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왜/자선단편 소설] 고기먹으러 가는 길
- 작성일 201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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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인터뷰 ‘나는 왜’]
박솔뫼 (소설가)의 자선 단편소설
고기 먹으러 가는 길
박솔뫼

숙소에 도착한 것은 점심이 지난 시간이었다. 갑작스런 폭설이 쏟아졌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나 폭설이었고 이곳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눈이 오고 있었다. 바람은 불고 날은 춥고 나와 도형은 밥을 먹으러 숙소를 나섰다. 미리 봐둔 식당은 도보 17분 거리라고 하였는데 이미 얼어붙은 길을 미끄러지지 않으려 애쓰며 걷느라 삼십 분 가까이 걸렸다. 가려는 곳은 적당한 가격의 파스타집이었는데 간판을 보고 반가워하며 문 앞으로 가자 CLOSE라고 적혀 있는 보드가 보였다. 혹시나 해서 문을 열어 보았더니 테이블에 고개를 묻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이 보였는데 그 아르바이트생은 아르바이트생 같지 않고 그렇다고 그 집 딸은 아니고 딸 친구나 조카 정도로 보이는 익숙하지만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피곤해 보였다. 아르바이트생 너머로 할아버지 둘은 원두커피를 마시며 테이블 위의 신문을 두드리며 무슨 이야기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식당 안의 조명은 어둡고 아무도 우리를 제대로 보지 않고 우리는 입 모양으로 안 해요 묻고 아르바이트생은 네…… 지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우리를 다시 보지 않고 우리는 문을 닫고 나왔다.
별수 없이 식당 옆 가게로 가서 밥을 먹었다. 그곳은 생선구이집이었다. 파스타집으로 가는 길에 옆집을 보며 음 정 먹을 데 없으면 저기서 먹어도 되겠네 하고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했는데 정말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 옆집은 옛날 과자를 파는 집이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파스타를 먹고 나와 과자를 사먹자는 말을 했는데. 우리는 다른 곳에 갈 힘이 없었고 그냥 여기로 하자 가까운 데서 먹자 그리고 생선구이집의 문을 열고 가 자리에 앉았다. 가게 주인은 우리가 메뉴판을 넘겨도 상다리를 만져도 무언가 거슬리는지 자꾸만 와서 이건 아니라는 듯이 수저통을 다시 옮겨 놓고 물병을 그 옆에 두고 컵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추위에 붉어진 얼굴이 테이블 옆 난로 때문에 가라앉지 않았다. 붉은 볼을 한 우리는 밥을 먹고 나와 들어올 때처럼 움츠러든 채로 숙소로 향했다. 음식이 맛이 없지는 않았는데 우리는 오늘 하루가 눈앞에서 썰리는 것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움츠러든 어깨는 욱신거렸다. 길이 익숙해져서인지 돌아가는 길은 처음보다는 짧게 느껴졌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파스타를 먹고 나와 시내의 상가들을 구경하는 것이었는데. 커피를 마시고 도넛을 먹고 옷을 구경하고 익숙하지 않은 길과 골목들을 걷는 것이었는데. 우습다 재밌다 이거 봐 저거 봐 할 생각이었는데. 숙소로 돌아간다. 시내는 걸어서 25분에서 30분 차를 타면 더 빨라질 거리였지만 우리는 추운 거리를 걷고 또 걸었고 식당에서는 왜인지 거절당하고 다른 곳은 신경질적이었고 눈은 여전했다.
숙소로 돌아와 긴장이 풀리자 자버리자 자다 일어나 맥주나 마시자 그래 그냥 좀 자버리자! 그래 그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옷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도형은 나보다 먼저 잠에 들어 흐크? 흐크? 하는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그 애는 정말 이불을 덮고 눈을 몇 번 깜박이다 자버렸다. 도형의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뺐는데 고개를 흔들다 다시 자버렸다.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에 비치된 가습기가 달린 포트에 물을 끓였다. 이런 것이 있다. 이것은 토스터와 함께 있는 커피메이커만큼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런 종류였다. 그런 것이…… 또 무어가 있나 글쎄 잘 모르겠지만 가습기와 함께 있는 포트는 보고 나니 좋은 것 같아 있을 만해. 포트의 물은 잘 끓지만 가습기에서 나오는 공기는 희미했다. 작은 구멍에서 작게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흰 습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방은 좁지만 길었고 시트는 흰색 테이블과 창틀이 흰색 그 외 많은 것들도 흰색 바닥은 옅은 회색의 카펫이었고 흰 가운을 입은 나는 침대에 등을 기대 컵에 녹차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넣는다. 컵 안의 물은 점점 노란색에 가까워지고 간신히 김을 내뿜고 있는 가습기도 여전히 할 일을 하고 있다. 내 앞의 김은 가늘게 위로 올라가고 가습기에서 나오는 흰 습기는 좀 더 존재감을 드러내며 흰색으로 좀 더 오래 남아 그 색으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고 하지만 그것은 다른 가습기와 비교하면 가습기라고 하기에…… 좀…… 이 방의 건조함을 막는 데 큰 도움이 아니라 작은 도움의 작은 도움의 작은 도움 정도를 줄 정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지만 그래서 자꾸 쳐다보게 하는 것인가. 한 번씩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작은 구멍에서 김을 내뿜고 있었는데 녹차를 홀짝이며 김을 바라보며 창밖을 보면 이웃의 건물이 건물의 창이 아니라 벽이 보이고 그 사이를 눈들이 흩어지는 눈들은 마치 너를 내가 잠들어 있는 도형을 내가 잠든 도형의 꿈을 내가 말하듯이 지켜보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습기의 김은 여전하고 나는 컵에 물을 담아와 가습기 안에 부어 주었다. 다시 침대에 등을 기대고 가습기를 바라보았을 때 김 사이에서 닭 세 마리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닭은 병아리와 닭 사이 크기의 부리도 벼슬도 모두 만화처럼 귀엽고 부드러운 형태로 변한 닭이라고 해야 할지 좀 더 병아리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였다. 세 마리는 테이블 위 가습기 김 사이에서 피어 나와 한 마리씩 테이블 위에 종종종 선다.
