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의 소원
- 작성일 202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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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의 소원
변선아
저는 사발입니다. 아주머니가 장날에 감자를 캐서 판 돈으로 산 밥그릇이었지요. 아주머니는 갓 지은 밥을 고봉으로 올려 끼니마다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아들은 삽으로 밭을 일구듯 숟가락으로 밥을 퍼 입 안에 넣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어머니.”
아주머니는 배불리 먹고 일어나는 아들을 볼 때마다 흐뭇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저도 덩달아 흐뭇했지요. 이상하게도 바닥이 긁혀 텅 비워질수록 제 배는 불렀습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어요. 더위가 기승을 부려 매미가 지천에서 쩌렁쩌렁 울던 때였습니다. 천둥보다 더 큰 소리가 새벽을 깨웠습니다. 마치 세상이 깨지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날 이후 마을 청년들은 아주머니 집으로 모이는 날이 잦았습니다. 아들과 청년들은 집을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서는 날,
“가지 마라. 늙은 어미를 두고 어딜 간다는 거니?”
아주머니가 울며 말렸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와 밭을 지키려면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떠난 뒤, 아주머니는 이른 새벽 산으로 갔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지나 깊은 땅속에서 막 솟아오른 물, 산짐승의 숨결조차 깃들지 않은 샘물을 떴습니다. 아주머니는 그 맑은 샘물을 밥 대신 제 몸에 가득 부어 장독대에 올렸습니다. 새벽이슬같이 맑고 차가운 물 안으로 샛별 하나가 떨어져 반짝였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아들이 몸 성히 돌아오게 해 주세요. 아들을 지켜 주세요.”
아주머니는 두 손을 모아 빌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일구던 감자밭을 살피러 갔습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한낮의 열기를 피해 집에서 쉬고 있는데, 옆집 순애가 달려왔습니다. 올해 열 살 된 순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주머니를 보고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모두 피난 간다고 난리예요. 엄마가 같이 가자고 모시고 오래요. 빨리 가요.”
아주머니도 군인들이 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산 너머에 있는 마을에는 군인들이 먹을 것을 빼앗고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피난을 갈 수 없었습니다. 집을 떠날 수 없었지요. 아들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순애야, 어머니께 나는 그냥 여기 있겠다고 전해라.”
“안 돼요. 그러면 죽는댔어요. 살려면 피난을 가야 한댔어요.”
순애가 아주머니 손을 잡고 끌었습니다. 그 바람에 아주머니 몸이 순애 쪽으로 기울며 잠깐 휘청였습니다. 아주머니는 순애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순애야, 나는 같이 갈 수 없어. 창수 오빠를 기다려야 한단다. 그러니까 너는 어머니 모시고 빨리 피난을 가거라.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그러고는 순애를 꼭 안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부엌에서 삶아 놓은 감자를 무명천에 쌓아 주었습니다. 순애는 “가야 하는데…… 여기 있으면 다 죽는다고 했는데…….”하며 아주머니가 준 감자를 받아 싸리문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아들이 집에 왔다가 내가 없으면 걱정할 거야. 아들을 만나려면 이곳에서 기다려야지. 암. 죽더라도 여기서 아들을 기다릴 거야.”
아주머니는 감자를 쪄 낸 솥을 닦으며 혼잣말했습니다. 어쩌면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한 이곳까지는 군인들이 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군인들은 남쪽으로 간다는데 이 마을을 거쳐 가면 빙 돌아서 가야 하니까요.
모두가 피난을 가고 작은 마을은 텅 비었습니다. 혼자 남은 아주머니는 아들을 기다리며 매일 새벽 제 몸에 밥 대신 맑은 샘물을 담고 빌었습니다.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세요.”
“순애네 식구가 피난을 잘 가게 해 주세요.”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습니다.
하늘이 붉게 물든 날이었어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쿠아앙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장독대가 흔들렸습니다. 품고 있던 물이 찰랑거리며 쏟아지려 했지요. 감자를 캐던 아주머니도 놀라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날 밤, 총을 든 군인 다섯 명이 아주머니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아주머니는 급히 안방에 있는 다락에 숨었지요.
