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토바의 연인」 외 6편
- 작성일 2023-03-17
- 댓글수 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조]
만토바의 연인
이윤훈
발끝 아래까지 눈꺼풀 내린 무덤
하룻밤 잠을 자듯 눈 한 번 감은 연인
흰 옥빛 상형문자로
오천 년이 흘렀다
죽어서도 껴안은 채 별의 꿈을 꾸는
여기는 달도 잠든 그들만의 궁전
사랑해, 불꽃 같은 말
어둠의 눈을 켠다
은하 너머 수만 년 더 빛나야 한다고
사랑의 별자리에서 두 눈을 반짝인다
그들을 해독한 아침
죽음조차 환하다
*만토바의 연인: 셰익스피어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 배경인 만토바에서 서로 껴안은 채 발견된 오천 년 전의 무덤 속 연인
굽은 못을 위한 레퀴엠
한여름 중천에 뜬 태양처럼 직시하라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거다
기둥에 대못을 치며 단호하게 외쳤다
미송 속 도사린 옹이를 만났을까
여린 속을 보고 그만, 눈 질끈 감았을까
못 하나 맥을 못 추고 휘어지고 말았다
등 굽은 그림자로 서성이던 아버지
세상의 벽을 끝내 꿰뚫지 못하셨지
조심히 굽은 못을 펴 연장통에 넣었다
현악 4중주, 겨울
# 1 악장 - 예세닌의 시를 읽는 겨울밤
먼발치 숲속 바람 뒷문으로 엿들어요
촛불의 흔들림에 가만 몸을 내맡기고
벽 위에 검은 나비로 너울너울 춤춰요
가끔 소스라치다 촛농을 엎지르며
양초가 빛으로 몸을 바꿔 사라지면
깊숙한 어둠의 관이 나를 삼킬 거예요
재 속의 밑불처럼 슬픔을 다독여요
먼 것은 먼 그대로 그립게 둬야 함을
알기에 차마 한시도 들쑤시지 못해요
외지도록 눈이 쌓인 자작나무 숲으로 가
바람의 거친 숨을 터질 듯 들이켜고
부풀어 보름달처럼 떠오르고 싶어요
# 2 악장 - 나의 벽지
산마을 절로 외져 고요로 쌓이는 눈
한차례 바람 일던 빈 가슴 분지 위로
온종일 무심하도록 내리고 또 내리고
저마다 제 안으로 들어서는 어스름 속
침묵이 깊어지면 사람도 침향일까
불현듯 산방의 모과 온몸으로 향기다
방 안의 등을 끄고 마주한 바깥 어둠
산짐승 숨은 눈빛 형형히 살아나고
한순간 흰빛을 그며 사라지는 별똥별
꿈 한 폭 스쳐 가는 붓길이 가파르고
벼랑 위 몸을 세운 소나무 가지 끝에
새뜻이 싹튼 초승달 곡옥으로 달린다
# 3 악장 - 폭설
나직한 하늘 한 귀 은사시나무 숲속
긴 활을 휘두르며 숨 가삐 연주하는
바람의 거센 광시곡 잠든 귀를 깨운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 머리를 치켜세워
갈기를 휘날리며 허공으로 뛰어드는
산마루 하얀 수사자 거친 포효 힘차다
온 생을 단 하루로 목숨 다해 살아온 듯
핀 채로 단숨에 뚝, 격정의 목을 꺾어
눈 속에 더욱 짙붉게 타오르는 동백꽃
동박새 온몸으로 눈보라를 뚫고 가고
흰 이마로 해를 맞아 눈부신 저 사자봉
폭설 뒤 찾아온 고요 그지없이 드맑다
# 4 악장 - 횡단
언 눈에 몸을 세워 곧게 선 자작나무
바람이 투명하게 목관악기를 불고
숲 너머 은빛의 달이 싱싱하게 부푼다
고독하여 더 빛나는 늑대의 푸른 눈빛
사람도 여기서는 깨끗한 피의 짐승
눈을 뜬 별들이 멀리 천공의 길을 열고