홱홱홱 종종종
홱홱홱 종종종
홱홱홱 종종종
테이블 위에서 날개를 저으며 날아와 종종거리며 내 앞에 선다. 첫 번째 닭이 가장 닭 같았고 점차 부드러워져 세 번째 닭은 병아리에 더 가까워 보였다.
먹으려던 것을 못 먹었지요?
끄덕끄덕
불쌍해
불쌍해
불쌍해
맞아! 아냐 그런가.
그러면 앞으로 당신들이 먹을 것은
??
1. 초밥.
한 판에 20피스의 초밥 세트입니다. 하지만 모든 초밥은 계란 초밥입니다. 이 계란은 제가 낳은 거예요. 닭은 엉덩이를 흔들더니 퐁 하고 계란을 낳았다. 계란은 곧 사라지고 날개를 몇 번 움직이며 아주 보송보송 부슬부슬 촉촉한 이렇게 두꺼운 계란이 올라간 계란 초밥입니다.
2. 미국 사람이 만든 김치볶음밥.
버터가 이만큼 하고 두 번째 닭이 날개를 움직여 이만큼? 이만큼 하고 이만큼이 얼마만큼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베이컨 열두 장과 스팸 한 통을 김치와 같이 볶습니다. 폴란드산 소시지가 완성된 김치볶음밥 위에 토핑처럼 올라갑니다.
3. 맥모닝
맥모닝이라면 굶는다는 뜻일까. 지금부터 굶어 새벽 네 시까지 굶는다는 말일까. 주린 배를 한 채 새벽 거리를 헤매다 노란 아치 밑으로 들어간다는 뜻일까. 나와 도형은 고기를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고기를 엄청나게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난여름 이곳에 왔을 때 근처 고깃집에 갔는데 그때 왜인지 고기를 많이 못 시켜 먹고 나왔었는데 그게 가끔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럭저럭 맛있었는데 왜 많이 못 시켰지, 그 전에 다른 것을 배부르게 먹었었나. 아니면 돈이 얼마가 나올지 혹은 뭐 이 정도면 배부른 거 아닌가 모르는 메뉴도 많고 뭘 더 시켜야 하나 무얼 더? 하다 이 정도면 배부르니까 하며 나왔기 때문에. 그 고깃집에 가서 이것저것 좀 더 시켜 먹어 보자 우리는 그런 생각이었다. 원래는 파스타를 먹고 상가를 구경하다 군것질도 하고 초콜릿이나 커피도 사먹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숙소 근처의 고깃집으로 가 고기와 맥주를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나는 도형을 흔들어 깨웠다. 도형은 화들짝 하고 일어났다가 몇 시야 하고 묻더니 대답도 듣기 전에 다시 스르륵 잠이 들었다.
