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
- 작성일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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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
이용옥
청년이 다가왔다.
"민기?"
그렇다는 말에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린다. 작은 키에 마른 체구. 거기에 검은 마스크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카페에 들어선 후, 차를 주문하자는 내 말에 민기는 프랑스제 생수통을 내민다. 당분이 든 차는 이와 대사질환에 안 좋고 유당은 소화기에 안 좋단다. 허브차는 괜찮지 않느냐는 권유조차 한사코 거절하며 청년은 생수 한 모금을 마신다. 빠른 말투에 떨어뜨린 시선, 이 청년이 내 기억 속 그 아이가 맞는 걸까.
민기는 눈이 반짝이는 아이였다. 아이는 그 초롱한 눈으로 무엇이든 오래 바라봤다. 운동장에 나가서도 뛰고 달리며 게임에 열중하기보다는 개미나 풀꽃을 바라봤고, 그런 날 그 애 그림일기에는 개미가 줄지어 기어가고, 풀꽃의 여린 잎이 연둣빛으로 하늘거렸다.
“영식이 때문에 고생했다며?”
차 한 모금을 마신 후, 나는 오래 담아뒀던 말을 꺼냈다.
“영식인 마음이 아픈 애였어. 그런데···”
민기는 처음으로 내 눈을 바라봤다.
“약을 끊어서···선생님이 미안했어.”
눈길이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어쩌면 민기는 영식이의 존재조차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영식이는 유독 민기에게 시비를 걸고 괴롭혔다. 자리를 떨어뜨려 놓아도 녀석은 어느새 민기에게 접근해 말썽을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화도 났으련만 민기는 잘 참았고, 아이엄마도 도리어 내 어려움을 위로하며 영식이를 걱정했다. 영식이의 부모를 상담하고 설득한 끝에 그들은 병원을 찾았고, 예상대로 과잉행동장애 판정을 받아 치료를 시작했다. 이후, 영식이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 학습적으로나 대인관계 면에서나 별문제가 없었다. 둘 사이도 원만해져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지만 떼어놔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 했다.
문제는 3학년에 올라가 불거졌다. 치료약이 아이 성장에 좋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영식의 부모가 약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영식이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또다시 민기를 괴롭힌다는 소문이 전근한 학교에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지금껏 미안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선생님, 많이 늙으셨네요.”
생수병만 만지작거리던 민기가 생뚱맞은 말을 던진다.
“늙었겠지, 그때가 벌써 14년 전인데···.”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받는다.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물으니 엄마 휴대폰에서 몰래 찾아냈다고 한다. 왜 ‘몰래’냐니까 나와 통화하는 걸 엄마가 좋아하지 않을 거란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려 깊게 배려하지 못한 담임을 원망했을 테니 그럴 수 있겠지. 그런데
“제가 임상병리사밖에 못 됐거든요. 그래서···”
고개도 안 들고 눈도 안 마주치고 아이가 빠르게 말을 잇는다. 가족들이 모두 의사인데 자기만 의사가 못됐다고. 자기가 꼭 의사가 되어야 했는데 임상병리사밖에 되지 못해 엄마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그래서 할머니 집엔 가지도 못한다고. 아이가 풀어놓는 말의 맥락을 연결하면 그랬다.
기억이 난다. 시아버지도, 남편의 형제들도, 남편도 모두 의사인 집안에서 결혼 후 십여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어 고생했다던 민기 엄마의 이야기. 여러 번의 시험관 시술 끝에 민기를 낳았을 때 그녀는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고 말했다. 속이 깊고 배려심이 많았던 그녀도 아들의 장래에 대해서만은 욕심을 버릴 수 없었나 보다. 그 귀한 아들이 집안의 기대에 못 미치게 되면서 급기야 마음의 병까지 얻었나 보다.
부모의 바람을 짐으로 지고 비틀거리다 쓰러진 채 버르적거리고 있는 민기. 쓰러진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 최선을 다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 그것을 아이는 에둘러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나 속이 답답하면 늙어가는 옛 선생을 찾아와 저렇게 속엣 말을 쏟아놓을까. 고개를 숙인 채 생수병만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앙상한 어깨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의사 아니면 어때? 아버지 병원에서 같이 일하면 될 것 같은데···.”
위로랍시고 내놓은 내 말에 그 애는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 침묵을 깬다.
“선생님, 저 옛날에 그림은 잘 그렸죠?”
“그림도 잘 그렸지. 그림일기상 네가 제일 먼저 받았잖아. 과학의 날 미래과학 그리기에서 전교 상도 받았고, 또···”
나는 모처럼 아는 문제를 받은 학생처럼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애는 과학의 날 그리기가 아니라 우리 학교 그리기였다고 정정해 말하면서도 내 반응이 싫지 않은 듯하다. 민기가 그림을 그렸다면 지금과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 간다. 지금부터 그림을 시작해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말하자 아이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다.
“선생님, 저 군대 가면 편지 써 주실 거예요?”
모처럼 눈을 마주친 채로 아이가 말한다. 맑고 새까만 눈동자, 내가 기억하는 그 눈, 하지만 좀 쓸쓸해 보이는 민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쓰고말고. 당연히 쓰지.”
언제 군대에 가느냐는 물음에 “언젠가는 가겠죠.”라고 말하며 아이는 휴대폰을 꺼내 든다. 사진을 찍자는 것이다. 민기와 나는 탁자 가운데로 얼굴을 모으고 휴대폰을 바라본다. 셔터를 누르기 전, 나는 그 애에게 마스크는 벗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다음에요.”
민기는 끝내 마스크를 벗지 않은 채 셔터를 누른다. 애써 웃음 지은 중년의 여자와 검은 마스크를 한 맑은 눈의 청년. ‘오늘’이 그 애의 카메라 앨범 어딘가에 저장되리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왔고 그 애는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 편 골목으로 걸어간다. 나는 그런 민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오랜 마음의 짐을 털어버리게 되리라고 기대했는데 왠지 더 무거운 무언가를 받아 안은 기분, 가슴이 답답하다. 나는 그 애가 사라진 쪽을 바라본다. 불어오는 바람. 그 싸늘한 바람 어딘가에도 봄은 깃들어 있겠지. 어서 봄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렇게 서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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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옥
- 20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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