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전의 양」외 6편
- 작성일 202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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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전의 양
임지은
잠이 오지 않을 때 그만 좀 불러냈으면 좋겠어 사람들은 양털로 옷도 이불도 해 입으면서 잠까지 덮어버릴 셈인가 봐 가을이 오면 확연하게 줄어든 몸무게에 양이 얼마나 어리둥절해하는지 모르면서
내가 아는 제일 불면증이 심한 사람은 양을 구십구만 구천 마리까지 셌지만 잠이 오지 않았대 세기를 그만두자 그제야 잠에 들었다지 좁은 방에 아침까지 불러 모은 양들이 서로를 밟고 올라섰다지
이런 사정을 아는 동물 애호가는 양 대신 말, 소, 사자들을 불러 모았대 함께 있기에는 긴장감이 넘치는 사이라서 밤새 뜬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지 이런 얘길 들으면 내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해
그래서 생각해 본 건데 컵이나 상자를 부르는 건 어때? 쌓아 올리기도 쉽고 무너지기도 쉬운 게 잠이잖아 쏟아진 잠 밑에 깔려 상자에 구멍을 내고 그 안을 들여다봐 보면 하얗고 부들부들한 털이 그게 설마··· 양이 아니라면 대체 뭐겠어
한낮의 잎맥처럼 활짝 펴지는 잠, 수증기 가득한 욕실의 콘센트처럼 짜릿한 잠, 일주일째 닦지 않은 안경처럼 흐릿한 잠, 프라이팬 위에 터진 노른자처럼 중심이 없는 잠, 그런 잠을 자기 위해 사람들은 계속 양을 부르고
좀비 소원
깨고 나니 좀 이상했습니다
욕구라고 부를만한 게 없어졌습니다
더는 먹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는 정말 지각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화가 난 걸까요?
하지만 저에겐 기분이라고 할 게 없어졌는걸요?
그래도 습관이라고 할 게 남아 있어 학교에 갔습니다
이가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비어있는 의자들
ㅂ ㅂ
ㅂ ㅂ
ㅂ
선생님이 소원을 적어 실내 나무에 걸라고 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소원이라 할 수 있나요?
연필 끝을 씹는 동안 준호가 시아를 깨물고
시아가 영재를 깨물고
나는 깨끗한 종이에 소원을 적고 있었습니다
진우를 더 이상 못 만나게 해달라고요
진우는 사인펜도 잘 빌려주고 내 얘기에
많이 웃어줍니다
진우를 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원은 벌써 어긋나버렸나 봅니다
진우가 내 손을 잡고 달리고 있습니다
못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진우는 하필
나를
만나서
숨을 몰아쉬면
진우는 깨물기 좋은 목덜미를 가졌고
아주 이상한 맛이 납니다
소원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요?
어떤 소원은 정말 이뤄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새로 생긴 점
코 위에 점은 미인 점이라 부르고
손가락 위에 점은 재주가 많다는 뜻이라죠?
입술에 점이 생기면서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친구가 손에 샤프 점이 생겼다고 했을 땐
반투명한 점이 참 신기했는데
나도 없던 점이 생기길 바란 적 있습니다
한 번 마음 먹으면 진짜 해내는 점
세계를 바라보는 나만의 관점
바빠도 여유로운 점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런 점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릴 땐 어려워했던
거절하는 일이 더는 어렵지 않으니
그게 바로 늙은 점의 가장 좋은 점일지도 모르고
피부과에선 점을 뽑아도
뿌리가 깊은 것은 다시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자외선을 받으면 진해진다고도 하니
식물일지도 몰라요
점이 안으로 쑥쑥 자라서
사람의 마음은 미로로 되어 있습니다
통과할 수 있는 길인 줄 알고
들어갔다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맨홀처럼 발견됩니다
도시에선 맨홀이 갑작스럽게 생긴 문제점일 텐데
빠져버린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맨홀은 점점 위험해지고
점점 중요해지고
별안간 일요일의 점집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미래가 아무것도 미리 정해두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려고 찻물이 든 잔에 물을 따라 마셨습니다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면
이젠 잔의 일부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나의 나쁜 점이라고 해도요
어쩌면 쉽게 낙담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새로 생긴 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성인 여자
배가 고프면 밥을 차려주는 여자가 있었다
준비물을 놓고 오면 학교로 가져다주는 여자도 있었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하는 여자가 있었다
화가는 되지 못했지만
깨뜨리고 싶은 풍경을 만나면 생각났다
더 커서는 물어볼 것이 생기면
먼저 대답해 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내가 모르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다
이제 나는 어리지 않고 주위를 돌아본다
스승이자 선배이자 언니였던 여자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오늘 아침엔 일어났더니
식탁 위에 잘 구워진 토스트가 놓여 있었다
끄적인 낙서 위에 지난날의 화가에게, 라고 적혀 있었다
창문이 일렁이는 그림자를 간지럽히는 오후
여자는
나를 데리고
좋은 곳에 갔다
글자가 빼곡한 책에 밑줄을 그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돼지고기의 제일 부드러운 부위를 내 몫으로 남겨뒀다
계단에서 풀린 운동화 끈을
묶는 여자에게 물어봤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
나는 나에게 꼭 필요한 존재잖아요
욕실 서랍에 가득한데 또 사게 되는 사워볼처럼
나는 당연한 사실을 자주 잊었다
우리가 하나의 그림자를
나눠 쓰며 수변도로를 걷는 동안
한 개의 목소리로 어제와 오늘을 이어 붙이는 동안
끓는 물에 넣어 익힌 차돌 같은 미래가
문밖에 도착했다
열 번째 줄*
부러진 밥상과
동그란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원이 되어서 걸었습니까?
