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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점은 끈끈이주걱으로」외 6편

  • 작성일 2024-11-04

   꽃점은 끈끈이주걱으로

신춘희


   나는 엄마의 꽃점대로 꼬리를 잡고 태어난 딸, 끈끈이주걱 같은 뒤를 달고 유년을 보냈지 창문이 달빛을 커튼으로 오므리면 보이지 않는 별들에게도 하나둘 이름을 지어 주었어 주술처럼 내 안에서 휘돌다가 꽃잎으로 흩어진 나날들, 끝내 나는 혼자 남겨졌지 그때부터 슬픔이 눈동자에 들러붙었던 거야 엄마가 남겨 준 건 지독히 외로운 점액뿐 그 꼬리를 어쩌지 못하고


   맹목 같은 꼬리


   나는 내 것보다 너그러운 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았어 사춘기를 소화시켜 고백을 받아들일 줄 아는 나이가 되었지 내게 달콤하게 달라붙은 사람이 애인이 되었어 하지만 애인은 여러해살이 비밀에 서식하는 사람이었지 여자와 여자가 겹쳐도 가리지 않더니 바람에 이리저리 튀는 방아깨비처럼 되었어 소문은 돌고 돌아 쉽게 주울 수 있었지


   기회 같은 꼬리


   꽃이 피고 질 때쯤 새벽에 서둘러 되돌아온 애인은 화려한 꽁지깃이 없이 초라했어 나는 한 번 더 나의 점성을 믿어 보기로 했지 애인은 자신의 꼬리를 잘랐다고 맹세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어 애인에게 새 꼬리가 생겨났지 뭐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삭둑삭둑 자르기 시작했지 얼마 가지 않아 그의 꼬리는 둔갑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 복수란 하는 게 아니라 잡는 것이지


   비수 같은 꼬리


   가끔 나는 나를 거쳐 간 꼬리를 생각하지 잡은 애인을 도망가지 못하게 조인 다음 단물 빠질 때까지만 두기로 했어 때론 꼬리가 채찍이 되기도 하지 내 꼬리가 휘둘러지면 애인의 질투가 묻어왔어 꽃이 화사한 것은 계절의 꼬리에 있을 때지 끝물처럼 사랑에도 점도가 있어 냉정하게 붙었다 떼는 말도 해 줘야 하는 법, 잠시의 침묵 이때만큼은 배후의 꼬리를 숨길 수 있어


   대물림 같은 꼬리


   냉정하게 점을 찍으며 선을 긋고 나만의 꼬리로 포획에 성공한 사람과 함께했지 나는 이제 꼬리를 다 썼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물고 있었어 돌아다보니 탯줄, 그 질긴 꽃점이 계속되는 거였지






   신로(神路) 



   신들이 이끄는 길이 지상에도 있다

   종묘 담장 안, 아무나 밟지 못하는 

   혼(魂)과 백(魄)으로 나누어진 통로 중앙에 높이가 다른 신로


   종묘도 5월에 딱 한 번 길이 열린다


   임금의 길보다 높게 깔린 박석(薄石)