저기 저는 1번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좀 들어요. 아니 맛있을 거 같아요! 그냥 계란 초밥도 좋아하는데 정말 맛있는 계란 초밥이라면 20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먹고 싶어요. 2번도 괜찮고 3번은 아쉽지만 아주 싫은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우리는 고기를 먹으러 갈 것이에요. 고기! 돼지! 소~ 돼지고기와 돼지의 내장과 소고기와 소의 내장을 먹으러 갈 거예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닭들은 킥킥대며 웃었다. 날개도 푸드득거리며 웃었다. 우리가 닭이라고 닭을 먹으러 간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 그런가 봐 그런가 봐 그런가 봐. 닭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닭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닭을 먹는다고 해도 되는데. 삶은 닭 구운 닭 튀긴 닭 이런저런 닭요리 치킨 삼계탕 닭죽 닭도리탕 닭사시미 양념치킨 간장치킨 후라이드치킨 치킨완탕수프 오야꼬동 깐풍기 라조기 닭바베큐 닭꼬치 치킨커리 치킨수프 치킨커리수프 치킨스테이크 치킨버거 치킨라이스 치킨쌀국수 닭만두국 닭칼국수 닭미역국 그렇게 국물에 닭들을 퐁당 기름에 닭들을 치치칙 탁탁 오븐에 닭을 위잉 하고. 아냐 아냐 닭이 제일 맛있다고 생각해. 그냥 우리가 돼지랑 소를 먹으러 가기로 미리 정한 것뿐이야.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닭들은 몇 번 활개를 치더니 다시
홱홱홱 종종종
홱홱홱 종종종
홱홱홱 종종종
하고 가습기 속으로 들어갔다. 김이 되어. 나는 녹차를 다 마시고 냉장고의 생수를 꺼내 입을 헹구고 흩날리는 눈을 창가에 서서 바라보다가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도형아 있잖아 닭들이 나왔어 그런데 돼지고기 먹으러 간다고 했어. 팔을 뻗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이대로 잠이 올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곧 잠이 들어버렸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 9시쯤 우리는 고기를 먹으러 나갈 준비를 했다. 좀 더 개운한 얼굴로 화장을 고치고 머리도 매만지고 옷을 입고 아니 아니 그 전에 우선 물을 끓이고 커피를 마실 준비를 한다. 숙소에서 미리 놓아둔 녹차와 커피와 레몬차와 아니 그리고 콘수프도 있다. 끓는 물을 넣으면 콘수프가 되는가 본데 물을 끓이고 콘수프를 끓이면 콘수프의 김 위로 닭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얼 먹니 배부르니 할 것 같다. 우리가 옷을 입고 머리를 매만지고 괜히 텔레비전을 켜보고 할 동안 물은 다 끓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채로 침대에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커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다가 핸드폰을 보다가 다 끄고 일어나서 후후 불며 커피를 마신다.
도형아 있잖아 닭들이 나왔어.
닭들이?
닭들이 내가 불쌍하다고 했어.
왜?
그게 점심에 잘 못 먹었다고.
이상한 닭들이네. 좋은 닭들인가?
모르겠네.
조금 남은 커피를 테이블 위에 놓고 우리는 문을 열고 나선다. 눈은 여전히 흩날리고 있었고 눈은 인도에도 쌓여 있었다. 도형은 여행 전부터 고깃집이 어디인지 정확히 기억한다고 했다. 지난번에 묵었던 그 숙소 쪽으로 가서 쭉 가다가 웬 뜬금없이 나오는 볼링장에서 꺾어서……. 나는 들어도 모르니 어어 하고 장갑을 끼고 움츠린 채 여전히 언 도로를 걷는다. 지나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무얼 먹을까 우선 갈비를 시키고 샐러드와 밥을 시킬까 맥주도 마셔야 하고 무얼 먹을까 무얼 먹으면 좋을까 돼지 코고기 돼지 꼬리고기 돼지 턱고기 돼지 이마고기 아냐 아냐 닭고기 닭고기 닭고기! 닭 머릿고기 닭 허리고기 닭 앞다리살 닭 뒷다리살 닭고기 닭고기 닭고기! 닭들이 있는 것처럼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아니 왜 닭들 앞에서 닭고기를 먹는다는 아주 맛있게 먹는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가. 이상한 사람이네 이상한 닭이고 경우네. 왜 닭들은 닭고기를 먹으러 가지 않는다는 말에 그렇게 낄낄대며 웃은 건가 생각해 보다가 도형은 어 맞아 이걸 본 것이 기억나 하며 이 골목 저 골목을 들어가고 코가 시렸다.
나는 모든 고기를 생각나는 모든 고기를 불러 보았지만 한참을 걸어도 고깃집은 나타나지 않고 소고기 소 코고기 소 뺨고기 소 입술고기 소 인중고기 오리 머릿고기 오리 겨드랑이고기 오리 뒷목고기 오리 옆구리고기 오리 모든 오리고기 말고기와 양고기 토끼와 타조고기 헤매는 와중에 몇 개의 다른 고깃집이 보였지만 아냐 우리는 지난번 갔던 그곳에 가야 해 다짐하며 골목을 돌고 또 돌고 만둣집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만두를 입에 집어넣고 기름 낀 가게 창으로 온기가 느껴졌다. 만두라도 먹을까. 테이블 위 간장마저 맛있어 보였다. 만둣집을 지나고 또 다른 고깃집을 지나고 빨간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얌전해 보이는 아저씨가 하는 카페를 지나고 아아 도형아 우리 나중에 고기 먹고 나와서 그 나중이 대체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고기 먹고 나와서 여기서 커피를 마시자 생선 횟집과 카레집과 도시락 가게를 지나고 우리는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가보지만.
