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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국」외 6편

  • 작성일 2023-09-29

손자국

박경희


어린 시절 뒤꽁무니를 쫒아 다녔던

수탉의 울음소리가 감나무에 버걱버걱 서려있는

옛집에 들었다

귀퉁이 떨어진 항아리가 있었던가,

개망초만 기웃거리는 구름을 쓸어냈다

눈 끝으로 어린 시절을 만지작거리다가

광에서 만났다

큰 몸집이 무너지는 걸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아버지 손자국

진흙 묻은 손바닥에는

당신이 가야할 길이 선명하게 나 있다

손금 봐주는 양반의 명줄 길다는 얘기에

세 살 먹은 손녀 운동회에는 갈 수 있겠다고

당신 삶의 온전한 길을 찾은 듯했다

북망산천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가셨어도 한참을 가서 달그림자에 기운 

당신의 마음을 바람으로 흘려보내고 있을텐데

이승에 찍힌 손바닥은

귀퉁이 무너진 광은 연탄자국으로

나를 붙잡아 두고 있다








산목련이 산 중턱에 허옇게 피어서 목까지 숨을 끌어올리고 올랐다 바람이 연두를 끌고 오니 스윽 꽃잎이 떨어졌다 뒷동산 산목련이 환장하게 피어서 꽃잎 주워 차라도 마실까, 바구니 들고 오르니 그리 불던 바람도 잠잠 다른 곳보다 그늘이 깊어 오므린 봉오리만 가득

산목련 바라보고 오른 산이 여러 고개인데 가는 곳마다 무덤이 있었다 아직도 상중(喪中)인지 저 허연 나무 연꽃에 부처님이 계신 것인지, 이 험한 세상 불 밝힌 곳이 부처님 품 안이라면 괜찮겠다고 내 그림자 뒤에 두고 산길 밟아 내려왔다






폐사지를 걷다가



오래전 비구니가 되겠다며 법당에 앉아 합장했다 깜박이는 전등이 부처님 말씀인 것처럼 깜박이며 법당을 내려왔다 울리지 않는 범종이 귓가에 울렸고 스님 목탁 소리에 어스름달이 떠올랐다


눈빛이 흔들리는 물빛이라, 

흔들리고 싶은 대로 흔들려야 한다는 말에 

절 마당 구석에 앉아 훌쩍이다가 문득, 


빈 절간을 지키는 개 반달이의 느린 걸음이고 싶어졌고 슬쩍 날아와 털신의 털을 뽑아가는 박새 부리이고 싶어졌고 무너진 축대를 간신히 붙잡고 있는 목련 나무를 스쳐 가는 바람이고 싶어졌고 극락전 앞 뒹구는 매미 허물이고 싶어졌다 바랜 단청 흐린 색으로 머물다 지워지고 싶었고 문살 나간 창호지 구멍이고 싶었고 그늘도 없는 폐사지에 머물다간 구름이고 싶었다 요사채에서 병든 사내가 밟은 절 마당이고 싶었고 승복 말리는 빨랫줄이고 싶었다 그렇게 여러 달 서성이는 발자국이었다


머리 긴 비구니가 되어 그늘 많은 

도시로 돌아왔다






발가락이 꼬물거렸다



냇물에 대나무 족대로 송사리 몇 마리 건져 올리며 고무신에 넣었다 


송사리가 내내 발 냄새 맡으며 뱅뱅 돌았다 


산그늘 나눠 가진 참나무는 물속에서 흩날렸다


간간이 옆집 개가 킁킁거리며 내 발 냄새를 맡았고 가다가 다시 와서 발 냄새를 또 맡았다 


그늘을 쫓아 앉은 발가락이 꼬물거렸다


어둠을 짚고 가는 별이 까마득해서 솟을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 맞은 별이 까딱까딱하다가 툭, 뒤꼍 조릿대 숲으로 떨어졌다 


달려가 보니 별이 집 앞 개울가 미나리아재비 잎에 앉았다


내 앞에 선 그대가 반짝거렸다






저물녘



귀뚜라미 소리에 햇빛이 비스듬히 내려앉고

길가 과꽃이 흔들리는 몸으로 바람을 대나무 숲으로 보내고


대숲에 든 성호 할머니 낫질에 파드득, 떨던 댓잎이 

바람을 노 저어 논바닥에 떨어지고


논가에서 어슬렁거리던 점박이 고양이가 바짝 몸을 움츠리고

내 소리가 바짝 엎드리고


그새 핀 억새가 햇살을 쓸어다 마당을 덮어주고

부글부글 끓어오른 노을을 토해 놓는 그런 저물녘






꽃게



살아있는 꽃게로 장을 담겠다고 사 왔는데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무섭게 파닥거렸다


바다가 그리 먼 곳이다


아무리 파닥거려도 갈 수 없는 곳


필사로도 갈 수 없는 곳


나는 필사적이지 못했기에 아직도 여기에 있다


연민과 불안이 돌아오게 했다


내 선택은 불안한 파닥임이었다


꽃게의 바다는 멀고


나의 바다도 멀다






달은 밝은데



틀니를 잃어버린 아흔의 아버지가 온 집안을 뒤집었다

고릿적 사진이 옷장 밑에서 나왔다

오래전에 메고 다녔던 붉은색 넥타이가 구겨진 채 

실타래처럼 엉켜있었다


틀니를 잃어버린 아버지가 온 집안을 뒤집었다

창밖, 개구리는 머릿속에서처럼 울어 대고

아버지는 구시렁거리며 울었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며 

늙은 냉장고 속까지 들락거렸다

찢어진 잇몸에 소금이 닿은 것처럼 따끔거렸다


거실에서 한참을 서성거린 아버지가 아들 얼굴을 보고 

달도 밝은데 머릿속이 우렁잇속이라고

도대체 어디에 뒀는지 모르겠다고

아버지가 우셨다

틀니를 잃어버린 아버지가 우셨다


고릿적 사진 속에 넥타이를 맨 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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