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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를 찾아서

  • 작성일 2022-10-28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빌레를 찾아서




장임혜경






태풍이 지나간 아침, 강정애는 시어머니 고은내가 부엌에서 부스럭대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어머님, 좀 주무셨어요, 한숨도 못 주무신 거 아니에요, 비바람 때문에 복장이 터져서?
안달한다고 달라지냐. 귤나무 뿌리 몇 개 뽑히고 지붕 날아가야 가을 오지 가을이 공짜로 오겠냐. 지붕 날아가면 어쩔 거여. 다시 덮어야지.
은내가 누룽지를 한 그릇 퍼서 숟가락질하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백중이라, 태풍 시기에 백중사리가 겹쳐서 더 바람이 거세다는 거 같아요. 잠시 잠잠해졌다가 또 온다더라고요.
아이고, 백중사리가 겹쳤냐. 망혼들 입김이냐. 예전에도 이런 난리가 있었다. 바람이 무섭지, 바다가 무섭고.
백중날은 망혼일(亡魂日). 전날 정애는 돌아가신 친부모님과 시아버지, 남편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관음사에 음식과 과일을 시주하며 빌었다.
어머니, 아버지, 시아버님, 빌레 아버지, 올해 농사 잘되게 해 주시고, 우리 빌레는 공부 잘해서 학교 선생님 되게 해 주시고, 올 추석에는 작은집이랑 고모네도 와서 다 같이 차례 올리게 해 주세요.
제사와 차례 때 작은집과 고모네가 오지 않은 지 오 년째였다. 마을 미군기지 유치에 대해 자기들은 반대하는데 강정애과 고은내가 찬성한다는 이유로.
은내는 누룽지를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후루룩 먹고 집을 나섰다. 문 앞까지 은내를 배웅하고 들어오다 정애는 시멘트 담벼락에 꽂힌 빗창을 보았다. 태풍에 대비해 물건들을 집안에 다 잘 들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빠뜨렸던가 보았다. 살짝 손을 대자마자 빗창이 툭 떨어졌다. 세로로 죽 금이 가 틈이 벌어진 담벼락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이렇게 튼튼한 담이 다 깨지다니.


식당 일은 열 시쯤 나가면 되어서 정애는 조금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물질을 그만두고 벌써 오 년이란 시간이 흘러갔건만, 여전히 아침이면 날씨부터 살폈다. 백중날에는 살찐 해산물들이 많이 잡혔지. 다른 해녀들과 어울려 물질을 더 많이 했는데. 해녀 일은 추억이 되지 않았다. 스물여덟 해를 물질하며 살아왔으니까. 춥고 힘들어서 그렇게 그만두고 싶던 일이었는데 가끔 그리웠다. 봄이 오면 깊은 바닷속에서 파릇파릇 피어날 파래가 떠올랐고, 계절 따라 미역이, 전복이며 소라가 생각났다. 그 바닷가에 철책이 둘러쳐지고, 그 바다에 콘크리트가 뒤덮이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렸다.
정애가 아침밥 먹으라고 빌레를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방문을 열어 보니 없다. 아침부터 어딜 갔나.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을 들여다보았다. 『해저 2만 리』. 빌레가 밑줄 그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따라 읽었다. 바다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니다. 사방에서 고동치는 생명을 느낄 수 있으니까. 바다는 거대하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살 수 있는 환경이다. 바다는 움직임이자 사랑 그 자체, 살아 있는 무한이다.
정애는 놀랐다. 작가가 이걸 아네. 빌레도 이걸 아나. 수없이 바다를 드나들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어느 때는 차라리 그 안이 땅보다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조류(潮流)나 시계(視界), 수압, 호흡 때문에 긴장하는 속에서도 어떤 무한이 느껴질 때가 있었고, 고동치는 생명과 마주침은 경이와 사랑 그 자체로 다가왔다. 그 생명은 식물과 동물이기도 했고 물결과 햇살이기도 했는데, 특히 남방큰돌고래가 지나쳐 갈 때의 두근거림과 떨림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눈을 떼지 않고 돌고래에게 ‘배 아래로, 배 아래로’ 신호를 보내며 신비를 마음에 새겼다.