우리 나온 지 삼십 분도 넘어가. 어떻게 하지?
저쪽으로 한번 가보자.
나는 아까 본 그 고깃집 가도 돼. (안 돼. 그때 거기에 가야 해.)
나는 자꾸만 도형에게 그 길이 아니라 아예 숙소 쪽에 있었던 것 아닐까, 아예 시작부터 그쪽이 아니라 다른 쪽이 아닐까 우리가 헤매는 쪽이 아니라 아예 반대 큰 길에서 반대편이 아닐까 등 거기가 아닌 것 같아 나도 어딘지 모르지만 하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초조하고 배가 고픈 우리는 말없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텔레비전에서 봤지 펭귄처럼 걸으면 넘어지지 않는다고 걸으며 가망 없는 길을 걷는다. 그러다 나는 길 한복판에서 누군가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누가 봐도 이 동네에서 십 년 이상 사신 듯한 퇴근길의 아저씨였다. 그 아저씨는 두꺼운 내피가 포함된 트렌치코트에 가죽 장갑과 서류가방을 들고 걸음을 재촉하고 계셨다.
저기 죄송한데요.
아 네?
이 근처에 이름은 천국인지 극락인지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그런 이름의 고깃집이 있지 않았나요?
아 있었지요. 이름이 뭐 극락인가 그랬지. 있었어요.
거기를 가려고 하는데요. 작년에 이 근처에 있었던 것 같은데.
네 확실히 있었는데…….
네.
있었지요. 있었는데.
네!
화재가 나서 없어졌어요.
네? 없어졌다고요?
네 지난달에.
아. 그럼 혹시 가게가 다른 데로 옮기지는 않았나요?
옮겼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럼 그 자리는 그대로 있나요? 그냥 가보기라도 하고 싶은데요.
음 그 자리에 그냥 그대로 있어요. 새로 뭐가 생기지는 않았고요.
우리는 감사 인사를 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서로를 본다. 못 찾은 이유가 있었구나. 안 나타날 만했어. 내심 도형을 재촉하고 닦달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하지만 불에 탔다니 왜인지 믿을 수 없는 기분이 되고 믿을 수 없고 정처 없는 마음으로 아저씨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마침 가게 문을 닫고 계신 아주머니 한 분이 보여 다시 말을 건다.
저기요.
응?
제가 작년에 이 근처에서 천국인지 극락인지 뭐 그런 이름의 고깃집을 갔었는데요. 오늘 오니 눈 때문에 찾기가 힘들어서요. 혹시 어디 있는지 아세요?
고깃집…… 은 이 길에는 없어요.
네?
고깃집은 없어요. 글쎄 저 너머로는 있지만 그런 이름은 아니었고 고깃집을 이 근처에서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아아. 없구나.
음. 참 그러고 보니 불고기집은 있었지. 무슨 뭐래더라. 암튼 거기는 저기 역 근처로 이사 갔어요.
그럼 불고기집이라도 알려주시겠어요?
어. 그러니까. 이 길 끝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서 좌회전해서 가다가 경찰서가 보이면 우회전하면 돼. 거기로 옮겼어요.
우리는 다시 감사 인사를 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서로를 본다. 그리로 가볼까? 그 불고기집 옮겼다는 곳으로? 아니면 불이 났었다는 그곳에? 우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다시 처음부터 오늘의 숙소에서부터 길을 시작해 보자고 정말 이 시점에서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되돌아간다. 이제는 왠지 우스운 기분으로 가벼워진 마음으로 되돌아가다가 어느 길에선가 아마 큰 길의 마트였을 것이다. 저기야 저기! 하고 비명처럼 외치며 도형의 팔을 잡아끈다. 저곳이 분명하다. 저 간판. 회색 철판에 붉은색으로 극락이라고 쓰여 있던 것이 기억났다. 도형은 정말이야 하고 나의 뒤를 따르고 우리의 뒤를 누가 봐줄까 계속 내리는 눈이 구름이 가습기의 김이 흰 습기가 녹차의 커피의 모락모락이 돌봐줄 것이야 하는 생각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아직 가게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내 마음속은 온몸은 의기양양으로 가득했다. 봐봐 맞지 맞지! 흥분된 표정으로 가게로 들어갔다. 도형은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또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렇네 정말 여기네 하고 말했다. 문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가방을 놓고 가게 안을 살폈는데 모든 것이 심지어 긴 검은 머리에 흰 얼굴의 통통한 아르바이트 여자애마저 그대로여서 너무나 그대로여서 좀 전의 아저씨가 말한 화재로 타버린 고깃집이 머릿속에 맴돌면서 왠지 꿈같았다 모든 것이. 그리고 우리는 고기를 주문했고 먹었다. 이런저런 것들을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밥과 야채
맥주
갈비 2인분
로스 1인분
막창 2인분
무언지 까먹은 고기 1인분
간 1인분
우리는 갈비와 밥과 야채와 맥주를 먼저 시켰고 그다음에는 막창과 다른 고기들을 차례로 시켰다. 모두 맛있었지만 로스가 가장 맛있었다. 로스는 큰 고기를 먹기 좋게 자른 후 위에 소금을 뿌린 후 접시에 담겨져 왔다. 화로의 연기는 기름이 떨어지면 치익 하고 올랐다. 기름과 장을 뿌린 양배추를 먹으며 밥 위에 핏물이 보이는 고기를 올려놓고 먹으며 그 아저씨는 어째서 드라마처럼 쓸쓸한 눈으로 화재로 그 가게는 없어졌다고 말한 것일까 생각했다. 주인에게 눈이 와서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려서 한참 헤맸는데요, 지나가다 만난 어떤 아저씨께 이 가게 위치를 물었더니 불타서 없어졌다고 했어요, 라고 말하면 작년에도 오늘도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기를 내어주는 저 주인은 무어라고 대답할까. 1. 재밌는 이야기네요 하며 같이 웃는다. 2. 무표정으로 아무 반응 없이 아 그래요 한다. 3. 아저씨와 이 식당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나와 도형은 눈이 내리는 길가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껴안은 채로 전봇대 밑에서 잠에서 깨어난다.
