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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경로에서 벗어나기

  • 작성일 2026-05-01

  [레지던시 일기-서울프린스호텔]

  익숙한 경로에서 벗어나기


고혜원


  익숙함을 좋아하는 수동적 도전자


  나는 익숙한 경로를 좋아한다. 산책을 가더라도 평소에 자주 가던 길로만 가고 글을 쓸 때면 자주 가는 단골 카페에서 작업한다. 그 카페에 자리가 없다면 2순위, 3순위까지 정해져 있다. 사실 노트북과 글을 써야만 하는 내가 있다면 어느 카페든 상관이 없겠지만 나의 발걸음은 익숙한 곳을 향해 간다. 언제였을까. 이직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직 전 회사와 이직 후 회사는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중심으로 정반대에 있었는데, 자연스레 이전 직장 방향 지하철에 몸을 실으려는 걸 간신히 정신줄을 부여잡고 내렸던 적이 있다. 아직 내 삶의 경로가 바뀐 걸 몸이 인식하지 못했구나 싶었다. 그만큼 몸에 배어있는 행동들이 나를 지배한다. 출근 시간이나 퇴근 시간에 별다른 약속이 없다면 자동으로 몸이 움직여 회사 또는 집으로 나를 데려간다. ‘어디로 가야지’라는 어떠한 의지가 배제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멍을 때리다가도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회사로 나가기 위해 합정역 10번 출구 쪽으로 몸이 향한다. 몸이 기억하는, 현재진행형인 내 삶의 경로다.


  그래서 주말마다 작업하기 위해 가는 장소도 대부분 정해져 있다. 주말인데 글 쓰러 나왔다고 말하면 오랜 지인들은 ‘오늘도 거기?’라며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그럼 나는 ‘네, 마감이 있어서.’라고 대답한다. 거기에 없는 날은 마감이 없거나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는 날이다. 그럼 이따금 지인들은 글 쓰는 나를 찾아와 지나가다 들렀다며 인사하고 갈 때도 있다. 이럴 때면 마치 게임 속 NPC가 된 기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머무는 공간에 익숙해져야 긴장이 풀리고 효율이 좋아지는 나에겐 내가 잘 아는 공간, 내가 예측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꽤 중요하다.


 그런 내가 6주 동안 새로운 공간으로 내 몸을 던지는 건, 도전이었다. 굳이 새로운 곳에, 무거운 짐을 풀고 적응해야 하는 곳에 ‘지금 내가 가야 하는 이유가 뭘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 신청할 때는 4주만 신청했었다. 너무 길게는 힘들 것 같아서. 그렇지만 입주 전 통화로 담당자님께서 진짜 4주로 충분하겠냐고 재차 물어보셨다. 다들 더 지내고 싶어 하신다고. 그 제안에 나는 그렇다면 6주를 꽉 채워 지내보겠다며 마음을 바꿨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레지던시 지원사업’에 왜 신청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의문이 자연스레 따라올 거다. ‘낯선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굳이 왜?’ 그러니까 나는 도전을 좋아한다.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고 반 페이지에 걸쳐 외쳤지만 그 와중에도 새로운 것을 곁에 두는 건, 내 호기심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언젠가 나는 왜 이럴까, 하며 고민하던 내가 나를 정의하는 단어로 ‘수동적 도전자’라는 수식을 만들었다. 익숙한 걸 좋아하면서 이따금 아예 새로운 것에 관한 제안이 찾아오면 주저 없이 도전한다. 담당자님의 제안에 혹했던 것처럼. 소설을 계약할 때의 기준에서도 내가 아예 안 써본 걸 써볼 수 있는가도 크게 작동한다. (그리고 매번 후회한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선택인 걸 알면서!) 그렇게 써보지 않은 장르에도 계속 도전하다 보니 영화, 드라마, 소설, 희곡, 뮤지컬 대본까지 매체를 오가며 작업해 왔다. (그러다 보면 어떤 장르에 정착하고 싶으냐는 질문이 종종 따라온다. 아직 그 질문에 답을 찾는 중이다.) 그러한 도전 의식의 연장선상으로 내가 익숙하다고 느끼는 공간이 아니라 색다른 공간에 나를 던져보고 싶었다. 단순히 집필 공간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로를 탐색해 보고 싶었다. 나의 고향 서울을 생각보다 탐색해 볼 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서울프린스호텔에서의 새로운 경로 속에서 어느 날에는 집중이 잘 되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선언하며 오락가락하는 적응기가 시작됐다.


  호텔 장기 투숙객의 나날


  종종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면 호텔방 안에서 글 쓰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보통 그들은 사건의 주요 목격자거나 살해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쓰던 원고가 다잉 메시지가 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떠나 워낙 익숙한 그림이 아닌가. 호텔에 장기 투숙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소설가의 모습은.


