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길 잃기
- 작성일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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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협성마리나 G7]
자유롭게 길 잃기
윤슬빛
유난히 길을 잘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난히 길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들도 있지요. 아무래도 저는 후자 쪽이라 어딜 가나 비슷비슷해 보이는 길 앞에서 매번 난감해지곤 합니다. 누군가에게 정확한 위치를 설명할 수도 없고 이 방향이 맞는지 저 방향이 맞는지 확신할 수도 없으니까요. 다행히 “모든 길은 다 연결되어 있다!”라는 아버지의 강건한 호언장담을 들으며 자란 터라,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하는 대책 없는 낙관으로 매번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간답니다. 언제든 어떻게든 가고자 하는 곳에 다다르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이랄까요.
오도카니 앉아 지난 기억을 되새기며 레지던시 일기를 쓰자니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낯선 부산역 주위를 하염없이 빙빙 돌았던 첫날이 떠오릅니다. 분명 지도에는 길이 있는데, 거의 다 온 게 맞는 것 같은데…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어김없이, 도무지 목적지가 보이질 않았지요. 안내문을 꼼꼼히 읽지 않아 자주 곤란해지는 사람에 대해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자분자분 오래 걸었습니다. 무작정 헤매고 있는데도 전혀 조급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오롯이 읽고 쓸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게 그저 기뻐서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았거든요.
일상으로 돌아와 비슷비슷한 하루를 무심코 흘려보내다 보면 문득문득 부산역 10번 출구를 가로질러 걷던 하늘광장이 떠오릅니다. 멀리 내다보이던 희부연 바다와 거세게 불던 바닷바람과 공사장의 소음이 제 안에서 소란스럽게 되살아납니다. 흔들거리는 그 길을 빈번히 걸으며,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과 어디선가 돌아온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 도시를 잠깐 사랑하러 온 사람들도요. 혼자, 혹은 여럿이 빚어내고 있는 찰나를 슬쩍슬쩍 엿보며 ‘다들 이렇게 흔들리면서 사는 거겠지’ 싶어 괜스레 애틋해지곤 했지요. 일부러 비워둔 시간 사이사이에 모르는 사람들의 표정과 그림자가 천천히 스며들었습니다.
차근차근 쓰다 보니 사람, 사람이란 말을 참 많이 적고 있네요. 문학을 하는 일이 삶을, 사람을 들여다보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인가 봅니다.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이 불가해한 세계에서 불완전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무엇을 붙들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지 헤아려보려면 잠깐 멈춰야 한다는 걸 다시금 배운 날들이었습니다.
돌이켜볼수록 참 귀한 3월이었어요. 호된 꽃샘추위에 웅크리고 다니면서도 종종 등 뒤가 뭉근히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더운물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것 같던 오롯한 충만함 덕분이겠죠.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잘 상상할 수 없었는데 별 의미도 없이 느긋하게 사위를 둘러보던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이렇게만 살면 참 좋겠다’ 싶기도 했답니다.
헐겁던 읽기 목록이 다시 빼곡해졌고 흘려 쓴 것과 흘려보낸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쉼표와 마침표를 들여다보고, 물음표와 느낌표의 질감을 매만지고, 차마 이을 수 없는 말을 줄임표로 대신하며 ‘쓰는 몸’은 대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짧은 일기조차 쓰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무엇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종종 생각하는 사람이, 어째서 어떤 목소리들에 붙들려 끝끝내 쓰지 않고 견딜 수 없는 날들을 겪게 되는 건지 고심해보기도 했지요. 여전히 답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진탕 휘저어 놓은 흙탕물의 불순물이 찬찬히 가라앉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듯, 맑게 갠 날들 안에서 새롭게 발견한 마음이 있습니다. 묻어두고 있었거나 짐짓 잊은 척했던 마음이겠죠. 읽고 쓰는 삶에 대한 어렴풋한 동경, 어린이 청소년 독자들을 향한 머쓱할 정도로 순정한 사랑 같은 것들 말이에요.
