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위장의 기술

  • 작성일 2024-11-05

   위장의 기술

박숲


   상위 1%의 VVIP를 빛나게 해 줄 그림자. 그들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입가엔 잘 훈련된 미소가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번져 있다. 어떤 모욕에도 쉽게 흘러내리지 않을 견고한 미소. 나는 30대 커플 앞에 고급 포장지로 감싼 다쿠아즈와 하트를 띄운 바닐라라떼 두 잔을 내려놓았다. 행동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말투는 나긋나긋하지만 품위 있게, 걸음걸이는 조용하고 단정하게. 

   나는 고객 응대 매뉴얼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돈이 필요한 내게 ‘Very Very Important Person’이기 때문이다. 여자 고객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손가락을 펼쳐 잔을 들었다. 노동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손가락은 희고 가늘었다. 여자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왼쪽 손목에 찬 시계와 팔찌에서 빛이 눈부시게 흔들렸다. 그들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간단한 인사 외엔 말을 걸지 않았고 무례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건 품위나 예의 또는 친절의 종류라기보다 섞일 수 없는 계급의 분리를 의미했다. 

   은은한 빛이 대리석에 반사되어 라운지를 화려하게 감쌌다. 띄엄띄엄 놓인 테이블을 둘러보며 바 쪽으로 걸었다. 생상스의 〈백조〉의 선율이 우아하게 실내를 떠다녔다. 갑작스러운 생리통이 아랫배를 압박했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한 손으로 아랫배를 누르며 걸음을 빨리했다. 허 실장에게 전화가 왔다. 급하게 예약이 잡힌 고객이 있어서 30분 안에 제품을 공수해 오라는 지시였다. 각각의 명품관에서 공수해 올 제품 리스트를 문자로 넘겨받았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퍼스널 룸 고객의 명품 공수 기회가 오다니, 가슴이 떨렸다. 계약직 만료까지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시기에 좋은 징조였다. 재계약을 위해 허 실장의 입김은 절실했다. 선애 언니의 다이어리는 내 인생을 바꿔 줄 최선의 카드가 돼 줄 수 있을까.

   어긋난 관계에 방부제가 필요하다고 한 건 선애 언니였다. 음식이나 음료도 아니고 ‘관계’라는 추상성에다 방부제라니. 방부제 종류가 뭐냐고 묻자 선애 언니는, 카무플라주라고 알아? 하고 되물었다. 모호한 표정을 짓는 내게, 위장이나 변장을 뜻하는 프랑스어라며 신상 스카프를 목에 두르듯 매끄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관계를 유지하려면 위장이 필수라는 얘기야? 사회적 가면이라고 해도 될 걸 꼭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야 신선하다는 건지. 끝없이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직업 탓이라 이해했다. 어긋난 관계라도 있어? 많지. 누군데? 선애 언니는 청바지 지퍼를 올리고 셔츠 위에 블루종을 걸친 뒤 유니폼 구두를 하이힐로 갈아신고 클러치 백을 들었다. 모두 샤넬 제품이었다. 넌 아닌 건 확실해. 명품으로 치장하고 명품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탈의실에서 나간 선애 언니는 그날 이후 중환자실에 누워 정지된 생을 이어 가고 있다. 

   직원 전용 통로를 이용해 뛰다시피 명품관으로 갔다. VIP 고객들이 명품관마다 쇼핑을 하느라 어수선했다. 1층 중앙 통로에선 4인조 클래식 공연을 하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고객들 사이로 클래식 연주는 불협화음처럼 떠다녔다. 백화점 입장에선 오늘처럼 휴무일에 VIP 고객들만 초대하여 이벤트를 여는 것이 일반 고객의 1년 실적보다 낫다고 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고객은 최상위 1% 고객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쇼퍼 룸에서 아니면 개인 집이나 호텔 룸에서 프라이빗 쇼핑을 즐겼다. 나는 명품관을 돌며 허 실장이 픽업해 둔 제품들의 리스트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화려한 고객들 뒤에는 언제나 유니폼 입은 직원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곳에서 그림자는 빛의 이면에서 빛을 더욱 빛나게 해 주어야 쓸모가 있었다. 의류 명품관을 돌며 슈트 케이스에 담긴 코트와 재킷 등 여러 벌의 의류를 인계받아 행어에 걸었다. 

   퍼스널 룸 통로로 카트를 밀고 들어갔다. 룸으로 들어가기 전 잠깐 허리를 펴고 숨을 몰아쉬었다. 룸으로 이어진 통로는 좁고 비밀스러웠다. 마치 1% VIP들만의 성처럼 화려하고 은밀했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이곳에선 얼마나 많은 비밀이 생성될까.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비밀이야말로 진짜 비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크를 하자 허 실장이 안으로 물건들을 들여오라고 했다. 룸 안의 오렌지빛 조명이 장식장 유리 곳곳에서 반사된 빛이 눈부셨다. 3인용 소파 뒷벽에는 추상화 네 점이 걸려 있었고, 소파 앞 탁자 위에는 명품 홍보 책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붉은색 벨벳으로 감싸인 3개의 의자는 황금빛 부드러운 곡선 테두리가 장식되어 고풍스러우면서도 디자인이 화려했다. 