빌레가 바다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려고 하나. 빌레는 가까운 도시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평소 기숙사에 머물지만, 방학이라 집에 와 있었다. 말을 하고 나가야지.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받지 않았다. 속이 탔다. 이렇게 태평할 때가 아닐지도. 누구한테 납치당했나, 나한테 서운해서 항의 조로 집을 나갔나. 또 시위하러 갔나. 사춘기 때도 얌전하니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던 아이가 근래 들어 이상해졌다. 숫기라곤 없던 애가 시위 현장에 뻔질나게 드나들지를 않나. 할머니와 엄마에게 대들지 않나. 다 그놈의 미군기지가 문제였다. 빌레가 걱정되어 정애는 밥상을 치우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태풍이 지나간 거리는 스산했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은 남아, 찢긴 하우스 비닐 조각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녔다. 장독이 깨지고, 담벼락이 무너지고, 뿌리가 뽑힌 나무들이 쓰러져 있고, 도로가 흙더미로 덮였다. 배수가 되지 않아 도로에 빗물이 고여 철렁거렸다. 고무장화를 신은 정애의 발이 금세 축축해졌다. 빌레가 어디 갔을까. 먼저 짚이는 곳은 미군기지 공사장 정문 앞으로 나 있는 소로였다. 며칠 전에 그곳에 앉아 있는 빌레를 잡아 오느라 진땀을 뺐다.
콘크리트 도로는 다섯 명이 나란히 앉으면 메워질 크기였다. 연신 부채질하며 경계를 서고 있던 경찰 서넛이 지나가는 정애에게 말을 걸었다. 아줌마 저 여자들 좀 말려 줘요. 타 죽겠어요. 경찰과 몇 미터 떨어진 길바닥에 다섯 명 여자가 얇은 스티로폼지를 하나씩 깔고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뙤약볕을 겨우 모자로 가리고. 세상에나. 정애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몸에 쇠사슬을 감고 있어서. 마을 사람은 빌레뿐이었고 한 명은 서양 사람, 세 명은 타지 사람이었다. 평화활동가. 그들은 서로를 그렇게 불렀다.
이보시오. 외지 분들. 얘는 아직 고2요. 미성년자라고요. 애를 이렇게 꼬드기면 안 되지. 어린애를 사상 주입해서 이렇게 불러내면 안 돼요. 인생이 창창한 애를.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정애는 말했다. 말끝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못다 한 말이 가슴에 너울졌다. 나도 한때 똑똑했다우. 학교 선생님이 되어서 아이들 가르치며 살고 싶었지. 맘대로 안 되더이다. 다 빨갱이 때문이었지. 빨갱이. 정애가 갓난아기 때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부모님의 사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수많은 섬사람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다고 알았다. 정애는 학교 선생님이 될 뻔하였으나 연좌제에 걸렸다. 빨갱이 자식이라니. 세상이 나한테 왜 이러나. 억울함을 잊고 살았는데 미군기지 문제가 일어나 다시 마음을 들쑤셨다. 빨갱이, 일명 ‘종북좌파’가 섬에 들어왔다고, 그 사람들이 마을을 갈라치기 한다고 들었다. 평화활동가가 아니라 종북좌파. 멀쩡하게 예쁜 우리 빌레가 쇠사슬을 목에 두르고 앉아 있을 생각을 어떻게 했겠는가. 야무지고 똑똑한 아이가 어찌 이런 미친 짓을 하는지. 종북좌파 때문이 아니라면. 저들이 어린애를 꼬드기지 않았다면. 빌레는 학교 선생님이 될 거야. 종북좌파면 곤란하다고. 엄마가 나서야 할 때였다. 빌레의 앞날을 위해. 딸이 다치지 않도록.
엄마, 가. 집에 가. 이 사람들이 꼬드긴 거 아니야.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하는 거야.
빌레가 벌떡 일어나 정애를 말렸다. 쇠사슬이 목 아래로 늘어졌다. 팔려 가는 노예도 아니고 꼬락서니하고는. 정애는 속이 상했다. 어머님 우리가 미안합니다, 빌레 씨 어서 어머니 따라 집으로 가세요, 라고 빌레를 설득해야 할 평화활동가들은 별말 없이 쭈뼛거리며 앉아만 있었다. 에라이, 싹수없는 종북좌파들아. 하는 수 없었다. 정애는 빌레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놔. 안 가.
실랑이를 벌이다 감정이 폭발했다.
이 나쁜 년아. 이게 다 뭐냐. 쇠사슬이 다 뭐야. 엄마가 이거 보고 속이 어떻겠냐. 당장 못 풀어!