맥주를 마시며 많은 고기들을 넘기고 씹고 넘기고 다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혹은 정말로 불에 타 없어진 고깃집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지 비슷한 거의 비슷한 이름의 고깃집이 하고 생각하다가 다시 또 고기를 먹는다. 고기는 정말 맛있다. 맛있다 맛있다 말하며 열심히 먹는다. 텔레비전에서는 미국의 러시아의 일본의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이 경기를 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 열심히 하고 있었다. 고기는 처음에는 허겁지겁 굽는 대로 먹었고 중간쯤 지나자 천천히 씹으며 이야기도 하고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도 찍으며 먹었다. 눈은 내리다 말다 하고 눈 내리는 거리를 생각하며 어딘가 있을 두 개의 가게를 생각한다. 정말로 화재로 타버렸을 고깃집과 저 너머로 이전한 불고기 가게를 생각하고 왜인지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린 중년남자를 생각하고 무슨 말인가를 지어낸 동네 주민을 생각하고 우리는 어디서 만나나 이전에 만난 그 길 위에서 만나는 것인가. 얼른 먹어 타고 있어. 우리는 아주 많이 먹었다.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고 계산을 하고 나오자 왠지 피곤해져 아까 지나가다 본 그 카페는 문을 닫았겠지 편의점에나 들렀다 가자 생각하며 걸었다. 계산을 하러 가게 주인과 마주했던 순간 왠지 제가 이곳을 못 찾아서요 헤매다가요 하고 주절주절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싶은 나는 무슨 이야기인가를 아주 많고 많은 이야기 커다란 이야기들을 그냥 마음에 품고 있고 당신은 그것을 내 이야기를 알아도 모르고 몰라도 압니다 하는 마음이 들고 나는 돈을 내밀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선다. 도형은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도형이 피우던 담배를 한 모금 나눠 피우고 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종종 생각해 그곳이 어디 있는지 혼자서 문장들은 꼬리를 이으며 쫓아가고 그러다 입 밖으로 뛰쳐나와 나는 종종 하고 말하다 멈춘다. 도형은 응? 하고 묻고 나는 아냐 아냐 그냥 종종이라는 말이 나왔어 말하고 우리는 생수와 커피를 사러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돌아가는 길은 배불러서인지 짧고 쉬웠다. 눈은 흩날리고 이 눈은 숙소 안에서 녹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눈 건물 사이를 지나며 너를 보고 있어 침대 위의 도형을 침대 위의 도형의 꿈을 너를 너가 보는 입김과 흰 습기와 소리와 말을 하고 메아리처럼 울리던 눈. 밤의 거리는 눈과 찬바람이 채우고 있었다. 바람과 눈은 숙소에서 보던 눈보다 멀리 가고 있었고 우리는 앞의 앞의 앞의 전의 전의 전의 먼 곳의 먼 곳의 먼 곳의 아주 먼 옛날의 눈을 따라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을 멀리 있는 사람들 이미 떠난 사람들을 따라서 지나서 가고 있어 말하는 듯했다. 배가 부르면 모든 것이 좋은가? 왠지 다 괜찮고 나는 먼 길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나는 웃으며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도형은 기분 좋아 보이네 말하고 나는 어! 말하고 맛있었다 그지 둘은 말하고 그래 그래 말하고 웃으며 숙소에 도착했다.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옷 주변에는 머리카락과 소매에는 고기 냄새가 떠돌고 클렌징 티슈로 대충 얼굴을 닦고 생수병의 물을 마시고 다시 물을 포트에 끓이고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판기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이십대 후반의 남자는 카페에서 방금 계산을 하고 나온 여자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 그 사람들은 어쩌면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었을 것이다. 혹은 우리를 영영 돌아오기 힘든 곳으로 보냈을지도 몰랐다. 컵에 물을 따르고 녹차 티백을 넣고 따뜻한 김을 얼굴에 대고 다시 가습기에도 물을 따르고 김이 피어오르기를 기다렸다.