   룸에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판매 상품들이야.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 선애 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 실장은 중요한 통화인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피팅실로 갔다. 유리 진열장 곳곳에 다양한 소품들은 모두 진열된 상태였다. 나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뛰어난 컬러 감각을 허 실장에게 어필하고 싶었다. 슈트 케이스를 열고 가죽 트렌치코트와 트위드 재킷과 버튼 재킷 등 여러 종류의 의류를 행어에 차례로 걸었다. 화려한 컬러와 독특한 디자인에서 평범한 고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애 언니는 나를 데리고 물건을 공수하러 갈 때마다 코코 샤넬의 말을 강조했다. VVIP 고객들은 상품보다 계급을 중요시해. 그러니까 각각의 고객마다 최상의 대접을 받는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요즘엔 비용과 상관없이 희귀상품에 목을 매는 시대라고 했다. 수억 원대 상품도 우습게 아는 고객들이 이삼십만 원대 한정품 운동화 상품을 구하려고 암투를 벌이는 심리는 뭘까? 그때는 선애 언니가 오버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박스를 열어 시폰 원피스를 꺼내려는 찰나, 허 실장의 절제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함부로 만지면 위험하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단단하고 뾰족한 것이 날아와 박힌 것처럼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스크에 가려 표정은 읽기 어려웠지만 싸늘한 눈초리와 갈라진 목소리에서 비난이 느껴졌다. 공수만 해 오랬지, 아무나 포장을 뜯어도 되는 물건이 아닌 거 모르나? 가끔 선애 언니를 도와 제품 포장을 뜯고 디스플레이도 했다는 것을 허 실장이 모를 리 없었다. 허 실장은 내 손에 들린 옷을 가져다 조심스럽게 행어에 걸었다. 고리 모양의 장식이 시폰 원단을 풍성하게 만드는 디자인이었다. 장갑도 안 꼈네. 귀하게 모셔야지 손때라도 묻으면 어쩔 거야. 내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허 실장은 부드러운 말투로 위장했지만, 평소보다 유난히 예민하고 까칠했다. 선애 언니 다이어리를 쉽게 건네주지 않은 내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을지 몰랐다. 허 실장은 내가 진열한 상품들을 재진열했고, 나는 빈 포장지를 박스에 정리하며 눈치를 보았다. 금세 침착해진 허 실장은 고객이 드실 간식 목록을 카톡으로 보낼 테니 고객이 도착하기 전에 구해 오라고 했다. 

   직원 전용 통로를 지나 창고로 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잊고 있던 아랫배 통증까지 몰려왔다. 퇴근 시간까지 진통제 몇 알을 더 삼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창고에 카트를 밀어 넣고 라운지로 뛰었다. 백화점 근처의 호텔 카페에 스테이크 포장을 전화로 주문했다. 그런 뒤 구글맵을 켜 열대 과일 파는 곳을 검색했다. 제철도 아닌 열대 생과일을 바쳐야 하는 고객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라운지를 찾는 고객과 퍼스널 룸 고객은 전혀 다르다고 했다. 타인의 시선을 유난히 의식하는 VVIP 고객들은 룸을 선호할 수밖에 없고, 룸에 들어선 순간 그들의 태도는 달라진다고 했다. 백화점 식품관에도 없는 과일을 어디서 구할지 난감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지옥이라도 찾아가 구해야 하는 것이 VVIP 세계의 법칙이었다. 긴 검색 끝에 택시를 타고 열대 과일 파는 전문점으로 향했다. 

   라운지로 돌아왔을 때는 식은땀이 이마와 목덜미를 적셨다. 바 안으로 들어가 접시에 스테이크를 세팅한 뒤, 패션프루트를 반으로 자르고 망고스틴과 리치의 껍질을 깐 뒤 초록의 샤인머스캣으로 접시를 풍성하게 장식했다. 라운지에는 두 팀의 고객들이 담소를 나누며 쇼핑 후 피로를 풀고 있었다. 이곳에는 두 부류만 존재하는 거 알아? 선애 언니 물음에, 두 부류? 하고 나는 되물었었다. 명품으로 치장한 자들과 유니폼을 입은 자들. 이상하게 선애 언니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돈 많은 자들과 우리처럼 가난한 자들이 아니고? 선애 언니가 피식 웃었다. 나는 유니폼을 툭툭 치며 말했다. 우리끼린 유니폼이 평등해 보여서 좋긴 해. 

   키친타월을 뽑아 이마와 목덜미에 흐른 땀을 닦았다. 옷매무새와 머리를 매만지고 숨을 고른 뒤 트레이를 받쳐 들고 퍼스널 룸으로 들어갔다. 열이 식지 않아 얼굴과 목덜미가 후끈거렸다. 긴장된 마음과는 달리 맑은 피아노 선율이 물방울처럼 라운지를 통통 떠다녔다. 허 실장은 소파에 앉은 고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객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호텔 룸에서의 프라이빗 쇼핑 계획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나는 선애 언니 메모를 참고로 고객의 정보를 추리했다. 저 여자도 VVIP로 위장한 리셀러는 아닐까. 고가의 한정품을 비밀리에 구입하여 몇 배로 부풀려 되파는 리셀러들. 

   선애 언니는 리셀러들의 횡포에 자주 휘둘린 눈치였다. 그 사이에 허 실장이 개입되었다는 건 라운지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선애 언니가 마지막으로 만난 고객의 정보를 떠올렸다. 