제목으로 일기를 쓴다
그녀는 네 번째 자아로 앉아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다른 걸 하려면 할 수도 있는데
구름은 눈의 어머니일지도 모르지만 이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렇게 그녀는 죽은 듯이 잠이 들었고
선명하게 잘 보이진 않지만
간혹 부산행 버스가 그녀 앞에 와서 서는 일도 있지만
유령들은 한 칸씩 띄워 앉는다
잠시 누워있는 거 아닐까요?
이제 막 일어난 사람과
파랑을 섞으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궁금하지만 생각하지 않고
여기 자리 있어요
차를 마실 땐 ⌕ 플레이리스트
실험하는 우주에도
조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매일 집에 그녀를 반납하긴 했다
얼마간 쌓인 뒤에야 치우는 사람의
상식을 전복시킨 것이다
병뚜껑이 열리지 않는다
욕조에 들어간 택배 상자를 발견한다
못 고쳤으면!
밥을 물에 말아 먹으면 미끄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원은 접으면 접을수록 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임지은의 세 번째 시집 <이 시는 누워 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의 1부와 2부에 실린 시들의 열 번째 줄을 모아 시를 썼다.
어제와 내일의 바깥
어젠 너를 만났다
내일은 너를 만날 것이다
오늘은 너를 만나지 않는다
나는 너를 만난 어제로 돌아가고 싶다
혹은 너를 만날 내일로 달려가고 싶다
그러나 오늘은 너를 만날 수 없다
너는 언제나 어제나 내일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내일을 그리워한다
어떻게 내일을 그리워할 수 있지?
그리운 것은 이미 지나간 것들인데
그럼 나는 어제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어제를 상상하면 어제는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이 된다
경험하지 않은 어제가 있다는 게
마음에 든다
지금 여기 없다는 점에서
어제와 내일의 차이가
종이 한 장만큼 얇아진다
열어둔 창틀에 먼지가 쌓인다
냉장고 속 시금치가 조금 더 파래진다
건조기 안의 빨래가 둥글게 둥글게 말라간다
나는 언제나 오늘 안에 있지만
어제가 너를 만나려고 내일이 된다
씨앗이 레몬이 된다 혁명이
철학이 된다
오늘의 바깥이 된다
고유함과 다양성
김밥에게 다양성을 요구합니다
하여
탄생한 수많은 김밥들
김 안에 뭐든 넣고 싸면 김밥이 된다면
여름엔 얼음 김밥
크리스마스엔 양말 김밥
술 마신 다음 날엔 콩나물 김밥이 좋겠습니다
김밥집에게 다양성을 요구하여
떡볶이를 팔았습니다 김치찌개를 팔았습니다
볶음밥을 팔았고 피자를 팔았습니다
거의 모든 것을 팔게 되자
김밥집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
내가 나인 것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나여서 좋았다던 사람들이
나를 떠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인 것은 고집스러우며
뽑기 기계 안에 사탕이 모두 똑같은 맛이라는
딜레마가 숨어 있습니다
하여 일주일만큼 다양해지기로 합니다
내가 7개가 된다면
나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기분 전환 삼아 골라 입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월요일의 나는 예민합니다
화요일의 나는 유쾌합니까?
수요일엔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만 했습니다
금요일의 내가 더 마음에 듭니까?
이젠 어떤 게 진짜 나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모두 다 나인데요?
나의 다양함이 고유하다면
고유함은 곧 다양성이 됩니다
*
김밥천국에서 시를 씁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일까요?
검은 김에 뿌린 참깨처럼 나다움을 숨길 수 없는 시?
단단하지만 밥알의 리듬이 살아있는 시?
