것이며, 아이러니하게도, 균형보다는 불안정을 택하고, 평화보다는 상처를 원할 때, 사랑에, 사랑이라는 드라마가, 환상이 생겨난다. 드라마 없는 사랑은, 그러니까 시련이 없는 사랑은, 다시 말해, 우여곡절이 없는 사랑은, 부연하자면, 상처 없는 사랑은, 타협이요, 거짓이요, 커다란 착각에 불과하다. 완벽한 불균형과 부조화의 산물이 사랑이기에, 사랑은 달콤하기보다는 쓰고 짜며, 아름답거나 고귀하다기보다 더럽고 치사한 감정을 주거나 받으면서 전개될 뿐이다. 예외 상황을 선포할 수 있는 자가 반드시 사랑하는 자는 아니지만, 이와 반대로, 누군가에 의해 선포된 예외 상황에 꼼짝없이 말려드는 자는 분명 사랑에 빠진 사람,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 사랑에 적어도 한 번쯤 목숨을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
이미 나는 노트에서 사랑이란 고문이나 외과 수술과 몹시 닮아 있다고 기술한 바 있는 것 같다. 한편, 이 생각은 가장 신랄한 방법으로 전개될 수 있다. 두 연인이 심지어 서로 몹시 반하고 상호간의 욕정에 가득 차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둘 중 한 사람은 나머지 한 사람보다 늘 침착하며 정신을 덜 빼앗길 것이다. 그 사람이 남자이건, 혹은 여자이건, 그 사람은 실행자이거나 사형집행인이며, 다른 한 사람은 소재나 희생자가 된다. 당신에게는 치욕적인 비극의 서곡인 이들의 회한과 이들의 신음소리, 이들의 외침과 이들의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 누가 이들에 대해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 누가 이들을 저항할 수 없게끔 강탈하지 않았겠는가? 당신은 주도면밀한 고문자들에 의해 행해진 취조에서 이보다 더 심한 경우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들의 보다 격분한 결과들 속에서, 몽유병 환자 같은 이들의 찡그린 두 눈, 갈바니 전지의 전류를 통과하는 것처럼 근육이 솟았다가 뻣뻣해지는 이들의 사지들, 취기, 횡설수설, 아편도 분명히 당신에게 이와 같은 끔찍하며 이와 같이 호기심에 끌리는 예들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비디우스가 행성들을 반사하기 위해서 빚어졌다고 믿었던 인간의 얼굴, 오로지 광기에 사로잡힌 격렬함의 표현 그 이상을 말하지 않는, 혹은, 일종의 죽음 속에서 긴장을 푸는 그런 얼굴이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러한 종류의 해체에다 황홀이라는 단어를 적용하는 것이 신성모독을 범한다고 생각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 경기자들 중 한 명이 자신에 대한 제어를 상실해야만 하는 가증스러운 게임! |
사랑은 평등이나 자비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사랑은 세심한 배려나 감정의 공유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다. 한 사람이 주도권을 쥐면 나머지는 그저 따라간다. 한 사람이 가하면 한 사람은 받는다. 마주치는 손뼉은 서로 강도가 다르고, 힘 준 세기가 다르고, 그 각도와 열정이 벌써 다르다. 한 사람이 애태우면, 한 사람은 저만치 있다.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어디에도 없다. 팽팽한 줄다리기처럼 보인다 해도, 거기에는 늘, 불균형과 부조화와 치우침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 명이 자신에 대한 제어를 상실해야만 하는 가증스러운 게임”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독점이나 과잉에서 비롯되거나, 독점이나 과잉을 통해 솟아오를 뿐인 어떤 상태, 그 상태에서 허우적거리는 두 사람에게 고지될 뿐이다. 사랑은 보편적 가치를 저버리며, 오로지 그럴 때만 사랑이다. 사랑은 평소에 할 수 없었던 온갖 악행을 감행할 용기이며, 나도 모르는 이상한 상황에 나 자신을 통째로 내맡길 기이한 에너지이자, 예기치 못한 감정의 경험임은 물론, 그러한 세계로 나를 몰고 가기도 하는, 위험한 전염병일 뿐이다. 그것은 삶에서 “치욕적인 비극의 서곡”일, 수많은 미지의 사건들로 입회하는 계기이며, 우리는 “이들의 회한과 이들의 신음소리, 이들의 외침과 이들의 헐떡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혹은 그 광경을 보면서, 제정신이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경험하고, 미지의 세계를 접하는 두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거나 상상해 볼 뿐이다. “사형집행인”이 제 칼을 높이 치켜든다. 얌전히 목을 빼고서 가만히 그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은 분명, 이 사형집행인을 사랑하는 자다. 그의 목을 내리치려는 행위도 사랑, 사랑의 보살핌일 수 있다. 이 순간, 사형집행인과 사형수는 공히 “죽음 속에서 긴장을 푸는 그런 얼굴”의 주인공이 되어, 서로를 독점하거나, 서로에게 넘쳐 충만한, 서로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범람하는 잉여의 불사조가 되거나 과잉 그 자체로 거듭난다. 이것은 교집합이 아니다. 사랑에 덧셈은 있을 수가 없다. 사랑은 애초의 원 두 개를 완전히 지우는 것이며, 지운 다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전혀 알 수 없었던, 이상한 형태의 도형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