   허 실장의 개인 고객 중 나이가 가장 많음. 주로 호텔 룸에서 쇼핑을 즐기고, 보안직원이 필요할 만큼 고가의 귀금속류 제품을 자주 구매함. 희귀한 한정품을 유난히 즐기는 타입. 항상 젊은 여자와 동행하지만 여자들이 수시로 바뀜. 취향: 심플하고 섬세하며 여성스러운 면이 강함. 화가 나면 예민하고 과격함.


   이외에도 직업과 사는 곳, 스타일과 취향, 선호하는 음악과 취미생활 등 미술작품 경매에 선애 언니가 동행한 것까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여자 리셀러가 끼어 있었다고 했다. 

   나는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탁자 위에 스테이크 접시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왼쪽 아랫배에 날카로운 통증이 몰려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고 샤인머스캣 몇 알이 탁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고객이 놀란 듯 짧게 비명을 질렀다. 허 실장 역시 놀란 목소리로 고객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노크도 없이, 당황스럽네. 나는 노크 소리를 못 들으신 거 같다고 했다. 어머 어디서 말대꾸야. 아유 죄송해요. 얼른 사과드리지 않고 뭐 해? 나는 머리를 숙여 사과의 뜻을 전했다. 허 실장은 바닥에 굴러떨어진 샤인머스캣을 주우라고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무릎을 구부리고 탁자 아래로 굴러간 샤인머스캣 열매를 찾았다. 고객의 가는 발목을 감은 하이힐 스트랩이 영화 속 주인공의 것처럼 아름다웠다. 

   어머머, 이러면 미안해지지. 그러곤 까르륵 웃었다. 고객은 말끝마다 까르륵 웃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요. 나는 고객의 발밑에 떨어진 샤인머스캣 세 알을 주웠다. 고객의 오른쪽 발목 안쪽에 새겨진 타투가 눈길을 끌었다. 문득 다이어리 메모에서 본 내용이 떠올랐다. 나뭇잎을 물고 날아가는 푸른 새. 블루버드!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선애 언니가 그날 만난 리셀러 별명과 일치했다. 고객으로 위장한 리셀러.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쇼퍼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유령 새라고 했다. 그만 됐어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지만 나는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허 실장은 고객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상황을 노련하게 이끌었다. 나는 정말로 죄송한 척 다시 사과한 뒤 룸을 나가려고 했다. 

   이봐요, 어디 가요? 우리 공주님 식사 챙겨 줘야지. 기다란 귀걸이가 고객의 귓불에서 찰랑거렸다. 쇼트커트 머리에 화려한 눈화장이 어울리는 여자였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제 탓이니 너그럽게 봐주세요. 애교 섞인 허 실장의 말투는 나긋나긋했다. 살짝 감았다 뜬 고객의 눈썹은 인형처럼 길고 윤기가 흘렀다. 고객의 하얀 손가락과 매끄럽게 잘 손질된 핑크빛 장식의 손톱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공주님 식사를 챙기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얼른 공주님 식사 챙겨 드려. 

   허 실장이 공손한 손짓으로 고객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제야 털이 수북한 방석 위에서 졸고 있는 작고 하얀 강아지를 발견했다. 

   쇼핑하는 동안 우리 공주님 심심하지 않게 잘 돌봐 줘요. 

   고객이 한껏 품위를 포장한 채 말했다. 나는 강아지 곁으로 다가갔다. 가장 낮은 등급의 라운지에서 유아 동반 고객들을 많이 봐 왔지만, 최상위층 프라이빗 룸에 강아지를 동반한 고객이라니. 고객은 스테이크를 작게 잘라 한 입 우물거렸다. 

   오 역시, 허 실장님 초이스는 언제나 최상이라니까. 

   허 실장 눈이 초승달처럼 접혔다. 고객은 내 앞으로 스테이크 접시를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접시를 받았지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 서 있었다. 고객은 우아한 손길로 강아지 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공주 맛있게 먹어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허 실장이 잘게 썰어 드리라고 덧붙였다. 개를 사람처럼 대하는 두 사람의 말투가 거슬렸지만, 나는 스테이크 접시를 들고 강아지 앞에 쭈그려 앉았다. 

   허 실장은 자연스럽게 신상품 얘기로 대화를 유도했다. 고객은 샤인머스캣 열매를 한 알씩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허 실장 얘기를 들었다. 허 실장은 미리 준비한 팸플릿을 펼쳐 신상품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 뒤 호텔 룸 프라이빗 쇼핑 계획에 대해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고객은 한 문장을 끝낼 때마다 초록의 알맹이가 또르륵 굴러가는 소리로 웃었다. 3인조 미니 클래식 공연과 남녀 모델 쇼를 추진해 달라고 했다. 허 실장은 완벽하게 준비할 테니 안심하시라고 했다. 고객의 시선이 가끔 내게로 와 꽂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돋보기에 투과된 햇빛에 피부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잠깐 일어나 볼래요? 

   고객이 문득 내게 뭔가를 주문하듯 말했다. 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어떤 물건의 상태를 살피듯 나를 훑어보던 고객은 작게 중얼거렸다. 

   잘만 하면 작품 되겠어. 

