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외 6편
- 작성일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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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류현
문진표 작성란에 여름을 기다린다고 적었다
꽃이 피는 시간에 나는 맹인에 가까웠으므로
화려한 조명이 쉽게 진흙탕의 발자국을 지우고 밝아지는 표정을 길이라고 생각했다
어제는 등 뒤로 폭풍이 몰아쳤고
나는 친구들을 만나러 숲으로 가고 싶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커다란 덤프트럭이 하얀 선을 무참하게 비트는 걸 목격했다
충돌이란 드러낸 속내를 감당하는 것
비명은 예고 없이 누군가의 희망을 낚아채 무성한 별들의 이름을 만들었다
숲은 사라지고
사람이 우거진 곳은 미로와 같아 인기척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빛의 노숙자가 되어 밤새도록 잭의 콩나무를 읽었다
북향의 틈새에서 기형의 자세로 자라
하얗게 질려 가는 빈칸에 새라고 적었다
크림 브뤨레
내 취향은 설탕을 태우는 것
철들지 말라고 내 머리에 설탕을 뿌리던 할머니를 이해해요
무엇이든 절여야 오래 가질 수 있었던 그녀에겐
위험한 주문이었죠
서랍을 열면 튀어나오는 질문 때문에
불편한 옷을 입어야 했어요
내 모든 생일을 혼돈에 빠뜨렸던 구름을 용서해도
불꽃을 터뜨리지 못하고 곤두박질치는 폭죽
할머니의 기적은 완성되지 못했어요
소녀를 빛내던 흑발의 윤기가
손가락을 빠져나와 어둑해진 골목을 배회하고 돌아온 날
텅 빈 배 속을 채우려고
빗물을 모으고 눈송이를 뭉쳤어요
무엇이든 이고 지고 다녀야 하는 게 어른이라며
긴 한숨을 내 어깨에 올려 주고 석양을 넘어가는 노인의 등에선
수많은 별자리가 돋아났죠
그리워서
창문 가득 햇살 멈춰 있으라고 설탕을 잔뜩 뿌렸어요
할머니 유언장에서 캐러멜 냄새가 나요
미각
높고 긴 담장을 선택했어요
최대한 느리고 길게 잠을 자고 싶었지만 내 식욕은 봄날의 꽃처럼 성급했어요
침은 흘리지 않아요
귀한 먹이일수록 가시도 많아 민첩하게 손을 뻗어 보지만 때론 속을 알 수 없기도 해요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게 남았을까요 설사로 진심이 쏟아지기 일쑤였죠
날 때부터 예민한 미각이 문제였어요
온몸에 힘을 주고 걷는 것은 겁 많은 천성, 나는 가시를 피하기 위해 아주 작아져야 했어요
오늘은 비가 오고 담장 위는 미끄럽고 바닥은 구정물이 넘치네요
추락해도 죽지 않을 만큼의 높이는 얼만큼일까요?
뛰어내리는 꽃잎들이 무서워서 손톱을 길렀어요
나의 허기를 사랑해요
이빨의 품위
날마다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하는 뱀파이어 영화를 보고
남을 물지 않아도 될 최소한의 에너지 필요량을 검색했다
주름 많은 입술의 인종 중 가장 붉은 혈액형에 매달린 나는
언제부터 이빨의 품위 같은 걸 생각했을까
부모의 장례식에서 통곡하고 돌아서서 밥을 먹었고
밤새 이빨 가는 꿈을 꾸어도 혀를 깨물지 않았다
슬기로운 생활은 죽음을 잃어버리는 것
이빨 구석구석 낀 그늘은 짙어만 갔고
먹은 걸 되새김질하며 나는 나를 가장 경멸했다 내일은 내일의 소화불량으로 잠을 깨는 게 양심적이었다고 말할 것 같다
백태 낀 혀를 씻어 이슬을 씹어 보겠다고
입안 깊숙이 칫솔을 넣자
하얀 거품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맹인의 결혼
식탁 의자를 찾으러 북쪽으로 갔다
날 선 새들의 울음과 핏빛 오른 나무들
지상의 무게를 덜어 내는 시간은 짧았다
입이 없는 너와 눈이 없는 나의 결혼은 완벽했다 하나를 얻기 위해 전부를 잃는 기도가 다정했다 식탁에 앉을 때마다 더 많은 입과 눈을 먹어 치운 우리는 어제보다 가난했다 꽃잎이 흔들리기 좋은 날씨로 더 많은 정사를 나눴다 이불 속에서 북쪽을 더듬는 너의 심장 소리가 점점 커졌다 내 어둠의 농도를 알아 버린 너는 모든 암흑을 한 번에 썼다
죽은 자들의 말은 모두 진실이어서 살아 있는 자들의 슬픔은 어려워졌다
흩어진 체온을 수습해 나의 체온을 섞어 보았지만 격렬하게 전달되는 냉기, 눈 없이 살아도 괜찮은 사람이 됐다 옷깃에 남은 내일을 털어 냈다
북쪽 별들이 일어섰다
구급차 지붕 위로 꽃잎이 흩날렸다
저녁
허공만을 손에 쥐고도
발버둥 치면 어디든 가닿을 수 있었다
헐렁해진 입안에선 하나 남은 송곳니가
남은 이생을 악착같이 꾹꾹 누르고 있다
경사진 하루가 살을 파고들고 심장을 찔러 대고 갈비뼈 근처까지 내려오더니
밤새 뿌옇게 흐려진 두개골까지 쿡쿡 찌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앞마당이 전부인 이승을 내다봐도 인기척이 없다
저기 문 앞의 발자국은 누구의 것일까
과꽃이며 수국을 키우던 울안 온기는 자취를 감추고
까치밥으로 남은 붉은 홍시는
지나가는 인기척에도 휘청거렸다
한나절이면 수십 년 내린 눈도 삽시간에 녹일 듯
늦은 햇살이 얼굴에서 시간을 재고 있다
석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축대가 무너졌다
창가에 어둠이 쌓이고 둥지 잃은 새들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우리들의 사치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우리는
서울의 외곽을 따라 동그란 얼굴이 됐다
광화문 2번 출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여러 겹의 옷을 입고
나의 바닥을 들키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언젠가부터 서로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적당함이 생겼고
누구나 올 수 있는 장소에 어울리는 표정으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쓸모 있게 만들 줄 알았다
사계절 내내 삐걱거리는 녹슨 뼈마디와 한없이 깊어진 목구멍에 대한 연민
밤새 만지작거렸던 빗물에 대해
우리들의 불면은 심각하지 않았으므로
연두색 완두콩을 까고
냉장고에서 늙어 가는 고등어를 버리고
새벽이슬을 채취하며
책의 밑줄에서 묵은 벌레들을 골라냈다
끝까지 가 본 막다른 골목을 언급하지 않아도
아메리카노와 카푸치노를 사랑했고
조각난 피자 개수에 맞춰 식욕을 조절할 줄 알았다
시들함을 씹어 다소 높아진 체온으로 서로를 안아 줬고
몇 달을 한꺼번에 쓴 사치를 접어 가방에 넣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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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지은
- 2024-11-05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2건
시가 단단하고 참 좋습니다.자기만의 시세계를 활짝 열어가기를응원하겠습니다~^^
류현 시인의 시는, 미로속에 숨어 들키고 싶지 않은시 밭의 씨앗들이 번성하면 시 풍년을 이루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