  나는 어땠을까. 일단 호텔에서 출퇴근하는 회사원의 자아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처음엔 48시간 넘게 집 밖에 나와 있는 기분이었다. (호텔이 집은 아니니 밖은 맞다.) 정확히 말하자면, 퇴근해도 여전히 밖처럼 느껴졌다.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일 거다. 그렇게 적응기가 시작되며 평소에 다니던 출퇴근길도 바뀌었다. 기존에 애용하던 호선이 아니라 다른 호선으로 갈아타고 다니기 시작했고 내가 오가던 거리의 풍경도 완전히 달라졌다.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지도 어플을 켜고 검색해서 다녀야 했다. 일단 이 주변에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한 마디로 서울 안에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서울 토박이인 내가 서울을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 건 생경한 기분이었다. 익숙한 경로에서 벗어난다는 건, 이렇다.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새로운 경로를 찾아내고 가본 적 없던 나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매일 아침 호텔 조식을 먹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를 알아갔고, 명동의 소음을 느끼고,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을 보고, 광화문까지 걸어가 보고, 한국어부터 중국어, 일본어까지 3개 국어가 가능한 약사 선생님을 만나기도 하고, 남산 타워가 보이는 공원에서 운동도 했다. (이실직고하자면 운동보다는 휘적휘적 걷는 일에 가깝다.) 어쨌든 내가 명동 중심가에 있는 호텔에 장기 투숙하고 있지 않았다면 전혀 경험할 일이 없었을 거다.


  심지어 아프기까지 했다. 호텔방에 누워 앓아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창 독감이 유행할 때였을 거다. 독감까지는 아니었지만, 괴로운 코감기에 호텔 근처 약국에서 감기약들을 우르르 사서 먹으며 주말을 내리 앓으며 보냈다. 그다음 찾아온 월요일에 방 청소를 요청한 후 출근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나의 방을 담당하는 청소 여사님께서 나에게 레몬즙을 선물하셨다. 청소하며 보니 고된 감기에 걸린 것 같은데 면역력에 좋으니 챙겨 먹으라는 다정한 말과 함께. 그렇다. 예상하지 못한 친절은 그 공간이 내게 익숙한 공간으로 편입될 거라는 허락처럼 느껴진다.


  작가 소개에 매번 적는 문장이 있다. ‘서로의 온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문장을 쓰는 것이 민망하게도 나조차도 온기를 주지 못하며 살아가는 순간도 많다. 그럴 때면 이런 온기의 순간들이 비집고 스며든다. 의심하지 말라는 듯. 그 문장을 믿게 되었던 계기라면, 어느 겨울 아르바이트를 하던 현장에서 잘 모르는 이가 던진 다정한 말이 그날의 나를 하루 종일 행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를 향한 모진 말들보다 다정한 말 한마디가 나의 세상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이번에도 골골거리며 잘 써지지 않는 글에 고뇌하던 나에게 건네진 상큼한 레몬즙은 훌쩍이던 콧물을 멈추기에 충분했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밤


  본가에서 머무는 나는 이번 기회에 독립한 느낌을 아주 조금 느껴볼 수 있었다. (조식도 청소도 호텔에서 대리해 줬기 때문에 진짜 독립과는 전혀 다르겠지만!) 혼자 호텔에 머물며 작품 속에서 고민하던 어떤 감정이든, 글을 잘 써지지 않아 해결하고 싶던 방법이든, 오랜 시간 나를 괴롭히고 있던 생각이든,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사고실험들에 가까웠겠지만. 그럼에도 호텔에서 생활을 해본 적이 없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또 한 번 달라졌다. 몰입을 해본 것과 안 해본 것, 경험을 해본 것과 안 해본 것은 차이가 난다. 드라마 속 폭발적인 성장이나 변화가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분명히 내가 알지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아주 작은 틈새가 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 호텔에 머물면서 그전의 내가 상상만 해보면 호텔에서의 나날을 직접 경험했고 깊게 몰입했으니 입주 전 1월의 나와 퇴실 후 3월의 나는 완전히 달라졌을 터였다. 아직 쌀쌀한 롱패딩이 필요한 겨울에 입주해 가벼운 옷으로 충분한 봄에 퇴실했으니까. 어색하던 6호선 출근길이 익숙해졌으니까. 이처럼 사소하게는 옷차림이나 생활 패턴부터 크게는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기간에 작업했던 나의 프로젝트 중에 완성본은 없었다. 이미 끝나가는 줄 알았던 원고를 대대적으로 수정하는 것부터, 아예 처음 써보기 시작한 초고, 새롭게 구상하는 작품의 시놉시스, 아예 해본 적 없는 장르까지 완성하기보다는 새로운 여정으로 떠나는 작업이 많았다. 익숙한 경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로를 택해야 하는 타이밍에 도착한 이곳에서 많은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새로운 경로의 이야기들은 아마 올해 안에 나 자신이 끝내리라 믿어본다. 


  노트북 속 조각나고 다시 합체한 이야기들이 곧 세상 밖으로 나와 각자의 경로를 따라가길 바라며 6주간의 서울프린스호텔 생활을 정말 마무리한다. 이 에세이의 초고는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써 내려간 단상에서 시작했음을 고백한다. 정말 그곳에서 시작했던 이야기들이 모두 결말을 향하여 각자의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다. 또 언젠가 기대하지 않던 곳에서 익숙한 경로를 벗어날 기회를 얻기 바란다.




  〈레지던시 일기〉는 문학 레지던시에 머문 작가들의 에세이입니다. 입주 기간 동안의 하루와 작업 과정,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마주한 감각과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작품 너머 창작의 현장과 작가의 내면을 함께 전합니다. 레지던시에서 보낸 시간의 의미를 독자와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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