또 하나. 애초부터 둘이 아니었다면 어쩌겠는가?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 수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합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말도 안 되는 오류일 수 있다. 둘이 하는 무엇, 둘만이 하는 것, 둘의 무대, 둘이 공연하는 순간들, 둘이 피어올린 불꽃 등등, 흔히들 사랑은 이렇게 둘의 일이라고 여긴다. 지성으로 물들이건, 감성으로 뭉뚱그리건, 감각으로 가슴을 움켜잡든 간에, 둘의 어느 깊은 곳에 도달해야만 사랑이 꿈틀거린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비겁한가? 포크를 쓰든, 젓가락질을 하든, 나이프를 휘두르건, 숟가락으로 떠서 올리건, 사랑은 결국 비슷한 양과 비슷한 강도의 고통을 대가로, 그러나 반드시 둘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잠시 몸을 내민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당위나 도덕 아닐까? 셋은 어떨까? 물론 그게 가능하려면, 적어도 이런 생각을 품어야만 할 것이다.
|
굳이 수학자가 아니더라도 그 흔한 덧셈법만으로는 사랑의 복잡한 방정식을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나눗셈과 뺄셈, 다항식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가?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왜 사용하지 않을까? 누가 감히 삶에는 이진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정했단 말인가? 무슨 권리로? 2) |
2) 로맹 모네리, 『상어 뛰어넘기』(이선민 옮김), 문학테라피, 2014, 206쪽.
회의주의적 낭만주의자들의 사랑, 모럴리스트들의 사랑은, 둘이라는 거점을 중심으로 사랑에 대해, 사랑이 아니라 사랑과 결부된 관념들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에 대한 이 견해들은 모두 사랑을 둘의 게임으로 상정한다. 그런데 타인을 향한 턱없는(주로 일방적인) 적재가 사랑일 수는 없다. 특히 한눈에 반했다고 말하며, 사랑이 여기저기서 불려 나올 때, 그건 폭력과 다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개인의 정신적 착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것은 어찌 되었건, 있지도 않는 것을 타인에게 덧 띄워, 오로지 그것만을 보고 즐기고 점유하려는 매우 이기적인 행위이자 환상일 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은, 적어도 이렇게, 헛것과 헛것의 표상일 수 있으며, 이 헛것을 걸머쥐고 ‘유레카’를 외치는 고질적인 병, 매우 이기적이고 집착적인 감정의 무덤 안으로 타인을 완전히 구겨 넣어 그를 내 안에 침몰시키고 마는 행위에 가깝다. 나의 존재를 지우는 것, 그러니까 너로 인해서만 바로 서는 나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반드시 둘이어야 하는가? 둘이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편리 속에 사랑을 붙들어 맬 최소한의 조건은 아닐까. 바디우가 같은 철학자가 ‘둘의 사건’,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고 말한 사랑은 사실 거짓이나 다름없다. 그가 사랑을 통해 진리를 모색하고, 그 힘을 혁명과 연관 지을 때, 차라리 섹스의 에너지나 성적 욕망을 말했더라면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해, 특히 ‘남자들’이 쓴 글을 나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사랑은 그들의 말처럼 그렇게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에 대해 남자들은 대개 점잖으면서도 다채로운 생각을 제 글로 덜어내면서, 온갖 신비하기조차 한 망상과 사변의 행렬을 보란 듯 제시하여, 어쩌고저쩌고 한없이 떠들어대지만, 그들은 고작 성적 욕망이 학문이라는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춘 제 철학적 변주 속에서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할 뿐이다. 사랑이 우리를 끊임없이 속인다면, 에로스는 순간만큼은 속이지 않는다.
