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제 두 알
- 작성일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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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제 두 알
유경미
약서랍을 연다. 약이 어디 있나, 마음이 급해진 상태로 두통약을 찾으려니 잘 보이지 않는다. 타이레놀 상자의 뜯어진 부분을 보니 거의 다 먹은 듯하다. 그래도 입구를 열고 약의 개수를 확인한다. 다행히 네 알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두 알을 꺼내 물과 함께 얼른 삼킨다.
피곤한 날이면 두통이 온다. 내 온몸의 긴장을 몸으로 느끼는 듯 뇌가 각성을 하는가. 빠듯한 계획을 소화하려는 날에는 점심 즈음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해 저녁 내내 밥을 못 먹는 상태에 이른다. 몸 안에서도 바짝 선 긴장감을 유지하고자 점심에 먹은 음식을 소화하지 못해 체한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건 다반사다. 두통이 심해지면서는 집중력도 떨어지고, 20대 동안 내내 진통제는 나의 동반자였다.
두통의 이유가 궁금했다. 그냥 당연히 머리가 아픈 거라며 다른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여자의 그때가 되면 일주일에 3일은 머리가 아프고 배도 아프고 그랬다. 체력은 늘 좋은 20대였지만 두통도 내게는 일상이었다. 게보린과 타이레놀은 어디든 갈 때마다 준비해야 하는 물품 중 하나였다. 머무르는 곳마다 두통의 신이라도 내려와 온 세상을 지배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두통이 오는 하루 동안은 만사에 문제가 생기고 모든 일이 하기 싫어졌다.
결혼하고도 두통은 계속되었다. 첫째를 낳고 엄청 두통이 심한 날이었다. 6개월째 되었을까. 모유 수유를 하는 중이었지만, 너무 머리 아파하는 나를 보고 남편은 참을 수 없었는가 보다. 병원에 가서 사진도 좀 찍어 보고 뇌 검사도 해 보자고 했다. 어디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표정이 가득했다. 소화가 되지 않아 밥을 먹지 않는 난 기운이 없이 두통약만 먹던 차였다. 그날은 유난히 심했나 보다. 첫째가 떨어지지 않아 검진할 때 내시경도 수면으로 하지 않던 나였다. CT와 MRI 검사까지 하려니 젖을 뗄 수밖에 없었다. 모유 수유를 끊고, 아이는 분유의 길로 들어섰다. 힘든 과정이었으나 결과는 별 이상 없음, 소화기관에 가스가 찬 것뿐이라나. 허탈할 뿐이다.
이후로는 아이 셋을 낳고 키우는 동안 가끔 두통약을 찾았다. 육아에 지친 날 한 번씩은 밥 대신 두통약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기도 했다. 마음이 조금 편해진 걸까. 아이들과 생활하는 것이 좀 마음에 맞았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지치다 못해 약 먹을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렇게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건 유전적인 문제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얼핏 해 본다.
어린 시절 엄마와 밥을 먹는 날의 기억 속에 엄마는 많이 아팠다. 소화가 되지 않는다며 한 끼를 거르기도 했다. 늘 체한 것 같다며 굶는 엄마를 보면 왜 그럴까 싶기도 했다. 내 머릿속 엄마는 늘 속이 안 좋아 얼굴이 하얗게 보이기도 했고, 말할 기운도 없이 시부모님과 시할머니의 밥상을 차리곤 했다. 우리 엄마는 늘 조용한 사람인 줄 알았다. 어느 날엔가 속이 좋지 않다며 마당으로 뛰쳐나가 토하는 모습을 보고, 이후로는 억지로 저녁을 같이 먹자고 조르면 안 될 것 같았다.
성인이 되면서 엄마의 모습이 내 모습 같았다. 단순히 소화기관의 문제로 두통이 생겼다는 게 그래서 두통약을 달고 산다는 게 참 피곤한 일이구나 싶었다. 나 역시 엄마처럼 밥을 굶어야 다음 날 괜찮아지는 걸 보면 일상이 쉼 없이 힘든 날에는 나처럼 엄마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집와 층층시하에서 한평생 살다가 이제야 하고 싶은 대로 조금씩 하시는 모습에 생기를 느낀다. 내가 하고 싶은 걸 참지 않고 한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 새삼 깨닫는다.
진통제 두 알이 빈속을 지나간다. 속이 쓰리지만 어느새 내 몸을 상대하고 있는 타이레놀을 격려하고 있다. 나의 두통을 좀 사라지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약을 달고 살았던 어느 시인의 일상을 하루 빌려 본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고 두통이 심하던 날은 내가 어찌 일상생활을 보냈을까.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아스피린으로 하루를 버티는 시인은 작품으로 마음을 달래며 시간을 흘려보냈으리라. 귀뚜라미 소리가 아파트로 올라오는 저녁 무렵 아이들에게 저녁도 차려 주지 않은 채 멍하니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 오늘의 시간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정리하지 못한 물건들을 챙겨만 놓고 침대로 돌아온다.
목뒤가 뻐근하다. 내가 오늘 하루를 긴장했구나. 눈알 반대편 안쪽도 뻑뻑해서 깊게 눈을 껌뻑여 본다. 인상이 찡그려진다. 그래도 진통제 두 알 덕분에 무사히 오늘을 넘길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해 본다. 진통제는 이제 내 배 속 가운데, 위에 도착한 것 같다. 약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면서 나의 아픔을 조금씩 소멸시키고 있음을 확신한다. 몸에 힘은 빠지고 다시 눈이 감긴다. 이제 좀 괜찮은 듯하다.
세상의 모든 아픔도 진통제 두 알로 해결이 될 수 있길 소망해 본다. 잠의 늪으로 서서히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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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경미
-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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