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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케이션」외 6편

  • 작성일 2024-10-11

   로케이션

나혜


   내가 거품 칠한 식기를 당신이 헹구고 있다

   비눗기에 손이 뻣뻣해져 가고


   나는 슬며시 대본에 없는 대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그런 낌새를 눈치챘다


   그래서 먼저 틀린 말을 한다

   “다음부터는 여기로 오지 말아야겠어”


   이곳은 여태까지에 비하면 그리 나쁜 환경은 아니다 

   화장실의 수전이 깨끗하지 않았고 정수기가 고장 났으며 실내화가 한 짝뿐이지만 


   “너를 잘 돌봐야 해”


   당신은 나를 이해한다고 한다 

   이전의 대본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므로 그것은 거짓이 될 수 없다

   나는 이미 이해받은 역할이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거의 울 것 같다

   나는 감독이 멈춰 주길 바랐으나

   감독은 제지하지 않는다


   “여기가 내 집 같아”


   나는 식은 스튜를 소분한다 

   여전히 스튜는 촉촉해서 그릇에 떨어질 때마다 찰박찰박 소리를 냈고 


   카메라가 나를 줌인 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렌즈를 부숴 버리고 싶다가 


   그래, 이것을 남기는 것이 좋겠다 싶다


   이것을 가지고 

   내일도 절망했다가

   다시 허벅지를 들어 올리려고






   요원(燎原)



   발레복을 입은 그녀는 그림 속 사람 중에서도 아주 작은 크기의 사람에 속하고, 캔버스 화면의 중앙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누구나 그녀를 발견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라고 말했는데 네가 제발 좀 기다리라고 한다 


   커다란 산업도로가 

   완전히 수장되었다고 한다 


   사람은 없었다고 해  


   소설가의 기억은 깔끔해 보인다 

   잘 정리되어 있으며 


   나는 줄곧 오른 가슴에다 손을 올리고서 내가 죽은 것 같다고 말했다


   더듬어 본 적 있니 

   네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에


   얼마나 상처 주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 

   네 손으로 하고 있다고 


   이 전시,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생을 두고 생각할 그림 하나 건졌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른 데서 발견하고 기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는 못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살아 돌아왔다는 게 

   그게 중요하지만 


   어깨에 화살 꽂힌 패잔병


   비가 오고 있다 

   안 그래도 적응할 것 많은데 


   청소기 돌리기 

   생활복 갈아입기

   긴 파자마와 담요 꺼내 빨기

   다회용 핫팩 소독하기 


   끝내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는다 

   텐트처럼 한쪽이 불쑥 솟는다






   탈출



   여자의 손목을 잡고 

   녹은 파라핀 속으로 들어간다 


   뜨거워요 놀라지 마세요 이제부터 이 동작을 반복할 거예요 여자의 손목에는 침을 뺀 흔적이 남아 있다 아주 작게 핏방울이 맺혀 있다 

   나는 열 번 정도 더 여자와 함께 손을 움직인다 투명한 초록색 파라핀 안에 작고 붉은 회오리가 생겼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나는 내 손끝이 같이 담기고 있다는 것이 익숙하고 

   알코올 솜에 소독제를 부어 파라핀을 빠르게 닦아 낸다


   타이머를 맞추고 구석의 간이의자에 앉는다 

   테이프를 붙였다 뗀 자국이 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벽에 붙은 종이에는 환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종이가 얇아서 볼펜이 금방 상했다 펜촉으로 종이를 긁어 썼기 때문에

   미음인지 이응인지 헷갈릴 때는 대부분 이응이라고 결론짓고 부르면 그게 맞았다 이응, 이응 이응


   이렇게 조용한 때는 일요일 오전뿐이다 혹은 평일의 고속도로 위라거나···

   버스 보조석에 앉아 정오의 햇빛과 탑승 계단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으면 눈물이 났다


   곧 있으면 타이머가 울릴 것이다 그렇지만 여자는 타이머가 울리기 전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것 좀 어서 떼어 달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타이머를 끄고 물티슈를 한 장 뽑아 여자에게로 간다

   그의 손목에서 손끝까지 파라핀을 말아서 뜯어낸다 

   석고를 뜨듯이 모양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우리의 손은 너무 뜨겁다


   여자는 오백 원 세 개와 백 원 하나를 커다란 지갑에서 꺼낸 다음에

   옥수수가 들어 있는 검정 봉투를 데스크에 올린다


   찜질팩과 전기매트가 전부 식은 후에도

   아무도 옥수수를 집으로 가져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청소를 마치고 로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나와 옥수수뿐이었다 