|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육체는 한결같이 쓰인다. 체험에 관한 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아직 심장이 남아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무의식과 같이 증여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독립을 말해 준다. 그것은 또 분별되면서 자신이 자신의 일부를 보고 있다는 듯이 돌아보기 마련이다. 와해시킬 수 있는 힘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특별한 방식으로 다뤄야 할 정도인가에는 관심이 있다. 그것을 충분한 고통쯤으로 여길 것이다. 고통은 시간의 총체성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는데, 고통은 어느새 고통을 넘어서, 번거로운 의식이 되고 있다. 고통을 불완전한 파동으로 견디는 것은 역치(閾値)3)의 문제가 아니다. 마취사의 실수를 지적해도 수술은 진행된다. 두려움은 흥분으로, 흥분은 허탈웃음으로 이어진다, 치료 행위와 잔혹 행위의 이중성도, 무방비의 육신을 공격하지 못한다. 통점의 실무율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환각의 관점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다. 불구덩이에 불을 가세하고 갈라터진 땅에 태양을 이글거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현재와 또 다른 부수적인 시간에는 어떤 새로움도 없고, 고통의 양식이나 시간의 유형은 끊임없이 고증될 뿐이다. 그러나 육신의 미래라는 말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없는 곳이 없는 자신이 된다. 그러나 또 현재가 된다. 새로운 시간은, 지금 더없이 충족되고 있는 시간만큼 갈망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이 어쩔 수 없는 현재성에는, ‘망할’ 놈의 시간들이 이미 있다. ― 김록, 『 억지스러운 시간들』 전문 |
3) 생물체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의 자극의 강도를 나타내는 수치.
그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기도 하다. 사랑의 위대한 진리를 성애에서 찾을 수 있다고 착각하며 젊은 날의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사랑에 관한 물음이 해소되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구체적인 사랑의 순간은 섹스의 순간이라는 것일까? 아니 그것은 차라리 사랑일 수는 있는 것일까? 에로스로 타오르는 시간은 “육신의 현재”이지만, 이 현재는 당최 붙들어 맬 수 없으며 연장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을 즈음, 우리는 서둘러 육체에서 빠져나오려 하고, 혹은 타협을 하면서, 그것만으로 사랑의 미래가 보장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까닭 없이 허무의 그림자를 붙잡기도 했던 것은 아닐까. 헛헛하다와 비루하다, 처연하다와 치졸하다는 낱말의 참뜻을 깨닫는 데, 젊은 날, 섹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참고서가 되었을 것이다. 에로스에 덜미를 잡힌 “지금 더없이 충족되고 있는 시간”으로는 오롯한 사랑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연속과 지속을 보장하지 않는 시간이며, 불연속적으로만 몸에 불꽃같은 문신을 새겨 놓고, 타들어가는 순간의 고통과 쾌락에 젖게 해주는 시간, 그러고 나면 그 흔적을 지우려 애쓰거나, 사라져 가는 걸 아쉬워했던 그런 시간이다. 몸을 현재화하는 시간은 사랑의 시간일 것인가? 그것은 그저 시시각각 변화의 요로에 놓일 수밖에 없는, 단속적인 순간들의 집합들, 순간의 진실에 따르고 순간의 요구에 반응할 뿐, 한없이 삐걱거리는 쾌락의 시간일 뿐이지 않는가. 그러나 시인은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말한다. 현재가 반사적으로 미래를 호출하기에, 새로운 시간에 “매혹”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현재성’의 사건을 지속시켜 나갈 방법이 없기는 어느 시절이나 매한가지일 텐데, 그래서인지, 주변을 돌아보면, ‘에너지의 독립’을 잠시 붙잡아 두고서, 이내 어디론가 빠져나간 허무의 연기들을 깊게 들이마신 사람들이 결국 사랑을 내려놓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에게 깊은 생채기를 내며, 그 순간에 몹시도 충실할 뿐이었다. 김록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육신의 현재와 또 다른 부수적인 시간에는 어떤 새로움도 없고, 고통의 양식이나 시간의 유형은 끊임없이 고증될 뿐”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계속) *
