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는」외 6편
- 작성일 2024-11-04
- 댓글수 0
낙타는
홍성남
이 도시를 걸어야지
죄라도 지어야지
걷고 걸어도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지나온 길은 보이지 않고
자랑스러워할 어떤 이름이 없어도
낙타는
낙타에 있어서
무럭무럭 자라나라고
혼자 말해 보는 것
건물 사이로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사다리를 오르듯이
번지점프를 하듯이
메마른 콘크리트 속을 걷는다
같은 걸음으로
도시는 폭염과 한파를 반복하고
그 속에서 꿈을 꾸며
꿈꾸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층 빌딩과
도시가 키우는 낯선 그림자를 밟으며
그림자에 밟히며
이젠 없을 숲을 향해
걷는 일만이 할 일이라는 듯이
건물 사이사이 한 걸음걸음
도시를 걷는 중이다
도시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너도 죄가 많았구나
울음소리가 우리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
울지 못하는 자의 이름을 이젠 잊어야 한다
콘크리트 숲을 걷는다
모래사막을 걷듯이
발자국이 없는 끝없는 사막도시를 걷는다
사과의 얼굴
사과는 언제나 떨어지기 직전의 얼굴이다
빨갛고 파랗고
혹은 그 사이의 얼굴로
매달린 안간힘처럼
나는 척하기 명수이다 안 아픈 척하기 배부른 척하기 욕심 없는 척하기 알 수 없는 미소로 들여다볼 수 없는 표정으로 다양한 척하기 얼굴이다 부사의 얼굴을 조사로 바꾸며 분장하기도 한다
사과를 쪼개기 시작한다
속을 가르고 씨방을 털어 내고
씨는 마지막 보루로
끝까지 숨길 생각이다
태풍에 떨어진 낙과처럼
렌즈에 찍힌 흠이 난 사과처럼
둥그런 척하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거짓말을 잘하는 이웃집 언니처럼
붉은 겉에 하얀 속
파란 겉에 붉은 속
나는 겉과 속이 너무 가까워서
멀고 먼 사이
사과를 깎으며
안 아픈 척하는 얼굴을 꺼내고
욕심 없는 척하는 얼굴을 꺼내어
멀리 던진다
쪼개지고 흩어져도
자꾸 되풀이되는 얼굴들
나는 다시 떨어지기 직전의 얼굴
겨우 매달려서 둥글어지는 중이다
각설탕
나는 모서리에서 자랐다
이불을 반듯하게 개고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게 정리하며
모서리를 키웠다
모서리에 모서리를 맞대면
모서리가 아닌 것들이 보였다
낯설고 부끄러웠다
백지의 여백처럼
종일 모서리를 만들면서 놀았다
나는 줄 게 없으니
무엇이든 반듯하게 펴 놓았다
겹쳐지는 모서리가 각설탕처럼 쌓여 가고
각설탕이 든 유리병에
햇빛이 통과하기를 기다리는 날들이었다
저절로 침이 말랐다
각설탕은 유리병 속에서
서로의 어깨를 받쳐 주고 있었다
아껴 먹던 각설탕을 한 움큼 집었다
손가락 사이로 모서리가 만져졌다
하얗고 쓸쓸하였다
세상의 모든 모서리를 가진 골목 같았다
그런 골목이 있다면
나는 끝까지 모서리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서지겠지
녹아 가겠지
사라지고 없겠지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서리 끝을 넘어
또 다른 모서리를 만나러 가겠지
모서리를 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낯선 집
모르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면 새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르는 것들이 밀어 올린 나무 위의 집 같았다. 아무도 없는 낯선 집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꺼냈다. 구름은 가까웠고 그만큼 멀어서 한 번쯤 와 본 곳 같았다. 바람은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더듬어 스위치를 누르고 커피를 내렸다. 컵 안에 구름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내려다보는 골목은 구름이 깔린 것처럼 뿌옇게 보이고 한쪽으로 뭉쳐 있던 빛이 지워졌다. 마트 주차장에 드물게 차가 드나들었다. 가끔 한 사람씩 나와 담배를 피우다 들어갔다. 창백한 얼굴을 한 도시였다. 흐릿한 배경 속에서 지나가는 차 지붕을 좇기도 하고 터덜거리며 걷는 사람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떠도는 유령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한동안 턱을 괴고 거리에 눈길을 두었다. 길을 잃은 사람이 있었다.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껴입은 옷을 벗듯이 이름을 벗고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는 미로 같았다. 낯선 길로만 연결되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공간이 낯설었다. 구름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구름이 쏟아지면 나도 같이 쏟아질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 속으로.