   허 실장과 고객은 15개 한정품인 고가의 명품 시계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가끔 내가 신경이 쓰이는지 목소리를 낮출 때도 있었다. 허 실장의 한정품 공수 능력은 쇼퍼계에서 유명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한 번에 15개만 생산된다는 한정품 시계를 어떤 루트로 구하는지 나는 궁금했다. 그런 기술을 익힐 수만 있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내 인생을 명품으로 온전히 재탄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허 실장은 진열 상품으로 고객의 관심을 유도했고, 두 사람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고객님께 잘 어울리는 특이한 아이템들만 모아 놓았다며, 어렵게 공수해 온 작품들이라고 허 실장은 생색을 냈다. 두 사람은 자리를 이동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들의 대화는 자연스러웠지만 어딘가 위장된 느낌이 강했다. 나는 스테이크를 잘게 썰어 강아지에게 먹였다. 강아지 목에는 생로랑 로고의 펜던트가 달랑거렸다. 강아지는 고기를 금세 삼키고 다시 달라고 낑낑댔다.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며칠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 탓에 매일 고객용 비스킷으로 식사를 때웠다. 강아지가 고기를 삼킬 때마다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고기 두 점을 재빨리 입안에 밀어 넣었다. 강아지가 캉캉 짖더니 갑자기 달려들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강아지를 세게 떠밀었다. 강아지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며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물린 상처 때문에 놀랄 틈도 없었다. 허 실장과 고객이 동시에 뛰어왔다. 고객은 비명을 지르며 강아지를 안고 소파에 앉아 강아지를 달랬다. 

   무슨 일이야? 

   허 실장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른쪽 손등이 후끈거렸다. 선명하게 박힌 이빨 자국 위로 검은 핏자국이 맺혔다. 한 손으로 상처 난 손등을 꾹 눌렀다. 허 실장이 내 뺨을 세게 때렸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피할 틈도 없이 같은 쪽 뺨을 다시 때렸다. 잇새에 문 고깃덩이가 달큼한 맛을 냈다. 허 실장은 내 팔을 밑으로 잡아끌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무릎을 꿇고 사과하라는 의미였다. 허 실장은 공주님 괜찮으시냐며 자동 인형처럼 ‘죄송’이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고객은 울 듯한 목소리를 내며 강아지 상태를 살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허 실장이 공주님께 사과하라고 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고객이 아닌 강아지에게 사과하라고? 허 실장이 어깨를 툭 쳤다. 이곳은 죄송할 일과 사과할 일이 넘치는 곳인가 보았다. 문득 고기를 뺏어 먹을 때 강아지 역시 내가 느끼는 이 모멸감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손등의 상처가 불에 덴 듯 후끈거렸다. 

   고객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허 실장은 과할 정도의 제스처를 취하며 고객의 기분을 풀어 주려 노력했다. 허 실장이 뾰족한 힐로 내 발꿈치를 지그시 밟았다.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선애 언니의 메모에서 매일 빠지지 않던 모멸감의 종류에 대해 떠올렸다. 선애 언니는 모멸의 순간을 박차고 뛰쳐나갈 용기와 맞서다 번번이 주저앉았던 자신을 책망했고, 그런 내용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맞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를 통해 자연스럽게 배우며 자랐다. 엄마는 며칠 전에도 아빠에게 두들겨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따지는 건 이제는 서로 피곤한 일이 되었다. 아직 고3 동생의 대학 입학과 졸업까지만 참겠다는 이유도 엄마의 반복되는 변명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그늘에서 헤어나려는 노력마저 포기한 상태였다. 나는 아빠보다 엄마의 무기력을 경멸했다. 

   그날 호텔 룸 문을 박차고 계단을 뛰어내린 선애 언니의 감정선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토록 참았던 고질적 모멸들을 한순간에 놓아 버린 이유 역시 반복된 무기력 탓일까. 내가 선애 언니였다면 어땠을까. 나에겐 참지 못할 모멸감이란 없다. 선애 언니가 말한 진정한 위장이란 자신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것이어야 했다. VVIP 고객들이 한정품을 차지하기 위해 그들끼리 암투를 벌이듯, 종류가 다를 뿐 욕망이 극에 달한 인간이라면 거미줄에 자신을 던져 넣을 각오쯤은 필수 아닌가. 선애 언니가 명품을 선호하면서도 그들의 위악에 휘둘리지 않으려 꾸준히 갈등했다는 메모는 위선으로 보였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완벽하게 속물로 변장할 수 있어야 했다. 상위 1%의 세계에서 일하는 나를 선망의 눈길로 보는 이들은 많았다. 그들이 나를 통해 다른 세계를 욕망하듯, 내 삶을 명품으로 바꾸고 싶은 열망은 엄마가 키우는 고구마 줄기처럼 거침없이 뻗어 나갔다.

   고객이 몸을 일으키자 허 실장은 재빨리 강아지 캐리어로 보이는 가방을 들고 왔다. 펜디 로고의 문양으로 장식된 캐리어였다. 허 실장이 캐리어를 열자 고객이 강아지를 조심스럽게 안으로 넣었다. 나는 진심으로 실수를 반성한다는 듯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손등이 점점 부어올랐다. 허 실장은 발레주차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고, 고객은 상냥한 목소리로, 우리 공주님 집에 갈까요,라고 했다. 허 실장은 캐리어를 들고 고객의 뒤를 따랐다. 문을 막 나서려던 고객은 뭔가 떠오른 듯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진열대에서 핸드백 하나를 집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기한테 감정 없는 거 알지? 자 선물! 

