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카르토그라피
- 작성일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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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서울프린스호텔]
빛의 카르토그라피
임택수
여행지의 호텔에 며칠 묵게 되면, 나는 꽃을 샀다. 야생의 빛 같은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방은 나를 밀어내듯 납작해졌다. 유리컵이든 값싼 꽃병이든 물을 담아 꽃을 꽂아두면, 방 안에 없던 높이가 생겼다.
오늘은 미모사 한 줄기. 만지면 부서지고, 멀어지면 공기 속으로 풀어질 것 같은 꽃송이들, 흩어지기 직전의 햇빛 알갱이 같다.
모네처럼, 아버지처럼 평생 정원을 가꾸며 살고 싶었지만 나는 여러 장소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주소는 자주 바뀌었고, 도착한 곳의 계절은 늘 막 시작되거나 막 끝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래 머무는 일보다, 잠시 머문 것들에 눈길을 주었다. 지나가는 빛이나, 금세 사라질 장면 쪽으로 조용히 서게 되었다.
서울프린스호텔에서 걸어서 오륙 분, 남산 초입에 모교가 있다. 언제나 열려 있는 정문, 비좁은 마당, 대극장의 파사드. 창의 배열과 입면의 분절이 만드는 리듬에 따라 시선을 옮긴다. 스물다섯에 입학한 학교는 경기도로 이전했고, 옛 건물은 부속 캠퍼스가 되었다. 오래전, 이 공간을 공유했던 사람들. 얼굴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담장에 바투 붙어 걷던 뒷모습 같은 것. 그리운, 스승의 방에서 흘러나오던, 주먹만 한 물방울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내는 소리 같은 음악. 이해한 만큼 오해한 시간. 나는 입을 다문 채, 늘 바람 속을 걸어가는 사람 같다. 겨울이므로, 칼바람이 분다. 조금 더 늙은 기분이 든다. 뺨부터 천천히 지워지는 것 같다.
밤이 내려오자, 명동의 창들은 하나둘 불을 밝힌다. 머릿속에 펼쳐진 지도 위로 맥락 없이 떠올랐다 끊기는 장면들. 누구의 것도 아닌 시간이 잠시 눈앞에 머무른다. 어떤 기억은 슬픔으로 남는다. 그 기억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을지도 모른다. 십 대에 일했던 을지로입구 인쇄골목은 이미 지도에서 사라진 지 오래. 삼십 대의 직장과 디가 살던 충무로 적산가옥. 각각의 시절이 명동 주위의 위성처럼 가물거린다. 무력한 그리움. 명동이 아니라면, 나는 더 기꺼이 미쳤을 것이다. 저만치, 남산타워가 붉게, 느리게 깜박인다.
눈이 녹은 길 위에 염화칼슘이 뿌려져 있다. 큰길의 경사는 그대로인데, 안쪽 골목은 말끔히 정비되었다. 지워진 자리일수록 정돈된 얼굴을 하고 있다. 예술관은 기억보다 작게 보이고, 주변에는 게스트하우스가 눈에 띄게 들어섰다. 국적을 특정할 수 없는 얼굴들과 생소한 언어들이 궤도를 따라 떠다닌다. 어떤 식당에서는 히잡을 쓴 단체가 치킨을 먹고 있다. 닭을 볼 때마다 나는 김수영 시인을 떠올린다. 오래 머물지 못한 빛. 어쩌면 그가 남긴 짧은 밝음이야말로 우리가 통과한 벨 에포크였는지도 모른다.
네온이 쏟아지는 밤거리는 눈이 시리다. 불 꺼진 환전소 앞이 별안간, 환해진다. 눈을 떼면 사라질 것 같은 세 사람이 빛 속에 서 있다. 담배를 문 사람이 나를 똑바로 본다. 그의 두 눈에는 이미 끝이 와 있다.
현실은 늘 늦는다. 시는 그보다 먼저 간다.
그가 그렇게 말했는지, 내가 그렇게 들은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연기를 길게 빨아들인 뒤 내뱉지 않고 삼킨다.