정애가 힘으로 쇠사슬을 끊어 보려 했다. 있는 힘껏 양쪽으로 잡아당기고 이빨로 깨물고 안달복달해도 쇠사슬은 꿈쩍하지 않았고, 머리 위로도 빠지지 않았다. 머리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열쇠 어디 있어. 빨리 빼. 정애가 소리쳤다. 작은 생수병이 또르르 굴러갔다. 빌레도 따라 소리를 질렀다. 엄마, 왜 이래. 엄마, 이러지 말아. 그제야 평화활동가 한 명이 나섰다. 빌레에게, 빌레 씨 열쇠 어디 있어요 하고 물었다. 빌레가 고개를 저었다. 활동가들이 사슬을 두른 채 사방으로 흩어져 도로와 길섶을 더듬었다. 열쇠를 찾아왔다. 그 열쇠를 자물쇠에 꽂으려는데 빌레가 정애의 손을 내쳤다. 정애는 주저앉았다. 땅을 치며 외쳤다.
너 이러라고 내가 낳아 키웠냐. 이런 꼴 보려고 내가 그 고생하며 널 키웠냐.
엄마, 가. 나 조금 있다가 따라갈게. 아무 일 없이 갈 테니까 먼저 가.
빌레는 열쇠를 잡아채더니 집어던졌고, 정애가 가서 주워 왔다. 자물쇠가 풀렸다. 가지 않겠다는 빌레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내가 니 엄마야. 엄마가 딸내미 다치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야? 양빌레, 당장 집으로 가자. 학생이 있을 데가 아니야. 정애는 되는 대로 말했다. 대학 가서 해. 그때는 니 맘대로 이런 거 해도 말리지 않을게. 말해 놓고 후회했다. 대학 가서도 사슬을 목에 걸면 그땐 어쩌나.
대학 가고 나서? 바위가 다 폭파되고 바닷가가 죄다 콘크리트로 메꿔지고 미군기지가 들어선 다음에? 그때 반대에 나서라고? 나 중학교 1학년 때 시작된 싸움이야. 벌써 오 년째 수많은 사람이 싸워 왔다고. 나 그동안 많이 참았어. 엄마가 말려서 할머니가 반대해서 엄마랑 할머니 생각해서 가만히 있었다고. 어떻게 됐어? 우리 의견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만 하잖아. 경찰이 마을 사람들과 평화활동가들을 탄압하고 잡아 가두고 사람 취급하지 않잖아. 바위며 할망물이 사라지고, 바다가 더럽혀지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엄마, 나도 다 생각할 수 있는 나이거든. 나도 보고 느끼고 생각하거든. 내버려 둬. 내가 엄마더러 반대로 돌아서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잖아. 엄마나 할머니 입장 존중하잖아. 내 의견도 존중해 달라고. 나도 한 사람이라고. 이거 놔.
빌레가 악을 썼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마흔넷에 늦둥이 하나 낳아서 금이야 옥이야 얼마나 아껴 가며 길렀는데. 니가 그러냐. 정애는 서러움이 북받쳐 엉엉 울었다. 우는 정애 곁으로 빌레가 다가왔다. 엄마. 정애를 흔들었다. 엄마. 왜 이래. 제발. 걱정하지 말고 그냥 가면 안 돼?
안 돼.
빌레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정애가 눈물을 닦고, 다시 활동가들을 향해 삿대질하고 헛발길질하고 울며불며, 이 종북좌파들아 우리 빌레를… 하자, 빌레가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하고 일어났다. 자물쇠를 빼 던지고 쇠사슬을 풀었다. 가. 앞장서. 정애의 뒤를 따라왔다.
또 그 소로에 가 있는 걸까. 며칠이나 지났다고 거길 다시 간단 말인가. 태풍도 끝나지 않았다는데. 그놈의 쇠사슬을 또 두르지는 않았겠지? 쇠사슬을 왜 두르는 거야. 끔찍하게. 정애는 큰 내를 건넜다. 폭우에 물이 불어 다리 위까지 물이 넘실댔다. ‘큰 내’라는 커다란 내가 흘러 마을 이름도 ‘큰내’였다. 섬은 화산으로 만들어졌기에 대부분 땅이 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이 동네만큼은 물이 풍부해 비닐하우스며 작물 농사를 크게 지었고, 마을 사람들은 같이 일하고 콩 한 쪽도 나눠 먹고 같이 어울려 놀며 오랜 세월 화목하게 지내왔다. 미군기지 문제로 마을 주민이 찬성과 반대 두 패로 갈라서기 전까지는. 다시 화목할 수 있을까.