   고객은 탁자 위에 핸드백을 내려놓았다. 고객의 입가에 화려한 주얼리처럼 반짝이는 미소가 걸렸다. 반면 고객의 뒤에 서 있던 허 실장의 미소는 갑각류의 껍질처럼 단단했다. 그러나 고객 앞에선 순식간에 태도를 바꿀 줄 아는 허 실장의 너스레에 웃음이 터졌지만 간신히 참았다. 선애 언니의 메모에 수시로 등장하던 이중성. 어느 정도 상대해 볼 만한 자신감이 생겼다. 

   허 실장과 고객이 룸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휘청거리며 소파에 앉아 저린 다리를 주물렀다. 부어오른 손등이 후끈거리고 쓰라렸다. 탁자 위에 놓인 핸드백을 바라보았다. 뾰족한 징으로 장식된 화려한 디자인이었다. 자주 바뀌던 선애 언니의 명품 쇼핑백들이 떠올랐다. 허 실장의 리셀 심부름을 선애 언니가 도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선애 언니의 명품 쇼핑백들이 모두 선애 언니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언니가 치장한 모든 명품은 인센티브 또는 어떤 대가를 치른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선애 언니는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을 위해 위장은 필수라고 했다. 선애 언니의 그런 갈등쯤 나라면 잠시 로커 안에 처넣었을 것이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명품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둘러보았다. 다면 거울 안에 다양한 각도의 내가 담겼다.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인지 나조차도 혼란스러웠다. VVIP 계층은 근본 자체가 점잖고 품위 있다는 소문은 그저 소문에 불과했다.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그들의 본능은 훨씬 과감하고 원색적이라고 했다. 선애 언니의 메모들은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표현들로 가득했다. 메모를 읽고 있으면 다양한 부류의 고객들을 실제로 마주한 듯 착각이 일 정도였다. 나는 다이어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면서도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핸드백 옆에 놓인 스테이크 접시를 바라보았다. 반 토막의 고기가 남아 있었다. 사르르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육질의 감각이 아직 혀끝을 맴돌았다. 소스가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육즙과 고기의 질감. 고기를 반으로 잘라 입안에 밀어 넣었다. 내 형편으론 결코 접할 수 없을 비밀스러운 맛이었다. 고기의 맛은 허 실장의 유혹적인 제안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허 실장은 내게 재계약 실패 이후의 향방에 대해 물었다.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선애를 퇴사 처리하면 티오가 날 텐데. 허 실장은 정직원을 새로 뽑을 때 자신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했다. 나는 허 실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그건 내가 선애 언니 반대편에 서야 한다는 의미였다. 

   나머지 고기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육즙의 향이 갈증을 더욱 부추겼다. 선애 언니 다이어리에 자주 등장했던 고객은 꾸준히 선애 언니를 괴롭힌 것 같았다. 허 실장은 고객의 위험한 비밀을 매출로 연결했고, 선애 언니는 허 실장의 악행에 휘말려 고객들의 비밀스러운 요구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점점 견디기 힘들어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졌던 샤인머스캣과 고객이 남긴 패션프루트의 과즙까지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오늘 처음 알게 된 열매들이었다. 고객이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한 청포도나 이상한 열매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어렵게 구한 탓인지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서 향기롭게 퍼졌다. 빈 접시와 음료 잔을 정리하여 라운지 바에 가져다 놓고 물수건으로 손등을 묶었다. 그런 뒤 룸으로 되돌아왔다. 감쪽같은 기분을 느꼈다. 비밀을 좋아하는 고객들이 무엇을 즐기는지, 비밀스러운 공간이 그들에게 베푸는 무한한 혜택의 종류 역시. 탁자 위에 놓인 핸드백을 팔에 끼고 다면 거울 앞으로 갔다. 유니폼과 낡은 구두에 화려한 명품 백은 어울리지 않았다. 

   장식장 곳곳에 진열된 다양한 제품들이 화려하고 우아한 자태를 내뿜었다. 아무에게나 자신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도도한 표정으로. 의류 행어 아래 장식된 토 오픈 스틸레토 힐에 발을 끼워 넣었다. 핸드백과 잘 어울렸다. 자리를 옮겨 보석에 무지갯빛이 반사되는 팔찌를 팔에 찼다. 눈이 부셨다. 부어오른 손과 서로 기묘하게 어긋났다. 천천히 행어 쪽으로 가 좀 전 고객이 피팅했던 부드러운 가죽 코트를 입었다. 코트가 유니폼을 감쪽같이 감춰 주었다. 다면 거울 앞으로 가 머리를 풀어 헤쳤다. 긴 머리가 어깨 위로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내 모습이 거울에 담겼다. 아름다우면서도 이질적이었다. 내 몸에 걸친 물건들의 가격표를 따져 보았다. 방 보증금인 5백만 원의 스무 배 가까이 되는 금액이었다. 그들이 한 번 착용하고 싫증 나면 버린다는 비용이 누군가에게는 평생 얻기 힘든 그저 평범한 방 한 칸과 다름없다니. 문득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오랫동안 참아 왔던 새우감바스 파스타와 붉은 와인의 향긋함이 떠오르며 식욕을 부추겼다.

