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력(場所歷)」외 6편
- 작성일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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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력(場所歷)
봉주연
이곳도 곧 떠나야 합니다.
오른쪽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 다리를,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 다리를 살짝 들어 보세요. 설원은 기울어져 있다. 아버지의 다리 사이에서 눈을 감았다. 여러 번 언덕을 오르고 내려왔다. 눈을 감고서도 우리가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작은 다리에 번갈아 힘을 주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단단함 속에 있다. 내가 그랬다는 걸 기억하세요? 우리가 치우칠 때마다 번갈아 힘을 줬어요.
놀이터를 떠나는 아이들은 집으로 가는 길을 따로 외우지 않는다.
손가락의 양식을 알려 줄 순 있는데.
엉덩이를 살짝 들어 보세요.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 아래로 쓰레받기처럼 생긴 것을 집어넣으면 된다. 동작이 끊겼다 이어졌다 끊겼다···. 아버지, 다리에 힘을 줘 보세요. 처음 해 보는 일은 순서를 기억해야 해요. 힘을 주세요. 힘을 줬던 감각을 기억하세요? 뒤를 돌아선다.
놀이터에서 또래 아이들은 망설임이 없다. 내 뒤로 올라오는 아이가 밧줄을 당긴다. 허벅다리가 쓸린다. 처음엔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나의 집은 여기에 있고 그 위로 반드시 거기가 따라옵니다.
이제는 집이 너무 무거워요.
봄이 되면 이사를 할 거예요. 이 얘기를 처음 꺼내.
새로운 집의 첫 번째 손님이 되는 것과 떠날 집의 마지막 손님이 되는 일 중에서 하나를 골라 보세요.
내일 현관문을 열었을 때도 오늘과 같이
이 집을 사랑하기 위하여.
물고기는 알아서 한다
마냥 좋을 줄 알았어요.
늦은 아침 거실 바닥에 물고기가 떨어져 있습니다.
어항 밖 반짝이는 실내
더 깨끗한 물일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책상 아래엔 발뒤꿈치와 소란, 저녁의 거스러미, 산 벌레들과 내일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며 잠드는 행복이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사이에 자라납니다.
나보다 먼저 내 집의 문을 열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외출하고 돌아와 아무 걱정 없이 불을 켤 수 있다니, 너는 복이 많은 사람이군요.
비 오는 날엔 의젓하지 않은 사람이 좋습니다.
분수대로 만든 터널이 보이면 그 가운데로 꼭 지나가 보는 사람. 물그림자도 밟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너를 구경하고. 부럽다, 참 부럽다. 돌아갈 걱정을 하지 않고 맘껏 젖는 휴일에. 옷을 다 버린다고 나무란 적이 없었어요.
물이 떨어지는 차림이어도 개의치 않고 문을 열어 줄 거예요.
깨끗하게 씻은 너를 무릎에 눕혀 귀를 파 주고
여기서 음정이 솟아난다, 눈썹 주변으로 튀어나온 뼈를 지그시 눌러 주면서
너는 귀가 참 작군요, 귀가 작은 사람은 복이 없다던데
먼저 나갈게, 먹고 가세요.
냉장고엔 전날 설탕에 재어 놓은 과일도 있고
내 방을 들여다보는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네가 보는 이 안은 투명하고 바깥세상은 굴곡되어 있습니다. 너의 집을 궁금해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어항으로 데려갈 물고기를 고르듯
집이 나를 고르는 것 같습니다.
이곳은 나를 밀어 내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떤 복은 매끄럽고 차가워서
바닥에 엎드려 숨을 쉬는지 살펴야 합니다.
