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그친 어느 날, 고양이가
- 작성일 202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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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그친 어느 날, 고양이가
변선아
바람이 유리창을 세차게 흔듭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갈수록 거세집니다. 아빠는 서둘러 밥그릇을 씻어 엎어 놓고 양치를 하고 옷을 입고 양말을 신습니다. 채은이는 그런 아빠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아빠는 현관에 서서는 우산을 챙깁니다. 채은이의 투명 비닐우산과 장화도 꺼내 놓습니다.
“갑자기 날씨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따가 학교 갈 때 우산 바짝 잡고 가야 해.”
아빠가 단단히 이릅니다. 채은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때 아빠 핸드폰이 울립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아빠 얼굴이 환해집니다.
“오늘 비바람이 너무 강하다고 학교에 오지 말라네.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에 어떻게 가나 걱정했는데 말이야. 오늘은 집에서 책 읽으면서 놀아.”
“응.”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채은이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반면 아빠 얼굴은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점심은 어떻게 하지? 종일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아빠는 채은이 혼자 집에서 점심밥을 먹어야 하는 게 걱정입니다. 고모에게 전화해 점심시간에 잠시 들려 달라고 합니다.
“고모 오면 같이 밥 먹고 다른 사람은 절대 문 열어 주면 안 돼. 일찍 올 테니까 잘 놀고 있어.”
아빠는 채은이 볼에 뽀뽀합니다. 채은이도 아빠 볼에 쪽 뽀뽀합니다.
“응. 아빠, 잘 갔다 와.”
채은이는 씩씩하게 아빠를 배웅합니다. 동글이를 가슴에 꼭 안고서요.
동글이는 엄마가 만들어 준 인형입니다. 채은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채은이를 기다리면서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만든 겁니다. 한 손에 잡힐 정도의 크기에 얼굴도 코도 귀도 동글동글해서 이름이 동글이입니다. 토끼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한 동글이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채은이만의 인형입니다.
“동글아, 오늘은 학교 안 가도 된대. 좋지?”
채은이는 매일 동글이와 함께 학교에 갔습니다. 선생님은 학교에 인형을 가져오지 말라고 했지만, 채은이는 동글이가 없으면 불안합니다. 아빠는 담임 선생님께 채은이가 동글이를 데리고 학교에 가는 걸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선생님은 채은이가 학교에 적응할 동안만 동글이를 데리고 오는 걸 허락했습니다. 문제는 친구들입니다. 아이들은 동글이를 놀렸습니다. 낡고 더럽고 지저분한 인형이라고요. 그런 인형을 가지고 학교에 오는 채은이도 놀렸습니다. 채은이는 속상했습니다. 그렇다고 동글이를 놓고 혼자 학교에 갈 수 없습니다. 동글이 없이는 불안하고 슬펐습니다. 그 어디도 갈 수 없었습니다.
채은이는 동글이와 함께 나란히 소파에 앉았습니다. 집 안에는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만 가득합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든 채은이는 텔레비전을 켭니다.
“동글 님, 여기 누우세요.”
채은이는 방에서 베개를 가지고 나와 동글이를 눕힙니다. 심심할 때마다 하는 병원 놀이입니다. 베개는 병원 침대입니다.
“동글님, 배가 많이 아프군요. 다리도 다쳤네요.” 채은이 꿈은 의사입니다. 채은이는 매일매일 죽어 가고 있는 동글이를 치료하고 살려 냅니다. 엄마도 살아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요. 채은이 엄마는 채은이가 여섯 살 때 몸이 아파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아파도 참으세요.”
채은이는 동글이 다리 안쪽으로 삐져나온 솜털을 밀어 넣고 테이프로 칭칭 감습니다.
“다리는 다 나았군요. 다음은 배를 볼까요?”
윗옷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솜뭉치가 나왔습니다. 찢어진 부위가 넓어 테이프로 할 수 있는 치료가 아닙니다. 채은이는 안방에서 손수건을 가지고 와서 동글이 배에 둘렀습니다.