고래를 찾아서
책을 뒤적이다 뒷부분 어디쯤에서 고래 단어를 본 것 같은데 그 고래가 바닷속이었는지 수조 속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갑자기 고래를 찾아서 무얼 하겠다고 생각한 건 없는데 궁금해졌다 혹등고래 향고래 흰돌고래 등등 먼바다에 사는 고래들이 친근하게 느껴져서 고래를 찾아 인터넷 서핑을 한 적이 있다 혹등고래는 인간적인 고래라는 것도, 향고래는 가장 큰 뇌를 가졌다는 것도, 물구나무로 서서 잠잔다는 것도, 범고래 돌고래는 사람과 교감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런 고래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닌데, 고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사실이다 고래를 찾아야만 왜 고래를 찾고 싶었는지 알게 될 것 같다 그 고래는 뒤쪽에 잠깐 스쳐 지나갔다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찾는 고래는 바닷속에서 떠밀리고 넘어지다 붙잡혀서 수조 속에 갇혀 길들며 혼자 울고 있는지 모른다 지나온 수심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며 복기하고 있을 고래, 길들인 고래를 보며 이 도시에서 혼자 걷고 혼자 밥을 먹는 나를 누가 길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고래를 찾아야만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래를 만나면 따듯한 신발을 신겨 주고 싶다 어쩌면 고래의 마지막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건지 모른다 고래는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하며 눈을 감을까 어떤 눈빛일지 어떤 기분일지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무엇일지 깊은 바닷속으로 고래 낙하를 하며 혼자 은밀히 죽어 가는 고래 내가 알고 싶은 고래 이야기
얼룩의 지도
비가 오다 눈으로 오다 그저 그런 날씨이다 드디어 그쳤다 드디어라니 드디어는 기다리는 여운의 끝말 같은데 비를 기다린 적이 없고 눈을 기다린 적 없는데 더구나 그치기를 기다린 적 없는데 드디어 나는 무언가 말이 하고 싶어졌고 할 말이 계속되면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데 하고 싶은 충동은 잠깐 스쳐 가는 얼굴처럼 떠오르다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후는 잠시 앉아 있다 앉아 있으면서도 계속 어딘가로 간다 창밖엔 나무들이 겨울을 기록하고 있다 기록을 마친 나무들은 가만히 제 몸을 쓸어내린다. 나는 처음 듣는 목소리 같은 방에서 습하게 끈적거린다 바퀴벌레처럼 방바닥에 달라붙어 얼룩이 된다 떠다니던 먼지가 가라앉고 가라앉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그렇게 먼지의 종족인 것처럼 이리저리 떠밀려 다닌다 먼지가 새가 되길 기다린다 먼지가 쌓여 날개가 되고 드디어 날아가고 새가 된 먼지가 다시 먼지로 흩어지길 기다린다 그럼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기분을 알까 방바닥에는 오래된 얼룩들이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 지도처럼 자라고 있다 어지럽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바싹 마른 얼룩 혹은 얼굴이 늙어 있다 얼룩의 늙음이라니 오늘 오후는 멈춰 서서 나아가지 않는다 나는 얼룩에 얼굴을 대어 본다 꼭 맞는 얼굴이다 누군지 모르는 내가 있다