새벽을 뚫고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갓 태인 첫울음을 눈부시게 터뜨리며
태고의 순결한 불을 목숨마다 붙인다
드넓은 숲을 질러 달리는 흰 늑대들
온몸을 내던진 채 심장 하나만으로
새하얀 세계에 저를 고스란히 맡긴다
암벽 타기
바짝 달라붙어 암벽과 독대하여
외로이 저 자신을 마주하는 이들
돌거울 어둠 속에서
제 얼굴을 꺼낸다
한 줄에 달려 서로 제 목숨 내맡긴 채
눈빛을 나눠 가며 당기고 풀어 주며
타인을 중심에 두고
한 발 한 발 오른다
날빛에 날을 닦아 제 몸처럼 아껴 두고
제 줄을 잘라야 할 가장 고독한 순간
마지막
숨죽인 커터 서슴없이 잡는다
위태해 더 외롭고 외로워 서로 깊은
생사의 경계선을 묵묵히 타는 이들
벼랑 위 뿔을 치켜든
흰 산양을 꿈꾼다
스피노자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다
변방의 다락방에 피신한 스피노자
책, 빵을 사기 위해 렌즈를 깎아 가며
세상을 새로이 보는 창을 하나 내었다
흐릿한 뭇별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숨은 풀꽃들도 새뜻이 나타나고
모두가 모습 그대로 눈에 맑게 어렸다
지상 한 모퉁이 길거리 카페에서
안경을 다시 닦아 먼 밖을 보는 아침
고요히 사람들이 다 내게로 와 빛이다
천국의 도시
# 파라다이스 풍경
먼눈이 부시도록 화사한 빛의 포장, 쉽사리 간편하게 일상이 소비되는
온종일 잠들지 않는 파라다이스 편의점
캔 커피 샘이 솟고 컵라면 솥이 끓고 허기진 눈을 끄는 색색의 온갖 식품
은밀히 적나라하게 제 알몸을 보인다
수명이 다하기 전 팔려야 할 상품처럼 쉼 없이 소비되며 넘나드는 허깨비들
천국의 이십사 시간 판토마임 축제다
# 메가시티 동굴
빛의 무릎이 깊이 꺾이는 지하 동굴, 토막 난 잠을 잇는 지하철 밤승객들
때늦은 수화물처럼 종착지를 꿈꾼다
촉수 무딘 일상 속 쉬이 잊고 잊히며 오늘 밤 또 몇몇이 수취인 불명으로
구겨진 지도 위에서 겉돌다가 잠들까
피곤에 움푹 파여 어둠이 깊은 눈들, 시선은 마디마다 꺾이어 끊어지고
꿈에도 사라져 버린 푸른 별과 지평선
핏발 선 눈을 감자 펼쳐진 동굴벽화, 먼 곳을 바라보며 우뚝 선 붉은 들소
뒷발에 온 힘을 둔 채 뿔을 번쩍 쳐든다
# 마리오네트
폭신한 소파에서 휴일을 살찌우며 솜사탕 하루를 또 한 입씩 떼어 물고
무심코 안락한 병을 일상 앓는 사람들
물신이 꾸며 놓은 도심지 금빛 무대, 머리 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에
쉽사리 목숨의 줄을 내맡긴 채 춤춘다
갖가지 광고 잔치 젖과 꿀이 넘쳐 나고 닿을 듯 말 듯 달린 탐스런 황금사과
날마다 장밋빛 단꿈 채울수록 허기다
부패의 정체
자꾸만 비린내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아무리 킁킁대며 사방을 둘러봐도 어디서 나는지 정체를 알 수 없다 며칠째 생선 한 첨 입에 대지 않았는데, 부엌을 살펴봐도 냉장고를 열어 봐도 자그만 생선 대가리 눈에 띄지 않는데, 비누로 손을 씻고 자리에 돌아와도 가신 듯 가시지 않는 비리고 역한 냄새
날 보는 고양이 눈빛, 내가 심히 수상쩍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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