돼지 냄새가 나. 불 냄새가 난다고.
세 마리의 닭은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내 머리카락과 소매의 냄새를 맡았다. 소매를 부리로 콕콕 쪼았다. 어떻게 날아다닐 수 있는 걸까? 김에서 나와서 가벼운 걸까?
그래도 낮에는 먹으려던 것을 못 먹었지?
끄덕끄덕
불쌍해
불쌍
아냐 배부르니까!
너는 이제 나를 다시는 못 본다.
왜? 아냐. 그래. 응…….
봐도 나를 누군지 몰라.
계란 초밥은? 어떻게 먹지?
그것은 다른 사람이 먹었다. 기회가 갔어. 너가 먹을 수도 있겠지 나중에.
가장 닭 같은 닭이 말하고 나머지 두 마리 닭은 고개를 끄덕 끄덕 하고 있었고 셋은 어느샌가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렸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날갯짓으로. 고깃집이 화재로 불이 났다고 말한 트렌치코트를 잘 차려입은 아저씨는 재가 가득한 폐허에 앉아 그을린 화로에 손을 올리고 고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아저씨의 등 뒤에서 김이 서린 병맥주와 잔이 나오고 있었다. 그걸 가져오는 사람은……. 그다음의 아줌마는 역 근처 불고기집에서 고기를 먹고 계란찜을 먹고 술이 아닌 콜라를 마시고 있다.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며 취한 사람처럼 취할 리 없는데 취한 사람처럼 붉은 얼굴로 노래 부르고 있었다. 어느새 씻고 나온 도형의 뒤로 뜨거운 기운이 훅 끼쳐 왔다. 씻어야지 씻어야지 생각하며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려다 다시 침대에 눕고 폐허로 사라진 고깃집은요…… 어떤 가게였냐면요…… 누군가 말하고 있었고 그 가게는 어딘가에 있었고 거짓말이라고 해도 있었다. 맨몸으로 수건을 챙겨 화장실로 가 욕조에 물을 채우고 얼굴을 씻고 비누로 손을 씻고 몸도 씻고 샤워기로 거울을 닦고 고기를 먹으러 가는 길은 멀고 험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옆 사람을 많이 좋아하고 믿으며 서로를 잘 돌보겠다는 마음으로 잘 헤쳐 나가야 합니다. 질 좋은 계란으로 오랜 경력과 기술과 성실함과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만든 윤기 나는 계란 초밥은 어느 테이블에서 누가 웃으며 먹고 있습니까. 나와 도형은 흩어지는 눈을 보며 모든 먹는 사람들을 빤히 보았다. 고기를 먹으러 가는 길에는 많은 먹는 것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우리는 춥고 어두운 길을 걸었다. 윤기가 흐르는 만두는 맛이 있을 거야. 커피 잔 위의 김은 참새가 나올지도 몰랐고 참새는 더 시끄럽게 재재재재 거린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도 오래된 테이블 위의 커피 잔은 어쩐지 내가 시킨 것 같기도 했는데. 모든 고기 먹으러 가는 길은 어떤 사람을 만날지 누구의 말을 듣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고 고깃집을 쉽게 찾고 맛있는 고기를 금방 먹게 될까요? 고기를 먹는 일이 쉬운 일일까요? 맛있는 것을 배부르게 먹는 것은 언제 가능한 일일까요?