그 길
그 길은 한적하다. 길 끝이 물속으로 이어진 듯 물속에서 막 나온 듯하다. 가끔 소나기가 물속에서도 내리고 붉은 흙길에도 내린다. 청원 가는 길. 고개만 들어도 훤히 보이는 길이다. 한참을 걸어가면 양조장이 있고 그 옆에 풀빵집이 있고 한약방이 있다. 장난기 많은 엄마 친구는 베개를 업고 가서 약을 지었다는 별난 이야기도 그 길에서의 일이다. 어떤 날은 노래를 부르며 걷고 때로는 모자 속에 나를 감추고 걷는 날도 있다. 길옆 플라타너스 그늘 밑에서 키가 작은 아이들은 싸움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며 나무속으로 걸어 들어가곤 했다. 나뭇잎 같은 귀를 하나쯤 달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있다. 풋살구 같은 연애가 시작된 것도 그즈음일 것이다. 길은 골목길과 연결되어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따듯한 불빛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온다. 문을 두드리면 누구든 나를 안아 줄 것만 같다. 후드득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사람들이 나직이 하는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으면 환하게 다 보인다. 아직 가 보지 못한 길. 길은 시멘트로 덮이고 다시 아스팔트로 변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기 시작했다. 한약방 노인이 죽고 풀빵집 아이가 죽었다. 내가 죽은 모습도 보인다. 뿌옇게 이름만 남아 있고 지도에도 없는 길에 노랫소리가 이명처럼 지나간다. 그 길은 어제도 내일도 그 자리에 있다. 걸어도 걸어도 도착할 수 없는 그 길에 간다. 청원에 간다.
추천 콘텐츠
모자의 줄 박소언 그리운 적막이 투명하게 걸려있다 마르지 못하는 목매단 모자 하나가 바지랑대를 하늘 높이 세우면 가장자리를 중심으로 두 줄이 생긴다 젖은 옷가지들과 모자가 걸린 문이었으므로 하늘이 내린 경계에서 하루의 동거가 바짝 말라간다 맨살을 비비적거리는 살갑던 허공을 헤아려본다 두들기던 얼룩이 서성대다, 발버둥 치다, 뜨거운 태양에 몸을 맡긴다. 자리매김한 여분도 없이 넘나들다, 휘날리다, 사지가 갈리면 문을 닫고 눈을 감고 싶다 두 개의 집게에 물려 벼랑에 설 때마다 하늘과 땅 사이를 맥없이 자맥질하는 무지개를 동반한 비바람의 날들이 가까스로 씻겨나간다 바람 너머 저 홑청 속으로 얼비치는 아홉 살 여자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등에 밥물을 잡는다 뒷산에 해가 걸리면,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매운 눈을 비비며, 육자배기 노랫가락에 아들 타령 늘어진 아버지가 ”아~ 신라의 밤이여” 털레털레 삽짝 문을 열고 갈지자로 휘청거린다 “아버지 내가 커서 아들 낳아드릴게요” 버스럭버스럭 벗겨내던 슬픈 말꼬리가 아들 없는 빈소를 기억하며 하얗게 운다 구멍 뚫린 양말이 늙지도 못한 채 유품처럼 마당가에 서 있는 빈 바지랑대 줄에 걸린 검정 두루마기가, 술 취한 혼잣말이 낮 그림자에 나풀거리며 자꾸만 손짓한다 흙 마당에 고꾸라진 짝 잃은 속디디미처럼 종종걸음하며 방향을 잃고 몸부림쳐대는 꼴이라니 옷가지 거두어간 자리에 방울방울 물음표만 걸리는 속알속알 느낌표만 걸리는 저 섬망 같은 세월을 하염없이 일으켜 세운다 허공 의자 한 사내가 높다란 허공 의자에 앉아 바람을 타고 있다. 창문에 매달린 꿈을 꾸며 리듬을 갈之자로 가른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순간이다. 밧줄에 매달려 좌우로 흔들리는 난간에서 무거운 몸통을 거미처럼 붙여 놓고 사내는 끝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빌딩 외벽에서 사내가 환상을 찾아 떠난다. 