《문장웹진 11월호》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사랑, 같은 소리(3)사랑, 같은 소리 (3) 몸은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로 뀌어진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이며, 가축의 무리이자 양치기다. 프리드리히 니체 1) 조재룡(문학평론가) * 에로스와 사랑, 그 잔인하면서도 모호한 관계에 관해서도 말을 아낄 수는 없다. “사랑의 극단적인 충동이 죽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 사드의 책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2) 바타유가 생성의 극점 에로스와 죽음의 극단 타나토스가 서로와 서로의 도움 없이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고 강조했던 대목을 상기한다. 이 양자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바타유의 지적을 좀 더 확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삶과 죽음, 육체와 영혼, 욕망과 금기, 말과 사유, 다수와 소수, 사회와 개인처럼, 하나를 다른 하나의 대척점이거나, 서로 별개의 것일 수 있다고 여겨져 온 이 두 짝의 개념들이 실상은, 별도로, 별개로, 오롯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절름발이에 불과하거나, 양면이 분명하지만 떼어내는 순간, 존재의 성립 가능성 자체를 상실하고 마는 동전이나 종이의 앞면과 뒷면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사랑을 매개로 차분히 따져 보면, 이 두 항 간의 분리 불가능성이 반드시 보장된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사랑이 몸과 마음의 벌어진 간극을 좁혀주고, 별도의 윤리나 도덕도 없이, 원래 하나였다고 긍정하면서 이 둘을 결속시키는 데 쉽사리 성공적으로 합류하는가 생각해 보면, 그게 우리 생각보다 그렇게 쉽사리 합의를 목전에 두거나 확신을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바타유는 ‘사랑의 극한 충동’에서 야기된 섹스의 작동 원리를 추적하면서, 이러한 충동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설파한다. 성애가 몰고 올, 저 아린 상처나 흔들리는 감정의 파장보다, 바타유가 정작 눈여겨본 것은, 그와 같은 상황에 돌입할 때의 짧은 순간에 표상되는 무엇이며, 느낌이나 감정과는 사뭇 다르다 할 이 표상의 순간, 솟아나는 어떤 현상이다. 그리고 내친 김에, 그는 이 짧은 순간이 사랑의 최고점, 사랑의 실질적 체험, 사랑의 유일한 형태, 구체적인 체현이라고 관념적 윤리주의자들에게 넌지시 경고의 메시지를 날리고, 나아가 그것이 실로 죽음의 체험과 다르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죽음의 현현과 죽음이 현재에 존재할 가능성을 일깨우고, 죽음의 양식에 진리의 면류관을 씌운다. 바타유가 말하려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합일은 사랑의 속성이 아니라, 섹스가 에너지의 과잉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오히려 무관하지 않다. “과잉은 필연적인 결과로 죽음을 초래하며, 정체됨(停滯)이 홀로 존재들의 불연속성(존재들의 고립)을 지탱하노라 약속”3)한다는 지적처럼, 과잉은 흥분을 앙양(昻揚)하고, 역동을 보장하러 뜻밖의 순간에 우리의 정신과 몸에 찾아든 신비롭기 그지없는 타자의 방문이지만, 어쨌든 소멸을 예정하기에 지속의 문제와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랑인가? 그렇지 않은가
- 조재룡
- 2015-01-01
문장웹진 기획
사랑, 같은 소리 (1)사랑, 같은 소리(1) 내게 말해다오, 사랑이여,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이 짧고 몸서리치는 시간을, 그저 생각과 교류하며 오로지 사랑이 아닌 것만 알며 사랑이 아닌 것만 행해야 하는가? 잉게보르크 바흐만 1) 조재룡(문학평론가) * 사랑이 무엇일까, 뭐 이런 멍청한 물음을, 그러나 한 번쯤 던져 보지 않은 청춘이 또 있을까? 누구나 그랬을 것이며, 그랬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거나, 어느 시각, 어느 정해지지 않는 순간들을 몰래 열고, 그래서 급습해 오는 기억에다가, 까닭을 모를 발작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사랑이라는 관념을, 사랑이라는 몸의 경험과 시간의 뭉텅이를 개인의 역사라는 허명을 들고 불러내고, 또 거기에 나름의 윤색을 가해, 암튼, 저 지리멸렬의 순간들을 빛나는 교집합으로 추려내기도 하면서, 그렇게 가끔씩 우리는 모두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무시로 찾아드는 걸 막아낼 재간이 없다고, 제 앞에, 친구건 동료건, 앉혀 놓고 고백을 한답시고, 듣는 사람의 찡그린 미간은 본 체 만 체, 지루한 제 사랑 이야기를 신이 나서 주구장창 늘어놓는 사람은 필경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무언가를 선택하라고 돌아오고 또 돌아 나가는 초밥집의 회전 벨트처럼, 하루하루 반복되는 지루한 삶 속에서, 제 무른 속살과 거기에 묻어 있는 감정들이 마모되어 가는 바로 그만큼 두꺼워진 표피를 잠시 망각하고서, 우리는 언제고 사랑이라는 이름을 불러낼 기회를 일상에서 만들어내고, 그 기회가 연출될 때마다, 감상에 젖어 무언가를 한 움큼씩, 뱉어내고, 쏟아내고, 토해 내고, 그러면서, 술을 한잔 입에 