   그렇구나 


   함께 지내던 사람은 내게서 나는 한약 냄새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기분이라고 했다


   나는 네가 안 건강해도 되는데, 목도리를 둘러 준다






   불 보듯 뻔한 미래



   속편이 나오면 오리지널도 다시 팔리기 마련이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작은 불이 하나씩 있어서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절대 꺼지지 않으니까 


   전력 질주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이 났다 주인공은 울면서 달렸는데 당차 보였다 이 약한 사람들아 이다음의 나를 믿지 못하겠느냐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를 보고 있을 관중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을 모두 소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속편의 소문으로 오리지널을 본 사람들이 지겹도록 생겨나고 

   오리지널을 본 사람으로 인해 속편의 소문이 또다시 퍼지고 


   돌아가며 기다리는 사람들 돌아가며 우는 사람들 사람들은 같이 울면서 뭔가 달라질 거라고 믿고 있다 나도 그 기쁨을 안다 모두가 함께하는 충돌과 묵념의 기쁨을


   납득이 가능한 이야기를 해 줘 

   간직한다는 것은 끔찍하구나 


   우리의 시간은 각자의 몫임으로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기억을 어떻게 만질 수가 없고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알아 뛰면서 숨이 차오를 때 버텨 내야 하는 기분을, 심장이 따가워지고 허벅지가 무거워지는 때를, 온몸이 공기로부터 주눅 들어 버리는 때를


   오리지널은 살아 있다 

   속편은 태어난 적이 없다


   가능성으로 인해 우리는 주위를 촘촘히 감싸 빙빙 돌고 

   다 같이 불쌍하고 초라해지다가 다 같이 똑똑해진다 


   예정된 날이 멀어질수록 더 크게 모이는 용서를

   그날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더해지는 유일함을






   천적



   좋을 때는 영화를 틀어 두고 자는 듯 아닌 듯한다 하지만

   좋지 않을 때에는


   내가 잠을 못 자면 나의 고양이도 잠을 잘 수가 없고 그러니 나는 아마 지옥에 갈 것이다 이 고양이의 평안을 지키기는커녕 영화가 끝나고서도 잠들지 못할까 봐 생수병만 생수병에 비친 오렌지빛 생수병에 묻은 아침 해의 색깔이 무서워 이젠 눈도 뜨지 못하고

   아침 싫다 밤도 싫다 시간을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탐험가는 피라미드 안에 있는 모든 방을 돌아보겠다는 의지를 빛낸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피디도 그러고 싶었을까? 어쩌면 그 피디의 의지가 더 강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의지만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이었을지도, 좁고 어두운 길을 팔꿈치로 기어서 도착한 그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미 물건이나 미라는 전부 꺼내어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니까

   그런데 그들은 기쁘고 

   그것이 신기해 


   뜨는 해를 보면서 물을 끓인다 빈속에 차 마시면 위가 아픈데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차를 마셔야 하는데 순서가 있는데 순서를 아는데 지켜야 하는데 안대와 귀마개 몰두나 집중 기분 같은 걸 허튼 데에 써 버리는 것도


   오늘은 낮에 햇빛도 보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출근도 하고 만 보를 세어서 걸었다 그런데 

   방에 불 켜고 싶지 않더라 음악도 듣고 싶지 않더라

   몸을 뒤척이면 고양이가 깨 버릴까 봐

   한숨도 상상으로


   많이 바라는 것이 아니다 뭘 쓴다 뭘 읽는다고도 말고 

   개운해지고 싶은 것도 아니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야 몸이 가렵지 않으니까 무성한 생각의 근처에서 서성이는 짓도 그만할 수 있으니까 오열할 힘이라도 생기니까 


   내가 이렇게 나를 소중히 여긴다 기어코 저 영화는 마땅히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캐릭터까지도 성장시켜 냈다 그런데 왜


   만약에 인간의 치아가 부정교합이 아니라 정교합이었다면 내 윗니 아랫니는 24시간 서로가 서로를 압박하는 힘에 못 버티고 뇌가 터져서 죽었을 것이다 완벽하다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니까

   나를 버리고 싶다 잠에게. 잠에. 잠아


   제발 받아들여 욱여넣어 견뎌 이해를 해

   하면서 싫다고 해

   해야 하는 거잖아 밤이고 잠이잖아 기본이잖아

   모두를 미워하는 네가 지겹잖아

   어차피 오래 미워하지도 못하잖아 






   연력1)



