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아크네스
- 작성일 202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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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아크네스
김아영
아크네스, 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겨울 방학이었다. 만날 학원과 집만 오가던 나에게 너는 그저 내 일상에 스쳐 지나가는 물웅덩이 위에 잔잔한 파동일 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너의 존재가 내 삶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을 울트라 메가급 핵폭풍으로 변할 줄은 그땐 미처 상상도 못 했다. 너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나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나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번 겨울 방학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고등학교 첫 시험의 결과가 달라진다며 수학학원 선생님은 우리를 몰아세웠다. 지금까지는 설렁설렁 공부했다 쳐도 고등학교 2년 동안 빠르게 모든 과정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지금 선행이 필수라는 흔한 말도 잊지 않았다.
히터가 내뿜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좁은 강의실에서 선생님과 서른 명 남짓한 아이들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를 마시며 나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전날 밤늦게까지 컴퓨터 게임을 했더니 피타고라스 정리나 미분 같은 단어들이 점점 귓가에서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야, 눈 감지 마!”
옆에 앉은 한 녀석이 내 옆구리를 툭 쳤다. 나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눈만 끔뻑거리자 수학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눈 감아보니 어때? 깜깜하고 아무것도 안 보이지? 그게 너의 미래가 된다. 오늘 힘들다고 눈을 감으면 여러분의 내일은 더 힘들어져요.”
선생님의 말에 강의실 여기저기서 왁자지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졸고 있던 녀석들마저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함께 웃고 있었다. 그러다 복도 쪽 구석에 앉은 한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 시선에 당황해하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찰랑찰랑한 단발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목까지 빨갛게 물든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모공조차 보이지 않는 탄탄하고 매끈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피부 하나는 타고났다며 부러워하던 친구들의 말이 떠올라 나는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때까지도 난 내 일상이 그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크네스, 네가 내 삶의 어떤 의미가 될 것이라곤 그땐 상상조차 못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습관처럼 양손으로 얼굴을 쓰다듬다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마 한가운데에 커다란 여드름이 빨갛게 볼록 솟아있었다. 얼마나 속이 곯았던지 손만 대도 아팠다. 거뭇거뭇 수염이 난 코밑에도 작고 하얀 피지들이 몇 개 올라와 있었다. 그것들은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아 손톱 끝에 힘을 주어 짜버렸다.
이마에 여드름이 나는 건 누군가가 나를 짝사랑한다는 뜻이라던데. 문득 어제 학원에서 나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던 그녀를 떠올렸다. 혹시 그녀가 나를···. 여자 사람 친구조차 없는 나에게 드디어 여자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오르며 나도 모르게 비실비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비누로 잔뜩 거품을 내 얼굴을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씻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여드름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피부가 건조해지면서 더욱 거칠어진 것 같더니 이번에는 턱선을 따라 무슨 전염병처럼 여드름이 번지기 시작했다.
대학교 졸업반인 누나 방에 몰래 잠입해 여드름 진정에 좋다는 티트리 오일이라는 걸 훔쳐 발라도 봤지만, 염증과 통증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녹차 티백을 우려낸 물로 세수해 봐도, 심지어 티백을 뜯어 찻잎을 직접 여드름 위에 올려보아도 효과는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피부만큼은 타고났다고 자부했는데, 중학교 때조차 여드름 하나 없던 내 얼굴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도대체 지난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특별히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게임을 하며 과자 조금 집어 먹은 것(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이 아닐 수도 있겠다)과 방학이라고 해서 샤워를 아주 조금 게을리한 것(또 생각해 보니 샤워를 삼사일씩 안 했던 것도 같다)외엔 그 어떤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러다 곧 좋아지리라고 생각했던 내 희망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무참히 깨졌다. 이제 양쪽 뺨에도 수없이 많은 딱딱한 분화구들이 생겨나더니 활화산처럼 시도 때도 없이 터지며 시뻘건 피와 누런 고름을 쏟아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드름 흉터 하나 없는 아빠, 엄마의 얼굴을 보더라도, 가끔 화장품에 대한 과민 반응으로 이마나 턱 주위에 하나둘 나는 뾰루지로 고민하는 누나를 보더라도,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난 부모님에게 이유를 따져 물었다.
“왜 아빠와 엄마는 여드름 흉터 하나 없는데 나만 이런 거야?”
부모님은 그런 내 얼굴을 쓱 돌아보며 대답했다.
“어머, 네 나이 때는 다 그렇지 뭐. 호르몬 때문이야.”
“괜찮아. 크면 저절로 없어져. 손만 대지만 마. 흉터 남아.”
부모님은 내가 받는 스트레스의 심각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도 네 나이 때 등에 여드름이 엄청 많았어. 자고 일어나면 속옷에 피고름이 묻어 있었다니까. 성인이 되니까 저절로 다 없어졌어. 걱정하지 마, 괜찮아!”
“아빠는 등이지. 난 얼굴이라고! 그리고 난 하나도 안 괜찮아!”
내 울부짖음에도 부모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빠의 매서운 손바닥이 내 등에 내리꽂혔다. 엄마도 잔소리를 쏟아냈다.
