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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보내는 방법

  • 작성일 2025-12-01

[문장서포터즈]


   계절을 보내는 방법 

   -무화과나무 한 그루와 오팔 라이트


문장서포터즈 2기 김수현


   올해 10월 초에 발매한 테일러 스위프트의 신곡 〈Opallite〉는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시작된다.


   I had a bad habit of missing lovers past

   (나는 지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나쁜 습관을 가졌어)


   이후 가사를 통해 테일러는 “사실 나는 망령 같은 추억 속에서 살았던” 것이라고 위 ‘습관’에 대해 덧붙인다. 망령과도 같은 추억. 너무 좋았거나 너무 좋지 못한 과거 중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무의식 한편을 둥둥 떠다니는 기억들. 아마 모두 공감할 이야기리라 생각한다. 어떠한 기억은 묻어 둬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매번 그러길 실패하니까. 어쩌면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일지 모른다. 내게 있어 문학은 보낼 수 없는, 애도 불가능한 기억의 반복이다.


   테일러가 곡을 낸 시월은 올해의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이다. 나는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 들어가서 도서를 구매하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해 왔는데, 이번 가을은 독서와 더불어 테일러의 신곡과 함께하고 있다. 오늘은 〈Opallite〉와 덧붙여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  가을 2025》을 소개하려고 한다.



사진1. 문학과지성사 《소설 보다 : 가을 2025》



   먼저, 《소설 보다》는 문지문학상 후보작을 세 편씩 묶어 낸 얇은 단행본 시리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맞춰 4권씩 해마다 출간되므로 젊고 개성 있는 한국 작품을 빠르게 접할 수 있는 도서이기도 하다.



사진1. 문학과지성사 《소설 보다》 시리즈 표지



   올해 《소설 보다》의 표지는 해마다 다른 디자인을 선보인다. 이번 2025년에는 각 계절에 어울리는 과일나무를 콘셉트로 하고 있는데, 아직 덜 익어 푸릇한 딸기나무와 싱그러운 포도나무가 그려진 봄, 여름에 이어 가을에는 무화과나무가 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아무래도 각 시즌에 맞춰 출간되는 책이다 보니 다음 계절, 해의 표지 디자인을 기다리는 나름의 재미를 찾을 수도 있다.


   《소설 보다》 시리즈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좋은 작가들의 글을 모아 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좋은 작가라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돌이켜 보니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은 모두 이 책에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각 소설 한 편을 마치면 문학 평론가와 작가의 인터뷰가 실린 페이지가 등장하는데, 그 속에는 글을 쓰는 동안 작가가 구상하고 골몰했던 내용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문학잡지보다 임팩트 있고 기성 작가에 대해 내밀하게 알 수 있는 위 시리즈에 더 손이 가는 것 같다. 



   이번 《소설 보다 : 가을 2025》에는 서장원의 「히데오」, 이유리의 「두정랜드」, 정기현의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가 있다. 


   먼저, 「두정랜드」는 지방 소도시의 놀이공원인 ‘두정랜드’ 알바생 주인공 ‘나’가 화자로 등장한다. 서울에 대한 낭만을 가진 화자는 상경을 위해 ‘두정랜드’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다. 그러던 중 화자가 일을 그만두게 된 날 동료 ‘연두’의 손에 이끌려 놀이기구를 타게 된다. 이십 대 초반, 아무것도 된 것이 없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기에 느낄 법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담은 소설 「두정랜드」를 한 줄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눈을 뜨라니까. 앞을 보라고. 그래야 재밌어”


   다음으로,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는 소설 속 인물로 중학생들이 등장한다. “숫자로 환산되는 것들을 자기 통제력 안에 두는 일에 애정을 두는” 승주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이야기를 내려다보며 통제하는 힘’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다. 위 소설 역시 한 줄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등생의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보던 승주는 버들치의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서장원의 「히데오」는 ‘따귀 게임’이라는 단막극을 준비하며 알게 된 히데오에 대한 기억을 담은 이야기이다. 이번에 읽은 세 편의 소설 중 내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작품이기도 하다. 「히데오」의 첫 문단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히데오에겐 몇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친부가 일본인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일본 교토에서 보냈다는 것이다(9p).