“먹을 게 있나 찾아보라우.”
군인들은 신발을 벗지도 않고 집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장 어려 보이는 군인이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벽장과 다락까지 헤집으며 먹을 걸 찾았습니다. 순간 군인은 숨어 있던 아주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어린 군인이 놀라며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아주머니에게 겨누고 외쳤습니다.
“손 들라우!”
아주머니는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사람이 있시요!”
어린 군인이 밖에 있는 군인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군인들이 안방으로 들어와서는 아주머니를 향해 총을 겨눴습니다. 아주머니는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습니다.
“아주마이는 피난도 아니 갔소?”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군인이 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아들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을 발견한 어린 군인을 가리키면서 아들하고 나이가 엇비슷해 보인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싸우느라 힘들지요. 많이 배고픈 것 같은데 내가 금방 밥을 해 드리지.”
아주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습니다. 군인들은 총부리를 밑으로 내렸습니다.
아주머니는 얼른 부엌으로 가 불을 지펴 밥을 지었습니다. 둥그런 밥상에 고봉으로 올린 보리밥 다섯 그릇이 놓였습니다. 반찬은 김치뿐이었지만, 군인들은 아주 맛나게 먹었습니다. 며칠은 굶은 것 같았지요.
밥을 먹는 군인들에게 아주머니는 이것저것 물어봤습니다. 결혼해서 어린 자식을 두고 온 사람, 부모님과 아내를 두고 온 사람, 학교에 다니다가 전쟁터에 왔다는 사람, 군인들은 모두 고향에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왜 났대요?”
아주머니는 그동안 궁금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던 것을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군인은 왜 전쟁이 났는지 잘 알 것 같았지요.
“모르갔시요.”
나이 많은 군인의 말에 아주머니는 황망했습니다. 이유도 모르면서 싸우는 군인들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모른다고요? 그것도 모르면서 싸워요? 왜요?”
“죽지 않으려면 싸워야 하니께요.”
모두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지요. 잠시 뒤, 나이가 가장 많은 군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해방됐다고 좋다 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나도 모르겠소.”
“안 싸우면 안 되나요?”
아주머니가 다시 물었습니다. 여전히 대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군인들은 다음 날 아침밥까지 먹고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날부터 아주머니의 소원은 한 가지가 더 늘었습니다.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세요.”
“순애네 식구가 피난을 잘 가게 해 주세요.”
“다섯 명의 군인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계절이 바뀌고 아주머니 집에는 군인 한 명이 또 왔습니다. 총상을 입은 군인이었지요. 군인은 예전에 왔던 다섯 명의 군인들이 입던 군복하고는 색도 모양도 다른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군인을 정성껏 간호하고 돌봤습니다. 아주머니에게는 어떤 군복을 입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군인은 보름이 지나도록 사경을 헤매며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매서운 눈보라가 치는 새벽, 아주머니는 여느 때처럼 첫 샘물을 떠서 제 몸에 가득 부었습니다. 물이 얼마나 찬지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아주머니는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순애네 가족과 다섯 군인의 안녕을 빌고 빌었습니다.
“어머니가 무사하게 해 주세요.”
낯선 목소리에 놀라 아주머니가 뒤돌아봤습니다. 군인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정신이 든 거예요?”
아주머니는 기쁜 마음에 함빡 웃으며 물었습니다.
“네. 아주머니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군인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아직 찬바람 쐬면 안 돼요. 들어가요. 내 서둘러 죽을 데워 줄 테니 먹어요.”
아주머니가 다그쳤지만, 군인은 장독대에 걸터앉았습니다. 아주머니는 군인 옆에 앉았지요.
“고향에 부모님이 계세요. 제가 막둥이라 연세가 많으십니다.”