욕조에 몸을 넣고 불에 탄 식당은 영업을 마친 새벽에 누전으로 불이 났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영업과 수익의 손실은 있었지만 보험회사의 발 빠른 대처로 곧 새롭게 공사를 시작하거나 근처 적당한 매물이 나와 이전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계적으로 샤워타월로 몸을 문지르며 그 가게의 이름은 극락이 아니라 극락처럼 두 글자인데 뭐라고 뭐라고 뭐였을까 뭐라고 하면 좋을까. 고기를 먹으러 가는 길이 험하고 두렵다 해도 고기는 맛있지요? 그 길은 완전히 험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쉽게 찾을 수 있고 가끔 눈이 와서 헷갈리더라도 또 길모퉁이에서 길을 물어본 사람이 쓰레기를 버리러 가느라 바쁘다며 지나쳐 갈 때도 생기겠지만 그래도 소금 뿌려진 고기는 모두를 기다립니다. 나는 여기저기 꼼꼼히 씻고 잘 세탁된 수건으로 몸을 씻고 미리 욕실에 놓아 둔 보디로션을 꼼꼼히 바르고 나왔다. 테이블 위 스킨과 에센스 크림을 잘 두드려 바르고 의자에 걸어 둔 가운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 도형에게로 갔다. 도형아 놀라지 마 길을 물어본 사람이 그 식당이 화재로 없어졌다고 해도 나 역시 여행자이고 이곳이 처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영어로 대답을 하고 손가락으로 머리 옆에 작은 원을 계속 그려도 그것은 모두 어디선가 그럴 법한 일이야. 도형은 이불을 들어 주었고 나는 고운 몸짓으로 가 누웠다. 누가 내 계란 초밥을 먹은 것일까 어디로 가야 계란 초밥을 다시 먹을 수 있을까. 내 친구들 귀여운 닭들이 어디에 갔다고 어디서 자갈을 쪼고 있고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누가 말해 주나요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는데 도형이 물 마셔 했다. 물을 마시니까 물을 마시는 것은 좋다는 것을 다시 알았다. 물을 마시는 것은 좋았다. 고기는 맛있는 것처럼. 그래 고기는 맛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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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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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비비디바비디부 홍순인 이거 제가 쓴 건데 들어 보세요. 나는 ‘네튤농’이라는 포크 밴드에 소속된 ‘작가’다. 밴드에 작가가 웬 말이냐고 따진다면 뭐라고 할 말은 없다. 네이버에서도 네튤농을 등록할 때 밴드에 작가라는 포지션은 있을 수 없다며 결국 나를 퍼커션으로 소개하게끔 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작 열여섯 가지 유형으로 인간 유형을 분류하는 건 신봉하면서 전 세계 보편적인 밴드 구성에 반기를 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뭐, 고분고분 인정하면서도 서운하긴 했다. 참고로 나는 INFP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시를 써 가면 죄다 디테일한 묘사뿐이라 시인이 될 수 없다는 평가를 받던(싱잉랩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평가도 있었다.), 화성학의 기초도 떼지 못했지만 밴드의 일원으로서 약 100회가량의 공연을 해낸 돌팔이 음악가이자,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에서는 비록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런, 정말 그런 내가 포크 밴드에서 ‘작가’로 살아가게 된 어떤 우연에 관한 이야기다. 때는 바야흐로 2013년, 대학교 4학년 1학기에 축제 위원장을 맡으며 학교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였다. 당시 학교 축제 기획에 도움을 주었던 기획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진짜 시에 대해 공부하고자 했지만 너처럼 노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책상에 앉아 있겠냐는 주변의 만류로 기분 좋게 기획사에 입사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특히 ‘이규범’을 만났다. 나와 같이 하루하루 일을 쳐내 가며 밤이 되면 야근을 하다가 술을 마시고 좁은 방에 여럿이 구겨져 자고 다음 날에는 이걸 또 반복했다. 대학원에 가면 불행해진다지만 기획사에 가도 불쌍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다만 그런 의미 없는 날들 속에서 이규범이 나와 달랐던 점이 하나 있었는데, 이규범에게는 ‘싱어송라이터’라는 꿈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신기했다. 어떻게 싱어송라이터가 된단 말인가. 이규범은 노래도 못 했고 가사도 못 썼다. 나는 회사의 기획서와 제안서 내의 글과 카피를 대부분 담당하고 있었고, 평소 인디 밴드 음악을 굉장히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규범은 가사와 관련해 나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나는 싱잉랩 정도는 할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을 제안해 줬고 종종 밤늦게까지 회의실에서 같이 노래를 불렀다. 꿈이 있다는 게 부럽다기보다 나도 싱어송라이터가 되어 보면 어떨까 막연한 상상을 해 보던 밤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이규범은 회사를 떠났다. 정이 많이 들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규범이 첫 앨범을 낸다며 찾아왔다. 나는 그 앨범의 소개 글을 써 주었다. 솔직히 좋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안티팬의 입장에서 소개를 하는 글을 써 주었다. 나는 진심을 담은 글로 편하게 족발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이규범은 두 장의 앨범을 더 냈고, 나는
- 관리자
- 2026-03-01