   오른쪽은 왕의 길 왼쪽은 세자의 길 

   양쪽에서 호위하고 있다 


   저 돌을 따라가면 맞배지붕 아래 

   신실에 모셔 놓은 신주들이 있다

   황색 봉등을 밝히고 제실에 초를 피워 제례를 하면

   세 번 나눠 피운 향이 신을 부른다


   화장장 굴뚝에서 쏟아진 연기를 

   신로라고 생각한 적 있다

   살짝 나부껴 공기가 호위하는 길

   상주들이 올려다만 볼 뿐,


   몸을 태워 만든 길은 신만이 걸어와 

   영혼을 데려갈 수 있는 건지


   폐백과 함께 축문처럼 타오르는 불길과

   그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한 사람과

   그를 데리러 오는 자옥한 

   신들의 길이 저 중앙에 있다


   통곡이 고인의 길을 터 가고

   유족들 버스에 오르면 

   신도 뒤를 밟아 장지에 이를까


   하늘에 혼을 모시고

   땅속에 잠든 백을 깨우기 위해

   술을 세 번에 나눠 붓는 건

   하관을 끝낸 묘에서도 행하는 일


   하얗게 피어오르는 혼들은

   어떤 눈빛으로 멀어져 갈까 


   땅의 신에게 올리는 술처럼

   고인의 마지막 은거에 울음을 섞으면 

   땅의 문도 닫힌다






   오늘의 104호 상담



   나는 소통으로 요리하는 셰프,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암시를 차려 주면 표현이 돌아와요 포크를 놓을 때까지 그날의 요리를 돕는 것은 몰입이에요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 차분하게 기다려요


   격한 슬픔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끌어내 낱낱이 성분을 분석해요 끊어진 이야기가 이어지면 잃어버린 순간들이 제자리로 돌아와요 비밀은 공개되지 않는 레시피이지요


   충동에 떠 있는 먹구름 베어 내 요리를 해 볼까요 사분의 일 쪽씩 잘라 버튼을 누르면 함박눈이 되고 눈꽃이 되어요 자각 없는 발랄한 순서, 좀 더 목적에 취하기 위해 스파클링 와인에 섞어 휘휘 저어요 


   기포가 생겨 오크 향이 느껴지는 건 아주 자극적인 상상, 날씨와 뉴스는 너무 쉬운 채칼의 향방, 속보를 찧어 다지죠 양파와 레몬에 뒤섞인 병아리콩이 이리저리 밀려 나와요 꽃들도 앞다투어 봄의 달력에서 튀고요 발사믹 식초와 후추로 드레싱하면 예감도 상큼해져요 

 

   이제는 흰 가운을 갈아입어야겠군요 납작하게 썬 단서를 결정적으로 넣고 돌릴 건가요 키위 한쪽이 들어가면 파란 하늘이 배겠죠 시럽 한 방울의 태양, 잠재의 완성이에요 이제 접시를 닦을 시간이군요 깐깐한 만큼 비법이 더해진 오리지널 추천 요법을 맛보아요 오늘의 카운터 다이닝*은 감성적이에요 당신에게 접시에 수북하게 담긴 말과 오늘의 처방을 고명으로 올려요 우울한 당신이 상쾌해지도록 




*counter dining: 손님이 요리사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며 하는 식사






   떠도는 고백 



   나의 코드 번호는 L0914, 무중력 마음에서 훈련되는 말(言)이죠 아직 입 밖에 나오지 않았고 속에서만 수없이 시행착오 중인 견습생, 9월 14일이 D-day죠 나는 특수한 상황일지라도 예상치 못한 결과일지라도 대비해야했죠


   거절과 무시란 치명적 실패의 통보, 그가 스위치 켜고 다시 연습을 시작하네요 저기, 그게, 어, 잠깐만요, 내게 심어 둔 측정 장치가 심장 수배에 달하는 가속도를 버티고 있어요 집착이 되어서는 안 되고 진심이 균형을 잡아야 하죠 


   내부의 소음을 동력 삼아 몇 날 며칠 계속되는 반복, 목표 완성 뒤에는 결말이 설계되어 있죠 접촉 기댐 포옹 키스, 원심분리기 속에서 터질 것 같은 심장에 새긴 단어죠


   드디어 그날, 수많은 시뮬레이션대로 두려움 없이 그녀의 궤도에 진입했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밀어내지는 않네요 쉼 없이 출력되는 심박동수, 메아리처럼 울리는 그녀 목소리


   마음에서 머문 시간은 백 여일, 그녀의 물리 속에 거점을 만들었죠 나는 최초로 그녀에게 간 고백이었죠 그러나 백일이 지나자 그녀는 칩처럼 나를 꺼내네요 대기가 충돌하면서 불꽃이 튀고 내부가 타들어 가요 데이터를 간신히 지키고 있어요 


   나는 잊힌 존재, 그의 기억에서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탐사선, 희미한 신호를 보내면서 그의 다음 목표 어느 지점에서 도킹을 기다리는 L0914