군인은 전쟁터에 끌려왔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나올 때 어머니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이라고도 했습니다. 날이 추워져 기침병이 더 심해졌을 텐데, 어머니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다고요. 아주머니는 말없이 군인의 등을 두어 번 쓸어내렸습니다.
“아주머니, 그런데 이렇게 빌면 집에 계신 어머니 건강이 좋아질까요? 저도 고향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드님도 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주머니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아주머니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지요. 아주머니가 한참 만에 말했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요.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꽃이 피듯이, 기다리다 보면 전쟁이 끝나고 아들이 오겠지요. 그럴 거라고 믿어요.”
군인은 아주머니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고는 머리를 깜싸고 허리를 숙였습니다. 군인은 결코 전쟁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본 전쟁은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하다면서요. 아무래도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싸우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죽어야만 전쟁이 끝날 거라고요. 그런 군인을 보고 아주머니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설상 전쟁의 끝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기다려야 해요. 기다리지 않으면 정말 안 올 테니까요. 그러니까 기다리는 거지요. 고향에 계신 어머니도 아드님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군인이 허리를 펴고 아주머니를 봤습니다.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네, 어머니가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힘이 나네요. 고맙습니다.”
군인이 목소리에 힘주며 말했습니다. 심한 상처로 강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기다릴 거예요. 아들은 나를 지키려면 싸워야 한댔어요. 나는 아들을 지키려고 기다리는 거예요.”
군인이 훌쩍거렸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군인의 어깨가 들썩거렸습니다. 아주머니는 군인을 꼭 안아 주었습니다. 군인은 아주머니 품에서 “어머니, 어머니!” 하고 외쳤습니다. 그 소리가 슬펐습니다. 한동안 군인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아주머니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기력을 찾은 군인은 아주머니 집을 떠났습니다. 아주머니는 군인의 안녕과 군인 어머니의 안녕까지 함께 빌었습니다.
해가 두 번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길을 잘못 들은 몇몇 군인들이 아주머니 집에 왔습니다. 그때마다 아주머니는 옷 색깔에 상관없이 집에 있는 먹을거리로 상을 차려 군인들의 주린 배워 채워 줬습니다.
그사이 아주머니는 몸이 많이 쇠약해졌습니다. 밭을 일굴 힘도 없고 먹을거리도 바닥이 났습니다. 며칠씩 굶은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해 겨울이었어요. 아주머니가 심한 감기에 걸렸습니다. 열이 펄펄 끓고 기침이 멎지 않았습니다. 두 달이 넘도록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요. 그래도 아주머니는 새벽 첫 샘물을 떠서 소원을 비는 일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이 아주머니의 식량이 되는 것처럼 아주머니를 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날, 아주머니는 정강이까지 푹푹 꺼지는 눈길을 헤치고 힘겹게 샘물을 뜨러 나섰습니다. 밖은 아직 어두웠고 바람은 살을 베듯 찼습니다. 아주머니는 꽝꽝 언 샘물을 돌로 깨고 깨끗한 첫 물을 떴습니다.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 아주머니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길, 매서운 바람만이 휑하니 아주머니를 지나쳐 마을로 갔습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아주머니가 물을 뜨러 걸었던 발자국마저 지워 버리고 아주머니를 솜이불처럼 덮어 줬습니다.
그해 여름, 바람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저는 아주머니를 생각했습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소식을 아주머니는 하늘나라에서 들었을까요? 기다리면 전쟁이 끝나는 날이 온다던 아주머니 소원이 이뤄졌으니, 하늘나라에서라도 아주머니가 좋아할까요?
이제 아주머니 아들도 집으로 돌아올 겁니다. 저는 아주머니 대신 아들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순애네 식구들도 오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들도, 순애네 식구들도 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웃들은 물론이고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지쳐 바람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무도 오는 않는 거지? 전쟁이 끝났다면서?”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잠깐 쉬는 거래.”
“쉰다고?”
“응. 쉬는 동안 서로 침범하지 말자고 구역을 정했대. 그래서 이제 이곳은 남쪽 사람도 북쪽 사람도 살 수도, 오고 갈 수도 없는 땅이 됐대.”