늘 현재형이어야 한다. 과거로 가면 장식이 되고 미래로 가면 구호가 된다.
그는 온몸으로 문장을 밀어붙인다. 확신은 문장을 윤리로 만든다. 윤리가 되면 시는 안전해진다. 안전해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옆에 선 사람이 소리 없이 웃는다. 빛이 붙지 않는 프로필이다.
문장이 너무 빨리 닳는 밤이다. 오늘을 아무렇게나 쓸 수 없다. 그의 넥타이는 지친 혀처럼 늘어져 있다.
거리의 음악이 서로를 밀어내며 부딪친다.
나머지 남자가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넨다. 미완성 스케치다. 여인 하나가 머리에 짐을 이고 걸어온다. 창가에 기대선 남자는 바깥을 본다. 둘은 서로를 보지 않지만 같은 시간 안에 있다.
제목을 묻자,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고 그가 말한다. 고통은 없다. 비극도 없다. 다만 되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만 있다. 나는 감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감정을 먼저 놓으면, 그림이 핑계가 돼. 그래서 너무 멀리 가지 않으려고.
나는 끝내 버티는 선을 본다. 끝내 홀로 남는 그림자를 본다.
영양센터 가서 삼계탕이나 먹읍시다. 내가 말한다.
시는 안 되는데, 삼계탕은 되겠네. 눌린 얼굴의 그 사람이다.
삼계탕은, 시대를 안 가리지. 이미 밤을 다 써버린 사람이 말한다.
나머지 한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웃는다.
명동에는 빛이 넘친다. 붉고, 푸르스름하고, 허옇게 질린. 나는 모든 불빛이 동시에 꺼지는 순간을 상상한다. 어둠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자유다.
귀와 코가 붉어진 채 호텔로 돌아왔다. 카드키를 대기 전, 문에 붙은 숫자를 잠시 바라본다.
금속으로 만든 입체 숫자, 505. 멀리서 보면 숫자라기보다 신호에 가깝다. 짧고, 길고, 다시 짧은 간격. 누군가를 부르는 방식이다. 조명이 비스듬히 떨어지면서 5의 곡선에 얇은 그림자가 걸렸다. 거의 S에 가깝다. 가운데의 0은 흔들림 없이 닫혀 있고, 양쪽의 5는 그 원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본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잠시 움직이지 않는다.
카드키를 댄다. 문이 열리고, 숫자는 남는다. 거대한 도시 속에서 반복되는 이 번호는 내가 돌아오는 자리다.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같은 번호로 다시 들어간다. 어느 순간, 그것은 나를 부르는 신호가 된다.

<사진. 서울프린스호텔에서>
방은 고립과 보호를 동시에 품는다. 바람이 없을 뿐, 방 안의 공기는 바깥만큼 냉랭하다. 코트를 입은 채 한동안 움직인다. 방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조용하다. 누군가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은 침묵이 어린다. 처음부터 꺼내지 않기로 한 말들. 그 말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천장에 박힌 스포트라이트가 커튼 위로 떨어진다. 주름과 주름 사이, 한 뼘 남짓 파인 골에 그림자가 고여 있다. 흰 시트를 씌운 침대 위에는 그림자가 없다. 평평한 눈밭 같다. 발자국 하나 없는 설원 같다.
문득, 디와 묵었던 트윈룸이 떠오른다. 비바크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그날. 우리는 이른 시각에 호텔에 들어왔다. 창가 쪽이 더 차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 자리를 먼저 골랐다. 몸에 열이 많다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바깥 공기가 천천히 들어와 커튼을 밀고 돌아갔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디는 몸을 웅크린 채 앓는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디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몸이 차가웠다. 자리를 바꾸자고 하자, 디는 망설이지 않고 내 침대로 넘어왔다. 등을 보인 채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나는 난방 온도를 조금 올렸다. 기계 소리가 낮게 울리고, 공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디의 뒤에 모로 누웠다. 서로의 체온이 고르게 퍼질 때까지, 조금씩 간격을 좁혔다.