해로운 장난
내가 이 동작을 하면 네가 그 대사를 할 거라는 약속. 그 모든 합을 잊고 있어야 합니다. 수어를 쓰는 사람들은 거짓말이 눈으로 보인다던데. 표정과 손짓, 말과 손짓이 따로 나오기도 하고. 등을 돌리고 있으면 네가 몰래 다가옵니다. 무대가 몇 번이고 반복되더라도 나를 놀라게 할 때 정말로 놀랄 수 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밤에 산책하기 어려울 거예요. 강변을 뛰는 사람들. 속도를 줄이며 호흡을 바꿉니다. 가장 먼저 이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사람이 누굴까요. 뒷모습이 지겨운 날엔 혼자서 반대로 걷기도 합니다. 너는 이런 일이 흔하다고 생각하고, 나는 언제나 정말로 놀랄 수 있습니다. 이 계절에도 손이 차가울 수 있고
일 년에 단 하루만 만날 수 있는 사이라면 어떤 계절을 고를 건가요. 헤어질 때 입었던 리넨 셔츠를 이듬해에도 똑같이 입고 나온 사람. 서먹하다는 듯 너를 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 고백이 거짓말인지 알 수 있으려면 내일이 되어야겠지. 묻고 싶은 것이 많으면 아무것도 물을 수 없습니다.
결말을 다 아는데도 몇 번을 다시 읽는 동화책. 온몸으로 펼친 책에서 아이들은 매번 같은 페이지에서 웃습니다. 오래 기다려 온 약속 자리에 먼저 도착하고 싶지 않아요. 다시 만난다면 마주 보고 앉을지, 나란히 앉아야 할지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우리는 웃어야 하는 장면에서 어김없이 웃었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사람. 천천히 땀이 식는 걸 느낍니다. 여전히 산책할 수 있는 밤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 너의 가을과 겨울의 옷장을 알지 못합니다. 결말을 걱정하진 않습니다. 잘되든 못되든 모두 별일이 아닙니다. 이제 계단 위로 네가 올라옵니다. 나는 진심으로 놀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생활과 동거 감각
골똘한 옆얼굴.
무슨 일이야, 묻는 사람.
어제보다 더워진 낮에
메밀 소바를 만들어 먹고.
산책길에 저녁거리를 사 오는 사람.
비눗방울을 처음 불어 보는
서투른 입김과
바람이 아이의 뒤에서 팔을 잡아 준다.
작은 무지개들.
길을 되돌아올 때
히라가나를 읽을 줄 아는 사람.
계란을 푸는 젓가락과
나무 도마 위의 두부는 부드럽게 썰린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삼월의 침실.
복도를 지나가는 발소리.
창문을 조금 열어 놓으면
먼지 냄새.
오늘은 잠을 설칠 것 같아.
살결을 쓰다듬으며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본다.
나는 지금 평온하다, 평온하다.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리면
먼저 잠든 사람의 숨소리.
심장이 빠르게 뛴다.
커다란 구(球) 안에서 길을 잃는다면.
모퉁이 카페는 꼭짓점이 된다.
청혼이 필요 없는 오랜 애인.
나의 궤도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꿈속에서 만난 새로운 동네에서도
히라가나로 된 간판을 읽을 줄 안다면.
반가웠어요, 조심히 들어가요.
인터로킹
무릎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성장기를 끝내고 몇 해를 아파했다.
승합차는 매일 무거워졌다.
언덕과 아이들이 많은 동네. 코스대로 돌아도 언제나 한 명의 아이가 남았다. 저는 주공아파트에 살아요. 처음으로 돌아가자. 클러치 페달을 밟을 땐 세게, 떼어 낼 땐 천천히···. 언덕길을 오를 때 무릎에 힘이 풀리는 상상을 자주 한다. 멈춰 있는 에스컬레이터처럼
맞물려야 할 것들이 멈춰 있으면 어지러운 거지.
길가에 차를 세워 담배를 피웠다. 가로수 한 그루가 인부 세 명에 둘러싸여 있다. 갈아엎어진 도로에 나무뿌리가 보였다.
생활의 칠십 퍼센트는 대기하고 참는 일이야.
