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였다는 사실을」외 9편
- 작성일 2025-06-01
- 댓글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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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였다는 사실을
김준현
쉬는 시간
분홍 지우개와 흰 지우개가 책상 위에서 구른다
분홍 지우개가 흰 지우개 어깨에 턱
제 몸을 걸친다, 원!
세 번 걸치는 쪽이 승리지 흰 지우개가 유유히 빠져나와
분홍 지우개 위로 올라간다
K.O 승! 분홍 지우개는 혜주 편으로 넘어간다
지우개는
잘못 쓴 받침을 지우고 기울어진 밑줄을 지우고 헝클어진 머릿속처럼 많은 글씨를 지우고 지우다가 공책 귀퉁이도 슬쩍 찢어먹었던
지우개였던
과거를 지우고 있다
과거는 점점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다
씨름선수로 직업을 바꾼 지우개들이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킨다 지금까지의 나를 뒤집는다
가끔 나처럼 옆구리가 터진 붕어빵이 있으면 터져나온 팥부터 먹어야지
붕어빵은 머리부터 먹는다 파
붕어빵은 꼬리부터 먹는다 파
올 겨울 우리 반은 두 파로 갈라졌다
등이나 배부터 먹는 애들은 아무도 없어서
머리 아니면 꼬리여야 한다
축구 아니면 농구여야 한다
엄마 아니면 아빠여야 한다
나는 그때그때 다른데
왜 한쪽을 선택해야 돼?
통통하고 팥이 많이 든 머리나
바삭한 식감이 기분 좋은 꼬리나
어느쪽부터 먹든 어차피 다 먹을 건데
왜 이런 걸로?
묻고 싶어지는 마음
ㅇ.ㅇ
붕어빵처럼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가 붕어인지 묻고 싶은 얼굴로
색다른 스타일
초록색 사인펜이 보라색 뚜껑을 썼다
빨간색 사인펜이 노란색 뚜껑을 썼다
보라색 사인펜이 주황색 뚜껑을 썼다
주황색 사인펜이 초록색 뚜껑을 썼다 노란색 사인펜은 뚜껑이 없다
빨간색 사인펜이 뚜껑이 없어서 빌려줬어요
촉이 마르지 않게
우리끼리 돌아가면서 바꿔 쓰고 있는 거예요
유성이 떨어진 자리
어? 팔에 못 보던 점 하나가 생겼다
너 어디서 온 거니?
여기서, 언니!
동생 희연이가 유성 사인펜을 들어보였다
희연이 팔이랑 같은 자리에
마음 놓고 싶은 자리에 생긴 점 하나
언니랑 나랑 똑같은 곳에 점 있다!
해맑은 희연이에게
네 마음대로 이러면 안 돼!
한 소리 하고
다섯 살 손에 있으면 좀 위험한 물건-유성 사인펜을 압수했다
비누칠해봐도 물로 씻어봐도 이 점은 잘 안 지워진다
물 말고 시간이 흘러야 지워질 것 같지만
희연이가 언니를 너무 사랑한다는 점만큼은
안 지워지면 좋겠다
소리 키우기
잘 안 들려
소리 좀 키워봐
리모컨으로 아무리 +를 눌러도
3 정도에서 더 이상
높아지지 않는 볼륨이 있다
내 목소리다
민우는 처음부터 볼륨이 15여서
작게 말해도 우렁우렁
온 반에 다 들리도록 울리는데
쟤는 언제 저렇게 목소리를 키운 걸까?
키가 큰 애들처럼 목소리도 타고나는 걸까?