마을회장이 마을 사람들 일부의 동의만 얻어 미군기지 유치를 야밤에 기습 결의하면서 마을은 갈리기 시작했다. 정애도 동의한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보상금 때문만은 아니고 믿고 따르던 어르신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미군기지 유치가 결정되자, 뒤늦게 알게 된 다른 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우리 일인데 어떻게 우리 말 한마디 듣지 않고 결정할 수가 있냐. 안건에 대해 충분한 사전 공지, 정보공개 한번 없이, 그 흔한 설명회 한 번 개최하지 않고 마냥 받아들이라는 거냐. 미군기지가 들어오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따져보지도 않고 무조건 따르라는 거냐. 그 사람들이 마을 임시총회를 열어, 회장을 해임했다. 새로 회장을 선출했고 다시 찬반투표를 했다. 투표는 우여곡절 끝에 성사되었는데 정애를 비롯한 몇몇이 투표함을 훔치려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정애는 지인들과 뜻을 같이했을 뿐 군대가 지시했는지 어떤지 다른 내막은 알지 못했다. 투표 결과와 상관없이 미군기지 건설 사업은 계속되었는데, 정부는 기습 처리든 뭐든 마을로부터 찬성 의사를 통지받았고 따라서 정당하게 시행되는 공사라고 주장했다.


미군기지 공사장으로 가는 길, 정애는 언덕배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언덕을 내려가면 철책에 가려 볼 수 없게 된 바다와 파도를 향해 섰다. 푸른 바다 저 멀리 햇살을 받고 반짝반짝 빛나는 잔물결을 보았다. 파도가 바람과 함께 가까이 다가왔다가 물러가고 또 다가왔다가 물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언덕을 지날 때마다 그렇게 서서 파도가 태어나고 굴러다니는 풍경을 우두커니 보곤 했다. 파도가 다른 파도를 덮치고, 뒤섞이고, 스쳐 지나가고, 따라잡고, 삼키는 모습을. 어떤 파도는 바다를 가로질러 멀리 떠나갔고, 어떤 파도는 폭 고꾸라지며 흰 거품으로 바닷가 바위로 밀려와 부서지곤 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뿌듯해졌는데.
딸 이름을 정애가 정했다. ‘빌레’는 ‘바위’를 뜻한다. 정애는 파도가 아무리 거세고 바람이 휘몰아쳐도 꿋꿋하게 거기 있는 바닷가 바위가 좋았다. 땅속에서 용암이 솟아올라 섬이 만들어질 때 같이 생겨났다는 검은색 바위, 헤아려지지 않는 기나긴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바위가. 바위에 비하면 사람의 한평생이란 얼마나 짧은가 생각하곤 했다. 정애는 숙모 손에서 자랐는데, 어릴 때 숙모가 물질 나가면 바위에서 놀며 숙모를 기다렸다. 바위는 용천수가 올라오는 바다를 감싸 안고 있었고, 사람들은 용천수를 ‘할망물’이라 불렸다. 정애가 아프면 숙모는 할망물 한 사발을 먹이고, 섬을 만들었다는 신화 속 인물 ‘대할망’에게 빌었다. 어서 낫게 해 달라고. 숙모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정애야. 물맛 좋지? 이 물은 생명수야. 경찰과 어용청년단이 물통 앞을 지키고 있지 않았겠냐. 잡히면 바로 죽지. 빨갱이라고. 그래도 몰래 기어 나왔어. 한밤중을 기다려서. 아휴, 물을 얼마나 마시고 싶었던지. 배도 고프지만, 목이 너무 말라서. 굶어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그런 심정이었지.
여름이면 수심이 얕은 그곳에서 어린 정애는 수영하고 놀았다. 물이 잔잔해서 놀기에 좋았다. 사내아이들은 다른 구역에서 대나무 낚싯대로 낚시했다. 섬에서만 산다는 어렝이, 코셍이, 멕진다리, 우럭, 보들레기, 덤부지 같은 물고기를 낚았다. 손바닥만 한 물고기들이 그렇게 커 보였는데. 햇볕에 달구어진 바위 때문에 발바닥이 벌겋게 화상을 입는지도 모르고 물고기 잡겠다고 뛰어다녔다. 푸른 파도 아래 다글거리는 붉은발말똥게를 쫓아다녔다. 게딱지의 빨간색이 무척 아름답고 빨빨거리고 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워서. 집게발에 물릴까 무서워 만져 보지는 못했으나. 물속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던 기억은 선명하다. 거대한 장벽 하나를 무너뜨린 것 같았지. 물 위에 둥둥 누워 파란 하늘을 보면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해졌다.
그 바다와 바위가 지금은 철책에 가려졌다.