디가 좋아하던 ‘All Alone’을 듣는다. 묵직한 피아노가 낮은 자리에서 반복된다. 음악은 앞으로 흐르지 않고, 같은 자리를 짚으며 한 걸음씩 옮겨간다. 음 하나하나가 서로 기대지 않은 채 떨어져 울린다. 볼륨을 낮춰도, 피아노 소리는 작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와의 거리가 줄어든다.
맬 월드론(Mal Waldron)은 한때 연주하는 법까지 잊어버렸다고 한다. 다시 시작할 때, 그는 복잡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몇 개의 음을 오래 붙들고, 그 사이를 반복해서 건넜다. 화려한 즉흥 대신, 가장 작은 단위에서 음악을 세우는 방식이었다.
피아노 한 대와 방 안의 공기. 그뿐이다. 컵 내려놓는 소리, 골목을 빠져나가는 차 소리, 의자를 바닥에 끄는 소리. 그리고 심장 박동. 그 사이로, 내 생각이 방 안을 걸어 다닌다. 월드론의 연주는 모든 소리가 들리도록 비켜 서 있다. 멍하니 듣고 있으면 슬그머니 옆에 와 앉는다. 디의 고양이처럼. 디는 고양이를 부를 때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 번 두드리곤 했다.
피아노는 손이 기억하듯, 글은 세계가 기억할 것이다. 내가 단어를 잊어버려도 언어는 사회 안에 남는다. 나른한 공기 냄새. 나는 콘솔 위 조명 버튼을 끄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새벽 세 시, 잠에서 깼다. 어둠 속은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 공기가 물처럼 가라앉아 있다. 심해를 떠다니는 해파리가 떠오른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어떤 것들은 느리게 움직일 것이다. 전원은 모두 꺼져 있다. 히터와 가습기, 냉장고와 공기청정기, 전기주전자, 스탠드, 노트북까지.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데, 벽을 따라 희미한 인기척이 흐른다. 무엇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고, 무엇이 남아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꿈에서 디를 보았다는 것. 이제 꿈에서 디를 보면 그게 꿈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문득, 디의 장례미사가 떠오른다. 연기도 보이지 않는데, 프랑킨센스 향이 방 안에 퍼진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 젊은 사제가 말했다.
죽음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죽음은 너무 외롭습니다.
죽음은 너무 차갑습니다.
빛이 없어도 피어나는 생명체가 있다. 일테면 부생식물이나 유령식물 같은 것. 태양의 문법을 배우지 않은 존재들. 보여짐을 목표로 삼지 않고, 침묵 속에 번식하는 리듬. 이름이 붙지 않은 감정과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사유도 그런 방식이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자라고 있는 것들. 매일 육백 명이 넘게 태어나고, 구백 명이 넘게 죽는다. 나는 아직 빛과 어둠을 다 말하지 못한다. 어둠이 있다면 빛이 있을 것이다. 디가 떠난 지 사십구일째, 명동성당에 다녀왔다. 오전 열 시 미사가 시작되기 전, 미사예물 봉투에 디의 이름을 적어 위령미사를 신청했다. 대니, 댄, 김다니엘. 너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그분뿐. 나는 제대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았다. 기도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채, 그저 앉아 있었다.
외국인 신부가 복음을 봉독한 후 원고를 꺼내 들었다. 한국어로 빠르게 읽었다. 몇몇 단어가 조금 뭉개졌지만, 문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창세기의 빛에 대해 말했다. 그 빛은 태양보다 먼저 있었고, 어둠을 없애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세계를 알아보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빛이 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빛이고 이미 소금이라는 말. 나는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수행 끝에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는 말. 자신을 등불로 삼아야 하는 일. 그 등불을 고요히 지켜보는 일. 파도는 끊임없이 출렁이고, 바람은 매번 방향을 바꾸지만 그럼에도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자리. 스스로 섬이 되는 방식.