털어 넣으며, 또 후회를 하고, 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사랑에 관한 담론들은 사랑 자체에 온전히 바쳐지지 않는, 거개가 무언가를 사칭하기 마련인 옛이야기요, 한갓 공설이라는 것인데, 십분 양보한다 해도, 그걸 묻곤 했던 모일모시의, 단속이 없어 느슨했던 저 과거의 어떤 순간에조차, 나는 사랑이 온갖 개인적-사회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문화적-정서적 후유증으로 생겨난 쭈글쭈글한 고난이나,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삶의 피곤과 그 피곤들로 구겨진 주름들을 말끔하게 펴주거나, 그 사이사이 더께 낀 흔적들을 깨끗이 닦아내고, 개인적-사회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문화적-정서적 억압의 사슬과 절연해 낼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흔히들 말하던, 그 무슨 미지의 가능성이라고도 믿지도 않았다. 차마 믿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이었을 개연성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지금에서 주절거릴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1) 「내게 말해다오, 사랑이여」, in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김재혁 옮김), 자연사랑, 1999, 55쪽. 그러니까 ‘사랑’과 ‘동지’는 같은 말이 될 수 없었다. 그건 막연한 희망이었을 뿐이다. 사랑을 손에 쥐고서, 사람 자체를 보는 일이 그리 쉽던가? 젊은 시절,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 사
- 조재룡
- 2014-10-01
문장웹진 기획
패자의 숭고함(2)패자의 숭고함(2) 도로 내려와야만 할진대, 네가 왜 가장 높은 저 언덕의 정상에 기어오르려 할 것이며, 일단 내려온 후, 어떻게 거기를 오르기 시작했는지를 주절거리며 네 인생을 보내지 않으려면 너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조르주 페렉 1) 조재룡(문학평론가) * 시라는 가교가 있어서, 중도에 좌절된 자들과 그럴 운명에 처한 자들을 우리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유와 연결해 주는 것일까? 문학은 패자들에게 최소한의 정당한 몫을 돌려주려 한 장본인이다. 시는 공적인 영광을 기리거나 호사롭고 장대한 장례를 치르는 일보다 더 오래 지속될 헌사를 패자들에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몸짓이다. 시는 이야기에 의탁해 패자들을 소모하려 들지도 않는다. 시는 철학이라는 사변의 늪으로 패자들을 몰아넣고, 그런 다음 이들에게 난해한 구원의 손짓을 보내지도 않는다. 시는, 타락했으나 순수하고, 아름다우나 연약한, 삶을 좀 더 살아 보기 전에 벌써 절망한, 불가능해서 위대한 감정에 사로잡힌, 지나가는 여인에게 무턱대고 말을 걸어 보거나 사랑을 구걸하는, 자기를 이끌고 있는 타락의 감정을 치료할 처방을 술과 우애에서 찾고자 하는, ‘지금’ 침묵하고 있는 지상 위의 풍경들에 추파를 던지며, 예정되어 있지 않는 것들을 힐끔거리고, 자명하지 않은 것들에 손길을 뻗어, 미지의 무언가를 우리의 삶에서 길어 올리려 하는, 아무도 격려한 적이 없고, 그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았던 길 위에 홀로 서서 세계를 향해 홀로 터뜨리는 알 수 없는 함성이다. 열정이 곧 타성에 젖을 것이라고 예견하는 자,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행복에 젖은 성취감으로 지어 올린 황홀한 궁전이 아니라, 폐허 위에서 어쩔 수 없이 타인을 떠나보내야 할 때라고 남몰래 속삭이는 사람들, 아름다움의 창조는 감수성으로 지어 올린 질서 속에서 위대한 파괴자가 되도록 자신을 기혹하게 몰아붙일 때, 잠시 틈입을 허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 이 획일화의 일로에서 앞만 보고 질주하라고 강요하는 이 세상에 시라는 형식의 글을 토해 낸다. 1) 「잠자는 남자」(조재룡 번역), 문학동네, 2013, 39쪽. 돌연 젖는다, 나는 철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따로 앉은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 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나는 불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함께 벌 받을 자격이 없다. 원인이기는 하나 해결을 모르는 불구로서 그 진흙 몸의 충혈 껴안지 못했던 것.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몸 적실 의향이 있지만 그것은 모독, 모독이 아니라 해도, 이 어지러움으론 그 무엇도 진화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랑보다 더 깊고 무서운 짐승이 올라오기 전에 피신할 것이다 아니, 피신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을 것이다. 네가 단풍처
- 조재룡
- 2014-09-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