   내 고백은 유효하죠 아직까지 그녀에게 닿지 않아 나는 행성처럼 그녀의 주변을 떠돌고 있어요






   착한 토마토



   인증서 발급하려는데 

   본인 확인을 위해 내 통장에 1원을 입금한다

   ‘착한 토마토’

   문자메시지로 그 입금자명을 보내라 한다


   당신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1원의 입금자명을 보내도 될까

   아직 살아 있는 당신의 계좌


   어딘가에서 통장 정리 중이라면

   드르륵드르륵 찍히는 소리,

   들을 수 있을까


   누구나 태어나게 되면 

   하나의 평생계좌를 개설하게 된다

   그 통장에서 감정을 인출하거나 

   관심을 입금 받는다


   텅 비었다고 들여다볼 때도 있지만

   통장과 혈연의 ATM이 

   맞닿기 전의 기록일 뿐이다


   나는 입출금이 자유로운 

   당신의 통장에 종종 입금을 한다

   밥은 먹었나요

   잠은 잘 잤나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한 면이 넘어가면 다음 장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소정의 이자도 불어난다고


   끝내 당신의 통장을 해지하고 온 날,

   내 통장도 갱신해야 할 텐데

   나를 확인하기 위해

   1원의 입금자명을 누구에게 보내야 할까

   매운 마음

   달콤한 집착

   미끄러운 성숙


   드르륵드르륵 찍힐 것 같은 밤이다






   보름달은 수압이 세다



   공중의 거치대에 걸린 

   보름달이 달빛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다 


   밤하늘은 빛을 저장하는 부스,

   시간 맞춰 열리는 달빛을 맞으면 마음도 산뜻해진다

   샤워기 구멍 같은 분화구가

   내면의 찌든 때까지 씻어 내린다


   달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수압

   압력이 약한 그믐은 달빛 줄기가 희미하고 

   수압이 높은 보름은 환하게 쏟아진다  


   점 하나에서 시작된 분출,

   조수간만 차가 일어나고 

   해수면이 불었다 줄어든다 


   구름에 가려 반환형으로 일그러질 때

   한 방울 두 방울 

   어렴풋이 비추며 서서히 사라지는 한줄기 섬광 


   도시에서 겉돌던 달빛 입자는 

   시골에 이르러 거침없이 쏟아진다


   빛을 뿌리는 샤워 꼭지는 수시로 이동한다

   오늘은 중부지방으로 

   내일은 남부지방으로


   서쪽으로 조금씩 돌려지는 달빛 샤워 꼭지

   아침이 되어서도 달빛 떨어지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린다


   당신의 거친 말도 수압이 세서

   나는 수시로 젖는다






   뿌리 염색을 하며



   부음을 듣고 거울 앞에 섰다

   죽음에도 뿌리가 있다면 그 본색은 무엇일까 

   운구차가 도착하기 네 시간 전,

   이 생에 방치된 나와

   저승으로 건너간 그의 

   간격에 색을 칠한다

   장례의 예를 갖추기 위해


   정수리 한가운데서부터 시작된 흰빛이 

   어느새 옆으로 번져 간다

   고인에게 애도하듯 머리도 검정 옷을 입힌다


   회한과 바람을 눈물샘에 짜듯

   비닐장갑 끼고 염모제와 산화제를 용기에 짠다

   애통에도 물이 들까

   둥근 튜브에서 질금거리는 감정,

   손이 떨린다 


   흡수율 높은 저 먹빛 슬픔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스며든다 

   흑이 백을 가지런히 뒤덮는다

   내 안에서도 옛일이 이리저리 뒤척인다 


   生은 색을 입히고 슬픔을 감추는 일


   이편과 저편에서 서로를 빨아들이는 과정,

   결국 인연이 점점 진해지는 것이다

   모발처럼 당신과 나 사이가 

   한 올 한 올 흑갈색으로 물들어 간다


   세상의 모든 색과 모든 결은 뿌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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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02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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