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할머니」외 6편
- 작성일 2023-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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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할머니
포도
허리가 둥그런 앞집 할머니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신다
저렇게 느린 걸음으로
어떻게 하루에도 몇 번씩
경로당에 다녀오시는 걸까
혹시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뒷짐을 풀어
포드득 포드득 날아다니는 건 아닐까
예쁘다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손이
날개가 되어서 말이야
앞집 아저씨도 이미 알고 있나 봐
오늘도 대문 밖까지 나와서
고개를 주욱 내밀어 두 눈을 가늘게 만들고선
할머니를 계속 지켜봐
너무 멀리까지 날아가 버리지 않게
금세 비둘기로 변해 버리지 않게
가을 세차
복숭아 과즙 뚝뚝 흘려 놓고 간
여름 공기에
시원한 비 한바탕 뿌려 놓고
방금 꽉 짠 가을바람으로
깨끗이 닦았다
몬스터 몰아내기
몸 안에 거대한 몬스터가 들어와서
속을 답답하게 하면
엄마는 내 등을 쓸어내리면서
몬스터를 겁주기 시작한다
꺼-억 끄어-억
어깨부터 팔을 쓸어내리면서
꺼-억 끄어-억
평소에 듣지 못한 굵고 무서운 소리가
엄마한테서 뿜어져 나온다
꺼-어억 끄어-어-억
소리가 점점 커지면
제아무리 몬스터라도
겁을 먹고 구석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지
이때다! 엄마가 엄지를 실로 칭칭 동여매고
바늘로 콕, 찌르자
붉고 둥근 몬스터 무덤이 불룩 솟아난다
나는 얼른 일어나 두 발을 쿵쿵
팔을 훠이 훠이 내두르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끄어억-
블루베리 먹을 땐
블루베리는 한 움큼 쥐어 들고 먹어야
블루베리 맛이 난다
하나씩 먹으면
어떤 건 달고
어떤 건 시고
어떤 건 물러서 싱거운데
한 움큼 가득 쥐고 먹으면
새콤달콤 블루베리 맛이 난다
하트
널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린
하트
연필로 그린 하트
까맣게 색칠한 하트
둥둥 노트 위로 떠오르는 하트
자꾸만 늘어나는 하트
시작과 끝이 만나는 하트
한쪽이 조금 더 부풀어서
삐뚜름해져도
그건 모두
하트
둥그런 심장 위에서
내가 방방 뛰는 바람에
그만 움푹 패고만
커다란 하트
쿵쿵, 내 발소리 간직한
쿵쾅쿵쾅 하트
베르
까망 베르 치즈
까망이와 치즈는 없고, 베르만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베르는 인사하면
초록색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면서
높은 책장 위로 풀썩 올랐다
나는 까망이도 치즈도 돼 줄 수 없어서
베르의 초록 눈만 좇았다
베르의 초록 눈은
초록 물감으로는 그릴 수 없고
꼭 노랑과 파랑을 섞어 만들어야 한다
내가 속으로
까망, 한 다음
베르야, 말하고
베르, 와 야, 사이에 치즈를 속으로 또
말하는 것이 자꾸 미안하다
나랑 동생 사이, 꼭 그 사이에서 잠드는 걸 보면
너는 여전히 까망이와 치즈 사이에 있고 싶은 건지
물어보고 싶은데
초록 눈동자만 천천히 끔뻑,
그 안에 고개를 갸웃하는 내가
담겨 있다
귤
주머니에서 꺼내
내 손에 쥐여 준 것부터,
껍질을 깐 것부터,
먹기 좋게 한 알 한 알 떼어 낸 것부터,
얇은 막 속에
알갱이 하나하나까지,
꽁꽁 싸매고
챙겨 나온 마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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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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