소리 키우기가
병아리 키우기보다
더 어렵다
접혀있는 귀
페이지 귀퉁이를 접은 자리를
Dog’s ear라고 부른다
=강아지 귀
접혀있다가도
눌려있다가도
페이지를 펼치면
쫑긋
귀가 일어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학교 간 나를 기다리는
아롱이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만 나도
쫑긋
귀부터 일으키듯이
그런데 이 귀는 너무 오래 접혀있었나보다
일어서지 않는 귀
왜 접어놓은건지 앞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 귀
늙은 귀
내가 학교 갔다와도 반겨주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아롱이
누워있기만 하는 아롱이 귀
티격태격
뒤죽박죽
알록달록
큐브를 샀다
완벽하게 맞춰져 있었다
섞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둘 거면 큐브를 뭐에 써
막 섞은 다음에 하나하나 푸는 게 재미지
너무 겁먹지 말고 일단 해봐
으아아아아! 언니가 마음대로 섞어버린 큐브
빨강 빨강 빨강
빨강 빨강 파랑
노랑 빨강 빨강
빨강끼리 모인 자리에
빨강이 아닌 애들이 끼여 있다
쟤들을 어떻게 제자리로 돌려보내지
머리를 굴린다
큐브를 돌린다
티격태격
뒤죽박죽
알록달록
빨강 파랑 노랑
보라 빨강 하양
초록 파랑 노랑
으아아아! 더 섞여버렸다
하나 둘 달랜다
괜찮다
할 수 있다
찬찬히 맞춰나간다
섞여있는 것도 보기 좋다고
큐브와 마음을 맞춰나간다
여름에 찾아온 뜻밖의 손님
여름 감기에 걸려서 누웠어
여름인데 으슬으슬 몸이 떨렸어
여름인데 겨울처럼 흰 입김을 내뿜는 가습기
여름인데 모락모락 김 나는 흑임자죽
여름인데 모락모락 김 나는 내 이마
여름인데 함박눈이 흩날리는 스노우볼 속처럼
여기는 겨울 집안 풍경
엄마와 내가 좋아하는 끝말잇기
일요일요일요일요일
요일요일요일요일요
일요일요일요일요일하러 가야하는
월요일까지
일요일요일요일요일찍
일요일요일요일요일어나야 하는
월요일까지 계속 하자, 우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피아노학원 바쁘게 달려가던 혜진이 멈춤
무궁화꽃이
구름처럼 느릿느릿 할아버지가 허리를 쭉
피었습니다
할아버지, 이쪽으로 와서 새끼손가락 걸어요
무궁화꽃이 멍멍
강아지 한 마리 앞발 들고 바들바들
피했습니까? 휴-
한숨 쉰 강아지는 제 갈길 가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이
비를 뿜으려던 먹구름이 다를 기다리며
오줌 마려운 얼굴을 하고
있
다!
순간 소나기가 쏟아져
보라색 우산처럼 접힌 무궁화꽃들이 한꺼번에
확 다시 피어났어 옆에서 옆으로
덩굴처럼, 새끼손가락―새끼손가락―새끼손가락을 걸고
무궁화꽃이 다 함께 피었습니다
외치면서 뒤를 돌아보면
우리 같이 쓸 우산을 들고 있는 너
그래, 바로 너
나 몰래 한 걸음씩 나한테 다가오고 있던 너
무궁화꽃처럼 웃고 있는 너
내가 다 봤으니까
어서 이리로 와 새끼손가락 걸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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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워터 카우보이언더워터 카우보이 김아영 지난 7월 9일, 제주시 애월 앞바다에서 괴생명체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긴장하고 있다. 스쿠버 다이빙 중 괴생명체를 목격했다고 주장한 박 모(15세) 군은 ‘괴생명체의 얼굴은 사람과 같았고, 다리는 물고기 꼬리처럼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고 말했다. “기사 좀 봐라. 괴생명체가 아니라 인어였다니까! 내가 분명히 봤어!” 병수가 자신의 휴대폰에 실린 기사를 내 턱밑에 들이밀었다. 심장이 박자를 잃은 채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사와 함께 올라온 사진 속에는 흐릿하게 푸른색 지느러미가 보였다. 내 옆자리에 앉은 윤찬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또 그 얘기야. 그래서 인어 공주님은 예뻤냐? 왜 인어 공주님 옆에 수다스러운 바닷가재는 없었고?” 며칠 전 병수는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바닷속에서 사람 얼굴을 한 물고기를 봤다고 했다. 꿈이라도 꿨냐고, 같이 바다에 들어간 다른 사람들은 왜 못 봤냐며, 평소 병수를 잘 아는 윤찬은 그저 웃어넘겼다. “아, 진짜라니까. 내 두 눈으로 직접 봤다고!” 병수의 말에 윤찬이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박병수,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 쉬는 시간은 다 끝났어!” 하여간 저 두 사람은 인어 공주와 바다 마녀처럼 누구 하나가 물거품이 되어야지 이 악연이 끝나지 싶다. ‘그날 병수가 본 게 정말 인어였을까?’ 갑자기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다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을 할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주변 아이들이 힐끗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이들의 시선을 피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차가운 수돗물을 얼굴에 마구 끼얹었다. 화장실 거울 속에 발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이 비쳤다. 가쁜 호흡도 서서히 제 박자를 찾아갔다. 복도 끝에서 조회를 하러 오는 담임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로 교실로 뛰어들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찌잉 울렸다. 병수가 보낸 문자였다. - 이번 주말 다이빙 한 깡 어때? * 내가 다이빙을 배우게 된 것은 병수 때문이었다. 병수는 가벼운 입만큼이나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 학교로 처음 왔던 날, 담임이 조회 시간에 말했다. “해구는 건강상의 이유로 한동안 학교를 쉬었다고 한다. 제주도에도 처음 왔다니,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모두 도와주도록.” 어색한 인사를 한 뒤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피해 맨 뒷자리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담임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복도 쪽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병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격하게 손을 흔들어댔다. 내가 알던 사람인가, 아님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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