“세수나 열심히 해! 어젯밤에 몇 시까지 안 잔 거야? 새벽까지 또 게임 했지? 너도 이제 곧 고등학생이야. 정신 좀 차려!”
그렇다. 나도 이제 곧 고등학생이다. 그러니 고등학교에 가기 전에 여드름 정도는 해결하고 가야 정신도 차리고 공부에도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해도 내 말은 그저 마이동풍,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공허한 바람일 뿐이었다.
시베리아에서 몰아닥친 한파로 거리가 꽁꽁 얼어붙은 그날도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학원에 갔다. 겨우 세수만 하고 나온 녀석들이 풍기는 호르몬 냄새와 여학생들의 화장품 냄새에 너는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포식자처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내게 멈추었을 때,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크네스, 넌 이미 나에게 수많은 상처를 남겼다. 너 때문에 나는 하루가 다르게 비쩍 말라가고 있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볼 때는 물론 세수할 때도, 찬바람을 맞을 때조차도 나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너를 생각했다.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너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너를 만지지 않고서는 내 손가락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피딱지로 덮인 여드름 흉터들이 나날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런 얼굴로는 학원에 갈 수 없었다. 누나처럼 나도 과외를 시켜주던가, 아니면 이 모습으로는 학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엄마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형준아, 내일 피부과에 가보자!”
엄마의 말이 나에게 마치 구원과도 같았다. 나는 그토록 절실하게 엄마의 말에 순종한 적이 없었다.
“네, 어머니!”
피부과에 갔을 때, 의사는 내 얼굴을 자세히 살피며 말했다.
“이 나이대에서는 대부분이 안드로겐이라는 남성 호르몬 증가가 원인이에요. 주로 프로피오니박테리움 아크네스 균이 염증을 일으키며 여드름이 발생하고 악화하는 것인데요.”
프로피오니박테리움 아크네스, 줄여서 P. 아크네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렇게 예쁜 이름의 네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걸. 의사는 사춘기 호르몬 증가가 과다한 피지 생성을 초래하고, 이 피지를 먹은 아크네스 균이 과하게 몸이 커지면서 모공을 막게 된다고 말했다. 모공이 막혀 염증이 발생하고, 염증은 여드름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의사는 내 얼굴을 스캔한 후 컴퓨터 화면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면포가 오래돼 화농성 여드름 상태로 변한 것 보이시죠? 다행히 고름이 찬 낭종 상태는 아니니까 치료를 꾸준히 받아야 합니다.”
“선생님, 어차피 사춘기 여드름은 계속 생길 텐데요. 정말 치료해야 할까요?”
아니, 인제 와서 이런 말을 할 거면 엄마는 왜 피부과에 가자고 한 건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의사가 내 반응을 눈치채고 말했다.
“물론 어머니 말씀대로 이 시기에는 치료해도 또 생깁니다. 그런데 이 정도면 흉터가 남을 위험이 있어서 치료받는 게 좋습니다. 여드름 흉터는 평생 남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의사는 각종 여드름 화장품, 여드름 연고, 세안제, 필링 및 혈관 레이저 시술 등을 권했고 엄마는 치료비를 듣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째려보았다.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나도 아크네스, 너로 인해 고통 받는 피해자일 뿐인 것을···. 레이저 시술까지 받는 건 부담스러워 기본 치료만 하기로 하고 우리는 상담실을 나왔다.
곧바로 나는 치료실 침대에 누웠다. 낯선 손이 내 얼굴의 번질번질한 기름을 닦아내더니 따뜻한 수건을 얼굴 위에 올려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평화롭고 포근했다. 낯선 손은 내 얼굴을 다시 한번 부드럽게 쓸어내리더니, 이내 ‘압출’을 시작했다. 바늘로 피부를 살짝 찔러 여드름을 터뜨리고는 무자비하게 힘주어 꾹꾹 눌러 짜냈다. 피지와 고름이 터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고통 속에서도 어딘가 모를 희열이 느껴지면서 목구멍에서 신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며 머리카락으로 스며들었다.
“아이고, 학생 잘 참네. 거의 다 됐어. 조금만 더 참자.”
낯선 손은 그러고도 30분이 넘도록 압출을 멈추지 않았다. 낯선 손도 지쳤는지 가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크네스, 너는 그렇게 잊을 수 없는 통증을 남기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내 얼굴에 온통 울긋불긋 상처들만 남긴 채 너는 여전히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듯했다. 붉게 달아올랐던 피부가 조금 가라앉는 것 같더니 그 자리에 하얗게 각질까지 일기 시작했다. 이런 얼굴로 밖에 나가기도 싫어 집에만 머무는 시간이 늘어갔다. 어쩔 수 없이 학원에 가야 할 때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길을 가는 사람들이 모두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입학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학교는 남녀 공학이었지만 합반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얼굴로 교문을 통과하고 복도를 지나 교실로 들어가는 상상만 해도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겨우 잠이 들어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꾸거나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화들짝 놀라 잠이 깨기 일쑤였다. 거울을 바라보는 것조차 싫었다. 소화도 잘 안되고 입맛도 사라졌다.