“이따가 수술을 해야겠군요. 그때까지 누워 있어요.”
채은이는 동글이를 침대에 눕히고 수건으로 이불을 덮어 줍니다.
우르릉 콰아앙 쾅.
천둥 번개가 칩니다. 창밖이 반짝하고 환해지더니 빗줄기가 유리창을 세차게 두드립니다. 마치 빗방울 괴물이 들어오고 싶다고 투명한 손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것 같습니다. 채은이는 동글이를 가슴에 꼭 안습니다.
“괜찮아, 동글아. 천둥이야. 비가 오는 거야. 그렇지? 괜찮아, 괜찮아.”
채은이는 동글이를 달래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킵니다. 괜히 노래를 부르고 텔레비전 소리도 더 높여 봅니다.
점심때가 되자 근처에서 편의점을 하는 고모가 왔습니다.
“채은아, 배고프지? 무섭지는 않았어?”
우산을 쓰고 온 고모 옷이 흠뻑 젖었습니다. 채은이는 고모에게 수건을 건넵니다. 고모는 대충 물기를 닦고 서둘러 점심을 차립니다. 식탁에 미역국에 밥, 소시지 볶음과 김치가 뚝딱 차려집니다.
“고모는 안 먹어?”
채은이가 묻습니다.
“곧 가 봐야 해. 편의점 문을 잠깐 닫아 놓고 왔어. 그런데 무슨 비가 갑자기 이렇게 오는지 모르겠다.”
곧 가야 한다는 말에 채은이는 급히 동글이를 내밉니다.
“고모, 동글이 수술해 줘.”
고모는 동글이를 받아 들고 한숨을 쉽니다. 엄마가 하늘나라로 간 뒤, 동글이밖에 모르고 동글이 없이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채은이가 걱정입니다.
“채은아, 이 인형 그만 버리면 안 돼? 고모가 인형 새로 사 줬잖아.”
지난 주말은 어린이날이었습니다. 그때 고모는 채은이가 다른 인형을 가지고 놀길 바라면서 귀여운 강아지 인형을 선물했습니다.
“동글이를 왜 버려?”
채은이가 볼멘소리를 합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고모는 하는 수 없이 안 쓰는 헝겊을 찾아, 적당한 크기로 오려 동글이 배에 놓고 실로 꿰매 줍니다. 동글이 몸은 여기저기 꿰맨 자국으로 누더기입니다.
“이번만 고쳐 주는 거야.”
고모가 가고 얼마 뒤, 바람이 잦아들더니 비가 그쳤습니다.
“동글아, 비가 그쳤나 봐. 첨벙첨벙하러 갈까?”
채은이는 동글이를 안고 밖으로 나갑니다. 비가 그치고 난 뒤, 물웅덩이에서 뛰어노는 놀이는 신이 납니다. 엄마와 했던 첨벙첨벙 놀이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비가 그친 세상은 맑고 깨끗했습니다. 마치 누군가 유리창 청소를 하듯이 세상을 청소한 것 같습니다. 채은이는 웅덩이를 찾아 첨벙첨벙 물을 튀기며 놉니다. 엄마와 함께 뛰는 것 같습니다.
채은이는 하늘을 올려 봅니다. 맑게 갠 하늘에 커다란 무지개가 떴습니다. 채은이는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엄마가 하늘나라에 가도 늘 채은이 곁에 있을 거야. 무지개다리가 뜨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잘 알아봐야 해.’
“무지개다! 엄마가 올 거야.”
채은이가 기쁜 마음에 외칩니다.
“거지 채은이다!”
그때 뒤쪽에서 소리가 납니다. 채은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뒤돌아봅니다. 같은 반 친구, 이상우입니다. 상우뿐만 아니라 무지개를 보러 나온 아이들이 많습니다.
“거지 인형도 데리고 나왔네.”
상우가 동글이를 보자마자 놀립니다. 채은이는 동글이를 가슴으로 바짝 안고 소리칩니다.