바위는 여름내 화약으로 폭파당했다. 쾅. 우르르. 우르르. 쾅. 우르르. 새벽부터 시시때때로 고막을 찢으며 사이렌이 울렸다. 경찰 병력이 이동하는 소리, 마을주민들과 경찰이 몸 부딪히며 내지르는 함성과 욕설, 바위가 폭파되는 소리. 전쟁 같은 그 소리가 일상의 배음이 되었다. 고은내가 괴롭다며 귀를 틀어막았다. 더운 계절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팡팡 터지는 게, 수류탄이야? 폭탄이야? 무서워. 저 소리, 저 불.
은내는 신음했다. 쾅 소리에 가슴이 무너진다고, 바깥의 인기척에 숨소리를 죽이며 가슴 졸이던 옛 기억에 사로잡힌다고 가슴을 움켜쥐며 벌벌 떨었다. 헛것이 보이는지 빌레를 끌어안고 자꾸 물었다. 해변에서 사람들이 총 맞고 쓰러졌냐고, 총 든 경찰이 집안으로 들이닥치냐고, 무섭다고.
혼자 책 읽기나 좋아하던 빌레가 밖으로 나돌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빌레는 언덕을 지나, 공사장 정문 앞에 모여 농성하는 백여 명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한목소리로 외쳤다. 바위를 깨지 마라. 도로 한가운데 나앉았다. 폭파에 쓰일 화약 운반 차량을 막기 위해서. 빌레가 시위대 진압 경찰한테 맞고 돌아왔을 때야 정애는 그 사실을 알았다. 거기가 어디라고 갔냐고 정애가 나무라자 빌레가 말했다.
그럼 구경만 해? 내 이름도 저 바위에서 왔다며. 바위가 사라지는 데 가만히 있어?
정애는 망설였다. 미군기지가 들어서는 일에 우리 집은 찬성이다, 반대하려면 집 나가라 식구 아니다, 라고 말을 할까 말까. 그 말을 했다가 빌레가 정말 집을 나가 버리면 그땐 어쩌나. 정애는 일단 조용히 타일렀다. 너는 나서지 마라. 종북좌파들과 어울리지 마라. 대답을 듣지 못했어도 빌레가 엄마 말을 알아들었으리라 여겼는데, 줄곧 그래왔듯 엄마 속 썩이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빌레는 다음날도 시위 현장에 나갔다. 흥분해 돌아와서는,
활동가들이 바위 주변에서 카약을 탔어. 바위를 폭파하지 말라고 외쳤거든. 경찰이 보트를 타고 와서 카약으로 다가가더니 카약을 넘어뜨려서 바다에 빠뜨리더라고. 헉. 해양경찰은 물속으로 들어갔어. 물속에서 화약을 제거하려고 시도하던 활동가들에게 다가가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잡아끌어 패대기를 쳤어. 그걸 다른 활동가가 수중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렸기 망정이지. 촬영을 안 했어 봐 경찰이 폭행한 걸 어떻게 증명해. 또 우리만 당하는 거지. 하긴 경찰은 우릴 팬 뒤 정당방위라 우기더라만.
하고 말했다. 그때 정애는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빌레의 등짝을 쳤다.
뭘 잘했다고 그딴 소릴 해. 우리 집은 찬성이다. 반대하려면 집 나가. 식구도 아니야.
정애는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언덕을 내려섰다. 부러진 나뭇가지와 태풍에 무너져 내린 돌덩이와 진흙더미를 피해 걸었다. 바람 속에서 끊임없이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높이 솟은 철책뿐. 바라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철책뿐이었다.


공사장 정문 앞이나 소로에 사람은 없고 빗물만 가득했다. 부응, 하는 중장비 굉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직 공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정애는 깜짝 놀랐다. 굴착기가 쓰러지고, 미군기지 홍보관이 주저앉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케이슨이 쓰러졌다. 높이 이십 미터, 무게가 수천 톤에 이르는 거대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세 개가 태풍에 무너진 채 철책 뒤쪽 바다 위로 모서리를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었다. 저 어마어마한 것이 태풍에 속수무책이었다니.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정애는 터덜터덜 발길을 돌렸다. 여기가 아니라면 빌레는 어디에 있을까.
혹시나 해서 마을 회장댁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큰 내 건너편에는 미군기지 유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그 한가운데 마을회장 집이 있었다.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 있어 정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감히 가까이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찬성 쪽과 반대 쪽은 오랫동안 서로를 원수처럼 대해 왔으므로. 말도 하지 않고 가족이라도 제사조차 따로 지낼 정도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모습을 숨겼다.