반짝반짝 별자리에 머물렀던 적 있었던가. 절벽 같은 유리창에 매달려 흔들흔들 안락의자를 기웃거렸을 뿐이다. 울렁울렁 목을 잡아당기던 밧줄에 맞춰 기어올랐을 벽과 빌딩 사이, 이곳저곳 희망에 꿰차고 앉아 날개를 달기도 했다. 높다란 저녁별 마주 보며 떨어지는 어둠에 하루치의 밧줄을 말아 잡아당겼다. 바람의 끝에서 홀로 앉아 있던 사내의 앉음새가 스르륵 풀어졌다. 핑 도는 어지럼증이 발아래로 튀어 오르자 사내는 그제야 허공 의자에서 내려오는 그때 유리창 아늑한 방안에서 아장아장 기어 나오는 아기가 두 손을 꽉 쥐고 까르르 웃는다. 하늘 높이 날아오를 포즈로 나는 그네 타기 놀이에 빠져든다. 은지화 애오라지. 손바닥만 한 딱지에 물고기와 아이들*이 놀고 있다 은물결 팔딱이다 헤엄치다 긴한 말들이 아로새겨진 활자 같다 꼬리꼬리한 비늘이 까르르 뒹굴면 깊은
- 최고관리자
- 2024-11-05
복선 윤인숙 참 이상하지 빨간 가운을 걸치면 몸에서 죽은 쥐 냄새가 나 유리 머리 폭탄 웃음 마음 바다 어느 쪽이 더 좋아 수족관에 손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손도 키우시나요 그럼 물도 매일 갈아 줘야겠어요 손톱에 물때가 낄 테니까요 깨진 유리 구겨진 웃음 진심으로 고마웠다니, 이런 환멸은 처음이야 머리를 틀어 올리고 다리를 오므린다 온도가 중요해 시시때때로 변하는 손바닥 얼룩같이 두 눈이 없어도 잘 느낄 수 있는 늪의 악어 알처럼 수국을 움켜쥘 때의 기분 모든 첫 중에 첫, 한 입 복숭아 수국을 손바닥으로 움켜쥘 때 무른 복숭아의 즙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거기를 만질 때 조금 젖을 때의 침이 꿀꺽 넘어가는 물고기가 찌를 물고 달아나는 산꼭대기 고사리 밭 층층나무의 향기 이끼 아래 바위 복숭아 살을 손으로 뭉개 봤다면 밀가루 반죽을 휘휘 저어 봤다면 끝물이라는 말 그 여름이 뜨거웠다는, 뼈의 화목 나무가 이름을 얻는다 적막이 가만히 가라앉고 있다 흰 항아리 한 줌 다섯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뼈의 화목 허공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밖은 따뜻하고 속은 부서지는 중 골목을 들어서며 느리고 크게 부르던 노래도 낡아, 노래뿐이다 기억은 가뭇없고 폭풍이 쓸고 간 듯 먼 길이 생겨나고 있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다 풀이 풀의 어깨에 기대 흐느낀다 목덜미에 내려앉은 나비의 날갯짓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나무의 이름이 살갗 아래 새겨진다 얕은 밤 고개를 젖혔다가 퉤, 하고 누런 가래를 뱉을 때, 가래가, 누런 가래가 땅바닥에 ‘척’하고 달라붙은 거 같죠. 척하고 뭉개지는 거죠. 산산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요 발끝으로 쓰윽 뭉개지 말아요. 진득한 실이 달라붙을지도 몰라요 영원이 알을 슬어 놓을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도 꽃은 피니까요 어떤 순간도 영원이 될 수 있으니까요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든다는 걸 일깨워 주진 말아요 왜 그런지, 선명한 것은 가여워요 얕은 밤에 꿈은 무르익고 계절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슬금슬금 와버려요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야 할까요 전 언제나 지는 쪽이 더 좋기는 해요 숨 비 오고 라일락이 막 피려고 해요 꽃향기 비눗방울처럼 터져요 다정한 소문 같아요 향기는 몸이 없고 소문은 멀리 가고 비 오는 날, 오른손을 높이높이 볼륨을 올리고 몸을 흔들어요 온몸에 풍선 달고 가라앉는 배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요 아아 목 놓아 노래 불러요 꿈틀꿈틀 드디어 다른 몸이 되려나 봐요 괴로움은 역사가 짧아 우리 엄마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춤으로 노래로 하늘로 하늘로
