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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축제, 그 후

  • 작성일 2024-11-04

   튤립 축제, 그 후

이혜숙


   봄은 해방군처럼 온다. 차갑고 무거운 겨울의 압박 아래 숨죽여 기다린 끝에 머지않아 그들이 당도할 거라는 은밀한 전갈이 바람결에 퍼지기 시작한다. 남쪽부터 입성했다더라, 하루에 몇 킬로미터씩 좁혀 올라온다더라, 여기저기서 승전고가 날아온다. 

   봄 여왕을 호위하는 꽃 부대의 군화 소리는 얼마나 당당하고 경쾌한가. 무혈입성! 동토에서 해방을 맞은 사람들은 밖으로 뛰어나와 팔 벌려 환영한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고 무엇이라도 해낼 것 같은 의욕이 넘친다. 꽃 부대의 행렬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은 먼저 마중 가기도 한다.

   꽃구경이 그것이다. 도시의 가로수가 새순을 틔어 봄이 왔음을 알리지만 성에 차지 않는 사람들은 더 강한 꽃 세력에 끌려 길을 나선다. 꽃도 많이 모여 있어야 더 빛나고 눈길을 끌기 때문에 군락을 이룬 꽃들을 ‘꽃 세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열 평보다는 백 평에, 백 평보다는 천 평에, 아니 만 평에 세력을 부린다 한들 그 정복을 마다할까. 우리가 꽃을 보면 저절로 허리를 굽히게 되는 것도 자발적 항복이 아닐까.

   내가 꽃 세력에 압도되어 무릎을 꿇은 것은 재작년 ‘튤립 축제’에서였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유채꽃을 놓치지 않으려고 4월 초에 제주도로 날아갔다. 가시리의 녹산로에 끝없이 이어진 유채꽃과 그 위에 넘실대는 벚꽃 구름을 보았고, 마침 ‘튤립 축제’를 한다는 곳이 있어서 찾아갔다. 이른 시간에 도착하니 축제 기간은 전날까지였단다. 

   수만 평의 정원에서 만난 튤립 군락, 과연 대단한 위세였다. 튤립은 봄 여왕으로 가장 어울리는 꽃이었다. 꽃송이 왕관에 잎사귀 검을 찬, 더구나 황금 주머니는 뿌리에 묻어 두었으니 부(富)까지 겸비한 막강한 군주일 터.

   그 넓은 정원을 유유자적 걷자니 기분이 꽤 좋았다. 그 시간만큼은 내가 네덜란드 귀족이었다. 300여 년 전의 귀족들은 튤립 구근 하나에 집 한 채 값도 아끼지 않았다는데, 나는 수만 평을 채운 튤립에 둘리어 있으니, 집 한 채가 대수인가. 도시를 넘어 나라 하나를 통째 살 수도 있을 게다. 가늠할 수 없는 화폐를 세면서 거만한 걸음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아주머니 몇이 부지런히 튤립을 뽑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축제는 끝났지만 아직 한창인 꽃을 잡초 뽑듯 걷어 내는 것이었다. 한껏 들떠 있던 감상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아주머니, 멀쩡한 꽃을 왜 뽑아요?”

   “다음 주부터 다른 꽃 축제가 있어서 치워야 한답니다.”

   “어디다 보관하나요?”

   “웬걸, 다 버리는 거지.”

   “이 많은 걸 다요?”

   “그러게 말이요. 이게 다 돈지랄들이지.”

   빨강, 노랑의 원색뿐 아니라 분홍, 보라, 흰색, 흑자색의 각가지 색 튤립들이 무참히 쓰러져 있는 현장을 보니 처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버리는 것이면 제가 좀 가져가도 될까요?”

   “관리인이 보면 뭐랄 텐데, 못 본 척할 테니 눈치껏 가져가요.”

   아주머니는 꽃 몇 송이 가져가려니 하고 허락했다. 손가방밖에 없었던 나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바닥에 펼쳤다. 보자기 삼아 싸갈 생각이었다. 옷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꽃이 우선이었다. 아주머니가 놀라서 비닐포대를 가리켰다.