정박으로 떨어지는 노래를 느리게 허밍하다가
왼발에 맞춰 구령을 넣는 거야.
포도와 풀의 중간 냄새가 나요. 차에서 내린 아이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보도블록의 틈새를 나뭇가지로 긁었다. 흰 돌로 된 길도 있어요. 고궁을 지나는 모퉁이를 돌면 항상 눈이 부셔요.
드물게 흰 돌로 만든 보도블록이 있다.
돌들은 어긋남으로써 빛난다.
언제나 한 명의 아이가 남았다. 집에 데려다주는 길에서도 무릎이 아팠다.
언덕길을 오를 땐 위에서 수많은 사람이 쏟아져 내려오는 상상을 해요.
어디 있어요?
과실을 맺는 가지의 끝.
뒤따라오는 손을 향해 내미는 손.
야영장 설계도면
오른쪽으로 치우쳤다가 왼쪽으로 기울고, 그럴 때마다 옆에 앉은 사람에게 몸을 기댄다. 그 사람도 몸을 기울인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선 늘 그런 놀이를 했다. 길이 똑바르지 않은 건 순전히 우리를 헷갈리게 하려는 목적이 아닐까. 위로 향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어떤 방향도 지속되지 않는다.
여기가 내가 있었던 곳의 반대쪽이겠다.
어느 방향으로 창을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 텐트를 어디에 놓을지 생각했다. 해가 뜨는 쪽으로 머리를 두면 돼. 그럼 텐트와 상관없이 몸만 돌리면 되잖아.
야영에선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오늘 밤에 비가 내릴까.
천장 위로 허공이 있다.
복도식 아파트는 대부분 부엌에 창문이 없어요. 현관문에 걸쇠만 있다면 여기서도 얼마든지 맞바람을 맞을 수 있습니다. 바나나가 검게 익어 가는 냄새가 났다. 침실 공기가 답답해서 창문을 조금 열었다. 삼월 밤엔 봄 냄새를 맡아야 잠에 들 수 있어.
위에서 내려다보면 크기만 다른 동그라미들로 가득할 것 같아. 텐트의 단면, 나무의 밑동, 산봉우리, 이슬, 아침으로 먹은 소시지와 계란, 간이 의자, 맥주 캔, 담배꽁초, 랜턴···.
밤새 불 피운 뒤척인 등.
작년 가을 이 마을에 큰 태풍이 왔었어요. 태풍은 순서를 지켜 찾아옵니다. 큰 상흔을 남긴 태풍은 이름들의 목록에서 빠진다고 해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게 태풍의 책임은 아닐 텐데.
한 달 뒤로 약속을 미루자고 한다면 아예 약속을 잡지 말자고 할까 봐.
밤사이에 비가 내리면 어떻게 잠에 들 수 있을까.
빗소리에 깨어나면서 어젯밤 그런 걱정을 했다는 걸 기억했다.
두벌잠에 들면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내 생일은 항상 추웠어.
삼월은 기다리는 일로 끝이 난다.
적응
꽃잎이 아파트 현관에 쌓여 있다.
유리문이 열리면서 꽃잎을 더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집을 옮기면 새로운 버릇을 만들어야 해.
허전한 왼손.
오늘은 손을 여러 번 감싸 쥐게 될 거야.
정류장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선 아무도 망설이지 않아요. 쏟아지는 사람들 틈에서 다른 속도로 걷는 건 오직 작은 사람과 작은 개뿐입니다.
어떤 건축가는 주인을 위해서 기둥 몇 개를 보태어 집을 지었대. 그 기둥은 천장에 닿지 않았습니다. 천(川)을 따라 줄지어 선 나무들. 유리창이 커다란 건물엔 햇빛 냄새가 가득해. 의자에 앉을 때 몸 위로 온기가 덮쳐 온다. 옆 사람이 알게 될까 봐 조심해서 앉는 버릇이 생겼어.