[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대먹튀 시대에서 예술의 쓰임에 관하여 오웅진 벨라 타르가 세상을 떠났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번역 신간이 집에 도착한 직후 그의 부고 소식을 들어 공교롭다는 생각을 했다. 소식을 듣고 멍청하니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벨라 타르의 1994년도 영화 〈사탄탱고〉의 한 주인공 이리미아스 역할을 했던 배우(Víg Mihály)가 동시에 이 영화의 음악 감독이었다는. (실은 주인공 같은 건 없다, 감독에 따르면 자신의 영화에서 굳이 주인공이라면 ‘시간’ 정도)1) 작품에서 그가 분(扮)한 역할을 설명하자면, 아니 그를 쉬이 욕할 수 있도록 거칠게 요약하자면 ‘곗돈을 들고 튄 계주’쯤 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죽는다. 아이의 죽음, 그로 인한 공통의 슬픔을 바탕으로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집 가장 깊숙한 곳에 박아 두었던 돈을 모으게 되는데, 계주는 그 돈을 들고 튐으로써 스스로를 사탄과 편히 겹쳐 보게 돕는다. 소설은 카프카의 짧은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2) 앞서 언급한 떠난 계주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도, 작품 속 마을 사람들 삶의 대부분은 기다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음악이란 게, 혹은 춤이라는 게 실은 곗돈을 들고 튄 저 악마 같은 계주쯤 되는 것은 아닌지 말해 보고자 한다. 소설 『사탄탱고』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85년, 그의 최근작 『헤르슈트 07769』가 쓰인 것은 2021년이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그가 좀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의 첫 장을 펼쳐보고 안도했다. 짧은 문장 한 줄이 나를 반겼다. “희망은 실수다.”3) 그가 여전히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 그를 믿게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다수가 음악인인데, 이는 독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예컨대 누군가 주말마다 부장님에 의해 호출되어 산을 탄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어쨌든 그가 산에 성실히 오르고 있으니 산악인이라 충분히 불릴 자격이 있다고 믿는 이라면, 이 소설 속 다수의 인물을 또한 능히 음악인이라 불러도 좋다. 소설에선 부장님 대신 ‘보스’라는 이름으로 음악인들의 리더를 달리 부른다. 보스는 바흐에 관하여 얘기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단원들 역시 보스가 바흐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건 그들이 바흐에 관해 듣길 좋아한다는 말과는 사뭇 다르다. “보스는 그들이 바흐에 대한 보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리허설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카나 심포니는 아마추어 음악가들로 자기 악기에 어느 정도 능숙하게 다루긴
- 관리자
- 2026-03-01
[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지문 너머로 하나의 선율이 아를 lilysacredlily · 20251228_slowslofi playset 최초의 기억은 들렸던 것이다.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 할머니는 늘 자기 전에 적혀 있는 그것들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할머니가 나를 부를 때,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또 다른 생경한 목소리와 리듬으로 그것들은 발화되었고 그 목소리는 음악처럼 들렸다. 할머니는 거기에 분명히 있었지만 어느 영겁 너머 다른 차원에서 내려오는 작은 신의 목소리처럼 들렸기에 그 소리의 흐름 속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나 또한 내가 무엇인지, 내가 있는 곳을 잊어버렸다. 그 뜻 모를 말들을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듣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거의 기도처럼, 주문처럼, 노래처럼 들렸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전해지고 또 쓰인 것들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나에게로 전해졌고 어린 나는 그것들을 어설프게나마 소리 내어 보기도 했다. 그 유년의 밤 동안 할머니는 나의 유일한 이야기꾼이었으며, 어린 나의 두 귀가 되어 주는 밤의 훌륭한 안내자였다. 구전. 우화. 신화. 전설. 민담. 시대를 넘어서도 계속되는 이야기들. 되풀이되는 노래 같은 것들. 요정. 고블린. 거인. 요괴. 도깨비. 기사와 문지기. 바드와 리라. 검과 용사. 광장의 하프 소리. 그것들은 때때로 꿈속을 수호하며 때론 일상의 그림자들이 되어 호출하면 응답할 것만 같았다. 들려지는 것들이 쓰여질 때, 쓰여진 것들이 들릴 때. 적혀 있는 것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귀로 전해지는 것. 반복해서 전해지고 지금도 여전히 전승되고 있는 것. 어느 날 들렸던 하나의 목소리가, 어느 한 구절이 누군가를 살렸다면, 그로 인해 살아갈 수도 있다면 그것은 신앙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빌어 준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기대어 계속 갈 수 있었던 수많은 시간들로부터 지금도 계속되는 어떤 순간들이 지속될 수 있었을 뿐이고 그다음이 있기를 그 순간들로부터 감히 바랄 수 있었던 것이다. 늘 목숨처럼 붙들고 있지만 동시에 늘 너무 아득하기만 한 것에 대해 대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끝에 일주일도 안 되어서 나는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며칠 동안 정신이 몇 번이나 나갈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셀 수 없을 정도로 꿈을 정말 많이 꿨는데 잠깐의 꿈에서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의 소리였겠지만 귓가에서 목소리는 오래 머물렀다. 병실의 침대가 아니라 이제 마침내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나는 온 건가? 눈을 뜨면 나의 옆에 누워 그것을 읽어 주는 할머니는 없었지만 나는 들었다. 이곳을 넘어서, 시간을 넘어서, 세월을 넘어서. 그 밤 이전의 무수한 밤들로부터, 그 밤의 영겁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던 목소리를. 초연해지고자 열망하는 마음을 이미 초월해 있는 곳으로부터 목소리는 들린다는 것이. 나의 뼈의 일부는 부러졌고 언제까지 누워 있어야 할지 그때는 몰랐다. 부서진 건 뼈뿐
- 관리자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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