   “꽃 욕심이 대단하구려. 나도 아까웠는데. 포대에 담을 만큼 담아서 샛길로 나가요. 정문에서 뺏기지 말고.”

   그 말이 고마워서 간식비를 드렸더니 포대를 더 내주었다. 

   남은 꽃구경은 물 건너갔다. 하필이면 그 시각에 내리기 시작한 비를 맞으면서 담을 수 있을 만큼 포대에 구근을 눌러 담았다. 그럴 땐 말려 봤자 싸움만 난다는 것을 아는 남편도 합세해서 무사히 빼돌릴 수 있었다. 그 길로 택배회사에 가서 집으로 부치고 난 후에야 허기가 밀려왔다. 

   마음만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처럼 하나라도 더 구출하고 싶었다. 비록 그것이 꽃일망정, 외면하면 죽는 건 매한가지니 말이다. 남은 여행 동안 여전히 넘치는 꽃 행렬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뽑혀 나간 튤립의 잔상만 어른댈 뿐.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택배가 도착했다. 짓무른 꽃, 줄기에 달린 구근 속에서 손상되지 않은 잎사귀 몇 개를 발견했다. 아직 날 선 검을 보는 기분이었다. 화훼에 해박한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어떤 식으로 살릴지 물어봤으나 그리 낙관적인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축제 때 심는 튤립은 말 그대로 축제용이라고 한다. 꽃이 지고도 흙 속에 두어야 구근이 여무는데, 일찍 뽑은 것은 다시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보관하기보다 해마다 구근을 수입해서 새로 심는 게 수월하다고 한다. 그것이 튤립이기만 할까. 수많은 공원, 식물원, 하다못해 가로화조차도 일회성으로 소모될 뿐. 조경된 꽃 세력은 꽃이 아니라 사람의 것이었다.

   귀족의 사치품, 전유물이었던 시절에는 ‘튤립 공황 상태’라는 말까지 있었고, 꽃으로는 유일하게 세계 경제를 흔들기도 했다지만, 그게 튤립에게 무슨 상관일까. 꽃은 제 소명대로 피고 질 뿐인데.

   심더라도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300개쯤 되는 구근을 그늘에 말려서 9월에 마당에 심었다. 내가 할 일은 어렵사리 구해 낸 꽃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이었으니까. 한편으론 마늘보다는 조금 크지만 형편없이 자잘한 것을 묻으며 과연 몇 뿌리가 살아날 수 있을지 영 미덥지 않았다.

   이듬해 봄, 놀랍게도 튤립 싹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왔다. 제주도에서 본 것에 비해서 작았지만, 꽃대마다 왕관 하나씩 쓰고 있었다. 색색의 꽃들은 여전히 기품과 도도한 성정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다년생이라는 유전자를 잊지 않았던 걸까. 

   튤립은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내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네덜란드의 어느 화훼 농장에서 시작해서 제주도 넓은 식물원에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짧은 영화 끝에 죽음으로 몰렸다가 우연히 한 여자의 손에 들려서 구사일생, 그리고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려 개화하기까지. 그 여정을 생각하니 호들갑스럽게 반길 마음이 아니었다. 숙연한 마음이 들어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올해, 지난해보다 더 작은 잎이 올라왔다. 그중에는 잎이 하나밖에 나오지 않은 것도 있었다. 두 개의 잎 사이에서 꽃대가 올라오는데, 하나뿐인 잎은 꽃대를 올리지 못하고 외다리로 서 있었다. 꽃을 피우지 못하는 잎도 장했다. 꽃은 제 자리가 어디든 흙이 있는 곳이면 족하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점점 꽃송이가 작아져도 왕관은 왕관이라도 말하는 듯도 했다. 나도 당당한 군주를 알현할 때마다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꽃을 보고 화폐 계산이나 했던 내게도 꽃이 다시 찾아와 주었다. 이 작은 꽃밭의 튤립 축제를 보는 것이 고마워서 올봄엔 꽃구경하러 갈 일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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