   그녀는 전깃줄을 쥐고

   주먹 위로 

   전깃줄을 감는다


   그녀는 6층 정도의 높이에서 일한다

   거기서는 사람들의 정수리가 보일 테다

   그녀는 사람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전신주에 묶인 밧줄과 그녀는 연결되어 있다 

   허리 한복판을 가로지른 줄 하나가 몸의 전부를 지탱한다

   그녀는 오후 세 시와 아홉 시 방향의 건물로부터 뻗어 나온 전깃줄을 전신주와 연결하고 묶는다


   우리는 전시회장에서 입구를 찾는다 

   모든 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여기서 공간을 구획하는 것은 커튼이다


   우리는 차폐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알면서 모르려고 한다

   그러나 다음 커튼을 걷을 때는

   꼭 함께여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녀는 이제 전선을 풀면서 골목길을 걸어야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수없이 반복되고 

   발바닥의 앞과 뒤를 골고루 쓰고 있다 허리춤의 공구가방이 흔들린다 삼키는 숨의 간격이 밭아진다


   나는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있는 줄로만 안다 

   나를 기다릴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비디오를 보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손바닥 전체로 잡아서 돌린다 집게와 엄지로 잡아서 돌린다 돌려서 늘린다 늘리고 엮는다 

   짧은 칼을 쥐고 긋는다 칼날 빠르게 움직인다 


   그녀는 공중에서 하는 동작을 땅에서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었으나

   땅은 그럴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그 비디오는 화면 안에 등장한 다른 카메라를 빨간 네모 박스로 잡아낸다 

   모든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있다 


   카메라만이 빨간 네모 박스 안에 들 수 있었다


1)국립현대미술관 〈재난과 치유〉展 중 〈미궁과 크로마키〉(차재민, 2013.)와 〈2020년은 나에게〉(리우 와, 2020.)를 참고하여 썼다.






   약속



   옆에서 달리고 있는 저 용달차는 이번 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빠질 것이다 항상 그랬다 나는 좌석 옆에 달린 버튼을 눌러 등받이를 젖힌다 옆 좌석보다 십 센티미터 정도 뒤로··· 머리를 기대어 자기에 딱 알맞다 회색 도로와 방음벽이 끝없이 이어진다 


   아마 내가 제일 많이 보고 사는 것은 타워크레인일 것이다 수천수만 개의 타워 크레인을 봤다 사람이 올라타 있기도 했다 또 어떤 하나는 너무 낮은 높이여서 이게 필요가 있나 그들은 전부 하늘 위로 내달리다 난데없이 부러진 모양이다 연결된 금속 줄과 철제 밧줄은 식물 줄기의 질긴 섬유질 같다 


   똑같은 자리에 있는 전광판 

   똑같은 자리에서 이름을 모집하고 있는 공터 


   고속버스는 창문을 열지 못해서 다행이다 저 큰 유리 건물 간간이 열려 있는 창문은 반대로 난 비늘 같다 손톱 거스러미 같다 중앙 분리선을 박고 넘어서 나에게로 달려오는 승용차가 하나도 없다 승객들은 전부 꿈을 꾼다 


   지금 나는 붙잡을 것이 필요하다 커다란 핸들은 어깨를 크게 돌리게 만든다 더 멀리를 본다 곧게 본다 여기에서 달린다 다들 운전석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계기판이 반짝거린다 전송 탑은 넓은 밭 한가운데에서도 우뚝 서 있다 기댈 것 없이도 


   잠의 점성이 높다 

   사치스럽네 


   시속 백 킬로미터를 벗어나지 않도록 액셀러레이터를 조절하다 보면 시간이 손에 들어온다 도로와 시간이 합쳐진다 1분에 1.5km 10분에 15km 계산이 확실하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지고 있다 


   해가 뜬 후에도 켜져 있는 가로등

   거짓말같이 도로와 시간과 나는 같아지고 


   커다란 화살표 여기서는 급커브

   서서히 속도를 줄여

   휘청이며 일어선다

   내린다


   고속도로 위의 간이 정류장에서 

   바람을 맞으며 나를 기다리는 사람을 만난다 


   여기로 올라오는 좁은 길에는 풀이 푹신하게 자라 있고 누가 가꾸는지도 모를 작은 화단이 있다 

   우리는 낮은 화단 턱에 쭈그려 앉는다 


   내가,

   가능성이 있어 보이냐고 


   너는 그렇다고 말해 준 첫 번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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