미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떠났다. 실내는 어둑해지고, 나는 남아 생각에 골몰했다. 빛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는 과잉의 빛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때 빛이 들어왔다. 제대 왼쪽, 열한 시 방향.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상 위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었다. 여덟 장의 꽃잎으로 나뉜 장미창. 빛은 유리를 지나 색을 얻고, 그 색으로 성당 안에 닿았다. 퍼지는 빛이 아니라 도착하는 빛. 선택된 경로와 시간에 닿는 빛. 그 빛이 내 머리 위에서 잠시 멈췄다. 빛은 나를 위로하지 않는다. 다만, 나를 드러낸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명동 길바닥은 밀랍을 바른 것처럼 번쩍거린다. 어디선가 끝없이 상승하는 하프시코드 연주가 고막을 때린다. 눈이 멀 것 같아, 눈을 반개한 채 걷는다. 길을 걸으며 세상에서 가장 밝은 곳은 어디일까 생각해 본다. 눈부신 사막의 한낮. 태양은 지면을 곧게 내려치고 그림자는 발밑으로 짧게 웅크린다. 그러나 그 빛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사물의 표면을 스치듯 튕겨 오른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장소를 떠올린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리, 태양의 중심.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수만 년 전의 빛이 지금도 길을 찾고 있다. 아마 내 문장도 아직 그 길 위에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을지로 쪽으로 향했다. 이제는 사라진 을지로입구 인쇄골목. 지금은 SKT 타워가 들어서 있다. 새 건물들 사이에서 옛 골목이 있었을 법한 위치를 짐작해 본다. 열다섯의 나는 걸핏하면 철야 작업에 붙들려 오프셋 인쇄기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가 인쇄된 종이 가장자리가 검게 번진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오른손이 체인에 끼였다. 검지와 중지 손톱이 으깨어졌다. 통증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파지가 된 인쇄물이었다. 어린 내가 눈물을 흘렸는지, 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침이 왔고, 나는 골목 어귀로 달려갔다. 약사는 내 손에 붕대를 감아주며 다행이라고,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말을 떠올린다. 다행이라는 말.
아침은 언제나 눈 깜짝할 사이에 밝아진다. 시어 커튼 오른쪽 중간 높이에 달걀만 한 빛이 떠 있다. 커튼의 주름과 주름 사이, 그림자가 고여 있던 자리에 떨고 있는 빛. 나는 그 작은 빛을 바라보다가, 생각한다. 누군가는 빛을 진리라 불렀고, 누군가는 빛을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빛은 세계가 나에게 잠깐 나타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짧은 밝음 속에서 세계와 나 자신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본다.
체크아웃 시간을 앞당겼다. 그러나 나의 장례는 먼저 치렀다. 침대 시트 위에 남은 주름, 욕조 벽에 부착된 리트랙터블 빨랫줄, 커튼을 여닫을 때마다 달라지던 빛의 각도들. 나는 그것들을 정리하지 않았다. 정리된 것은 이미 죽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나는 이름을 가질 만큼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다만 매일 같은 복도를 걸으며 ‘지금 이것을 하고 있는 나’를 수 차례 만들어냈다가 지웠다. 프론트 데스크의 인사, 마흔한 번의 조식, 엘리베이터에서 스친 타인의 어깨, 거리를 점령한 수천 개의 트렁크와 거짓말. 누구도 내가 여기서 하나의 삶을 마쳤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 장례는 울음도 꽃도 없다. 내일 저녁에도 명동은 여전히 명동일 것이고, 새 손님은 같은 방에서 다른 공기를 만들 것이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 끝 비상문 앞에 청소 카트가 멈춰 있고, 그 위로 아침 빛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나는 뒤돌아 문에 붙은 숫자를 본다. 금속으로 만든 입체 숫자, 505. 짧고, 길고, 다시 짧은 모스 신호. SOS. 이 신호에는 이름이 없다. 그저 누군가 여기에 있었다는 최소한의 흔적만 남는다. 나는 이 문을 수없이 드나들며 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들어가고 머물고 다시 나오는 동선 속에서 505는 어느 순간 객실 번호가 아니라 하나의 리듬이 되었다. 