마을주민이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물으며 돌아다녔다. 혹시 나이는 열여덟 살이고, 키는 백육십 정도, 단발머리 여자애를 보셨나요, 양빌레라고. 몸집은 통통하고, 눈이 큰데. 흰 수염을 늘어뜨린 할아버지에게 묻고, 파란 눈을 가진 여자, 곰처럼 둥글둥글한 몸매를 가진 남자, 말라깽이 청년에게 물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봤던가. 흰 수염은 연설했고, 파란 눈은 굴착기에 몸을 던졌고, 곰은 온몸에 고린내 지독한 액비를 바르고 도청 진입을 시도했고, 말라깽이는 ‘미군기지 반대’라고 쓴 깃발을 자전거 뒤에 매달은 채 한복 입고 짚신 신고 상투 틀고 갓 쓰고 섬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모두는 호소문과 전단을 사람들에게 뿌렸다. 사진을 보여 주니 그들은 빌레를 알아보았다. 시위 현장에서 보았다고. 하지만 지금 빌레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정애가 풀이 죽어 입술만 깨물고 있을 때, 누군가 정애를 불렀다. 이게 누구야, 하고.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 정애는 반사적으로 뒤로 돌아섰으나 숨을 데가 없었다. 어쩌지. 뛰어 달아나기도 그렇고.
스무 해를 붙어 다니며 물질하고 가족처럼 지냈던 용화 언니였다. 표정이 부드러워서 정애는 당황했다. 다정한 사람이었지, 언니는. 상군이라 늘 수확량이 많았던 언니는, 중군인 정애가 아쉬워하면 전복이며 오분자기를 몇 개라도 손에 쥐여 주는 사람이었다. 미군기지 문제로 서먹한 사이가 되어 버리기 전에.
오 년 전 오월의 어느 저녁, 마을 회관에 해녀들이 모였다. 정애는 용화 곁에 붙어 앉아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빌레 이야길 했던 것 같다. 빌레가 달거리를 시작했어. 중학생이 되더니 이상해. 반항해. 사춘기인가. 나는 어깨도 아프고 갱년기인데. 용화가 깔깔거렸다. 야, 사춘기하고 갱년기하고 붙으면 누가 이기나 해보려고 그러냐. 어른이 돼서 애를 이기려고 하냐. 어린 것아. 그것이 언니와 나눴던 마지막 다정한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해녀 회장이 앞에 섰다. 미군기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군인의 도움을 받아 화면으로 보여 주며 길게 설명했다. 무역선이 오가는 중요한 교통로인 바다를 안전하게 지킨다. 국가 안보를 튼튼하게 한다. 마을주민들에게 여러 일자리를 제공하여 생계 수입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덧붙였다.
미군기지가 들어오면 우리는 물질을 못 하잖아. 그럼 생계가 곤란해지니까 보상금을 주겠다고 약속받았어. 미군기지 유치를 찬성하는 사람만.
정애는 물질이 지긋지긋했다. 춥고 배고프고 힘든 그 일을 진작에 그만두고 싶었다. 빌레를 키우고 먹고살려니 아무리 싫어도 참고 해 왔을 뿐. 그렇지 않아도 서울로 대학 가고 싶다는 빌레 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었는데, 목돈을 받아 학비 걱정을 덜고 싶었다. 정애는 이 기회에 물질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고 분위기를 살폈다.
미군기지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말했다.
마을이 개발되고 일자리가 생기고 하면 좋잖아. 학교가 세워지고 인구가 늘고 젊은 사람도 살고 하면.
면사무소랑 읍사무소에서도 좋은 거라고 찬성하라고 전화하고 문자 보냈더라고. 서로 협력해서 좋은 쪽으로 가야지.
농사짓는 고은내도 찬성하자고 말했었다. 행정기관에 협조하지 않으면 비료 한 포대나 직불금도 받기 어렵고, 다른 여러 혜택도 알아서 찾아 먹기 곤란해진다고. 행정기관이 권유하는 쪽에 서자고.
분위기가 찬성 쪽으로 흘러가나 싶었는데 용화가 나섰다.
물질 그만하고 싶은 마음이야 나도 있고, 보상금이 많지도 않지만 적지도 않아 급히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도 알아. 그렇지만 평생 우릴 먹여 살려 온 바다잖아. 어머니 같은 바다. 우리 후세들도 이 바다를 누려야지. 어떻게 돈 받고 어머니를 팔아넘겨.