아크네스, 난 네가 미웠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나를 불행에 빠뜨리는가. 네 존재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너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살아남는가.
나는 곧바로 검색 창에 ‘P. 아크네스’ 너의 이름을 입력했다. 작고 하얀색 애벌레 모양의 박테리아는 의외로 귀여웠다. 그 모습은 블랙헤드 여드름을 짤 때 쏙 나오는 길고 하얀 알갱이와 닮았다. 사춘기 청소년의 약 85%에서 여드름이 발생한다는 문장을 읽고 나는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여드름의 발생 원인은 다양하며, 가족력이 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부문에서 내 시선이 멈추었다.
아크네스, 너도 억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내 유전자 때문이라고, 네가 이렇게 강력한 생명력을 갖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고. 너는 원래 해로운 박테리아들의 군집 형성을 막고, 다른 세균으로부터 내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러한 과학적 정보를 통해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내 여드름 문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나 자신이 어떤 생물학적 특성을 가졌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몸과 정체성에 대해 깊은 통찰을 얻었다.
언젠가부터 우리 가족이 모두 식탁에 모여 함께 식사하는 날이 드물어졌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온 가족이 함께 외식이라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네가 웬일이니?’ 하며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고, 아빠는 ‘용돈 필요하냐?’고 물었다. 대학교 졸업반인 누나는 내 중학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날 입사 면접이 있었다. 이번에도 누나는 ‘지금 외식할 시간이 어디 있어?’ 하면서 참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다 내 얼굴을 슬쩍 바라보고는 쯧쯧쯧 혀를 찼다.
내 초등학교 졸업식 이후 온 가족이 이렇게 함께 외식한 적이 있었던가. 오랜만에 온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처음에는 가끔 이렇게 외식하자는 둥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는 샐러드만 뒤적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조심스럽게 레이저 시술까지는 아니더라도 피부과 치료를 좀 더 받고 싶다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누나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취업 준비의 어려움을 털어놓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계속 취업에서 떨어져. 난 머리가 나빠 그런 건지, 아니면 남들처럼 어학연수라도 다녀왔어야 하는 건지···.”
헉, 지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 누나는 자신이 타고난 머리가 좋은 것 같다고 큰소리쳤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취업이 잘 안된다며 어학연수라도 다녀와야겠다는 말이 아닌가.
순간 오랫동안 억눌려있던 감정이 밀려 올라오며 설움이 복받쳤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 아빠도 알잖아? 누나보다 내가 더 머리 나쁘다는 거. 그런데도 누나는 하고 싶어 하는 거 다 해주고, 나는 왜 항상 참으라고만 해?”
엄마, 아빠 얼굴이 어두워졌다. 누나는 당황해하며 나를 나무랐다.
“야! 좀 조용히 해.”
한번 말문이 열리자 그동안 참고 참았던 말이 술술 터져 나왔다.
“여드름이 나는 게 내 탓은 아니잖아? 난 여드름 때문에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어. 그런데 엄마, 아빠는 나한테 관심도 없고 내 이야기는 들어주지도 않잖아!”
이게 다 유전자 때문이라고. 어떻게 나한테 이런 피부를 물려줄 수 있어,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진짜 그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 입을 쩍 벌리고 있고, 누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부끄럽다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유전자 탓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아크네스, 너와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네가 날 떠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나 또한 최선을 다해 내 얼굴을 지키리라!
미지근한 물로 하루에 두 번씩 꼼꼼하게 얼굴을 씻고, 외출할 땐 항상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며 햇빛으로부터 내 피부를 보호했다. 중학교 이후로는 아침 식사를 건너뛰었는데 꼬박꼬박 하루 세 끼를 챙겨 먹었고, 정기적으로 피부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밤새 게임을 하던 습관은 버리지 못했지만, 자정이면 컴퓨터를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학원에서 졸던 것도 많이 줄어들었다. 수학 선생님이 자주 하시던 ‘눈을 감으면 깜깜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
아크네스, 너와의 아슬아슬한 동거는 그렇게 계속되었다. 너는 잠시 한눈팔 새도 없이 시시때때로 너의 존재를 드러냈고, 그때마다 난 압출로 강경하게 대응하기도 하고 진정 팩으로 너를 살살 다독이기도 했다.
겨울바람에 따뜻한 기운이 묻어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주변에 눈에 익은 몇몇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들 중에서 수학학원에서 봤던 그녀가 눈에 띄었다. 나를 힐끔거리며 얼굴을 붉히던 그녀는 그 후로 학원에서는 볼 수 없어 안 그래도 매우 궁금했던 참이었다. 그녀도 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분명 내 얼굴은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녀도 재빨리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시선을 피하는 게 아닌가.
아, 아크네스. 그 순간 난 보고야 말았다. 머리카락으로 가린 그녀의 양쪽 볼에 선명한 너의 모습을···. 아크네스, 넌 이 순간도 안드로겐 호르몬을 마구 뿜어내고 있는 열일곱 살의 우리와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낯선 강당에서 교장 선생님의 입학 축하 훈화를 들으며 앞으로 어떻게 너와 함께 잘 지낼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의 공생관계는 지속될 것이며 아슬아슬한 밀당은 한동안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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