- 최고관리자
- 2024-11-05
직전의 양 임지은 잠이 오지 않을 때 그만 좀 불러냈으면 좋겠어 사람들은 양털로 옷도 이불도 해 입으면서 잠까지 덮어버릴 셈인가 봐 가을이 오면 확연하게 줄어든 몸무게에 양이 얼마나 어리둥절해하는지 모르면서 내가 아는 제일 불면증이 심한 사람은 양을 구십구만 구천 마리까지 셌지만 잠이 오지 않았대 세기를 그만두자 그제야 잠에 들었다지 좁은 방에 아침까지 불러 모은 양들이 서로를 밟고 올라섰다지 이런 사정을 아는 동물 애호가는 양 대신 말, 소, 사자들을 불러 모았대 함께 있기에는 긴장감이 넘치는 사이라서 밤새 뜬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지 이런 얘길 들으면 내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해 그래서 생각해 본 건데 컵이나 상자를 부르는 건 어때? 쌓아 올리기도 쉽고 무너지기도 쉬운 게 잠이잖아 쏟아진 잠 밑에 깔려 상자에 구멍을 내고 그 안을 들여다봐 보면 하얗고 부들부들한 털이 그게 설마··· 양이 아니라면 대체 뭐겠어 한낮의 잎맥처럼 활짝 펴지는 잠, 수증기 가득한 욕실의 콘센트처럼 짜릿한 잠, 일주일째 닦지 않은 안경처럼 흐릿한 잠, 프라이팬 위에 터진 노른자처럼 중심이 없는 잠, 그런 잠을 자기 위해 사람들은 계속 양을 부르고 좀비 소원 깨고 나니 좀 이상했습니다 욕구라고 부를만한 게 없어졌습니다 더는 먹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는 정말 지각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화가 난 걸까요? 하지만 저에겐 기분이라고 할 게 없어졌는걸요? 그래도 습관이라고 할 게 남아 있어 학교에 갔습니다 이가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비어있는 의자들 ㅂ ㅂ ㅂ ㅂ ㅂ 선생님이 소원을 적어 실내 나무에 걸라고 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소원이라 할 수 있나요? 연필 끝을 씹는 동안 준호가 시아를 깨물고 시아가 영재를 깨물고 나는 깨끗한 종이에 소원을 적고 있었습니다 진우를 더 이상 못 만나게 해달라고요 진우는 사인펜도 잘 빌려주고 내 얘기에 많이 웃어줍니다 진우를 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원은 벌써 어긋나버렸나 봅니다 진우가 내 손을 잡고 달리고 있습니다 못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진우는 하필 나를 만나서 숨을 몰아쉬면 진우는 깨물기 좋은 목덜미를 가졌고 아주 이상한 맛이 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어떤 소원은 정말 이뤄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새로 생긴 점 코 위에 점은 미인 점이라 부르고 손가락 위에 점은 재주가 많다는 뜻이라죠? 입술에 점이 생기면서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친구가 손에 샤프 점이 생겼다고 했을 땐 반투명한 점이 참 신기했는데 나도 없던 점이 생기길 바란 적 있습니다 한 번 마음 먹으면 진짜 해내는 점
- 최고관리자
- 2024-11-05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