미군기지 들어오면 바다가 더럽혀지기라도 한다니. 어머니 바다는 저 태평양까지 넓고 넓은데 그거 조금 사라진다고 뭐가 문제야. 누군가 말하자,
바다만 더럽혀지면 그나마 낫지, 미군기지 검색해 봐 어떤가, 하고 다른 사람이 말했다. 용화는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이런 생각도 있어. 전쟁이 말이야. 전쟁 준비를 하니까 전쟁이 일어나는 거 아닌가. 방위니 어쩌니 하지만 여기다 미군기지를 만들어 전쟁 준비를 해서 오히려 상대편을 자극하자는 말처럼 들려. 지금 이렇게 아름답고 살기 좋은 땅에 무슨 전쟁 준비를 위한 미군기지야. 난 싫어.
해녀들이 수군댔다. 자기가 뭐라고. 우리가 뭐라고. 우리가 반대한다고 일어날 전쟁이 안 일어나나. 무슨 상관이야. 우리야 먹고살기도 힘든데.
내가 태어나 자란 이곳이 이제까지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으로 남길 바라. 우리 세대만 생각하지 말고 멀리 보자구. 저 바닷가 바위는 수천 년을 살아왔네. 한 치 앞도 못 보는 우리가 부끄럽지 않은가.
그때 정애는 보았다. 실룩거리는 입술들을. 해녀들이 두 패로 갈라서고 있었다. 수확물 경쟁하고 사소하게 다투기는 했어도 대체로 서로 오순도순 정답게 지내왔던 사이였건만, 해녀들은 해녀 회장을 중심으로 한 대부분 찬성 측과 용화 언니를 중심으로 한 소수 반대 측으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눈을 흘겼다. 거친 말들이 오갔다. 등을 돌렸다. 정애도 물결에 휩쓸렸다. 용화와 대화를 피했고, 만남을 피했다. 최근에는 길에서 마주쳐도 보지 못한 척 그냥 지나쳤다.
보상금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계속 미뤄지다가 지난달, 오 년 만에 결정이 났다. 애초 약속했던 금액의 절반도 안 되는 액수였다. 장난하나. 보상금 두고 장난해. 정부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 버리자 정애는 놀아난 기분이 들었고 허탈했다. 보상금을 찾아가라는 통지 앞에서 정애는 분통했다. 난 해녀였는데, 뒤늦게 깨달았지만, 물질은 누가 뭐래도 자랑스러운 내 일이었단 말이야, 그걸 포기했단 말이야. 우리 정답던 이웃들이 등을 돌리고 지낼 이유가 없어. 마을 분위기가 이게 뭐냐고. 마을을 이따위로 동강 내놓고 고작. 아직 보상금을 찾지 않은 이유였다.
여긴 어쩐 일이야? 혹시 자기도 의견을 바꾼 거야? 보상금 때문에 감정이 상해서 몇 사람 찾아왔더라고.
제멋대로 착각하고 반기는 용화에게 정애는 아니라고, 아직 그건 아니라고 했다.
빌레가 사라져서요. 혹시 여기 왔나 하고.
정애는 용화 손에 이끌려 인파를 벗어났다. 오 년 동안 많이 늙었네. 전복을 쥐여 주던 손이 그사이 더 주름졌다. 그간 어떻게 살아왔을까. 한적한 돌담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용화가 입을 뗐다. 빌레 말이야. 정애는 긴장했다. 언니가 빌레를 봤을까. 용화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보지 못했어. 종종 시위 현장에서는 만났는데.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쏟는 정애에게 용화가 마시라고 물통을 건네며 말했다. 빌레 참 많이 컸더라. 달거리 시작하고 사춘기라고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걔는 클수록 니 얼굴을 닮아가. 너도 갱년기는 지나갔겠구나. 벌어진 돌담 사이 빼곡히 자라난 풀의 물기를 손으로 떨며 용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빌레라면 괜찮지 않을까. 몇 번 이야기 나누지 않았지만 난 빌레가 믿음직스럽더라. 생각도 깊고 행동도 신중해, 이름처럼. 그 말을 듣고 정애는 조금 안심했다. 같이 찾아다니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용화에게 정애는 사람들이 마당에 몰려 있는 사연을 물었다.
새벽 댓바람에 형사 스무 명이 마을 회장댁으로 들이닥쳤다. 긴급 체포라며 연행해 가려 했다. SNS를 통해 그 사실을 접한 사람들이 마을회장을 구하겠다며 달려왔다. 연행을 막으려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졌고, 경찰은 대여섯 명을 긴급 체포했다. 남은 사람들이 경찰서 항의 방문 등 대책을 세우는 중이었다.
마을회장은 왜 잡혀갔어? 정애가 묻자,
연행 따윈 일상다반사야, 용화가 후, 하고 크게 숨을 내쉬며 답했다.