도시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나를 다시 나에게로 되돌려 보내는 작은 대칭. 내가 그 시간을 무사히 건너고 있다는 조용한 신호.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체크인에서 체크아웃까지 41박 42일이었다. 짐은 도착했을 때보다 조금 늘었다. 카드키를 반납했다. 프런트 직원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어느 호텔이든 프런트 직원의 작별 인사는 산뜻하다. 문을 나섰다. 명동의 빛은 이미 낮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잠깐 돌아보았다. 그러나 오래 보지는 않았다. 이 도시는 내가 떠난다고 해서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체류는 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여기 있었다. 그리고 그 신호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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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는 문학 레지던시에 머문 작가들의 에세이입니다. 입주 기간 동안의 하루와 작업 과정,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마주한 감각과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작품 너머 창작의 현장과 작가의 내면을 함께 전합니다. 레지던시에서 보낸 시간의 의미를 독자와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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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엠맥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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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가 사는 섬[레지던시 일기-남이섬 호텔정관루] 토끼가 사는 섬 구돌 남이섬은 1.4km의 직선과 그를 감싸는 호로 이루어진, 긴 달 모양의 섬이다. 본래 홍수가 나면 물에 둘러싸이던 곳이었는데, 1944년 댐이 들어서며 북한강 수위가 높아진 뒤 완전한 섬이 되었다. 모래땅이던 곳에 나무를 심고 길러 지금은 3만 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숲을 이루었다. 2025년 문학 레지던시를 열었고, 나는 2026년 3월, 그곳에 보름간 머물렀다. 레지던시에 참여하는 세 번째 작가라고 했다. 그곳 역시 나의 세 번째 레지던시였다. 첫 번째는 도시 한복판에, 두 번째는 인적 드문 산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남이섬은 유명한 관광지였다. 앞선 두 곳의 조건이 묘하게 겹쳐졌다. 야생동물과 마주치는 숲길 옆에는 갤러리와 카페가 있었고, 인파가 넘쳐나다가도 어느 순간, 나는 섬에 혼자였다. 한 시기마다 한 명의 작가만 초청하는 남이섬 레지던시의 특성은, 섬 안의 섬처럼 온전한 고립을 만들어주었다. 고립. 내가 레지던시에 들어간 목적이다. 작년 말 나는 모든 모임에서 빠져나왔다. 친구들에게도 반년간 연락이 닿지 않을 거라 말해 두었다. 그러고는 묵언수행을 하는 명상원에 들어갔다. 열흘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어느 절에서 묵언수행자의 등을 멀찍이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나는 그가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지쳐 있었다. 끝까지 타 흘러내린 초의 자국처럼 책상 위에 눌어붙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책을 낸 일은 전생인가 싶었다. 작년까지 나는 수험생 두 명과 살았고, 둘을 차례대로 대학에 보내 놓고 고립을 택한 건,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런데 남이섬에 들어오기 전날 밤, 그중 한 명이 재수를 선언하는 게 아닌가. 나는 눈을 뜨자마자 급히 짐을 쓸어 담고 택시에 탔다. “남이섬이요! 최대한 빨리 가 주십시오.” 섬에서 눈을 뜨면 러닝화부터 신었다. 숙소의 왼쪽 길은 그대로 긴 달 모양의 외곽선과 이어져 있었다. 남에서 북으로 곧게 뻗은 직선 길을 달리다 섬의 끝에 다다르면 거대한 돌탑을 8자로 턴하며 돈다. 북에서 남으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달려 돌아온다. 해가 떠오를 무렵이라 뿌연 물안개가 수면에 낮게 깔려 흐르고 물안개를 가르며 오리 떼가 줄을 지어 따라왔다. 러닝을 마치면 아침으로 황태국을 먹었다. 