“거지 인형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누덕누덕 누더기, 거지 인형, 거지 채은이. 메롱.”
상우가 혀까지 쑥 빼며 놀립니다. 채은이는 속상합니다. 너무 속상해서 화가 납니다. 그때 다은이와 송희, 몇몇 아이들이 채은이와 상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옵니다. 다은이 손에는 예쁜 인형이 있습니다.
“다은아, 인형 예쁘다.”
송희가 말합니다.
“어린이날 선물 받은 거야. 진짜 사람 같지?”
금발의 여자 인형입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움직이는 데 진짜 사람처럼 보입니다. 가방도 있습니다. 가방에는 화려한 인형 옷들이 가득합니다.
“와, 예쁘다.”
송희가 인형 옷을 보며 부러워합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우르르 다은이에게 몰립니다. 금발의 인형을 구경한 아이들은 갑자기 자기들도 선물 받은 것들을 자랑합니다. 서윤이는 새 신발을, 희수는 장난감 로봇을 진솔이는 핸드폰까지 자랑합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받은 선물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좋은 거라고 야단입니다. 채은이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무지개를 올려 봅니다. 그때 갑자기 상우가 동글이를 가로채더니 외칩니다.
“야! 이거 봐. 채은이 거지 인형이야.”
아이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립니다.
“내놔!”
상우는 동글이를 갖고 달아납니다. 채은이는 동글이를 뺏으려 상우를 쫓아 달립니다. 겨우 채은이가 상우를 따라잡으려는 순간, 상우가 동글이를 멀리 던집니다. 동글이가 더러운 물웅덩이에 빠집니다.
“동글아!”
채은이는 한달음에 달려가 동글이를 집어 듭니다. 웅덩이 물이 묻어 동글이 몸이 축 처졌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힘이 없습니다. 채은이는 동글이를 가슴에 안고 소리칩니다.
“어떻게 할 거야. 살려 내! 내 동글이 살려 내!”
“거지 인형 가지고 뭘 그래?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잖아!”
상우는 미안해하기는커녕 되레 큰소리입니다. 화가 난 채은이는 상우에게 달려들어 밀칩니다. 상우가 넘어집니다. 엉덩이가 젖고 손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손바닥이 살짝 까졌습니다.
“야, 고채은!”
상우가 채은이에게 달려듭니다.
“어허. 너희 싸우는 거니?”
갑자기 아저씨가 나타났습니다. 동네에서 처음 보는 아저씨입니다. 아저씨는 어깨에는 이상한 것을 매고 있었는데 콧수염과 눈매가 얼핏 고양이를 닮았습니다. 아니 말하는 고양이 같기도 합니다.
상우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억울하다는 듯 말합니다.
“실수로 인형을 웅덩이에 빠뜨렸는데 저보고 살려 내라잖아요. 인형이 죽은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리고 보세요. 이 인형은 더럽고 낡았어요. 좋은 인형도 아니에요.”
상우는 다친 손바닥을 아저씨에게 보이며 채은이가 못됐다고 합니다.
“아니에요. 쟤가 먼저 동글이를 웅덩이로 던졌어요. 내 소중한 동글이를요.”
채은이도 지지 않고 소리칩니다. 고양이를 닮은 아저씨는 동글이를 유심히 봅니다. 다른 아이들은 채은이의 동글이는 낡고 헤지고 쓰레기나 마찬가지라며 한마디씩 합니다. 당당하던 채은이 표정에 힘이 풀리면서 어두워집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이고 콧망울이 빨개지기 시작합니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입니다.
“너희 이게 뭔지 아니?”
엉뚱하게도 아저씨는 어깨에 걸친 걸 내리며 묻습니다. 긴 막대에 양 끝에는 조그만 접시가 달려있습니다. 채은이와 상우, 아이들은 고개를 젓습니다.
“저울이란다. 옛날에는 이런 저울로 무게를 쟀어. 그런데 말이야, 이건 아주 특별한 걸 잰단다.”