주거가 확실하고 도주할 의사도 없지만, 마을회장이 긴급 체포된 이유는 경찰의 출두 요구에 한 번 응하지 않아서였다. 마을회장이 이제까지 낸 벌금만 오천만 원에 달했고, 공사를 맡은 대기업이 주민 열댓 명을 상대로 손해배상금으로 물린 돈은 삼 억에 이르렀다. 경찰하고 대기업이 마을회장을 괴롭혔다. 가족들 목숨을 생각하라느니, 편히 살게 해 줄 테니 섬을 떠나라느니. 하지만,
회장 신조가 이거거든, 사람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가치 하나는 지키고 살아야 한다.
정애가 무슨 가치냐고 묻자 용화는 그건 모르겠다고, 그냥 가치, 라고 대답했다. 법으로 미군기지 건설공사 현장에 접근이 금지되었는데,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혀 재판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여든 살 노인이 경찰서에 끌려가 시멘트 바닥에서 한밤 지내고 나와서는 그러시더라. 한숨도 못 잤다고. 이유도 없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끌어다가 가두고 때리고 죽이던 시절이 또 왔나 싶어 폭폭해서 잠이 오지 않더라고.
용화가 휴대폰을 뒤적여 동영상을 찾아내 정애에게 보여 주었다. 영상 속에서 빌레는 사람들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정애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알 수 있었다. 빌레가 다시 용기를 내어 사람들 앞에 섰다는 사실을.
소로에서 쇠사슬을 두르고 앉아 있던 빌레를 끌고 나와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언덕에서 둘은 잠시 멈추어 섰다.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무심한 푸른 바다가 드넓게 펼쳐졌다. 먼 데서 몰려오는 먹장구름을 마주하고 빌레가 말했다. 엄마, 사실은 나 엄마 핑계 대고 빠져나왔어. 거기 있기가 솔직히 두려웠어. 정애가 잘했다고 하자 울음을 터트렸다.
그게 아니라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란 생각 때문에 달아날 기회만 보고 있었다고. 엄만 그런 내가 자랑스러워? 신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배신하고 혼자 도망쳐 나온 게 잘한 거야?
신념을 같이한다고?
거기 사람들은 바위도 달걀로 수없이 치면 넘어진다고 믿어. 독재정권이 무너진 것처럼.
계란으로 바위를 넘어뜨린다고? 종북좌파들과 신념이 같다고? 그러니까 빌레가 종북좌파? 그런 생각을 하니 정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바위가 넘어지냐고! 내가 가난해서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해서 너만은 네 마음껏 살게 해 주고 싶었는데 무엇이 너를 붙잡는 거니. 왜 그렇게 주눅 들고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냐.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거야.
엄마가 안 갔으면 어쩔 뻔했는데?
그럼 이겨 냈겠지. 패배에 대한 불안도, 사람들 앞에 서기 어려워하는 마음도. 하지만 이제 다 끝났어. 나 다시는 시위 현장에 나가지 않으려고. 스스로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신념도 없고 자신도 없고 두렵고 부끄럽고 난 형편없는 사람이니까.
그랬던 빌레가 용화 휴대폰의 동영상 속에서 사람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웃는 얼굴로, 큰 목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말을 했다.
제 이름은 양빌레입니다. 빌레라고 하면 사람이 물어요. 벌레? 발레? 빌, 레 고요. 빌레는 바위…
빌레가 연설을 시작하려는 찰나, 용화가 영상을 끄고 일어났다. 마당에 모인 사람들과 경찰서로 차를 나눠 타고 출발한다고, 동영상은 가는 차 안에서 전송해 주겠다고 말했다.
정애도 일어섰다. 차가 들어오고 길을 비켜서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생각이 났다.
엄마, 사랑하는 거야.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언덕에서 한참 속이 상한 정애에게 빌레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을 태우고 서너 대의 차가 출발했다. 흙탕물이 넘실대는 큰 내가 보였다. 마당을 벗어난 차들이 다리로 들어서자 하얗게 물보라가 일어났고, 물보라를 바라보다 정애는 눈앞이 흐려졌다. 정애는 손확성기를 입에 대고 이름을 크게 불러 보았다.
빌레야.
바람이 소리를 싣고 큰 내를 넘어 바다로 불어 갔다.




※ 참고 도서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평화유배자들』, 이주빈 글 노순택 사진, 오마이북, 2011
『눈물 속에서 자라난 평화』, 강정마을회, 단비, 2012










장임혜경
작가소개 / 장임혜경

2018년 손바닥문학상을 계기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2020년 5·18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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