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 박물관」 외 6편
- 작성일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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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조]
자연사 박물관
김수형
1. 공룡 우표
두근대는 편지는 빙하기의 소인이다
초식 공룡 한 마리 접혀 들어간 봉투 속
봉인된 알 깨고 나와 눈을 뜨는 백악기
수백만 년 낮과 밤을 다져 왔던 편지에서
호수로 강물이 거슬러 올라 꿈틀댄다
돌 속에 걸어 들어갈 내 훗날의 유적지처럼
2. 기억의 가설
사무치게 그립던 사연들은 사라지고
노을 무렵 담아 두었던 두개골만 남았다
뇌 속의 늪이 마른 뒤
서걱이는 모래알
당신과 웃으면서 돌도끼를 던지던 날
들소를 쫓던 곳에 당신 뼈를 묻었지
기억은 죽지 않는다
흰 뼈가 숨을 쉬고
심금(心琴)
창밖에 새 우는 소리
현 하나 튕기나 보다
길게 늘인 전깃줄
언 발로 비트는 꿈
울음을 받아먹은 구름
빗줄기를 탄주하면
상처마저 노래라고
음 찾는 빈방의 고요
드러누운 바닥에서
만져지는 죽은 음악
줄 끊긴 지평선 위에
달빛이 차오르고
우산은 그 많은 빗방울을 기억하고
마스카라 번진 눈썹
깜박이며 비가 와요
빗소리로 두드리는 그리움 활짝 펴면
안부를 묻는 저녁은 빗방울 냄새가 나요
사랑이라 부르고픈 둥근 방은 따듯했죠
한 귀로만 듣고서 흘렸던 아픈 말들
우산 밖 젖은 세상에
빗소리를 심고 있죠
휘어지는 우산살로 슬픔을 끌어당기면
흠뻑 젖어도 좋을 오른쪽 어깨너머
수많은 빗방울 기억
사선으로 쏟아져요
거울의 복고적 성향
벽에 걸린 거울은
무수한 금을 품고 있다
이삿짐 모두 떠나고
말라 버린 수돗물
폐가에 세 들어 사는
거미줄이 흔들린다
여러 곡을 들어도 한 장면만 반복되는 오래된 골목들은 먹먹해진 미래다. 되감긴 카세트테이프가 건너뛴 음표를 재생한다. 십 년 전 집 떠난 식구들이 걸어 나오고 달각이는 밥그릇과 수저 소리 들리면, 웃음은 늙지도 않고 마루 위를 뛰어다닌다
한나절 부푼 구름
속살을 만지면서
꽃등 환히 켜 놓고
볼이 붉은 능소화
한 올의
갈바람이 툭
거울 속에 사라진다
귓속말
고양이가 난간에서 서성이며 울고 있다
곤두선 털끝마다 바람이 일렁인다
이제 막 쏟아지려고
발꿈치를 든 구름
고집 센 귓불을 조금씩 깨물면
비린내 난 입김으로 창문이 만들어지지
읽다 만 페이지처럼
달이 반쯤 접혀 있고
긴 혀에 굴절된 빛이 바깥을 지우면
고양이는 미동도 없이 한 곳만 응시하고
솜털이 보송한 입에
꽃망울 툭툭 터진다
윤나던 마루에 발톱 자국 새겨진다
담장 너머 달아나는 꿈에서 깬 나도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먼 풍경이 되었다.
뿔이라는 신
모든 초식동물을 한 번에 제압한다
뿔이 앞에 나서면 몸은 뒤로 물러서지
모두가 머리 숙인 채
눈동자만 치켜뜬다
신을 죽이는 일은 신만 할 수 있는 법
순록의 머리에 우아하게 돋은 신들
늑대에 쫓기는 숲에선
신끼리 서로 엉킨다.
일 년에 한 번은 꼭 신을 갈아치우지.
갓 태어난 신들은 죽순처럼 온순하지만
우듬지 저 높은 곳엔
드센 신이 살고 있지
만월(滿月)
아이들이 부엌에서 보름달을 기웃거리네
솥 안에서 새알심이 익어 가는 동짓날
오늘 밤 뜨는 달에는 팥물이 배어 있어
만삭인 온달이 죽 그릇에 떠 있다
검붉은 저녁이 걸쭉하게 담기면
가난한 숟가락마다 달빛들을 퍼올린다
반지하 셋방처럼 떠 있다 잠기는 달
먹구름을 헤치고 돋아난 만월처럼
아이들 배 속에서는 달빛 가득 출렁이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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