밑반찬으로 나오는 단무지처럼
어디에나 어울리는 시?
어쩌면 시는 하나의 요리일지도 모릅니다
같은 재료라도 튀기고 볶고 삶고 찌는 조리법에 따라
맛이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요즘엔 짬짜면이나 김떡순처럼
복잡한 메뉴들이 선호되고
아이스크림에서 치약 맛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잘 차려진 뷔페 같은 시를 쓰면
하루 종일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만 같고
여기까지 듣던, 조리사가 말합니다
시에게 다양성을 요구하지 말고
다양한 시를 쓰면 되지 않을까요?
같은 말인데 다른 것 같아 곰곰이 씹습니다
나는 왜 전문점보다 김밥천국에서
먹는 돈가스가 더 맛있을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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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024-11-05
가스라이터와 함께하는 시간 ―태양 고광식 당신은 나의 가슴을 열고 태양을 심었다 심장 대신 태양은 뜨거운 분노로 이글거린다 큐브처럼 여섯 가지 색깔의 표정을 찾아 당신이 지목한 사람들을 폭행했다 관상동맥은 뜨거운 열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아버지를 폭행하는 날이면 혈액순환이 원활해져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심장이 약속보다 빨리 뛰어 나는 흥분한다 깨끗해지기 위해 단단한 빗장을 풀었다 태양을 안고 달리다 보면 늘 동쪽 서쪽 너머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당신의 입술은 책 어느 페이지이든 숨어 있다 동생이 강물에 뛰어들어 나를 잡아당겼다 축축한 말을 들으면 당신은 언제나 옳다 태양이 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는 당신이 준 태양을 심장 대신 가슴에 품고 다닌다 열리는 입술을 보는 나의 귀가 커진다 바다의 소멸각 나는 바다와 육지 사이에 고래를 그려 넣었다 검은 눈동자 속에서 해변이 소멸하고 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셀프 마사지기로 문질러댔다 아침과 저녁을 오가며 파도가 출렁인다 소멸하는 파도가 안타까웠다 각이 사라진 고래는 곧 척추동물의 소멸을 예고한다 고래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바다의 각이 다 닳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케 했다 고래 등에 각이 산다 멀리 있는 겨울 바다의 표정이 녹아든다 고래수염은 각자 각을 만든다 바다 각의 크기는 일정치 않다 나는 몇 번 태양의 각을 떴나 일출과 일몰 때의 시간을 모두 놓친 것 같다 크릴새우와 수염 사이의 각은 살아 있다 고래의 시간은 열대 대양에 각을 뜨면서 만들어진다 파도의 높이와 상관없이 바닷속은 각을 뜨기 좋은 압력으로 눌리는데 차단된 소통은 외로움을 부른다 소음은 파도치는 속도로 플랑크톤처럼 쌓인다 좌우 비대칭으로 기울어진 자세로는 바다의 각을 뜰 수 없다 파도는 공작새의 꼬리만큼 화려하다 고래는 해안가에 일렬로 떼 지어 마지막 각을 만든다 각은 고래의 몸속으로 흘러들어 하얗게 흩어진다 난독증 ―결별 ㅍ, ㅏ, ㄷ, ㅗ를 놓고 마주 앉았다 카페의 창문에 매달려 우리를 붙잡고 있는 바다 꽃병과 꽃잎이 분리되지 않는다 커피잔과 네 입술을 구별할 수 없는 시간이 의자 밑으로 흐른다 구름이 바닥에 깔린다 표정 잃은 너의 발과 내 발이 동시에 젖는다 이미 구별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버린 우리의 발 ㄱ, ㅡ, ㅁ, ㅏ, ㄴ, ㅁ, ㅏ, ㄴ, ㄴ, ㅏ 각각의 소리에 대응할 수가 없다 네 목소리가 낮게 탁자와 탁자를 건너뛰고 있다 긴 꽃병이 환경에 적응하려는 듯 바닥의 물을 위로 끌어올리고 있는데 카페의 의자는 유행가로 사랑을 만든다 너는 항상 같은 의자에 앉아 지연 없이 이해되는 말을 익혔다 노래는 감정을 파도에 섞으며 가벼운 허기로 삐걱거렸다 젖은 발로 구름을 밟는 너, ㅇ, ㅏ, ㄴ, ㅕ, ㅇ 시각적인 기호를 나는 분리할 수 없다 고양이 무리가 되고 싶
- 최고관리자
-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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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시인님 언제 이런 재밌는 시를 또 쓰신 거예요..! "나여서 좋았다던 사람들이 나를 떠나기 시작했"다는 문장이 너무 와 닿아요ㅠㅠ
@흰양말 헤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