연결되기 위해선 건물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앉아 쉬었다. 저쪽에서 걸어오던 아이가 걸음을 멈췄다. 우리가 쳐다봐서 그런가 봐. 고개를 돌리고 있자. 신발 소리를 낼 만큼의 무게도 되지 않은가 봐. 머리 뒤쪽으로 아무런 형체도 그려지지 않았다.
허물기에 크다면 유지하기에도 너무 크다.
길 한가운데에 계단이 있다면 좋겠어. 아무것도 연결하지 않은 채로. 계단이 있다는 것만으로 이곳은 사람을 불러 모으게 될 거야.
언덕길을 거슬러 오르기까지 많이 망설였다.
새로운 버릇이 왼손에 깃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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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02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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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024-11-05
직전의 양 임지은 잠이 오지 않을 때 그만 좀 불러냈으면 좋겠어 사람들은 양털로 옷도 이불도 해 입으면서 잠까지 덮어버릴 셈인가 봐 가을이 오면 확연하게 줄어든 몸무게에 양이 얼마나 어리둥절해하는지 모르면서 내가 아는 제일 불면증이 심한 사람은 양을 구십구만 구천 마리까지 셌지만 잠이 오지 않았대 세기를 그만두자 그제야 잠에 들었다지 좁은 방에 아침까지 불러 모은 양들이 서로를 밟고 올라섰다지 이런 사정을 아는 동물 애호가는 양 대신 말, 소, 사자들을 불러 모았대 함께 있기에는 긴장감이 넘치는 사이라서 밤새 뜬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지 이런 얘길 들으면 내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해 그래서 생각해 본 건데 컵이나 상자를 부르는 건 어때? 쌓아 올리기도 쉽고 무너지기도 쉬운 게 잠이잖아 쏟아진 잠 밑에 깔려 상자에 구멍을 내고 그 안을 들여다봐 보면 하얗고 부들부들한 털이 그게 설마··· 양이 아니라면 대체 뭐겠어 한낮의 잎맥처럼 활짝 펴지는 잠, 수증기 가득한 욕실의 콘센트처럼 짜릿한 잠, 일주일째 닦지 않은 안경처럼 흐릿한 잠, 프라이팬 위에 터진 노른자처럼 중심이 없는 잠, 그런 잠을 자기 위해 사람들은 계속 양을 부르고 좀비 소원 깨고 나니 좀 이상했습니다 욕구라고 부를만한 게 없어졌습니다 더는 먹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는 정말 지각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화가 난 걸까요? 하지만 저에겐 기분이라고 할 게 없어졌는걸요? 그래도 습관이라고 할 게 남아 있어 학교에 갔습니다 이가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비어있는 의자들 ㅂ ㅂ ㅂ ㅂ ㅂ 선생님이 소원을 적어 실내 나무에 걸라고 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소원이라 할 수 있나요? 연필 끝을 씹는 동안 준호가 시아를 깨물고 시아가 영재를 깨물고 나는 깨끗한 종이에 소원을 적고 있었습니다 진우를 더 이상 못 만나게 해달라고요 진우는 사인펜도 잘 빌려주고 내 얘기에 많이 웃어줍니다 진우를 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원은 벌써 어긋나버렸나 봅니다 진우가 내 손을 잡고 달리고 있습니다 못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진우는 하필 나를 만나서 숨을 몰아쉬면 진우는 깨물기 좋은 목덜미를 가졌고 아주 이상한 맛이 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어떤 소원은 정말 이뤄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새로 생긴 점 코 위에 점은 미인 점이라 부르고 손가락 위에 점은 재주가 많다는 뜻이라죠? 입술에 점이 생기면서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친구가 손에 샤프 점이 생겼다고 했을 땐 반투명한 점이 참 신기했는데 나도 없던 점이 생기길 바란 적 있습니다 한 번 마음 먹으면 진짜 해내는 점
- 최고관리자
- 202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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