“뭐? 아무도 살 수 없는 땅이라고?”
“응.”
“잠깐 쉬는 거면 언제든지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거야?”
“아마도.”
저는 절망했습니다. 아주머니의 소원이, 이뤄진 게 아니니까요. 아주머니가 아침마다 정성껏 첫 샘물을 뜨고 기도했는데, 왜 천지신명은 아주머니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주머니 소원이 이뤄지지 못한 게 제가 힘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주머니는 오지 못하고 아들도 언제 올지 모릅니다. 사람이 올 수 없는 땅이 되었다니, 혼자서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아주머니는 언제 올지 모르는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지 않으면 정말로 오지 않을 거라면서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기다리는 것이라고요. 아주머니 대신 아들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기다리면서 소원을 빌 겁니다. 아주머니의 소원도 그 누구의 소원도 아닌, 간절한 제 소원을요.
“전쟁이 끝나게 해 주세요.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게 해 주세요.”
하지만 모두 제 소원이 쓸데없는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산짐승들은 사람이 없으니 편하다고 했고 풀들도, 나무도 사람이 없으니 맘껏 자랄 수 있어 좋다고 했습니다. 헛된 소원은 품지도 말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오지 않는다고 해도 기다려야 한다던, 기다리지 않으면 정말 오지 않는다던, 아주머니 말을 잊을 수 없었으니까요.
“전쟁이 끝나게 해 주세요.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게 해 주세요.”
샘물처럼 맑은 정신으로 빌고 빌었습니다.
하지만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세월을 세는 것도 힘들 정도로 시간이 흘렀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시간은 더욱더 흘러 제 몸도 삭아 부서질 것 같았습니다. 쩍쩍 금이 가고 바람에 날아온 돌에 맞아 이가 나가기도 했습니다. 정신도 몽롱했습니다. 제가 왜 소원을 비는지도 알 수 없었지요. 아주머니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제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소원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렸습니다. 아니, 소원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요.
그런 어느 날,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바람은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마구 휘몰아쳤습니다.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면서 땅을 깊게 팼습니다. 나무뿌리가 뽑힐 듯한 엄청난 바람이 불었습니다.
쨍그랑. 쨍그랑.
거센 바람에 장독들도 깨졌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폭풍 속에 있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장독대에 있던 항아리들이 모두 깨졌는데 제가 올려진 장독만 멀쩡했습니다.
‘왜 나는 멀쩡한 거지? 나처럼 작은 그릇이 이 폭풍에 날아가지도 않고 멀쩡한 이유는 뭘까?’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만 깨지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지요. 저는 소원을 담은 그릇이니까 쉽게 깨어지지 않는 겁니다. 아주머니와 군인들의 소원이 제 안에 가득 담겨 있어서 폭풍우에도 날아가지 않았던 겁니다. 사람들의 소원이 저를 지켜 주고 있었던 겁니다. 그 간절함이요.
강한 빗줄기가 제 몸에 가득 차고도 남아 흘러넘쳤습니다. 물은 흐르고 흘러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가겠지요?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처럼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곳에 사람이 오게 해 주세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전쟁이 끝나게 해 주세요.”
저는 빌고 또 빌었습니다. 멀리서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세요.”
“순애네 식구가 피난을 잘 가게 해 주세요.”
“다섯 명의 군인들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총상을 입었던 군인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습니다.
“어머니가 무사하게 해 주세요.”
저는 정신을 똑바로 차렸습니다. 새벽 첫 샘물 같은 맑고 청아한 기운이 제 몸 가득 담겨지는 듯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전쟁이 끝나게 해 주세요.”
얼마나 빌었을까요? 바람이 잦아지고 빗줄기가 약해졌습니다. 조금씩 먹구름이 걷히더니 제 몸에 파란 하늘이 가득 담겼습니다. 저는 반짝이는 맑은 햇살까지 끌어 품으며 빌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게 해 주세요.”
“다시 이곳에 사람이 살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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