안락한 은신처가 되어준 북두칠성 도서관 구석에 앉아 손에 잡히는 책들을 맘껏 읽다 보면 반짝이는 별 조각들을 두 손 가득 쥔 것처럼 뿌듯해졌습니다. 마음에 남는 문장과 단어를 기껍게 옮겨 적고 무작위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받아쓰는 동안 ‘아, 내가 이런 시간을 정말 좋아했지. 이런 시간이 꼭 필요했지’ 하고 무뜩 깨닫곤 했지요. 읽는 일이 숙제처럼 느껴지고 쓰는 일이 업보처럼 느껴지던 때였는데 그저 여백과 여유가 필요했던 것뿐이란 걸 알아차리게 된 거죠.
많은 문장을 버리고 약간의 문장을 건지며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을 느루 곱씹었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찬 일들에 매여 꾸역꾸역 무언가를 견디던 고단한 날들이 조금씩 희미해져 갔습니다. ‘숨길’이 되어줄 이 시간과 공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간절할 텐데 싶어 혼자 숙연해지기도 했지요.
얼마든지 실패가 허락된 공간에서 슬픔을 받아다 기르는 시를 쓰고 성글게 짜인 이야기를 다듬고 좀체 잘 모르겠는 나의 작품 속 인물을 거듭 들여다봤습니다. 답이 없는 질문에 한없이 골몰하다 지치면 익숙하지 않은 거리를 하릴없이 걸으며 생경한 풍경을 차곡차곡 쌓아보기도 했습니다. 지하철을 잘못 타도 허둥거리지 않았고 복대기는 버스에서도 태연자약할 수 있었습니다.
살풍경까지 아름다운 도시에 한 달 남짓 머무는 동안, 어디든 가보고 싶었지만 어디서든 적응 기간이 필요한 기질을 이기지 못해 결국 숙소 언저리만 맴돌다 온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래도 아주 근사한 뭉게구름과 첨벙거리는 환한 빛을 만나 애석하진 않아요. 한데, 이렇게 적고 나니 위안과 별개로 애써 시간을 내 찾아갔던 곳들이 유독 선명하게 남아있음을 선선히 인정하게 되네요. 자갈치시장의 활기와 보수동 헌책방 길목의 호젓함이 얼마나 좋았던지요. 특히, 자주 보는 남쪽의 바다와는 사뭇 다르던 짙푸른 바다가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그 위로 아무렇게나 뻗어나가던 빛과 수런거리던 사람들과 잠깐 허락되었던 완전한 고요에 대해 생각합니다. 좀처럼 잠들 수 없어 뒤척이던 밤들과 빈 종이를 앞에 두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문장들을 잠잠히 기다리던 날들이 설핏 스칩니다. 이상하죠. 적막과 고독이 반가울 수 있다는 게.
글을 쓰기 위해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엉뚱하게도 기다리는 일입니다. 제자리걸음으로 한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또 돌며 나만의 언어를 기다립니다. 한껏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어떤 목소리들을 기약 없이 기다립니다. 목적지까지 가장 빨리 도달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누군가에겐 그 기다림이 참 한심해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효율과 쓸모만 따지는 사람이라면 어처구니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며 혀를 찰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쓸데없어 보이는 그 기다림과 몸짓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네가 있는 자리까지, 딱 한 걸음을 내디뎌보는 용기로 이어집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기꺼이 타자의 자리에 서보려는 사람들, 서로의 값진 조각을 기어코 발견해내려 안간힘 쓰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어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 덩그러니 앉아 있으면서도, 전혀 쓸쓸하지 않았습니다. 잘 알아챌 수 없는 은연한 방식으로 그곳에 머물다간, 머물다 갈 누군가와 깊이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내 것이 아닌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이전에 앉은 사람과 이다음에 앉을 사람을 덧그려보던 기억이 선연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고유한 빛깔로 빚어낸 문장들이 언젠가 우리를 부드럽게 이어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종잡을 수 없이 알쏭달쏭 한 말만 늘어놓던 글이 끝나 갑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제 독자는 대부분 어린이, 청소년들이라 그 당시의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을 작가의 말에 쓰곤 하지요. 어디로든,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길 바라요- 같은 말들 말이에요. 어딘가에서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도 그러길 바랍니다. 부디 자기 안에서 부단히 헤매보길 바라요. 그리고 두려움 없이 성큼성큼 나아가길 바라요. 그러기 위해 우리는 더 기꺼이, 더 자유롭게 길을 잃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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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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