황태국은 운동 후 단백질을 보충하기에 적당했고,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작업실로 출근했다가, 오후가 되면 숲길을 걸었다. 해가 질 녘의 섬은 언제나 다른 그림을 보여주었다. 낮 동안 사람의 발걸음에 맞춰 땅에서 걷던 공작새는, 어두워지면 높은 나뭇가지로 날아올라 밤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나도 작업실로 돌아와 온 섬의 불이 꺼질 때까지 책상 앞에 있었다. 작업실은 남이섬 측에 별도로 요청드린 공간이었다. 그림책 작업 중이어서, 자료를 펼쳐 놓고 볼 수 있는 커다란 책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0인용 원목 책상 맞은편 벽에 족자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는
- 구돌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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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났던 서랍[레지던시 일기-서울프린스호텔] 내가 만났던 서랍 하가람 2026년 2월 13일 체크아웃을 하고 탄 기차에서 내가 앉은 자리 대각선으로 전자책을 보고 있는 남자가 있다. 그가 읽고 있는 것은 ‘작가의 말’이고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만났던 서랍을 잘 잊지 못한다. 문득 던진 시선이 정지한다. 실눈을 뜨고 한참을 들여다본 후에야 내가 ‘사람’을 ‘서랍’으로 잘못 읽었음을 알아챈다. 내가 만났던 서랍.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나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글을 쓴다. 주로는 두어 개의 카페를 전전하지만 몇 년 전 팬데믹으로 카페가 폐쇄되었을 때는 호텔에 묵으며 작업하기도 했다. 집에서는 왜 글을 쓰기 어려울까. 언젠가 본 영상에서 한 요리사는 말했다. 국물이 들어간 음식에는 10시 1분의 맛과 10시 3분의 맛이 있다고. 나는 매일 그날 하루에만 쓸 수 있는 문장과 장면이 있다고 믿는다. 많은 날 나는 나룻배 위에 있다. 검은 호수의 수면은 잔잔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늘 무언가 부유하고 있다. 헤엄치는 물고기나 신발 한 짝, 썩은 과일 같은 것들이 내 주변을 흐른다. 검은 호수에서 나는 매번 다른 것을 건져 올린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변하는 것은 없건만 내 자세는 달라진다. 한 호수에 오래 머물다 보면 바짝 세웠던 허리가 굽어지고, 어제 잡은 물고기나 오늘 잡은 물고기나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는 생각이 밀려들기 마련이다. 익숙한 공간은 나를 무르게 만든다. 몸이 고되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별수 없이 집에서 작업하지만 그럴 때조차 집을 낯설게 만드는 의식이 필요하다. 영국 성당이나 사찰 ASMR을 틀어 공간의 공기를 바꾸고 평소에 쓰지 않는 향수를 방 안에 뿌리기도 한다. 정작 호텔 같은 곳에 들어가면 나는 반대로 군다. 문고리를 돌려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마주하는 전경―빳빳한 침구와 가지런한 가구의 배치―은 처음 만난 이의 얼굴만큼이나 서먹하다. 나는 잠시 얼어붙은 채 그 얼굴을 응시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 친밀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내 물건을 소개하는 것이다. 쪼글쪼글한 핸드크림과 아끼는 티백, 인공눈물처럼 사소한 것들을 그에게 나누어주기. 짐을 풀자마자 나는 차가운 서랍 속에 소지품을 집어넣는다. 내 속내를 내어 보이듯 그 방 곳곳에 손길을 뻗는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어떤 공간을 나는 원하는 걸까? 내가 만났던 서랍.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다 보면 꼭 서랍 속에 물건을 두고 오는 일이 생기곤 한다. 체크인 직후에는 맨 먼저 서랍을 열어 물건을 채워 넣으면서도, 체크아웃을 할 때는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 서랍을 열어볼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물건만 챙기기에 급급한 것이다. 왜 떠나는 나는 도착하는 나보다 언제나 조금 더 무심할까. 대개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곳에 물건을 놓고 왔다는 것을 알아챈다. 아니,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사라졌던 시기를 돌
- 하가람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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