   유니폼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선애 언니 번호였다. 물건을 훔치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선애 언니가 깨어난 걸까. 언니를 배신하려던 건 아니라고 변명할까. 근무 재계약 실패가 불러올 암담한 미래는? 언니가 말한 대로 철저히 위장 중이라고 할까. 심호흡을 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선애 언니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우리 선애가 죽어 가는데, 백화점 관계자들이 아무도 전화를 안 받아요. 

   전화를 받아 줘서 고맙다고 했다. 간신히 울음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사고 경위에 대해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몇 초간 전화기 너머로 가쁜 숨소리가 전해졌다. 빨래를 비틀어 짜듯 선애 언니 엄마의 호흡은 점점 일그러졌다. 하마터면 다이어리에 대해 말할 뻔했다. 마침 허 실장이 들어왔다. 

   저기 우리 선애, 며칠을 못 넘길 것 같다네요. 

   그 말을 한 뒤 무거운 침묵이 잠깐 이어졌다. 

   근데, 친하게 지냈다던데··· 그럼 서로 깊은 속 얘기까지 다 하지 않나? ···선애 이대로 보내면, 아가씨도 힘들 텐데··· 우리 선애랑 친했던 거 맞죠? 

   선애 언니 엄마 말투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죄송한데요, 친하다고 속사정까지 다 얘기 안 해요. 그리고 선애 언니랑 특별하게 지낸 사이도 아니고요.

   거울 속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저기 어머니, 괜찮으시면 이따 일 끝나고 연락드릴게요. 

   울먹이는 선애 언니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재빨리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허 실장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당장 벗지 못해!

   나는 허 실장을 바라보며 치아가 드러나게 미소 지었다. 

   명품이 안 어울리죠? 

   허 실장이 뺨을 때렸다. 아까보다 두 배의 힘이 실렸다. 한 손으로 얼얼한 볼을 만지며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선애 언니 며칠 못 넘긴다네요. 

   허 실장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뒤틀렸다. 나는 코트를 벗어 제자리에 걸었다. 이상하게도 선애 언니 죽음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스틸레토 힐을 벗어 제자리에 놓고 유니폼 구두로 갈아신었다. 갑자기 허 실장이 과장한 소리로 웃었다. 다면 거울 안에 담긴 허 실장과 내 모습이 마치 연극배우들 같았다. 

   내가 말한 건 생각해 봤니? 

   허 실장의 건조한 목소리가 잠시 흐트러졌던 감정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글쎄요. 

   허 실장은 자신이 채용한 직원의 참담한 미래를 떠올려 본 적 있을까. 선애 언니 사고에 죄책감이나 미안한 감정은 전혀 없는 걸까. 선애 언니를 찾아가 사과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는 것일까.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보다 나는 나의 이중적 감정에 더 화가 났다. 이 짧은 순간 선애 언니 걱정보다 나는 다이어리에 숨겨진 비밀을 두고 계산을 두드리는 냉혹감이 싫었다. 하지만 계약기간이 끝난 뒤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현실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에 더욱 화가 났다. 부조리한 저들의 탐욕과 나의 탐욕은 어쩌면 더없이 공평하게 작용하고 있는지 몰랐다. 

   다이어리 가져왔지?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감정을 노출하면 지는 게임이었다. 

   선애 언니요, 사고 전날 저랑 술 마셨는데 그동안 그렇게 힘들어한 걸 몰랐어요. 실장님은 아셨어요? 사고 직전에도 통화했는데, 그날 만난 남자 고객의 취향이 아주 독특하다면서요? 

   그날 선애 언니는 퇴근하는 나를 일부러 기다린 듯했다. 저녁 대신 술이나 마시자며 이른 저녁 시간부터 바로 갔었다. 선애 언니는 취하기 전까지 자신의 얘기보다 내 얘기에 집중했다. 그러나 술이 취하자 울기 시작했고 적잖이 당황한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선애 언니를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선애 언니는 말끝마다 너무 괴롭다, 힘들다, 죽고 싶다, 사는 게 더럽다, 등등의 말을 추임새처럼 늘어놓았다.

   뭐가 그렇게 힘든지 속 시원하게 말을 해 봐, 울지만 말고.

   말해 봐야 기분만 더러워져. 근데 딱 하나만 말할게. 너 정규직 되고 싶다고 했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허 실장 같은 1인자 쇼퍼는 무조건 피해라. 알겠지?

   언니도 참, 정규직이 되고 싶다고 무조건 되냐고!

   에이 그래, 부자들 시중드는 게 싫으면 다음 생에 태어나야지 뭐. 부자로 말이야. 우린 꼭 부자로 다시 태어나자.

   지금이 중요하지, 다음 생을 믿어? 죽으면 끝인 거지, 난 그런 거 안 믿어.

   선애 언니는 미친 여자처럼 울다 웃다를 반복했다. 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기다리며 선애 언니는 말했다. 

   너 있지, 나한테 건투 좀 빌어 줄래. 내일 난 꼭 해낼 거야! 

   뭘 해내는지에 대해선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요즘 자주 고가의 선물을 해 주는 허 실장의 1순위 고객의 프라이빗 쇼핑을 주도하나 보다 생각했다. 속으론 몹시 부러웠다. 선애 언니의 투정이 더 밉상이라는 생각에 더 이상 투정을 받아 주지 않고 택시를 불러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선애 언니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사고 전 몇 번의 통화 끝에 내게 와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까. 