“특별한 거요?”
“응. 바로 가치를 재지.”
“가치요?”
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묻습니다.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못한 거.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를 재는 거야.”
아이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말도 안 돼요.”
상우 말에 다른 아이들도 이상한 아저씨라고 합니다. 하지만 채은이는 그런 저울이 있다니 신기합니다.
“한 번 재 볼래?”
아저씨 말에 채은이는 어쩌면 동글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아이들에게 제대로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저씨 저울이 엉터리 저울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됩니다. 채은이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아저씨가 저울에 다은이의 인형을 먼저 올립니다. 다른 쪽에는 서윤이의 신발을 올립니다. 저울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더니 신발 쪽으로 기웁니다.
“엉터리예요. 이 인형이 얼마나 비싼 건데요.”
다은이가 속상해하며 소리쳤습니다.
“신발이 인형보다 무거워서 그런 거 아니에요?”
옆에 있던 송희가 묻습니다. 그러더니 묶고 있던 머리끈을 풉니다.
“이 머리끈이랑 재 보자.”
송희는 머리끈을 접시에 올립니다. 머리끈에 달린 노란 나비가 바람에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는 것 같습니다. 저울은 인형과 머리끈을 올리고 저울질합니다. 그러고는 곧 머리끈이 있는 접시가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아이들이 놀라면서 소리칩니다.
“머리끈이 더 무겁대.”
“정말로 무게를 재는 건 아닌가 봐.”
“그런데 왜 머리끈이 더 소중해?”
아이들이 웅성웅성거립니다. 그러자 송희가 말합니다.
“정말 갖고 싶은 머리끈이었어. 액세서리 가게를 지날 때마다 사고 싶다고 생각했어. 엄마가 초콜릿 조금만 먹으면 사 준다고 해서 먹고 싶은 거 참고 참고 참아서 산 거야. 나한텐 소중한 거야.”
그러자 아이들이 “정말?” 하면서 송희를 바라봅니다.
“그 인형도 재 보자.”
상우는 채은이에게서 동글이를 뺏어 저울 위에 올립니다. 반대쪽에는 송희의 머리끈이 있습니다. 저울은 왔다 갔다 할 것도 없이 바로 동글이 쪽으로 기웁니다.
“어? 거지 인형이 더 소중하대.”
아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기들이 갖고 있는 것을 하나씩 꺼내 동글이 반대편 접시에 올려 봅니다. 동글이 쪽으로 내려간 저울은 꿈쩍도 안 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올려도 소용없습니다.
“우리 물건을 모두 올려 보자.”
상우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동글이 반대쪽 접시 위에 올립니다. 여전히 저울은 꿈쩍도 안 합니다.
“와. 이거 정말 소중한 건가 봐.”
상우가 말합니다. 다른 아이들도 입을 벌리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요.
“정말 소중한 거구나.”
아저씨 말에 채은이는 동글이를 품에 안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채은이는 이제야 동글이가 그냥 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는 것 같아 기쁩니다.
“이 인형이 무겁게 나온 건 인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네 마음 때문이란다. 소중한 것은 오래 간직해야겠지? 그러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려무나.”
고양이를 닮은 아저씨가 채은이에게 귓속말합니다. 그러고는 그만 가 봐야겠다며 저울을 어깨에 멥니다.
순간 아이들이 채은이 주변으로 몰려듭니다.
“이 인형이 어떤 인형이야?”
“너한테 왜 소중해?”
“얼마나 소중한 거야?”
아이들이 동글이에 관해 묻기 시작합니다. 채은이는 엄마와 동글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채은이 얘기를 모두 들은 친구들은 동글이를 거지 인형이라고 놀렸던 걸 사과합니다.
그사이 고양이를 닮은 아저씨는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무지개가 시작된 곳 어디쯤에서 고양이처럼 네 발로 사라졌습니다.
고양이 목에는 채은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엄마에게 만들어 준 구슬 목걸이가 걸려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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