   화자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한때 사랑한 히데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달리 진행되거나 돋보이는 사건 없이 진득한 회상만으로 화자가 소설의 전반을 이끌고 있는데도 별다른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 첫 문단에서 언급된 것처럼 화자가 히데오를 기억하는 주된 키워드는 ‘비밀’이다. 히데오는 학창 시절 ‘조센진’, ‘총’ 같은 말을 들으며 괴롭힘을 당한 이후로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를 비밀이라는 이름의 공백으로 남겨 둔다. 그 비밀 공유함으로써 화자와 히데오의 관계가 이어지지만, 결국 먼 훗날 “충무로의 신성”이 된 히데오가 인터뷰에서 자신의 학창 시절을 더 이상 비밀로 감추지 않게 되면서 둘의 연결고리는 끊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화자는 “인터뷰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히데오를 보며 “이제 더는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를 히데오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를 히데오라고 부르는 것. 서장원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첨언하였다.


  서장원: (···) 히데오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살아왔고, 그렇게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 공백을 메꾸어 나름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을, 그렇게 자신을 오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오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화자가 사랑에 빠졌을 당시의 히데오입니다. 조금 과장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는 이제 자신이 히데오의 한국식 이름을 감춘 채 히데오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이 이야기의 주인이자 서술자가 되려고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44p).


   내게 이 글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하나의 기억을 저 너머로 보내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사실 소설을 다 읽은 후엔 둘의 관계가 다소 쉽게 끊어진 것이 아닌가, 누군가를 잊는 것이 이토록 쉬운 일인가 싶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히데오와 화자 사이의 무언가를 삭제한 듯했다. 물을 너무 많이 타 버린 밍숭맹숭한 믹스커피 같은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리허설 날 무대에는 비즈로 만든 발이 설치됐다. (···) 마침내 완성된 발은 불량소년과 모범 소년 사이에 놓였다. 불량소년이 손을 뻗어 모범 소년을 때릴 때 관객들에게 급작스러운 빛을 반사하는 효과를 줄 수 있도록, 지윤은 그렇게 해서 관객들이 산란하는 빛에, 지윤의 표현에 따르면 빛의 폭력에 노출되길 원했다(31P).


   위 문장을 보자마자 곧바로 〈Opallite〉의 가사가 떠오른다. “You had to make your own sunshine. But now the sky is opalite”. 오팔빛을 띠고 있는 하늘과 무대 위에서 번쩍이는 비즈발을 모습은 꽤나 비슷해 보인다. 번쩍였다 사라지는 빛의 조각들. 나는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기억을 왜곡하고 삭제하고 덧붙이며 추억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난주에는 여름옷을 정리하고 두꺼운 니트와 패딩을 옷장에서 꺼냈다. 결국엔 다 지나갈 것이라는 곡의 내용답게 발랄한 <Opallite>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방을 정리하던 중 나는 누군가 선물했던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줄기를 잡고 빙그르르 돌리면 무지갯빛이 일렁이는 홀로그램 꽃이었다. 나는 그 꽃을 선물한 이가 누구인지 무엇을 기념하여 준 것인지 단숨에 떠올릴 수 있었다. 동시에 아주 많은 이미지와 목소리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했지만, 곧바로 꽃을 내려놓고 기억을 떠올리기를 멈추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긴 하지만 opallite는 유리로 만든 합성석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내겐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그 보석의 반짝임이 그저 아름다운 순간의 일부가 아니라, 화자가 히데오를 떠올리는 방식처럼 지나치는 세월과 인연과 감정들을 애써 보내려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테일러가 지나간 연인을 보내기 어려워하듯, 나 역시도 지나가는 시간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떠한 것들은 아무리 붙잡아도 희미해지고 불가피할 정도 선명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매번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한 사실이 나조차도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때쯤이면 나는 「소설 보다」 시리즈 중 하나의 계절을 집어 든다. 과거를 보내는 대신 지난해 같은 계절 속 내가 읽고 남겨 둔 인덱스를 꼼꼼히 살펴본다.



*이번 《소설 보다 : 가을 2025》의 서장원 「히데오」는 문장웹진 6월호로 발행되었으며, 정기현‧이유리 작가의 올해 발표 신작 또한 문장웹진에서 만나볼 수 있다.


- 서장원 「히데오」 (2025년 6월호)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3000000&bid=0003&list_no=105001&act=view


- 정기현 「바람 부는 날」 (2025년 6월호)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3000000&bid=0003&list_no=104999&act=view


- 이유리 「썬더스트럭」 (2025년 10월호)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3000000&bid=0003&list_no=106659&act=view



[문장서포터즈] 2025년에 시작되어 1기 ‘몽글’에 이어, 2기 ‘쓰담’ 6명이 새롭게 선정되었습니다. 자신의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가고 있는, 문장의 든든한 서포터들과 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기획 콘텐츠를 제작합니다. 문장서포터즈가 담아낸 마음을 쓰다듬는 이야기들을 《문장웹진》 ‘모색’에서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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