   허 실장이 피식 웃었다. 긴장을 감추기 위한 위장을 너무 쉽게 드러냈다. 풍성한 웨이브 머릿결이 실크처럼 보라색 셔츠 위에서 출렁거렸다. 나는 한껏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은근하게 물었다. 

   그날, 사고가 아니라 사건··· 맞죠? 

   하아 너, 건방지게, 지금 딜을 하자는 거니? 좋아, 원하는 걸 얘기해 봐. 

   나는 다이어리에 적힌 정보들을 천천히 나열한 뒤 유령 새를 마지막으로 언급하며 정점을 찍었다.

   블루버드, 36세, 명품 한정판 리셀러이면서 유명 인플루언서라죠? 그날 실장님의 1순위 고객을, 한정판 보석을 미끼로 호텔로 불러들인 장본인. 

   메모를 토대로 한 그날 사고에 대한 나름의 분석이었다. 

   아까 두 분 연극 잘하시던데, 진짜 속을 뻔했잖아요. 

   허 실장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한정판 명품 구매 판로를 훤히 꿰고 있는 리셀러들과 실장님이 깊게 연루된 거 다 알아요. 희귀 한정판 명품으로 1% 고객들끼리 암투를 은밀히 조장하는 사람들. 악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선애 언니는 VVIP 남자 고객들과 데이트는 물론 성적 요구까지 강요받았다는 메모는 충격이었다. 

   선애 언니는 요즘 유난히 고가의 명품을 자주 선물 받는 눈치였다. 아무것도 모를 때의 나는 선애 언니가 부럽고 배가 아팠다. 최상위층 고객을 다수 확보한 허 실장 보조라면 그 정도의 혜택은 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선애 언니가 허 실장의 부조리에 완벽하게 동참한 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어쩌면 그날도 선애 언니는 무리한 요구를 받았을지 모른다. 선애 언니는 그날 호텔 룸에서 고객 한 명의 쇼핑을 위해 밤늦도록 퇴근을 못 한다고 했다. 마지막 통화에서 언니는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아 진짜 이따위 짓 더러워서 못 해 먹겠어. 

   이따위 짓이라니? 물었지만, 선애 언니는 혀가 꼬인 발음으로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퇴직금 받아서 프랑스 유학이나 떠나 버릴까. 패션은 아무래도 밀라노가 낫겠지? 

   언니가 그만두고 떠나면 티오가 생기고 나야 좋지, 제발 떠나 줄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쪽으로 와 주면 안 되냐는 부탁에 나는 일찍 출근해야 한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나의 바람이 저주로 작용했던 걸까. 나는 나만의 죄책감을 다스리느라 자칫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장을 놓치고 민얼굴의 나를 드러낼 뻔했다. 

   선애 언니가 SNS는 잘 안 하는데, 메모에 집착하는 건 알고 계세요? 그것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상세히 묘사하는 버릇이 있더라고요. 

   허 실장은 미간을 찡그리며 피식 웃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거래되는 은밀한 위선들이 모두 밝혀진다면? 저토록 냉담하고 당당한 허 실장이라도 담담할 수 있을까. 허 실장은 생각에 잠긴 듯 길고 하얀 집게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데요, 실장님 말씀대로 모두를 위한 길이 뭔지 생각 좀 해 보려고요. 

   미래의 내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잠시 떠올렸다. 겉으론 무심한 척 말을 뱉었지만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감정을 숨길 때 마스크는 유용했다. 특히 선애 언니가 말한 카무플라주는 이 순간을 위해서 꼭 필요해 보였다. 허 실장은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뒤 천천히 입을 뗐다. 

   보기보다 똑똑하네. 민주 씨도 알다시피 시끄러워지는 거, 잠깐이야. 이 세계는 복잡한 걸 싫어하고, 또 나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거든. 

   허 실장은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았다. 

   현명한 판단을 믿어. 비밀은 의외의 선물을 안겨 줄 때가 있거든. 

   허 실장은 풍성한 머릿결을 어깨 뒤로 넘겼다. 허 실장이 눈치채지 못하게 숨을 몰아쉰 뒤 거만을 위장한 채 말했다. 

   명품 선물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선애 언니가 즐겨 사용하던 샤넬의 말을 인용했다. 

   가장 용감한 행동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거라죠? 

   허 실장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민주 씨가 뭘 원하는지 내가 모를까 봐? 그리고 명품 잘 어울리던데? 내일을 기대해 볼게. 어서 퇴근해. 

   역시 고수답다. 허 실장은 탁자 위 핸드백을 턱으로 가리키며 쇼핑백에 잘 넣어서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핸드백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라운지로 나왔다. 바 안으로 들어와 수정구슬 모양의 조명이 라운지 통로를 가득 채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명은 피로를 풀어 줄 듯 온화해 보였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 어둠을 배치해 서로의 비밀을 감싼 듯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비밀은 어둠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곳에선 모든 것이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재탄생했다.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기침 소리마저 기품 있고, 이따금 작은 종소리처럼 울리는 고객들의 웃음소리마저 품위가 넘쳤다. 두 명의 여자 고객은 절제된 몸짓으로 라운지를 빠져나갔다. 그녀들의 높은 하이힐 굽 소리가 대리석을 경쾌하게 울렸다. 나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다. 그들이 곧 상식이고 신이다.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에서 내렸다. 탈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로커에서 평상복을 꺼내어 옷을 갈아입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자 구차하고 비루한 현실이 와락 달려들었다. 마치 위장을 위한 변장을 끝낸 기분이었다. 유니폼을 로커에 넣고 열쇠를 채웠다. 선애 언니의 로커는 단단히 닫혀 있었다. 그날 선애 언니는 로커 아래에 다이어리를 빠트린 걸 몰랐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다이어리를 주운 건 행운일까 불행일까. 1층으로 올라와 명품관이 이어진 통로를 지났다. 명품관마다 퇴근 준비를 서두르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고객이 모두 빠져나간 백화점은 물고기가 모조리 사라진 수족관처럼 휑했다. 

   출입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색색의 불빛들이 밤의 거리를 화려하게 떠다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선애 언니를 위해 병원으로 가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백팩 안에 담긴 다이어리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내일이면 어떤 쪽이든 이 무게를 덜어내리라. 찻길을 건넌 뒤 백화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불 꺼진 건물은 야경에 묻힌 거대한 괴물 같았다. 날이 밝으면 마법의 성으로 바뀔 저 건물 안 어디쯤, 비밀 가득한 무한의 세계로 다시 발을 들이는 나를 상상했다. 밀린 월세와 대출금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엄마를 구해 낼 방법까지 해결될지 모른다. 어쩌면 선애 언니의 꿈처럼   파리나 밀라노 등으로 대신 유학을 떠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동시에 사경을 헤매고 있을 선애 언니가 떠올라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짧은 순간 나 역시 가파른 절벽 위에 선 듯 몹시 혼란스러웠다. 어떤 쪽이든 발을 내딛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선애 언니 핸드폰 번호를 꾹꾹 눌렀다. 보도블록 위로 길게 드러누운 그림자가 위장한 나인지 진짜 내 그림자인지, 운동화 끝으로 꾹꾹 짓뭉개면서.




추천 콘텐츠

문장, 콤마 소설

두 겹의 노래

두 겹의 노래 박숲 CCTV 화면 속 여자는 유리코가 틀림없었다. 문득 생의 끝에서 맞닥뜨릴 그녀의 기억들이 궁금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유리코의 미소가 너무도 무구(無垢)해 보여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차를 마주한 채 멍하니 서 있는 유리코. 차체에 몸이 튕겨 나가는 순간까지 그녀의 눈동자는 다른 세계를 경유하듯 풀어헤쳐져 있었다. 내 눈에는 꼭 그렇게 보였다. 색과 소리가 사라진 CCTV 속 사고 장면은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마치 시공을 벗어난 다른 차원에서 벌어진 사고처럼 아득하고 멀었다. * 오늘도 그녀, 유리코는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주 출입문을 돌아보았다. 조 군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부직포 구멍에 마 끈을 끼워 넣었다. 내리다 만 창문 블라인드 아래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 군의 머리에 햇살이 닿아 머리카락이 은회색 빛을 냈다. 조 군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는 부직포 주머니와 흰색 마 끈을 슬그머니 잡아 뺐다. 유리코 양은 왜 안 왔어요? 조 군은 발음이 잘 안 되는지 입술을 비틀며 대답했다. 몰라. 어머나, 여자 친구가 왜 안 나오는지 몰라요? 난 몰라. 치매 과정이 급격히 진행된 조 군에게 제대로 된 답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이 주째 유리코는 나오지 않았다. 육 개월 동안 한 번도 활동에 빠진 적 없던 그녀다.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상담 활동 초기만 해도 조 군은, 내 여자 친구 예쁘지? 자랑스럽게 소개했었다. 그녀는 새침하고도 도도한 표정을 지었고, 활동 시간마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 말싸움을 했다. 대개 조 군의 일방적 애정 공세 때문이었다. 조 군은 입술에 힘을 주며 내 손에 들린 부직포를 쳐다보았다. 나는 부직포 구멍을 연결한 끈이 뒤엉킨 부분부터 모조리 빼냈다. 다른 노인들은 주머니 구멍에 마 끈을 끼우는 것에 집중했다. 좌석을 둘러보며 질문을 유도했다. 다들 떡국은 드셨어요? 어린아이들처럼 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노인들은 제각각 다른 대답을 했다. 그럼, 먹었지. 당연히 설에 떡국을 먹어야지. 선생님은 먹었어? 노란 햇살이 긴 탁자 위로 구부정하게 드러누웠다. 드뷔시의 〈아마 빛 머리의 소녀〉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이었다. 상담 작업실을 일 층에서 이 층으로 옮긴 뒤부터 음악을 틀기 시작했다. 노인들은 음악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노인들과 달리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작업을 하다가도 잠깐씩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세요? 물으면 도도한 표정으로, 이거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곡이야, 쉿, 이 부분은 너무 애절하지? 하며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감춰 둔 기억의 한 조각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스치듯 보았던 그녀의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자 작고 여린 새 한 마리가 가슴 한복판을 통과하며 지나갔다. 문득 그녀, 유리코 얼굴에 내 할머니 미소가 겹쳤다. 요양원에 위탁한 뒤 돌아설 때 짓던 할머니의 미소. 그 미소는

  • 박숲
  • 2023-05-26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